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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2화 (42/530)

042화. 작별

“아니 되옵니다, 운 학사님!”

갑자기 박 환관이 외쳤다.

이번에 놀란 것은 운현이었다.

전에 없던 박 환관의 격한 반응에 운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정도의 일로 관직을 그만두시다니요.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때껏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 없는 박 환관이었다.

하지만 지금만은 예외였다.

“권불십년이라 했사옵니다. 비록 지금 학사님을 핍박하는 이들의 세가 강하다 하나, 결코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기다리시면 반드시 학사님을 알아주는 때가 올 것이옵니다.”

평소의 장난스럽고 가벼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박 환관은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금성의 주인으로 행세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허나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고 가지만 저희들은 여기 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낙망하셔선 아니 되옵니다.”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 때문일까? 박 환관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엔 보기 힘든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운현은 다시금 미소 지었다.

“고맙네, 박 환관.”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박 환관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으리…….”

“형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나는 이미 관직에 뜻을 버렸네.”

운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곳은 애초부터 나 같은 사람이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었네. 나는 형님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도, 그리고 누군가처럼 노골적으로 출세를 추구할 사람도 못 되니 말일세.”

박 환관은 운현의 말에 공감했다.

만일 운현이 출세를 원했다면 지금쯤 돌계단이 닳도록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연줄을 만들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창룡전의 내막을 알았을 때 바로 사직서를 던지고 이곳을 나갔어야 했다.

어중간하고 어수룩한 사람.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박 환관은 운현을 좋아했다.

이곳 자금성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것도 그저 명분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네. 그래도 형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운현은 미소 지었다.

박 환관은 간곡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정말 이곳을 떠나시렵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과도 인연이 다한 것 같네. 그리고…….”

운현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문연각 창 너머로 푸른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젠, 조금 쉬고 싶네.”

***

털썩.

작은 보따리 하나가 탁자 위에 가볍게 놓였다.

어쩐지 더욱 작아 보이는 그 보따리를 바라보며 운현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이것뿐인가.”

운현은 숙소에서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자금성에 들어와 십수 년을 넘게 지낸 곳이다.

길다면 긴 세월이라 지내는 동안 늘어난 짐도 만만치 않으련만, 의외로 짐은 매우 단출했다.

숙소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자금성에 속한 것이라 운현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탁, 탁.

운현은 보따리 한쪽 옆에 서책들을 쌓아 올렸다.

그동안 기록한 보고서와 소환된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어찌 될까?”

이것들은 모두 그가 직접 작성한 것들이지만 그의 것은 아니다.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들어 작성한 것들이니 당연히 황태자의 것이다.

그러나 과연 황태자도 이것을 자기 것이라 여길까?

‘그나마 잡서 구역에라도 놓인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자금성에서 보낸 백호전 학사조차 한 권의 보고서를 문연각 잡서 구역에 놓아두는 데 겨우 성공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짐이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운현은 서책에서 눈을 돌리고 짐 보따리를 가볍게 들어 보며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이사라고 할 수도 있는데 너무 가벼웠다.

이곳 자금성에 처음 들어올 때 가지고 있던 것들이라 봐야 벌써 오래전에 버리거나 처분해 버렸으니, 자신의 짐이라 해 봐야 옷가지 몇 점과 잡다한 물건이 전부다.

그리고 또 하나.

‘언젠가 전해 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운현의 보따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짐은 바로 일충현 교두의 유품이다.

일충현 교두의 부탁에 따라 운현이 수습하여 보관해 온 것들인데, 그는 ‘기회가 닿는다면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고 했었다.

운현도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다.

문득 운현은 가슴에 손을 얹어 옷 밑으로 느껴지는 반지의 감촉을 확인했다.

일충현 교두가 남겨 준 증표.

운현은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짐이 가벼우니 길을 가기는 좋겠군.”

한 손에 짐을 들고 운현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젠 너무나 익숙한 모습들이 천천히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왠지 모를 아쉬움이다.

“후우…….”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박 환관에게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말은 그럴듯하게 했다.

그러나 나간다고 누가 반겨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간 모아 온 은자가 조금 있다지만 언제까지나 놀고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괜히 나간다고 했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자 망설임이 다시 발목을 잡는다.

생각해 보면 일 없는 창룡전 학사야말로 놀고먹는 데는 최적의 환경이 아닌가?

게다가 잘릴 염려도 없다니 더욱 좋은 일이다.

“……훗.”

한동안 이리저리 생각을 펼치던 운현이 웃음을 흘렸다.

사일천 옆에 앉아 똑같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빈둥빈둥 놀고먹는 학사라니, 어쩐지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운현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날려 버렸다.

예전 같으면 꽤나 강렬한 유혹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우스울 뿐이다.

이런 생각의 변화가 검을 수련하면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으며 나름대로 철이 든 것인지 잠시 고민하며, 운현은 서탁 옆에 세워져 있던 목검을 손에 들었다.

탁.

익숙한 감촉이 손에 전해져 왔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아차.”

무심코 목검을 들었던 운현이 다시 그것을 내려놓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 목검 또한 운현 개인의 것이 아니다. 당연히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게다가 서생 차림을 하고서 옆에 목검을 차고 다닌다면 누가 봐도 웃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목검은 놓고 나가는 것이 옳다.

그러나 운현은 쉽게 목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사락.

운현은 목검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목검은 병기창 구석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금성 어디에서도 쓰이지 못한 채, 묵묵히 먼지를 덮어쓰다가 잊혀지게 될 것이다.

마치 운현 자신처럼.

말없이 목검을 쳐다보던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짐을 들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숙소를 나섰다.

달칵.

문이 닫혔다.

운현이 떠난 빈방을 그저 한 자루 목검만이 지키고 있었다.

***

숙소를 나선 운현은 짐을 들고 일충현 교두와 함께 수련하던 작은 공터로 향했다.

전각을 돌아 공터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아, 장원 교두.”

운현의 말에 먼저 와 있던 교두 차림의 금의위가 얼굴을 찌푸린다.

“제 이름은 장원이 아니라 관철훈입니다.”

운현은 웃으며 손을 젓는다.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그만…….”

먼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금의위의 관철훈 교두였다.

무과에 장원으로 들어왔다 해서 운현이 가끔 ‘장원 교두’라 부르기도 하는데, 운현과 함께 일충현 교두를 추억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이었다.

관철훈 교두가 찌푸린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나가십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제 창룡전에 가서 인사만 하면 끝나오. 가기 전에 잠시 둘러볼까 해서 왔소이다.”

말을 마치고 운현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공터를 돌아보았다.

따랑.

전각 끝에 매달린 풍경이 작은 소리를 울렸다.

그다지 볼 것도 없는 작은 공터지만 운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곳곳마다 가득한 기억과 추억 들이다.

정작 당시에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시간들이 지금 돌아보면 눈에 밟힐 듯 아프게 떠오르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느낌들.

그러나 너무 회한에 잠기는 것도 좋지 않다.

운현은 관철훈 교두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만 가 보리다.”

관철훈 교두가 정중하게 포권으로 답했다.

“살펴 가십시오.”

무뚝뚝한 인사였다.

그러나 관철훈 교두가 이곳에서 운현을 기다린 것이 그의 마음을 말해 준다.

운현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관철훈 교두도 보중하시오.”

‘보중’이라는 말이 오히려 모자란 듯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이곳 자금성이다.

고개를 들며 운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능하면 출세도 좀 하시고 말이오, 허허.”

운현의 말에 관철훈 교두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사를 끝낸 관철훈 교두는 서슴없이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저벅, 저벅.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또 다른 일충현 교두를 보는 것 같았다.

일충현 교두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던 기회가, 그에게는 꼭 주어지길 빌며 운현도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지금 떠나려는가?”

“네. 그동안 폐를 끼쳤습니다.”

사일천은 고개를 들고 운현을 쳐다보았다.

그의 서탁에는 여전히 뭔지 모를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바스락.

사일천은 가만히 책을 덮으며 운현에게 물었다.

“이곳을 나가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사일천의 질문에 운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직 정한 것은 없습니다만, 일단 잠시 쉬려고 합니다. 둘러볼 곳도 있고, 그 후에 천천히 앞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일천에게 대답하며 운현은 어젯밤 했던 생각들을 떠올렸다.

일단은 숙부가 계시는 광주로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광주는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도시다.

대단히 긴 여정이니 이왕이면 중간에 이름난 곳들을 둘러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어차피 은자는 넉넉하고 시간은 넘쳐나는 데다, 그동안 이곳 자금성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느라 답답했던 참이다.

“미련 같은 건 갖지 말게.”

문득 사일천이 말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운현은 놀라지 않았다.

사일천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선비라는 이들이 관직에서는 자신만이 충신인 듯 행세하며, 낙향한 후에는 마치 신선인 양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자연과 더불어 산다고 하네. 그러나 결국 속내를 알고 보면 오매불망 다시 부르심 받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결국 그들의 삶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셈일세.”

이번에는 운현이 놀랐다.

사일천이 이토록 길게 말을 한 적이 없었기도 했지만, 그 내용이 평상시 그가 말하던 바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일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는 바로 그런 곳일세. 그나마 큰 탈 없이 이곳을 나서게 되는 것만으로도 자네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가면 관직에 대한 미련은 접도록 하게.”

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깊숙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일천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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