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학사의 방문
터벅, 터벅.
“후우.”
잠시 숨을 돌리며 운현은 고개를 들어 길 저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보일 거라던 모용세가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전통 있는 세가라 그런가, 가는 길도 꽤 멀군.”
발밑에서 피어오르는 먼지와 흘린 땀으로 벌써 의관은 지저분해진 지 오래다.
길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운현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의관이 더럽혀지는 것이다.
‘마차라도 얻어 타고 올 걸 그랬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운현은 곧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도 힘들지는 않으니까.’
수련의 결과인지 아니면 그저 기분 탓인지 몰라도, 꽤 먼 길을 걸어왔건만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운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곧 멈춰 섰다.
“응?”
길 저편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소리뿐만이 아니다.
멀리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들었다.
운현은 곧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차였다.
“혹시 모용세가에서 나오는 마차인가?”
운현은 기대를 안고 앞을 바라보았다.
따가닥, 따가닥.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거침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 대여섯이 탈 만한, 일견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모습의 마차였다.
운현은 눈을 반짝이며 마차가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은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 어.”
거침없이 달려오는 마차는 운현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그냥 치고 지나갈 기세라 운현은 황급히 길옆으로 비켜섰다.
“어이쿠.”
갑작스러운 일이라 발 디딜 곳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래도 운현은 급히 몸을 비틀어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바로 그 옆을 요란한 기세로 마차가 스쳐 지나갔다.
쿠루릉, 쿠루릉.
마차 바퀴가 내는 소리가 운현의 귓전에서 크게 울렸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엄청난 양의 먼지바람이었다.
황급히 입을 가리려 했지만 그것은 그저 마음뿐, 운현은 그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말았다.
푸확.
“우헤엑. 쿨럭, 쿨럭.”
한동안 건조했던 탓인지 마차가 일으킨 먼지는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운현의 의관도 삽시간에 제 색을 잃었다.
손을 휘저어 보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쿨럭.”
먼지가 가라앉고 운현이 다시 길 가운데로 나섰을 때는 이미 마차가 멀어질 대로 멀어진 후였다.
“허어, 거 성질 한번 급한 사람들이로군.”
따지고 보면 미리 비켜서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있는데 저렇게 위험하게 달리는 것도 잘한 일이라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벌써 멀리 가 버린 마차에 대고 시시비비를 따져서 무엇하랴?
운현은 이것이 하남성에서 모용세가의 위세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옷을 털었다.
“후우, 아직 멀었나?”
먼지가 사그라들었지만 아직도 길 저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운현은 멀어져 가는 마차를 쳐다보고 나서 다시 발길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에 다시 발소리가 터벅터벅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방금 지나친 사람은 누구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모용미가 물었다.
마차 안에는 그녀 말고도 외당에 속한 제자들 세 명이 더 타고 있었다.
그녀를 수행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용봉지회 정도의 큰일에 동행할 정도라면 앞으로 세가의 핵심이 될 재목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외당 제자들 중 하나가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서생 같았습니다만…….”
서생의 차림을 하고 있던 것은 모용미도 보았다.
가는 길로 보아 모용세가로 향하는 것이 분명한데,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다.
“아마도 세가를 방문하려는 모양입니다.”
문제는 방문의 목적이다.
외당 당주로서 세가를 방문하는 외부인을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기본이다.
그러나 서생 혼자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중대한 방문은 아니리라.
잠시 생각하던 모용미는 짧은 명령으로 말을 맺었다.
“다음부터는 마차를 주의해서 몰라 이르세요.”
“네, 알겠습니다, 당주님.”
한적한 길이니 마차가 속력을 낸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모용세가의 마차가 어찌 길 가는 서생 한 명을 위해 멈춰 설까?
강호 무림의 상식으로는 미리 피하지 못한 서생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외당 당주의 명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마부는 고개를 끄덕여 명을 받들었다.
마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길을 재촉했다.
***
“오호라.”
운현은 걸음을 멈추고 흥미로운 시선으로 모용세가를 살펴보았다.
하남성의 패자이자 유서 깊은 세가답게, 모용세가의 건물은 제법 규모가 크고 고색창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간 자금성에서 살아온 운현에게는 생각보다 아담해 보인다는 느낌이 먼저였다.
모용세가가 아니라 그 어느 문파라 해도 어찌 자금성에 비하랴마는, 아무래도 보아 온 것이 있으니 비교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꽤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곳이군.”
운현은 모용세가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강압적으로 내리누르는 듯 위압감을 주는 자금성의 전각들보다는 이런 단아하면서도 품격이 배어 나오는 건물이 더 좋았다.
어찌 보면 문연각과 비슷한 느낌 같기도 하다.
저벅.
한동안 모용세가를 쳐다보던 운현은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곳이라 보람은 있다.
중간에 먼지를 덮어쓴 일조차 벌써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잠깐 멈추십시오.”
그러나 모용세가의 문턱은 운현의 생각만큼 쉬운 곳은 아니었다.
운현의 발걸음은 난데없이 들려온 컬컬한 목소리에 멈춰 서야 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커다란 눈을 부릅뜬 무사가 운현의 앞길을 막았다.
모용세가의 정문 좌우를 지키고 섰던 무사들이었다.
분명히 아까 본 사람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운현은 설마 그들이 자신의 앞길을 막으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자금성에서 자신의 길을 막은 금의위가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운현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나, 나는…….”
“이곳은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마치 으름장을 놓듯 우락부락한 무사는 허리에 한 손을 턱 얹고 위협조로 말했다.
사실 무사들은 이미 상황 파악을 끝냈다.
먼지를 덮어쓴 초라한 서생의 모습인 운현에게 그들이 공경의 자세를 취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반말이 튀어나가지 않은 것이 나름대로 최선의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라는 말이 운현의 심사를 건드렸다.
“나는 이곳의 가주……님을 만나러 온 사람이오.”
혼자서야 모용가주니, 관일검이니 하며 마구 불렀지만 이곳은 다름 아닌 모용세가다.
운현은 간신히 존칭어를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무사와 커다란 정문의 위세가 한몫한 결과이기도 했다.
“초청장이나 소개장을 가지고 계시오?”
가주를 만나러 왔다고 했음에도 무사들의 기세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약간 평대를 섞어 가며 운현에게 물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본 무사들이 아니다.
질문은 그저 확인에 불과할 뿐, 그들의 눈에 운현은 ‘어떻게든 빌붙어 보려고 온 글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그런 건 없소만…….”
있을 리가 없다.
모용세가의 가주가 자신을 모르는데 어떻게 초청장이니 소개장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허어, 참. 이 양반 하고는…….”
무사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느새 운현은 ‘이 양반’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아니, 가주님을 뵈러 왔다는 사람이 초청장도 소개장도 없단 말이오?”
“가주님은 바쁘시네. 자네 같은 서생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이제는 옆에 섰던 무사까지 한몫 거들고 나섰다. 그는 처음부터 아예 반말로 나왔다.
자연히 운현의 말도 고울 리가 없다.
“아니, 이거 보시오. 손님이 주인을 찾아왔으면 기별부터 하는 것이 순서 아니오? 그런데 다짜고짜…….”
“어허!”
그러나 운현의 항변은 무사의 큰 목소리에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소리를 높이는 게요! 어쨌든 소개장이나 초청장 없이는 가주님을 만날 수 없으니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무사가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위협하듯이 한 손을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얹었다.
“허어…….”
정작 어이가 없는 것은 운현이다.
자신이 환영받기 힘들다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지기 무사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오만 나는 절대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
흥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운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예전에 이곳의 가주님께…….”
운현은 ‘서찰’이라는 말을 하려다 꿀꺽 삼켰다.
생각해 보니 정작 설명할 것이 없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모용단천 본인이라면 눈치를 봐서 슬쩍 운이라도 띄우겠지만, 이런 아랫사람이 가주가 무슨 서찰을 받았는지 시시콜콜 알 리가 없다.
게다가 서찰을 ‘주고받은’ 사이도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그것도 가명까지 써서 보낸 서찰이니 대놓고 얘기할 수도 없다.
“가주님께, 뭐요? 계속해 보슈.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뭐 그랬소?”
옆에 섰던 다른 무사가 빈정대는 투로 말을 던졌다.
하지만 운현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처음 운현을 제지했던 무사가 혀를 찼다.
“여러 말 하기 귀찮으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시오. 알았소?”
무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이미 볼일은 끝났다는 듯 아예 시선조차 돌렸다.
다른 무사 역시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처럼 또 한마디를 거든다.
“서생 나부랭이들은 글 좀 읽은 게 무슨 벼슬인 줄 안다니까? 쥐뿔도 없는…….”
그러나 그 무사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세가의 안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무슨 일들인가?”
“웃!”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사들은 자세를 바로 했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약간 마른 체구의 중년인이 안쪽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무사들과 운현을 쳐다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는가?”
“네, 부총관님. 이분이 가주님을 뵙고자 한답니다.”
무사들에게 부총관이라고 불린 사람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부총관의 시선은 사뭇 날카로웠다.
누구라도 주눅이 들 만한 시선이지만 오히려 운현에게는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의 행동이며 시선이 마치 예전의 창룡전 관리, 사일천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주님을 뵙고자 하신다 했소?”
“아, 그렇소만…….”
“소개장은 가지고 계시오?”
부총관이라는 사람의 물음은 앞서 무사의 것과 똑같았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기다리셔야 하오.”
부총관은 말했다.
“일단 따라오시오.”
운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부총관은 휙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진행에 운현이 머뭇거리자 옆에 섰던 무사가 고갯짓을 하며 운현을 재촉했다.
빨리 따라가라는 뜻이다.
운현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모용세가로 들어섰다.
부총관은 벌써 꽤 앞서가고 있었다.
‘오자마자 또 다른 사람 따라가는 것부터 시작인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운현은 부총관의 뒤를 쫓아 바삐 걸음을 옮겼다.
기울어 가는 부드러운 햇살이 모용세가의 지붕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