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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0화 (40/530)
  • 040화. 복마전(伏魔殿)

    청진 도사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매화검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리는 건 알지 못했다.

    사박.

    아름다운 젊은 여인은 청진 도사와 매화검 영호준을 향해 다가왔다.

    “무당파의 청진 도사님이시죠?”

    그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청진 도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문의 당설련이라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설련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아찔한 미소였다.

    그러나 청진 도사 역시 오랜 세월 수도한 도인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지금 들린 그녀의 이름이, 청진 도사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했다.

    달칵.

    “무당의 청진이라 합니다.”

    청진 도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소문이 자자하신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 소저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청진 도사의 말에 당설련은 살짝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 소문이라니 부끄럽군요. 부디 좋은 이야기였기를 바라지만요.”

    청진 도사가 무언가 말하려는데 앉아 있던 매화검 영호준이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당연히 나쁜 말이겠지. 그 성질에 무슨 좋은 소문이 날 수 있을까?”

    당설련이 매화검 영호준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매화검 영호준은 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당설련은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매화검께서는 가볍고 놀기 좋아한다는 평판이 여전하더군요. 용봉지회 때도 그러시더니 아직 못 고치셨나 봐요?”

    매화검 영호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용봉지회’는 무림맹이 주최하는 후기지수들의 모임이다.

    삼 년마다 열리는 이 용봉지회는 모든 문파의 후기지수는 물론, 멀리 새외와 변방에 있는 문파에게도 초청장이 날아간다.

    그러나 실제로 이 용봉지회를 움직이는 것은 무림맹 십팔대 문파의 후기지수들이다.

    바로 그들이 다음 세대의 무림맹을 이끌어 갈 사람들이자, 문파의 다음 주인이 될 사람들이니까.

    당설련과 영호준 역시 용봉지회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되었다.

    그들이 무림맹에 대표로 나와 있다는 것은 용봉지회가 원래 의도대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청진 도사 역시 용봉지회를 거쳤으나 다만 해가 달라 두 사람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 심각한 표정으로 나누고 계셨죠?”

    “별것 아니었소. 당설련 소저.”

    “별것 아니라고요?”

    당설련은 활짝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하시니 아무것도 아니겠죠. 저는 단지 무당파의 청진 도사님과 화산파의 매화검 대협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을 나누셨다는 이야기를 다른 문파의 대표들께서 듣게 된다면 어찌 될까 싶었을 뿐이에요.”

    “윽.”

    매화검 영호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그녀의 말은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지 않으면 소문을 내 버리겠다는 위협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은 자신의 말대로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당문은, 특히 당문의 눈꽃은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다.

    “무림맹 회의에서 논의될 안건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청진 도사가 대신 말했다.

    당설련은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무당의 도사께서는 아량이 넓으시군요.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에요.”

    “매화검께서 제게 책임을 넘기시니 어쩔 수 없지요. 저 또한 대화의 당사자이니 말입니다.”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누구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요. 청진 도사님은 참으로 멋진 남자시네요.”

    마치 유혹하는 듯한 눈빛에도 청진 도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당문의 눈꽃, 당설련이다.

    그 화려한 외모에 눈을 빼앗겼다가는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차갑게 죽어 가게 될 것이다.

    “답례로 제가 한 가지 좋은 것을 가르쳐 드릴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그때였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매화검 영호준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아, 당설련 소저. 혹시 소식 들으셨…….”

    “소저께서 하시는 말씀인데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청진 도사는 영호준의 말을 끊었다.

    당설련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매화검과 나눈 말씀을 그대로 믿으셨다간 아마도 낭패를 당하시게 될 거예요.”

    그건 난데없는 말이었다.

    방금 전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당설련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매화검께서는 창룡검주라는 이름을 들먹이셨을 거예요. 마치 무림맹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청진 도사의 말은 매화검 영호준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당문에서도 창룡검주라는 이름은 가벼이 취급할 만한 것이 아니지 않소?”

    당설련은 가볍게 조소를 흘렸다.

    “물론 그래요. 비밀스러운 비무로 죽은 문주급 무인들에 관한 정보 또한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당설련은 다시 청진 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두 사건이 서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한 사람의 억측에 불과해요. 바로 그 사람이 무림맹 회의에 그 안건을 상정했죠. 그렇지 않은가요, 매화검 영호준 대협?”

    청진 도사가 그제야 놀란 표정으로 당설련에게 되묻는다.

    “설마 그 안건을 상정한 사람이…….”

    “네, 바로 여기 계신 매화검이시죠. 오직 이분 혼자만이 말예요.”

    청진 도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제껏 그는 무림맹이 이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매화검 영호준이 홀로 상정한 안건일 뿐이라니?

    청진 도사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 그러했군요. 허허허.”

    청진 도사는 너털웃음을 흘렸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만일 이대로 무림맹 회의에 참석했다면, 그리고 그 안건에 동의하는 발언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다른 문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일에도 지대한 지장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매화검께서 소녀를 불편해 하시니 저는 이만 가 보겠어요.”

    영호준의 일그러진 표정을 바라보는 당설련은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그리고.”

    자리를 떠나며 당설련은 말했다.

    “매화검께서도 그런 억측은 이제 그만두시고 좀 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쓰셔야 하지 않을까요? 무림맹에 파견된 대표답게 말예요.”

    사박, 사박.

    자그마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당설련이 물러갔다.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청진 도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매화검 영호준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오늘 주신 많은 가르침, 정말 감사드립니다.”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정말 여러 가지로 말이다.

    청진 도사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

    홀로 남은 영호준은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일이라…….”

    영호준은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내 생각엔 이게 정말로 중요한 일인데 말이야.”

    하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호준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무림맹을 비추는 오후의 햇빛이 천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찌이잉.

    잡초만이 무성한 넓은 평야, 날카로운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찢었다.

    “아!”

    슥.

    잘려 나간 검 조각이 소리도 없이 잡초 사이로 박혔다.

    반으로 잘려 나간 자신의 검을 들고, 중년 무인은 탄식을 흘렸다.

    “이럴 수가, 검기라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릉.

    검을 거둔 상대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도 승복할 마음이 없나?”

    중년 무인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보았다.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거대한 체격의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내가 졌소.”

    중년인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의 허망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어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그것이 벌써 세 번째, 드디어는 자신의 애검마저 두 동강 나 버리고 말았다.

    비록 검기발현의 고수는 아니라 하나 자신 역시 검에 내력을 담을 만한 고수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담은 그 검이 눈앞에서 잘려 나가 버렸다.

    상대와 자신의 성취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뜻이니 어찌 승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당신을 따를 수는 없소.”

    잠시 후, 상대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환우오천존 때문인가?”

    하늘 아래 가장 강하다는 이 시대 다섯 명의 절정고수들.

    사람들은 경외를 담아 그들을 환우오천존이라 불렀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환우오천존이라 해도 당신보다 강하리라 장담하지는 못하겠소. 허나…….”

    사내는 잠시 말을 끊고 이를 악물었다.

    “창룡검주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를 만나 본 적이 있나?”

    상대의 목소리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만나 본 적은 없소. 친우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 허나 그는 당신보다 강하오.”

    “어째서? 그를 만나 본 적도 없다 하지 않았나?”

    “물론 그를 만난 적은 없소.”

    반검(半劍)을 든 사내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허나 내 친우는 창룡검주의 서찰에서 새로운 검의 지평을 보았다 했소.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했소. 그 빛나는 눈동자 앞에서, 부끄럽지만 나는 질투할 수밖에 없었소.”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뜨거운 열정이었다.

    “누가 더 강한가, 누구의 검이 더 대단한가 하는 것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 내 친우의 눈빛은 바로 그것을 내게 깨닫게 해 주었소.”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패배시킨 상대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당신은 분명히 강하고, 또 나를 꺾었소.”

    잘려 나간 반검이 달빛 아래 빛났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검에서 새로운 검의 지평을 발견할 수 없었소.”

    침묵이 흘렀다.

    사내의 검은 이미 부러졌으되 그 자신은 아직 꺾이지 않았음을, 상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상대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것이 이유인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귀를 울렸다.

    “창룡검주가 나를 따르게 된다면, 너 또한 나를 따르겠는가?”

    “그렇소.”

    사내의 대답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잠시 후, 거대한 체격의 사내가 낮게 말했다.

    “가라.”

    반검을 들고 있던 사내의 얼굴에 이채가 서린다.

    그를 거부한 자신을 그냥 보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는 부러진 반검을 들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대의 명호를 알고 싶소.”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나는 어두운 하늘 아래 서 있는 자, 암천무제(暗天武帝)다.”

    상대의 말이 끝나자 사내는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몸을 홱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사내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고, 스스로 어두운 하늘 아래 서 있는 자라고 밝힌 사내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하얀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암천무제의 옆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가냘픈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다.

    검고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어째서 그에게 명호를 밝히셨습니까?”

    조용히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대단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기개 있는 무인이다.”

    여전히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의 목숨을 취하지 않으신 것도 그 때문입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는 무인의 이름을 가졌을 뿐인 쓰레기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니까.”

    암천무제는 몸을 돌렸다.

    “상인(上人)께 돌아가자.”

    여자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아직 비무행(比武行)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비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듣지 못했느냐?”

    암천무제의 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

    “나는 창룡검주를 만나야 한다.”

    그가 정했다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할 말이 있었다.

    “그 이름이 처음도 아닌데 어찌 그러십니까?”

    “그러기에 지금 돌아가는 것도 이른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암천무제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저벅, 저벅.

    암천무제가 멀어져 가기 시작했어도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암천무제와는 반대쪽, 반검을 든 사내가 사라져 간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스르륵.

    마치 어둠 속에 녹아내리듯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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