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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8화 (48/530)

048화. 배우겠다면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소

“주무시는데 미안합니다.”

운현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직 어려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다른 청년을 부축한 채 운현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부축을 받고 있는 청년은 그보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였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취한 모습이었다.

“뭐야? 누가 있잖아. 이 좁은 데서 자란 말이야?”

술에 취한 청년이 게슴츠레 운현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이 모습으로 들어가실 순 없습니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주무십시오.”

젊은 청년이 타이르듯 말을 하고는 운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오늘 밤만 같이 주무실 수 없을까요? 다른 방엔 자리가 없고, 보다시피 사람들에게 보일 만한 모습이 아니라서…….”

운현은 대강 짐작이 갔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모용세가의 제자들이었다.

필경 선배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돌아오자 후배가 이리로 데려온 것이리라.

운현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거절은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있겠소. 자리가 없다니 그렇게 할 수밖에.”

한밤중에 쳐들어온 만취객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러나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곳이다.

조금 불편을 감수하면 그만이리라.

“죄송합니다.”

젊은 제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운현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정작 사과해야 할 술 취한 청년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어이, 술 좀 더 가져와.”

“안 됩니다. 벌써 많이 취하셨는데…….”

젊은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술 취한 청년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너까지 날 우습게 보는 거냐?”

부축해 온 제자는 대답을 못 했다.

“술이나 가져오라고!”

이젠 언성까지 높아진다.

젊은 제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조용히 하십시오.”

그제야 술 취한 청년은 소리치는 것을 멈췄다.

젊은 제자는 그를 빈 침상에 올리고는 신발을 벗겨 주었다.

달칵.

젊은 제자는 밖으로 사라졌다.

술 취한 청년은 침상에 앉아 벽에 등을 턱 기댔다.

운현은 인상을 찡그린 채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차피.’

옆에서 무얼 하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환하게 밝혀진 등불이 눈에 거슬리지만 돌아누우면 별 상관없다.

바스락.

운현은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술 취한 이는 항상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자는데 미안하게 됐소.”

혀가 꼬인 목소리가 운현의 귀에 들렸다.

말은 미안하다지만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어조였다.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술 취한 사람이니 대꾸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은 의외로 집요하기도 하다.

“어이, 자는데 미안하게 됐다니까?”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운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이! 자는데…….”

생각대로다. 그는 이제 아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운현은 결국 대꾸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선비 된 체면에 누워서 대답하는 무례함을 보일 순 없었다.

“크흠.”

운현이 일어나자 술 취한 청년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거, 자는데 미안하게 됐소이다.”

하나도 미안해하지 않는 그의 목소리에 운현이 퉁명스럽게 답한다.

“됐소. 그보다 좀 조용히 해 주시오.”

심사가 불편한데 말이 고울 리가 없다.

한밤중에, 그것도 모용세가의 제자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어찌 고운 말이 나갈까?

운현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다시 자리에 누우려 했다.

“흥! 나 같은 건 그냥 닥치고 찌그러져 있으란 말인가?”

운현은 술 취한 청년을 돌아보았다.

아예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다.

하긴 이대로 그가 조용히 있을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시끄럽게 하지도 않았으리라.

“보아하니 술을 꽤 하신 듯한데 조용히 쉬시는 게 어떻소? 나도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야 할 사람이니.”

“비겁하게 둘러대기는……. 결국 같은 말이구만, 젠장.”

술 취한 청년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다.

운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초면에 너무 무례하지 않소?”

운현의 말에 돌아온 대답은 웃음 섞인 조롱이었다.

“큭큭큭. 초면? 무례? 어떻게 좀 빌붙어 볼까 하고 온 주제에 고상한 척은…….”

운현의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훅 올라왔다.

어차피 낮의 일로 모용세가의 제자들에 대한 감정은 충분히 안 좋은 상황이다.

거기다 이런 삼류 날건달 같은 녀석이 꼴에 세가의 제자랍시고 자신을 대놓고 우습게 여기니 열이 안 받을 수가 없다.

“남의 말 하기 전에 자신이나 돌아보시오. 검을 수련한다는 제자가 그 꼴이 뭐요?”

나이로 보나 배운 것으로 보나 자신이 참아야 한다.

하나 이미 충분히 심사가 뒤틀린 상태여서, 운현은 기어이 한마디를 던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술 취한 청년도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것에 심사가 꼬여 있는 상태였다.

“꼴? 내 꼴이 어때서? 비실비실한 서생 나부랭이 녀석이 어따 대고 잘난 체야?”

“녀석이라니, 어디서 함부로 반말이오? 세가의 제자라면 제자답게 처신해야 할 것 아니오? 그렇게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어찌 검을 든단 말이오!”

운현의 반응은 꽤 날카로웠다. 그러나 상대도 지지 않았다.

“내가 검을 들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젠장!”

청년은 씩씩거리며 소리치고는 혼자 분을 이기지 못한 듯 말했다.

“검이고 나발이고 다 지랄 같은 것들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야! 빨리 술 안 가져와?”

청년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 뭐라고 했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검이고 나발이고 다 지랄이라고 했다, 왜?”

“그게 검을 든 사람으로서 할 말이오?”

“흥.”

가소롭다는 듯 청년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비록 학사이나 무인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검을 드는지 잘 알고 있소. 헌데 당신은 무가의 제자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이오? 술에 취했다 하나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소?”

그건 아주 신랄한 추궁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피식 웃었다.

“나 참, 이젠 별게 다 날 가르치려 드는군.”

청년이 보기에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운현이다.

무언가 얻을까 하고 세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었던가?

정작 세가가 어려울 땐 하나같이 외면하던 것들이 말이다.

피식거리던 청년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주제에 내게 검이라도 가르쳐 주시게?”

청년의 눈빛은 사뭇 위협적이었다.

비록 취했다지만 그가 익힌 무공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운현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우겠다면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소.”

청년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그의 얼굴 가득 비웃음이 번지며 한마디가 튀어나온다.

“……나가지.”

“그럽시다.”

운현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현 역시 침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

세가 뒤쪽, 자그마한 숲에 공터 하나가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그 공터에서 운현과 청년은 서로 목검을 들고 마주 섰다.

등불은 없었지만 환한 달빛은 마치 대낮처럼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운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술 취한 그 청년이 내뱉은 말이 운현을 정말 화나게 했다.

밖으로 나온 청년은 자신을 부축해 왔던 후배에게 막무가내로 목검을 가져오라 윽박질렀고, 결국 두 사람은 이렇게 목검을 들고 아무도 없는 공터에 마주 서기까지 된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일…….’

운현은 목검의 감촉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무는 처음이지만 저런 녀석에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오죽 못났으면 술타령이나 하고 있을까?

그러면서 검을 함부로 여기고 있으니 따끔하게 혼을 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술 취한 청년도 운현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훗.’

청년은 운현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세가가 어려울 땐 쳐다보지도 않던 것들이, 이제 세가가 위세를 떨치는 듯하자 우르르 몰려와선 웃는 낯으로 살랑거리고 있다.

자신의 눈에는 승냥이 떼와 다를 바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 떨거지 중 하나가 잘난 척을 하더니 겁도 없이 이렇게 자신과 마주 섰다.

그야말로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내가 술에 취했다고 우습게 보인 모양인데, 너 오늘 잘못 걸렸다.’

지금이야 이처럼 술에 절어 살지만 한때는 촉망받는 무재(武才)였으며, 세가에서도 대제자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자신이다.

아무리 한동안 검을 놓고 살았다 해도 저 비실비실한 서생 따위가 어디 상대나 되랴.

목검을 가져오라 한 것도 나름대로의 배려를 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지.’

쿡.

목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서 모용진은 일부러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가르쳐 준다니 한번 가르쳐 보시지.”

그러나 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술에 취하더니 예의마저 잊었소?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 먼저 손을 쓰시오.”

‘하.’

모용진은 속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먼저 공격을 한다면 저 서생은 아예 움직여 보지도 못할 것이다.

“뭐, 후회는 말라고.”

운현에게 한마디 던지며 모용진은 한 손으로 목검을 움켜쥐었다.

세가의 제자들은 하나의 초식을 수백, 수천 번 넘게 연습한다. 아무리 간단한 초식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완전히 몸에 익어 버린 동작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눈으로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달밤에, 게다가 마주 선 상태라면 더더욱 그렇다.

거리감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 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고 끝날 것이다.

휘릭.

목검을 한번 허공에 뿌리고 나서 모용진은 운현을 바라보았다.

“간다!”

타악.

모용진의 몸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리고 순식간에 운현의 눈앞으로 짓쳐 들었다.

표적으로 삼은 운현의 팔이 거리 안에 들어오자 모용진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따악,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모용진의 목검이 방향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모용진은 균형을 잃고 몇 걸음을 지나쳐 갔다.

“어?”

탁.

모용진은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운현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모용진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분명히 자신의 목검이 운현의 팔을 노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새 운현을 지나친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운현을 쳐다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담담한 눈빛뿐이었다.

그 눈빛이 모용진의 화를 돋우었다.

모용진은 목검을 고쳐 쥐었다.

“흥.”

타앗.

모용진은 다시 운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운현을 주시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운현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음을 확인한 모용진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모용진은 보았다.

스륵.

운현의 목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릿한 운현의 목검은, 어느새 모용진의 목검을 보란 듯 걷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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