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식객
“타하!”
쿵.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연무장 바닥이 울렸다.
모용세가의 연무장은 세가에 갓 들어온 젊은 제자들의 땀과 열기로 한창 달아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젊은이들이었지만,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들의 열정과 포부가 가득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아!”
쿠웅.
다시 한번 기합소리가 들리고 낮은 울림이 그 뒤를 따른다.
그들의 열정은 연무장 바깥에서 구경하고 있는 운현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후우…….”
나지막한 한숨소리가 운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어쨌거나 들어오긴 했는데…….”
부총관을 따라간 운현은 그의 집무실에 앉아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처음에는 부총관의 반응도 무사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운현이 자금성에서 학사를 지냈었다는 말에 부총관의 눈빛은 바뀌기 시작했다.
“학사라니, 한림원 학사를 지냈단 말이오?”
놀란 부총관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림원은 아니오. 아마 이름을 들어도 모르실 거요.”
운현이 피하는 듯하자 부총관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니 과거는 함부로 파고들 것이 못된다.
“흠, 그러면 전시(殿試)에 합격하셨다는 뜻일 터,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시오?”
“삼십을 조금 넘었소만…….”
부총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다시 운현을 쳐다보았다.
겉보기에는 잘 봐 줘야 이십 대 중반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가를 찾아오는 식객 중에는 얕보이지 않으려고 나이를 속이는 경우도 꽤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소? 흐음…….”
부총관은 들고 있던 붓을 다시 놀리며 말을 계속했다.
“가주님을 뵙고자 하시는 용무가 무엇이오?”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운현에겐 가장 곤란한 질문이기도 했다.
사실 인연이라곤 가명으로 서찰 한 통 보낸 것뿐인데, 그 이야기를 대놓고 꺼낼 수는 없다.
“아, 그저 지나던 길에 인사나 할까 해서요. 평소에 모용세가의 이름을 자주…….”
“알겠소.”
부총관은 운현의 대답을 끊었다.
이런 식의 대답은 이미 귀가 닳도록 들었다. 결국 별 특별한 용무가 없다는 이야기다.
부총관은 붓을 놀려 기록을 마무리 했다.
“세가에 찾아와 주셔서 고맙소. 허나 지금은 다른 손님들도 많으셔서 쉽게 차례가 오지 않을 듯하오.”
그 말에 운현이 낙담하는데, 부총관은 붓을 내려놓고 넌지시 물었다.
“원하시면 그때까지 세가에서 머물 곳을 제공할 수도 있소만, 어떡하시겠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야 이삼 일이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운현은 혼자 중얼거렸다.
“벌써 칠 일이 넘어갔는데 소식조차 없으니……, 후우우.”
부총관이 사람을 시켜 운현을 안내한 곳은 손님들이 묵는 일종의 사랑채 같은 곳이었다.
운현이 놀란 것은 그곳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운현은 학사를 지냈다는 배경 덕분인지 작은 독방을 얻을 수 있었지만, 칼 찬 사내들이 큰 방 하나에 두셋씩 같이 기거하는 모습도 흔하게 보였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가주를 만나는 것이 선착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 특별히 내밀 만한 재주도 없고…….’
내밀 만한 것이란 모용세가에서 흥미를 보일 만한 것을 의미했다.
무사들은 연무장을 찾아 자신의 실력을 보이려 했고, 문인들은 자신의 경력이나 계책들을 적어 내거나 혹은 부총관의 일을 도와주며 눈에 띄려 애썼다.
그러면 그중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일종의 천거 형식으로 가주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썼던 보고서라도 하나 내 볼까?’
하지만 진짜 무인에게 그런 이야기가 먹히기나 할까?
오히려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굽히고 들어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은 가주에게 ‘충고씩이나’ 했던 사람 아닌가?
사실 모용세가에 온 것 자체가 굽히고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후우, 젠장.”
운현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자신이 보낸 서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보낸 서찰의 반응이 긍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의미다.
그러니 서찰을 보낸 사람이 자신이라는 건, 아예 입 밖에 내지 않는 편이 더 나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만 넘긴 지 벌써 칠 일째, 운현은 이곳을 떠날지 혹은 더 머물러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모용세가에서 가장 마음이 편한 곳이 이곳 연무장이라, 이렇게 구석에 앉아 젊은 제자들의 수련을 보며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그래도 저 사람의 움직임이 제일 낫군.”
한창 수련에 열심인 젊은 제자들을 쳐다보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자금성에서도 늘 금의위 연무장에 드나들었기 때문인지, 저들의 수련 모습이 오히려 운현에게 어떤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물론 금의위에 비하면 저들은 너무 기본이 안 된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저렇게들 어설퍼서야……, 정식 제자가 되기는 좀 힘들겠군.”
운현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운현의 예상과는 반대로 저들 대부분은 정식 제자가 될 정도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운현이 자금성에서 늘 보아온 수련은, 신입 금의위가 숙련된 금의위가 될 때까지의 모습이라는 데 있었다.
비록 그들이 신입 금의위라도 무과를 통과한 당당한 무인이요, 나름대로 한 가닥 재주씩은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을 늘 보아 온 운현에게 젊은 제자들의 모습이 못내 어설퍼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운현의 기준으로 ‘괜찮은 무사’란 금의위 교두 정도의 실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효, 내가 저 사람들 걱정할 때가 아니지.”
저들 이전에 자신이 문제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는 언제 가주를 만나볼지조차 알 수 없었다.
대체 가주 한번 만나는 게 왜 이리 번잡하고 어렵단 말인가?
“뭐, 그래도 일단 문턱은 넘었으니까…….”
하지만 말하고 보니 오히려 처량하다.
여기가 자금성도 아닌데 문턱을 넘은 것에 무슨 의의를 둘 것인가?
모용세가가 하남성에서 위세를 날린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위세가 거창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자금성을 떠날 때는 막연한 기대라도 있었는데, 막상 현실을 대하고 보니 실직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뭐야, 젊은 사람이 웬 한숨을 퍽퍽 쉬고 난리람?”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작은 꼬마 여자애가 얼굴을 찌푸린 채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똘망똘망한 커다란 눈동자가 마치 빛이라도 나는 듯 반짝거리며 운현을 주시한다.
“실연이라도 당했어?”
운현은 멍한 표정으로 이 당돌한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옷차림이 고급스러운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곳 세가의 아이 같았는데, 얼굴을 찡그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꽤나 깜찍하고 귀여웠다.
방금 전에 자신이 들은 그 이상하고 건방진 말투만 빼면.
“너, 누구니?”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운현이 묻자 꼬마 여자아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 만나는 여자한테 불쑥 반말이야? 쳇, 너무 예의가 없잖아.”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먼저 반말을 한 것은 눈앞의 이 당돌한 여자아이 쪽이었지만 그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
“뭐, 그래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니까 참을게. 하지만 그러면 평생 연애 같은 건 못 할걸?”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내던 여자아이가 자신의 허리에 손을 턱 얹었다.
“난 상아야, 오빤 누구지?”
“오, 오빠?”
꼬마 여자애로부터 오빠라고 불리자 운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오빠라기엔 너하고 내가 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니? 최소한…….”
“그럼 아저씨가 좋아?”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아저씨가 맞긴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라고 불리긴 싫다.
“어차피 우리 언니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 오빠 맞지 뭐.”
“네 언니 나이가 몇인데?”
운현이 물어보자 상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아이가 정색을 한다.
“여자 나이를 함부로 물어보면 어떡해? 하여간……. 어쨌든 언니는 꽃다운 나이야.”
꽃다운 나이라면 방년(芳年)이니 대략 이십 세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오빤 누구야?”
한참을 돌던 끝에 상아가 처음의 주제로 돌아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운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난 운현이라고 한단다.”
“운현? 처음 들어 본 이름인데…….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어? 운 오빠.”
“우, 운 오빠?”
대뜸 나온 상아의 호칭에 운현은 놀란 눈이 되었다.
꼬마 여자아이에게 운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리니 어쩐지 적응이 안 된다.
아니, 애초에 운현은 누군가에게 오빠라고 불려 본 적이 없었다.
“아이 참, 뭐하고 있었냐니깐?”
“어, 저 사람들 수련하는 거 구경하고 있었는데?”
운현의 말에 상아가 위아래로 운현을 훑어보았다.
“무사로는 안 보이는데? 혹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고수야?”
운현이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나는, 음, 그러니까 학사란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연구를 하는 사람이지.”
상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운현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신기하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수련엔 관심 없던데…….”
혼자 중얼거리던 상아는 운현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여기서 계속 구경하고 있을 거야?”
“아, 뭐 별일 없으면…….”
별일이 있을 리가 없다.
운현의 대답에 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계속 구경해, 운 오빠.”
그 말을 끝으로 상아는 예쁘게 땋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다른 쪽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운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애는 대체 뭐야?”
그러나 운현에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달랑 이름 하나만을 던져 놓고 작은 여자아이는 사라져 버렸다.
운현이 다시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릴 즈음엔 연무장을 달구고 있던 제자들의 훈련도 마침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크, 벌써 끝날 때가 된 건가?”
운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열심히 땀 흘리며 수련 중일 때 누군가 구경하고 있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 구경꾼이 문사 차림의 서생이라면 십중팔구 좋은 감정을 가지기 어려우리라.
금의위 훈련장에서 익히 겪었던 바 있는 운현은 수련이 끝나기 전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가는군.”
터벅, 터벅.
운현은 발걸음을 옮기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사랑채를 가득 메우고 있는 다른 식객들의 온갖 이야기를 다 들어야 했다.
처음엔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대부분 과장을 섞은 자기자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다음엔 들려오는 목소리마저 짜증스럽다.
그러나 방 안에 틀어박히면 그 또한 심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니, 이처럼 무미건조한 날들도 없을 것이다.
“모용세가의 가주 한번 만나기가 이토록 힘들 줄은…….”
운현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자금성에 있을 때는 별생각 없이 서찰도 보내곤 했건만, 이렇게 나와 보니 자신의 안이한 생각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하긴 모용세가는 하나의 성(省)에 위세를 떨치는, 예전이라면 한 나라와도 비견될 만한 지역의 패자다.
실직하고 낙향하는 자신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록 그걸 인정하자니 자신의 처지가 너무 처량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뭐, 좀 더 기다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테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운현은 지겨운 오후를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