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행운유수(行雲流水)
자금성의 아침은 조용하다.
해 뜨기 전의 새벽이 여러 준비로 가장 부산하기에, 아침이 밝아 올 즈음이면 이미 하루를 시작한 지 꽤 지난 시간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창룡전도 예외는 아니어서 운현이 사일천에게 보고를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한낮의 적막 같은 분위기가 전각 안을 메우고 있었다.
“지난번 소환되었던 이야기꾼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운현은 창룡전 관리 사일천의 앞에 작은 책자 하나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사일천 앞에는 운현의 보고서 외에도 늘 그렇듯 알지 못할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사일천은 책도, 보고서도 보지 않았다.
“수고했네.”
사일천은 운현에게 말했다.
‘응?’
의외의 반응에 운현은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일천은 늘 무뚝뚝하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그의 냉랭한 성격은 변함이 없다.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이려니 하고 오히려 운현이 적응이 되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수고했다는 말까지 하니, 운현이 이상히 여긴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운현의 눈길에 사일천은 시선을 피하며 탁자에 펼쳐져 있던 책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상한데?’
운현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사일천이 운현의 시선을 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예 무시한다면 또 모를까.
운현은 조심스럽게 사일천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다음 소환은 언제쯤 있을 예정입니까?”
“다음 소환은 없네.”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창룡전 관리 사일천의 말은 변함이 없었다.
“방금 말한 그대로일세. 더 이상의 소환은 없을 것이네.”
운현은 멍하니 서서 사일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사일천은 시선을 내린 채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운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게 무슨 말씀…….”
사락.
사일천이 가만히 책을 덮더니 고개를 들어 운현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어느 정도 익숙해졌던 눈빛이었음에도 운현은 새삼 흠칫 놀랐다.
“이야기꾼 소환을 위한 예산 집행이 거절되었네. 각 성의 전문적인 이야기꾼에 대한 정보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의 이야기꾼 소환은 없을 거라는 말일세.”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사일천이 말하는 의미가 이제야 확실히 들어왔다.
운현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사일천에게 물었다.
“제 임무는 황태자 전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헌데 어째서…….”
하지만 운현의 목소리는 다시 끊겨야 했다.
“전하의 영(令)이 내려왔네.”
사일천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누군가의 글을 대독하는 듯한 느낌.
처음 운현이 창룡전에 왔을 때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자네의 임무는 오늘로써 끝일세.”
운현은 말을 잊었다.
어이가 없어 화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연구 분야라는 게 남들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 해도,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애착을 가지고 해 온 일이다.
나름대로의 의미도 찾았고 일말의 자부심도 생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일을 그만두라는 것이다.
‘허어…….’
학사에게서 붓을 뺏는 것은 모욕이다.
그러나 운현은 분노 대신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지난 십 수 년간의 노력이…….’
차라리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이렇게 되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대놓고 게으름을 피웠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누구에게 탓하랴?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운현은 자신의 일을 빼앗긴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미안하네.”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가 사일천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운현이 자금성에 들어와 처음으로 들은 사일천의 사과였다. 그러나 그의 탓이 아니다.
작년 일충현 교두의 죽음 이후로 자신이 윗사람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듯 직접 압력을 가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은 그저 볼품없는 창룡전 소속의 학사에 지나지 않는데, 그들은 그런 운현마저 결국 보아 넘기지 못한 것이다.
“그럼 저는 이제 파직당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러나 사일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자네가 여전히 창룡전 소속 학사임에는 변함이 없네. 다만…….”
사일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해야 할 일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뿐일세.”
의미 없는 위로였다.
해야 할 일이 주어지지 않은 학사가, 붓과 책을 빼앗긴 학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일천은 운현의 임무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라 했으나, 아마도 그 임무가 정해지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허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닥치고 보니 어깨에 힘이 빠지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마치 자신의 잘못인 듯 죄책감이 운현의 고개를 짓눌렀다.
“미안하네.”
들릴 듯 말 듯 사일천의 사과가 다시 한번 새어 나왔지만, 운현의 한숨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
문연각 잡서 구역에서 자그마한 소음들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작은 한숨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후우.”
책을 정리하던 운현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정리하고 있는 책들은 그가 문연각에서 찾아낸 무림에 대한 자료들이었다.
참고하기 위해 늘 서탁에 올라와 있던 것들이었는데, 이것들도 이제는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다.
‘앞으로 문연각에 들어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일이 없어졌다고 당장 문연각 출입 허가가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현은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곳을 정리하러 온 것이다.
비록 잡서라 하여 문연각에서도 천시받는 책들이지만 그냥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탁, 탁.
서탁에 놓인 책들을 정리하다가 운현은 손을 멈췄다.
무심코 집어 올린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꽤나 길고 복잡한, 쉽게 읽힐 생각은 아예 포기한 듯한 제목.
“무림 방파에 전승되는 무공 근원의 통전적 접근에 관한 보고서라…….”
운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백호수련검 십이식이 적혀 있는 바로 그 ‘보고서’였다.
처음 이 책을 발견했던 때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데 낡고 닳은 표지는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
“그래도 선배는 나보다 낫구려.”
운현은 두꺼운 책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운 학사님.”
운현은 흠칫 놀랐다.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끝에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아, 박 환관이었군.”
박 환관을 쳐다보는 운현의 얼굴엔 반사적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씁쓸한 미소로 변했다.
자신을 보는 박 환관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네도 알고 있었군.”
박 환관은 아무 대답도 없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언제나처럼 예의 바른 인사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박 환관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이 사람…….”
박 환관의 인사는 의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없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운현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만하게. 별일도 아닌 것을…….”
말은 그렇게 했어도 운현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것을 운현은 오늘 처음으로 실감했다.
가슴이 저려 왔다.
***
“그런가…….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군.”
운현이 탄식하듯 말하자 박 환관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송구하옵니다, 나으리.”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자네가 송구할 게 무어 있겠나.”
언제나처럼 문연각 잡서 구역에 앉아 운현은 박 환관에게서 일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예측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나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높으신 분들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그것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말일세.”
창룡전 소속이라면 자금성의 모두가 우습게 안다.
게다가 창룡전의 책임자도 아니요, 일개 학사에 불과한 자신이 아닌가?
“아마도 불안하기 때문일 테지요.”
“불안?”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박 환관은 고개를 저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잃는 것에 대한 불안도 더욱 큰 법이지요. 게다가 이곳은 자금성 아닙니까?”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조금 외람된 말씀이오나, 높으신 분들은 의외로 소심하옵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절대 그냥 넘기지 못하시지요. 자기 사람, 자기 편으로 채워야만 비로소 만족하고 안심을 하신답니다.”
“허어.”
운현의 작은 탄식에 뒤이어 박 환관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운 학사님은 창룡전 소속이시니 더욱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일이지요. 뭐라 해도 황태자 전하께 속하신 분이니…….”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자금성에 들어와 십수 년이 되도록 황태자 전하의 용안조차 뵌 일이 없는데 무슨…….”
“아마 윗분들께는 그리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요.”
“허허.”
운현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박 환관의 말대로였다.
힘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눈에 거슬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비록 그들이 느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근저에는 박 환관의 말대로 일종의 불안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권력에 올라서며 흘린 무고한 피가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으니 어찌 불안하지 않을까?
창룡전의 별 볼 일 없는 학사뿐만 아니라 그 심부름꾼이라 한들 가볍게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 이제 앞으로 어찌 되겠나?”
한동안 어이없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운현이 박 환관에게 물었다.
“소인이 무얼 알겠습니까마는…….”
늘 그렇듯이 박 환관은 슬쩍 말을 흐렸다.
하지만 자금성 내의 일이라면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은 운현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그분들도 더 이상 어쩌지는 못할 테지요. 뭐라 해도 운 학사님은 창룡전 소속의 학사, 곧 황태자 전하께 속하신 분이시니 말이지요.”
더 이상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아까 사일천이 파직은 아니라고 한 말과 같은 의미였다.
“다만…….”
“다만?”
박 환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주저했다.
운현의 재촉 어린 눈빛을 받고 나서야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운 학사님께 업무가 주어지는 일은 아마…….”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듯 박 환관은 말을 흐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운현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가…….”
운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박 환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운현은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박 환관이 운현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없다.
“저기, 그래도 오래지 않아…….”
박 환관이 그렇게 말을 꺼낼 때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운현은 고개를 들고 박 환관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잔잔하고 평온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수만 자의 글을 외웠고, 높으신 성현들의 뜻을 기록한 서책을 수도 없이 읽어 왔네.”
운현의 말은 난데없었다.
그러나 박 환관은 묵묵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허나 그 모든 것은 과거를 위한 것이었네. 글을 익혔으나 그 뜻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였고, 책을 읽었으나 그 길[道]을 따라 걷지 않았으니 어찌 선비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겉 흉내만을 내었을 뿐이지.”
운현은 말을 이었다.
“허나 그런 나도 아는 것이 있으니, 물처럼 자연스럽게 순응하며 흘러가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라는 것[上善若水]이네.”
“니예?”
박 환관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갑작스러운 그 말을 박 환관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운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소였다.
“이제 관직을 그만둘 때가 되었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