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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4화 (44/530)
  • 044화. 모용미

    늦은 밤, 모용미는 단정한 자세로 서탁 앞에 앉아 있었다.

    사방은 이미 적막하기만 한데, 모용미는 촛불 아래 펼쳐진 서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락.

    모용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찰의 다음 장을 넘겼다.

    깊은 밤이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처음 읽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읽어 아예 외우고 있을 정도였지만, 오늘도 모용미는 그 서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아.”

    모용미의 입에서 경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모용미의 앞에 놓인 것은 바로 창룡검주로부터 온 서찰이었다.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이 모용미에게 내어 준 것인데, 원래대로라면 대제자 모용진이 받았겠지만 지금 이 서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용미뿐이었다.

    고색창연한 작은 문갑 안에 소중히 놓여 있던 이 서찰은 처음부터 모용미를 사로잡았다.

    사실 처음 듣는 내용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검을 수련해 온 무가의 여자로서 한두 번은 들었음 직한, 어쩌면 평범할 수도 있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흐름이 그녀를 사로잡아 버렸다.

    모용세가의 검에 대해 논하되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검의 새로운 지평까지 끌어가는 그 대담함과 신선함은, 진정한 대가(大家)의 손길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게 했다.

    그것은 마치 안개가 걷힌 산 정상에 선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아.”

    모용미가 다시금 작은 한숨을 흘렸다.

    가주 모용단천처럼 큰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매번 경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러니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이 이 신비인을 찾기 위해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리라.

    바스락.

    모용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밖에서 들린 인기척에 모용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안에 있느냐?”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히 가주 모용단천의 것이었다.

    “네.”

    모용미는 서찰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하고 주변을 간단히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륵.

    방문이 열리고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그녀의 할아버지 관일검 모용단천이 안으로 들어왔다.

    “편히 앉거라.”

    “괜찮습니다.”

    단아한 모습의 손녀를 보며 모용단천은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밤이 늦은 줄은 알지만 지나가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들렀다. 방해는 안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모용단천의 말에 모용미는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좀 어땠느냐?”

    앞뒤 없는 말이었지만 가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용미는 잘 알았다.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모용단천의 시선은 서탁에 있는 서찰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볼 때마다 놀라울 따름입니다.”

    모용미는 조용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비록 서찰이라 하나 본가에 전해지는 검보(劍譜)에 뒤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모용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검에 대한 놀라운 견해는 그야말로 대가다운 탁월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주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녀의 결론이 그의 마음에 흡족한 까닭이다.

    “그렇지. 검의 대가를 꼽으라 한다면 당연히 검성(劍聖)을 꼽을 것이다. 허나 검주(劍主) 역시 그에 모자라지 않는다 할 수 있겠지.”

    모용단천이 말하는 검주는 서찰을 보낸 창룡검주를 일컫는 말이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귀를 의식해서인지, 모용단천은 서찰에 관계된 내용에는 언제나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검성과 말입니까?”

    모용미가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모용단천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이라…….’

    모용미는 가만히 가주의 말을 되뇌었다.

    검성.

    하늘 아래 가장 강하다는 환우오천존 중에서도 첫손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절대 강자이자 검의 지존.

    오죽하면 자존심 강한 무인들조차 그를 검성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모든 무림인 위에 군림하는 무림맹마저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런 검성과 창룡검주를, 지금 모용단천은 같은 경지에 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검성의 검이 어떠한 경지인지 제대로 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했으니, 모용단천의 말은 그가 창룡검주에게 가진 경외가 어떠한지 말해 주는 것이리라.

    “비록 검주가 본가의 사람은 아니나, 본가의 검에 대하여 그가 한 말은 절대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는 그 내용을 대함에 있어 결코 소홀함이 없어야 할 터이다.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모용단천의 당부에 모용미는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 손녀의 모습이 또한 대견스러워서 모용단천은 미소를 지었다.

    사락.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손녀를 쳐다보던 가주 모용단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미아야.”

    “네, 할아버지.”

    모용단천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용봉지회에 나가 보지 않겠느냐?”

    “용봉지회라 하시면…….”

    모용미는 눈을 들어 모용단천을 바라보았다.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가 삼 년마다 열리는 용봉지회가 있는 해더구나. 무림맹에서 초청장이 온 것은 너도 알 것이다.”

    용봉지회는 무림맹에서 후기지수를 위해 여는 커다란 대회다.

    각 성에서 이름 있는 문파들을 비롯해 무림맹에 소속된 거의 모든 단체에 초청장이 발송되며, 형식적이지만 새외에 있는 거대 문파들도 초청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각 성의 패자라 할 만한 몇몇 문파들 뿐, 대부분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

    가 봐야 군소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누구나 초청을 받지만 모두가 용봉지회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무림맹 핵심 문파의 후기지수들이며, 용봉지회는 그들을 위한 잔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봉지회는 모든 젊은 무림인들의 꿈이다.

    비록 그 속사정이 어떤지 뻔히 안다 해도 젊은이라면 가슴을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에, 삼 년마다 용봉지회가 열릴 때면 무림의 젊은이들은 밤잠을 설치는 것이다.

    “허나 할아버지, 저는…….”

    모용미 역시 한창 나이의 아가씨다.

    검을 든 무가의 여식으로서 용봉지회에 관심이 없다면 그 또한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용봉지회에 참석하는 것은 대부분 이십 세 전후의 젊은이들이다.

    모용미는 올해로 이십사 세.

    아직 방년(芳年)의 꽃다운 아가씨이기는 하나 그들과 어울리기엔 살짝 어색한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모용세가는 이제껏 용봉지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아 왔었다.

    “이건 할아버지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가주로서 외당 당주에게 하는 부탁이다.”

    모용단천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모용세가는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다. 이대로 무수한 군소 가문들 가운데 하나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하남성을 넘어 천하로, 그래서 오대세가의 새로운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발판을 다질 수 있을 것인지가 바로 내 대(代)에서 결정이 날 것이다.”

    오대세가의 일원.

    예전의 모용단천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었던 말이다.

    그러나 모용미에게는 그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렸다.

    “가서 큰물을 보고 오너라. 그리고 누가 우리의 적이 될 것이고, 누가 우리와 뜻을 같이할 수 있을지 알아 오너라. 네가 외당 당주로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용세가의 발걸음에 아주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모용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가 이미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모용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모용단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모용단천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견제가 심할 것이다. 허나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 역시 많을 테니 반드시 기회가 있을 터. 정황을 잘 살펴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각별히 유념하겠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굳은 결의를 담고 있었다.

    늘 총명하고 당찬 아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손녀의 대답에 모용단천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손녀사위 감이라도 하나 주워 오면 좋겠구나, 허허허.”

    “하, 할아버지.”

    모용단천의 갑작스러운 농담에 모용미가 말을 더듬었다.

    정말 당황했는지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는 손녀를 바라보며 모용단천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미안하구나, 미아야.”

    아쉬움이 배인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또한 가슴 아파서 얼굴을 붉히고 있던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아니다. 네게 가문의 무거운 짐을 맡겨야 하다니……. 죽어서 네 아비를 볼 면목이 없다.”

    작게 한숨을 쉬고 모용단천은 말을 이었다.

    “허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약속하마.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문을 위해 너나 상아를 희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누구를 택하든 네 뜻대로,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거라. 알겠느냐?”

    “할아버지.”

    모용미의 눈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방금 모용단천이 한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약속이었다.

    소위 세력을 떨친다는 문파의 여식치고 가문의 뜻에 따라 혼처가 결정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으랴?

    아무리 강호의 여인들이 자유분방하다지만 그것도 혼처가 정해지기 전의 일이다.

    혼인할 나이가 되면 본인의 의사는 간데없고 늘 가문과 문파가 제일 우선시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모용미는 지금 모용단천의 약속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하는 할아버지 모용단천의 마음도.

    “아이도 아닌데 다 큰 처녀가 그리 눈물이 흔하면 어찌하느냐?”

    툭 던지는 모용단천의 말에도 살짝 습기가 배었다.

    모용단천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미가 따라 일어서려 했지만 그는 벌써 방문을 열고 있었다.

    “됐다. 나오지 말고 그만 쉬도록 해라.”

    모용단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용미는 일어서서 방문을 나서는 모용단천을 배웅했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모용미는 아직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 내지 못했다.

    멀어져 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넓고 따뜻해 보인다고, 모용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

    “아냐, 아냐. 그건 너무 고지식해 보인다니깐.”

    키 작은 모용상아가 작은 손을 살래살래 저었다.

    “하지만 아까 그건 너무 화려한 것 같지 않니?”

    약간 짙은 색의 외투를 들고 있던 모용미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모용상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야. 언니는 좀 더 화려한 게 어울려.”

    의자에 앉아 짧은 다리로 물장구치듯 놀고 있던 모용상아가 결국 팔짝 뛰어 내려왔다.

    “언니처럼 한창때인 아가씨가 이런 구질구질한 걸 들고 어쩌자는 거야. 지금 가는 곳은 용봉지회라구. 고리타분한 노인네들 만나러 가는 게 아니란 말야.”

    모용상아는 모용미가 미처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짙은 색 외투를 빼앗았다.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대체 너는……. 어떻게 열두 살짜리가 못 하는 말이 없니?”

    “열두 살이 뭐 어때서? 나도 알 건 다 안단 말야. 특히…….”

    모용상아는 한쪽에 걸려 있는 많은 옷들 중에 가장 밝고 화사한 외투를 빼내 들었다.

    “어떤 옷이 우리 예쁜 언니에게 잘 어울리는지 정도는 말야.”

    모용상아는 깡총거리며 옷을 들고 모용미에게 다가갔다.

    “자, 이게 바로 상아의 추천이야.”

    모용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모용상아가 까치발까지 하며 내밀고 있는 옷을 받아 들었다.

    사라락.

    옅은 분홍색에 살짝 금빛 문양이 들어간 화려한 비단 외투가 모용미의 가녀린 어깨에 살포시 얹혔다.

    순간 모용상아는 방 안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떠니?”

    조금은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모용미가 물었다.

    하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모용상아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작은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짝.

    “진짜 예뻐. 역시 언니는 최고야!”

    그 말에 모용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모용상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렇게 살짝 웃어 주면 어떤 남자건 넘어올 테니까 걱정 마. 그렇다고 아무 남정네한테나 웃어 주면 안 되고. 알았지?”

    “얘는.”

    모용미는 모용상아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녀도 동생이 골라 준 옷이 싫지는 않은 듯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 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언니. 왜 이렇게 일찍 출발해? 용봉지회는 아직 시간이 있잖아.”

    고풍스러운 장식이 된 검을 챙기는 모용미에게 모용상아가 물었다.

    “가는 길에 지부 몇 군데를 돌아보려고 그래. 준비해야 할 일도 조금 있고…….”

    “하아, 당주란 자리도 나만큼이나 바쁜 거구나.”

    탄식하듯 말하는 모용상아의 말에 모용미는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너도 아주 바쁜가 보지?”

    “응.”

    모용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엔 내가 챙겨 줘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나 없이는 도대체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니깐?”

    작은 꼬마 여자애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모용미는 모용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언니가 너만 믿고 떠난다.”

    모용상아는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한가득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모용미가 허리를 굽혀 모용상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혹시 진 오라버님이 돌아오시면 네가 잘 해 드려야 한다, 알았지? 아침저녁으로 할아버지 문안도 빼먹지 말고.”

    “알았어. 걱정 마, 언니.”

    씩씩한 모용상아의 대답에 모용미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주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상아에게 살짝 굽히고 있던 모용미는 허리를 펴고 등을 꼿꼿이 세웠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언니, 잘해!”

    모용상아의 씩씩한 응원에 미소로 답하며 모용미는 바깥을 항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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