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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3화 (43/530)
  • 043화. 북문의 이별

    사일천의 짧은 인사말에 운현이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운현은 발길을 돌렸고 사일천은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다 문득, 운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사일천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사일천이 고개를 들었다.

    “왜 이런 곳에 계속 계시는 것인지요?”

    운현에게 말한 대로라면 사일천 역시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권력을 추구하거나, 혹은 운현처럼 이곳과 연을 끊거나.

    그러나 운현이 생각하기에 사일천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자금성의 외딴섬과 같은 이곳 창룡전에서 사일천은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일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곳에서 십수 년을 지냈지만 사일천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운현이 생각하는데, 사일천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꼭 심산유곡에 있어야만 세상을 피해 숨는 것은 아닐 테지.”

    사일천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는 사라지고, 그는 다시 서책에 시선을 던졌다.

    정작 대답을 들은 운현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뒤통수를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 사일천을 보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긴…….’

    이곳은 자금성이다.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면 숨으려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운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창룡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룡전을 나가 운현이 사라질 때까지, 사일천의 시선은 여전히 서책에 머물러 있었다.

    ***

    창룡전을 나온 운현은 자금성의 북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금성 어느 것이 그렇지 않으랴마는, 북문 역시 규모도 크고 아름다운 문이다.

    그러나 자금성의 권위를 나타내는 거대한 오문(午門), 혹은 불사조의 오탑이라고도 불리는 오봉루(五鳳樓)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무엇보다 오봉루가 관리들과 황제가 드나드는 정문이라면 북문은 후궁들이나 들어오는 일종의 후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문연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문연각은 정문 쪽에 있는 건물이라 방향이 정반대다.

    게다가 이제는 출입 허가도 없으니 들여보내 줄 리가 만무했다.

    운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높이 솟은 황금빛 이중 지붕들 사이로 어찌 보면 문연각이 보일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젠 사일천의 말대로 모든 미련을 버릴 때였다.

    운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조금 더 걷자 커다란 북문이 보였다.

    저 커다란 문만 나서면 자금성과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남들은 이제 과거에 급제할 나이건만 난 벌써 퇴직이라…….’

    전시의 장원급제자는 자금성의 정문이자 황제가 출입하는 오문을 지날 영광을 얻는다.

    그때는 온 세상을 한 손에 쥔 것만 같았다.

    과거의 고생과 어려움은 사라지고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자신의 앞날이 환히 열리리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홀로 후문으로 나서는 신세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지만, 그럼에도 그다지 서글프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지나간 세월이 그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뜻이리라.

    다만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정작 이곳을 나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운 학사님.”

    문득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 박 환관.”

    커다란 북문 옆에 박 환관이 서 있었다.

    운현을 발견하자 박 환관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지금 나가시는군요.”

    의외로 박 환관의 어투는 밝았다.

    일전에 문연각에서 ‘이대로 그만두면 안 된다’며 강변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넬 못 만나나 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다행이네.”

    운현은 미소 지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자금성에 들어와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박 환관이다.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 또한 박 환관이니 이런 인연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네.”

    운현은 박 환관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박 환관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요. 오히려 운 학사님께서 제게 잘 대해 주셨지요.”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럴 리가……. 그보다 이젠 학사가 아니니 운 학사라는 말은 그만두게.”

    관직을 벗었으니 학사가 아니다.

    이젠 그저 일개 서생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박 환관은 고개를 저었다.

    “관리라면야 관에서 일을 맡겨 주지 않으면 관리라 할 수 없겠지요. 허나 학사는 배울 것[學]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학사 아니겠습니까?”

    “허어.”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지. 자네가 나보다 낫네그려, 허허.”

    운현의 웃음에 박 환관도 미소를 머금었다.

    박 환관은 깊숙이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바라건대 학사님께서는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어허, 이 사람. 예는 무슨……, 어서 고개를 들게.”

    보중해야 한다면 오히려 자금성에 있는 박 환관 쪽이 더하다.

    그러나 박 환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옵니다. 미천한 소인의 말이라 흘려듣지 마시고 부디 매사에 조심하시어 훗날을 기약하셔야 하옵니다.”

    박 환관은 말에 힘을 주었다.

    “참고 기다리시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옵니다.”

    “……고맙네.”

    운현은 박 환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비록 그의 말이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희망을 북돋아 주려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그의 말을 들으니 이곳을 떠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하다.

    “자네도 부디 조심하게.”

    운현의 말에 그제야 박 환관이 고개를 든다.

    “아참, 학사님께 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내게?”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돌려줄 것이라니, 자신이 박 환관에게 맡긴 것이 있었던가?

    짤랑.

    박 환관은 운현에게 주머니 하나를 불쑥 내어 밀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주머니였다.

    “이건?”

    “일전에 운 학사님께서 제게 맡기신 것입니다. 남았기에 이렇게 돌려 드리려고 가져왔습지요, 니예.”

    박 환관은 운현이 받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주머니를 살짝 떨어뜨리듯 운현의 품에 놓았다.

    운현은 얼결에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서찰을 부탁할 때 박 환관에게 같이 맡긴 은자 주머니였다.

    “아니, 박 환관. 이건 그냥…….”

    운현은 다시 주머니를 내어 밀려고 했지만 박 환관은 벌써 뒤로 물러난 뒤였다.

    “소인이야 이곳에 있으니 무슨 은자가 필요 있겠습니까? 게다가 맡기신 것이니 당연히 돌려 드려야지요.”

    “허어.”

    주머니를 들어 보니 여전히 묵직한 것이 건네줄 때보다 별로 줄어든 것 같지도 않다.

    운현은 탄식을 내뱉었지만 사양한다고 박 환관이 도로 받아 갈 것 같지도 않다.

    “고맙네.”

    운현은 다시 한번 박 환관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난 박 환관에게 신세만 지는군.”

    처음 자금성에 들어와 길을 헤맬 때부터 지금 이 작은 주머니에 이르기까지.

    생각나는 건 모두 박 환관에게 신세를 진 일뿐이다.

    “신세라니요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인데요.”

    여전히 박 환관은 미소를 지은 채 운현의 감사를 사양했다.

    그러나 자금성에서 박 환관 같은 사람이 운현에게 또 누가 있었으랴.

    굳이 찾자면 일충현 교두뿐이니, 백 마디 말이라도 박 환관에게 진 마음의 빚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아닐세. 정말 고맙네. 자네같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던 것 같네.”

    박 환관은 아무 말도 없이 빙긋 웃었다.

    “그럼, 이만…….”

    운현이 작별을 고하자 박 환관은 여전히 예의 바른 자세로 고개를 숙인다.

    “니예,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요.”

    아마 다시 볼 일은 없을 텐데도 박 환관은 유독 ‘다음’이라는 말에 강조를 뒀다.

    운현은 박 환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북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지키는 금의위들에게 간단한 질문을 받은 후 운현은 북문을 나섰다.

    그러나 박 환관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운현이 손을 흔들어 주었어도 박 환관은 그저 말없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운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박 환관은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운현의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

    박 환관은 빙글 몸을 돌렸다.

    미소가 떠올라 있던 그의 얼굴이 냉막하고 메마르게 변했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박 환관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자금성을 오가는 수많은 환관들과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 모습.

    그러나 박 환관의 눈빛만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

    내성의 북문을 나온 운현은 곧게 뻗은 다리를 걸어 자금성을 둘러싼 넓은 해자를 건넜다.

    그리고 다시 작은 문을 통과하여 완전히 자금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후우.”

    미련을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운현은 웅장한 붉은 담과 멀리 보이는 황금빛 지붕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어쩐다…….”

    사일천에게 말했던 대로 일단은 숙부가 계시는 광주로 가야 한다.

    광주는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곳이니 이곳 북경에서라면 먼 길이 될 것이고, 자신의 계획대로 중간에 유명한 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터이다.

    그러나 운현의 걱정은 어디로 갈 것인가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다.

    광주까지 머나먼 길을 간다 해도 숙부가 그다지 환영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하남성부터 들러 봐야겠지? 그 유명하다는 소림사도 좀 둘러보고…….”

    ‘하남성부터’라고 한 진짜 이유는 바로 모용세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뭐, 내가 특별히 뭘 바라는 건 아니고, 그저 인사나 전해 보려는 거니까.”

    물어본 사람도 없건만 운현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광주로 가는 길에 여러 군데를 들러 보자고 운현이 결정한 데는 실리적인 계산도 다분히 깔려 있었다.

    듣자하니 모용세가는 하남성에서 일대 패자로 군림할 만큼 유서 깊고 세력 있는 가문이라 했다.

    그렇다면 자신 같은 학사가 할 만한 일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일반 서생들과는 달리 무공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갖고 있는 편이니 모용세가로서도 좋아할 터이고, 무엇보다 서찰이라도 한 통 보내었던 사이가 아닌가?

    “아니면 뭐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든지…….”

    서찰을 보내긴 했지만 반응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하니 헛다리를 짚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강 눈치를 봐서 아니다 싶으면 그냥 나오면 될 터, 운현으로선 어쨌든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운현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짐이야 무거울 것 하나 없이 단출하건만 발걸음은 가볍지 못했다.

    허나 사람의 처지란 늘 예측대로만 되는 건 아니다.

    자금성에 들어와 확 트일 것 같다가 대차게 꼬인 자신만 봐도 그러하니, 처량하게 자금성을 나서는 이 발길이 오히려 좋은 일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 가자.”

    운현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북경은 가능한 빨리 벗어나기로 했다.

    이곳이라고 풍광이 좋은 곳이 없으랴마는, 오래 머물러 봐야 마음만 심란할 뿐이니까.

    높이 솟은 자금성을 짐짓 외면하며 운현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 둥실 떠가는 외로운 흰 구름 하나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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