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7화 (47/530)
  • 047화. 자괴감

    모용세가에 식객으로 눌러앉은 운현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연무장에 나올 때마다 상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운현이 연무장 구석에 앉아 있으면 꼭 한 번씩 상아가 나타나서 생각나는 대로 한두 마디 물어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기 말로는 항상 바쁘다는데, 꼬마 여자아이가 뭐가 그리 바쁜지 운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상아라고 이름만 딸랑 밝힌 이 여자아이에 대해서 운현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어린아이 상대나 해 주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운현은 상아의 물음에 곧잘 대답을 해 주곤 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아프진 않아?”

    운현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얘기를 해 주자 상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난 조금만 읽어도 지겨워서 못 읽겠어. 재미도 없고.”

    운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래. 그래도 계속 공부하다 보면, 뭐랄까 익숙해진다고 할까? 오히려 재미있어지게 되는 때가 오거든.”

    “흠, 자포자기라는 거구나?”

    “그런 건 아니고…….”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상아는 아랑곳없이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운 오빠는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아니. 사실은 검을 좀 수련하기도 했어. 그래도 영 엉터린 아냐.”

    엉터리는 아니다.

    가르쳐 준 사람이 다름 아닌 금군교두인 데다가, 무려 십여 년이 넘도록 백호 수련검만 죽어라고 수련한 운현이 아니던가?

    “헤? 정말? 보여 줘, 운 오빠.”

    무가의 여식답게 상아는 운현의 검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딱히 무가의 여식이 아니라도 보일 만한 반응이었지만 운현은 갑작스러운 상아의 요청에 당황했다.

    “지, 지금? 그냥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운현이 슬쩍 꽁무니를 빼려 하자 상아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치, 그러고는 결국 안 보여 줄 거잖아. 어른들은 다 똑같아…….”

    작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상아의 말에 운현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모용세가 안에는 바쁜 어른들과 건장한 제자들뿐이다.

    상아 같은 또래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으니 사실은 꽤 외로움을 탈 것이다.

    오죽하면 자신에게 이렇게 매일 찾아오기까지 할까?

    ‘아직 이렇게 어린데도…….’

    운현은 문득 상아가 남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고아로 자란 자신의 과거가 상아의 모습에 투영된 탓이리라.

    운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탁, 탁.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서 운현은 상아에게 웃어 보였다.

    “보여 줄게.”

    “정말?”

    상아의 어두웠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운현은 연무장 한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무장 구석에는 여러 가지 병기들이 놓여 있는 거치대가 있었다.

    병기들 중에서도 단연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검이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모용세가였으니까.

    “흐음…….”

    운현은 무기들을 살펴보다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목검을 발견했다.

    수련이야 검 없이도 한다지만, 꼬마 여자아이에게 보여 주는데 빈손으로 할 수는 없다.

    남의 수련장이니 함부로 무기에 손을 대는 것은 무례한 일이겠지만 목검 한 자루 정도라면 아마도 괜찮으리라.

    스윽.

    운현의 손이 막 목검 한 자루에 가 닿을 때였다.

    “이봐! 뭐 하는 거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에 있는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한창 수련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교롭게도 쉬는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맞닥뜨린 수많은 시선에 운현이 잠시 당황하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냐니까?”

    그들의 시선에서 운현은 자신을 향한 악의(惡意)를 느낄 수 있었다.

    적대감과 비웃음이 반씩 섞인 듯한 그들의 시선.

    그것은 처음 금의위 수련장에 갔을 때 맞닥뜨렸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

    “아, 미안하오. 잠시 목검을 좀 빌렸으면 해서 그러는데…….”

    그러나 운현의 정중한 요청은 그 끝을 맺지도 못했다.

    “목검을 빌려? 웃기지 말고 물러나.”

    난데없는 반말에 고압적인 말투.

    게다가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한테서라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러나라니까? 안 들려?”

    “킥킥.”

    운현에게 소리치고 있는 사람 뒤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들은 이미 운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긴 며칠 동안 계속 그들의 수련을 지켜봤으니 모를 리가 있으랴.

    문제는 운현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그리 곱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땀 흘리는 모습을 멀뚱히 앉아 지켜보고 있는 구경꾼, 그것도 문사 차림의 운현이 그들에게 달가울 리 없다.

    “은근슬쩍 가져가려고 했나 본데, 우리가 우습게 보여?”

    “어이, 목검 만져나 봤어? 잘못하면 베인다고.”

    “큭큭큭.”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운현은 굳은 얼굴로 입을 꽉 다문 채 서 있었다.

    이런 노골적인 모욕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 무안을 주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때였다.

    “뭐야! 너무하잖아!”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는 바로 상아의 것이었다.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연무장에 있는 젊은 제자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목검 하나 가지고 왜 그래?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니면서. 쓰지도 않는 거잖아!”

    상아의 목소리에 일부 제자들이 웃음을 멈췄다.

    그러나 또 다른 제자들은 상아를 향해 짓궂게 놀려 댔다.

    “헤에. 뭐야, 꼬마 아가씨가 저 서생의…….”

    “야, 야.”

    제자 중 몇이 상아를 알아본 듯 놀리려는 이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들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자 놀리려던 사람들의 안색이 살짝 변해선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남자들이 치사하게 뭐야? 우르르 모여서는 한 사람한테!”

    상아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연무장의 제자들은 아무 대꾸도 없이 상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상아야.”

    그녀를 만류한 건 운현이었다.

    운현은 연무장에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를 표했다.

    “함부로 손을 대어 죄송하오.”

    운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는 분노가 일어났는데 상아가 화를 내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비록 제자들의 반응이 도를 넘는다지만 먼저 잘못한 것은 자신이다.

    게다가 여기서 화를 내면 오히려 저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저벅.

    담담하게 사과를 표시한 운현은 상아에게 돌아갔다.

    연무장에 있던 이들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꽁무니를 빼시는데?”

    “힘도 없는 주제에 배짱마저 없군그래, 큭큭.”

    그 목소리는 운현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상아의 얼굴이 붉어지며 무언가 소리치려는데, 운현이 상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괜찮아 상아야. 나중에 내가…….”

    “뭐가 괜찮아!”

    뾰족한 목소리로 상아가 소리쳤다.

    “저런 소릴 듣고도 한마디 해 주지도 못해? 우리 언니 같았으면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언니는 철가장이 쳐들어왔을 때도 당당하게 나가서 그 나쁜 아저씨들을 전부 쫓아 버렸단 말이야!”

    상아를 화나게 한 사람은 젊은 제자들만이 아니었다.

    운현에게도 상아는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상아야.”

    운현이 무어라 얘기하려 했지만 상아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상아는 자신의 어깨에 놓인 운현의 손을 쳐 냈다.

    탁.

    “오빠 같은 사람, 진짜 싫어.”

    운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운현이 채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상아는 몸을 돌려 뛰어갔다.

    타닥.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뛰어가는 상아의 작은 뒷모습은 금방 건물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사이 다시 수련이 시작되었는지 젊은 제자들의 기합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아!”

    쿵.

    연무장을 울리는 힘찬 기합 소리. 그러나 운현의 귀에는 그 우렁찬 기합 소리가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자그마한 상아의 화난 목소리가 운현의 가슴에 못처럼 박혀 왔다.

    ***

    “아아, 그 얘기? 이곳에선 아주 유명한 얘기지. 나는 직접 보기도 했고.”

    식객 중 한 사람이 철가장에 대한 얘기를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모용세가의 자존심을 너무 우습게 본 거야. 다른 문파들을 모아서 압박을 가하면 당연히 양보를 하지 않겠느냐고 확신한 것 자체가 바보짓이었어. 철가장 놈들, 나중에 다 들통날 걸 가지고…….”

    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명문이니 전통이니 하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하더군. 차라리 죽을지언정 모욕을 받지는 않겠다고 외당 당주님이 단언을 하는데, 철가장 같은 풋내기 문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죽을지언정 모욕을 받지 않는다라…….”

    운현이 중얼거리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모용미 당주님은 정말 멋있었네. 그 많은 무사들을 앞에 두고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 아마?”

    사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용세가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헌데 문파를 대표한다는 분들이 이렇듯 몰려서서 떠들고만 있으니 이 어찌 웃음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사내는 눈빛까지 반짝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운현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사내는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싸울 거라면 빨리 덤벼라. 우린 이미 각오가 되어 있다. 뭐 그런 뜻일세.”

    사내는 빠르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철가장과 모용세가의 각오 자체가 다르다는 뜻이겠지. 어쨌든 그 후로는 모용세가에 도전해 보려는 문파도 없어졌고, 외당 당주님을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사람도 사라졌네. 당연히 철가장은 하남성에선 이름도 못 내밀게 됐고.”

    사내의 말이 끝난 듯하자 운현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상아가 바로 외당 당주 모용미 소저의 동생이었군.’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철가장과 모용세가의 일은 자신이 낮에 당한 일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한 사람을 핍박하는 모습에서 모용상아는 자연히 철가장의 일을 떠올렸으리라.

    그러니 모용미가 보여 준 당당한 모습과 운현의 모습이 비교가 안 될 리 없다.

    달칵.

    운현은 작은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많이 토라졌을까?’

    어린아이의 말이니 그다지 신경 쓸 것은 못 된다.

    쉽게 토라지고 금방 풀리는 것이 아이들이고, 상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어쩐지 상아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경멸의 눈빛을 보내던 젊은 제자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쯧.”

    손님으로서 자신의 처신은 잘못된 것이 없다.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 버릇없는 녀석들만 아니었으면…….’

    사건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젊은 제자들이 떠오르자 운현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 자신이 답답하기도 하고, 한마디라도 할걸 그랬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후, 이럴 때 수련이라도 할 수 있다면…….”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운현은 객잔에 머물 때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틈틈이 수련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의치 않아 그저 시도로만 끝났을 뿐, 실제로 수련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곳 모용세가에 들어와선 아예 그것마저 불가능해졌다.

    혹여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거나 오해를 산다면 가주의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

    ‘수련을 못 한 지도 근 한 달이 되어 가는군.’

    연무장에서 남들 수련하는 것을 쳐다보며 달래고는 있지만 그걸로 족할 리가 없다.

    게다가 무엇보다 힘든 것은 바로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내가 대체 뭘 바라고 여기 있는 건지…….”

    운현은 답답했다.

    자신은 손님이라 여기고 왔건만, 이들은 자신을 손님으로 보지 않는다.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운현은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사실 그리운 것은 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운현은 자금성이 그리워졌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얹어 목에 건 작은 반지의 감촉을 확인했다.

    그렇게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던 운현은 결국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제 그만 떠나자. 미련한 짓도 이만하면 충분하니…….”

    생각해 보면 시작부터 잘못된 방문이었다.

    자금성을 박차고 나와서는 기껏 세가에서 일을 맡아 보길 바랐단 말인가?

    “훗.”

    결심을 하자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련을 털고 보니 마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입맛은 여전히 썼다.

    그렇다고 술 한잔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운현은 이대로 잠자리에 드는 수밖엔 없었다.

    사락.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대로 길을 떠나리라 다짐하며 운현은 침상에 누웠다.

    그렇게 운현은 모용세가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냈다.

    콰당.

    자고 있던 운현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누군가 운현에게 사과했다. 운현은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활짝 열린 방문으로 밖의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역한 술 냄새가 코를 확 찌른다.

    “무슨 일이오?”

    “죄송합니다. 잠시…….”

    화륵.

    등불이 밝혀지고 두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