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무림맹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서신을 전한 사자를 목 베는 것쯤은 흔한 이야기다.
혹시 서찰의 내용이 대단히 모욕적이라면, 그렇잖아도 기분 나빠 보이는 고독객이 자신의 목을 쳐 버릴지도 모른다.
상상이 여기까지 이르자 표국에서 나온 사내의 표정은 그만 새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독객이 그를 불러 세운 것은 단지 서찰의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용에 따라 혹시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
바스락.
표국 심부름꾼이 불안에 떠는 동안, 고독객 독고랑은 굳은 표정으로 서찰을 넘기고 있었다.
“뭐야?”
“비무 도전장인가? 이제 안휘성에서 고독객에게 비무를 요청할 사람은 없을 텐데?”
“어쩌면 다른 문파에서 온 초청장인지도 모르지.”
“그럼 벌써 던져 버렸을걸? 고독객이 어디 매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던가.”
정작 서찰을 읽는 당사자는 말이 없는데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있었고, 몇 사람들은 패배한 사람을 부축하며 이곳을 빠져나가려 군중 속을 헤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하하하하!”
갑작스러운 광소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단번에 침묵했다.
그리고 그 미친 듯한 웃음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머리까지 흐트러트리며 미친 듯이 웃어 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독객 독고랑이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고독객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서찰을 가지고 왔던 사람은 순식간에 안색이 새파랗게 되고 말았다.
“하하하하! 하하, 하아…….”
얼마나 웃었을까?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며 고독객의 고개가 수그러든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어깨는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파삭.
고독객의 손에 들려 있던 서찰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리고 마치 허탈한 목소리가 고독객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우물 안 개구리라더니……. 내가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몰랐구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저런 한탄은 보통 비무에서 졌을 때 내뱉는 말이 아닌가?
사람들은 고독객의 말에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무리 중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람 하나가 기어이 질문을 던졌다.
“대협, 혹시 비무의 결과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으시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심정인 듯 눈을 빛내며 고독객을 주목했다.
그러나 고독객 독고랑의 안중에는 애초부터 아무도 없었다.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거칠게 탁 내뱉어졌다.
“비무엔 더 이상 볼일이 없다.”
고독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검의 길[道]을 알았으니까.”
고독객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옆에 있던 표국 심부름꾼만이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벅, 저벅.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고독객 독고랑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지만 사람들은 미처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한 손에 서찰을 꼭 움켜쥔 채였다는 것도.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지금 비무가 어떻게 됐다는 거지?”
“글쎄? 무슨 말인지 도무지…….”
하릴없이 멀어져 가는 고독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독객은 멈추지도, 발길을 돌리지도 않았다.
“휘유.”
표국 심부름꾼은 고독객이 멀어지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이고야,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네.”
조금 전 고독객이 미친 듯 웃을 때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아무런 불상사도 없이 고독객이 사라져 주니 그로서는 그야말로 한 발을 무덤에 넣었다가 빼낸 기분이다.
“젠장, 결국 이렇게 갈 거면 왜 사람을 불러 세우고 난리야? 아니면 웃지나 말든지……, 쳇.”
일단 목숨을 건지자 그제야 불만이 튀어나온다.
표국 심부름꾼은 입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근데 서찰 내용이 대체 뭐길래 저래?”
다른 사람들이야 영문을 모르겠지만 바로 옆에서 본 자신은 다르다.
고독객의 미친듯한 그 웃음은 분명히 서찰의 내용 때문이었다.
마침 고독객이 찢어 버린 서찰의 봉투가 발치에 굴러다니는 것이 보여서, 표국 심부름꾼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주워들었다.
“이게 뭐야? 천외(天外)…… 음, 어려운 글자군. 획이 많아. 그리고 다음이…… 어, 으음…… 용검(龍劍)…… 주(主)?”
표국 심부름꾼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고독객 독고랑은 소호를 떠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안휘성에서 고독객 독고랑을 본 사람은 없었다.
고독객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자 갖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더 이상 적수를 찾지 못한 그가 무당이나 소림을 찾아갔을 거라는 얘기부터, 모종의 목표를 이미 달성했기에 사라졌을 거라는 설, 그리고 사실은 그가 유명한 명문 검파의 제자인데 정체를 감추고 비무행을 즐겼던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날 비무를 했던 상대방은 자신의 필살기가 원래 천천히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기에 고독객이 뒤늦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라고 우기기도 했지만, 그다지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의견 가운데는 표국 심부름꾼의 의견도 끼어 있었다.
그는 고독객이 하늘 밖의 용과 비무하러 간 거라고 말을 꺼냈다가 객잔에서 한번 웃음거리가 된 후, 다시는 그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안휘성의 경우일 뿐이었다.
***
항주는 절강성의 성도이자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말처럼 수많은 절경이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이곳 항주는 또한 모든 무림인들이 주시하는 곳이기도 했다.
바로 이곳 항주에 정파와 사파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강호 무림 최고의 협의체, 무림맹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십여 년 전, 정사대전이라고도 불리는 정파와 사파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끝에서 무림맹은 탄생되었다.
십팔대 문파의 연합체인 무림맹은 스스로 강호 유일의 배타적인 패권을 주장했다.
정사대전으로 피폐해 있던 대부분의 문파는 무림맹 앞에 굴복했고, 무림맹을 거부하는 전대 고수들은 은거해 버렸다.
악명을 떨치던 장강수로채 연합과 녹림을 궤멸시킨 후, 무림맹은 강호 무림에 안정을 가져왔다.
풍요해지는 사회와 경제, 문화의 발전 속에서 무림맹 체제의 강호 무림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모습에 불과했다.
달칵.
고급스럽게 장식된 문이 열리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오, 청진 도사께서 여기에 계셨군요.”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예를 표했다.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도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예를 표했다.
“화산파의 매화검 영호준 대협이시군요.”
젊은 청년 영호준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화산파의 도사라기보다는 마치 명가의 귀공자 같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법한 모습이었다.
“대협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제가 어찌 무당의 청진 도사께 대협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청진 도사라 불린 젊은 도인이 영호준에게 말했다.
“마침 이곳에서 보이는 서호의 풍광이 아름다우니, 매화검께서도 함께하시지요.”
매화검 영호준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청진 도사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떻습니까? 무당의 대표자로 무림맹에 오신 감상이?”
무림맹은 명실공히 강호 무림의 최고 협의체다.
그러나 모든 문파의 수장들이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각 문파는 대표자라는 형식으로 무림맹에 사람을 파견했고, 거대 문파나 세가 들은 아예 무림맹에 대표자를 상주시키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림맹에 대표자로 파견되는 것은, 앞으로 문파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인정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당의 청진 도사도, 이미 항주에 머물고 있던 화산파의 매화검 영호준도 그렇게 이곳 무림맹에 오게 된 것이다.
청진 도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책임이 막중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힘써 강호 무림의 평안과 안위를 지키…….”
“쯧쯧.”
청진 도사의 말은 영호준이 혀를 차는 소리에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뭘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놀란 얼굴의 청진 도사에게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강호 무림이 오늘날과 같이 혼탁한 적은 없습니다. 정사대전은 없지만 각 파의 이익을 위한 이전투구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하지요.”
영호준의 말은 진실이었다.
정사대전은 이미 끝났지만 어찌 보면 지금은 예전보다 더 피비린내 나는 세상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거대 상단들과 조정의 관인들까지 얽혀 있으니, 한 발만 삐끗해도 문파의 존망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작금의 현실 아닙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유서 깊은 문파로 대우해 주던 좋은 시절은 옛날에 물 건너갔단 말입니다.”
영호준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강호의 평안과 안위를 지켜요? 무당이 그럴 생각이시라면 저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영호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청진 도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화산파의 매화검이 그 화려한 검술에 비해 성정(性情)이 가볍다 하더니,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요.”
청진 도사는 매화검 영호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무당파는 이전과 같이 화산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무림맹에서 논의되는 사안에 대해 항상 공동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당파의 확고한 뜻입니다.”
영호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청진 도사를 바라보았다.
청진 도사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영호준이 빙긋 웃었다.
“이렇듯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시니 이제야 큰 짐을 던 듯합니다. 하하하!”
청진 도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배운 게 많습니다.”
배운 게 많았다.
이곳 무림맹에서 어설픈 위선은 무시당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이곳 무림맹이 좋은 점이라면 구태여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죠.”
매화검 영호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다 적나라하거든요. 체면상 손해 볼 사람도 없을뿐더러, 예의상 물러났다가는 한꺼번에 몰매 맞듯 짓밟히기 마련이니까요.”
“그야말로 복마전(伏魔殿)이로군요.”
“맞아요. 아주 정확합니다.”
매화검 영호준이 맞장구를 쳤다.
무림맹은 거대한 마물이 웅크리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라는 마물이 말이다.
“아 참, 며칠 후 있을 무림맹 회의의 안건은 알고 계십니까?”
매화검 영호준의 말에 청진 도사는 막 들려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흐음.”
영호준은 잠시 딴청을 부렸다.
청진 도사는 슬며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으신지요?”
“혹시 창룡검주란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눈살을 찌푸리는 영호준에게 청진 도사가 덧붙였다.
“공식적으로는요.”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무당파 정도 되는 곳이 그 이름을 아직 모를 리가 없었다.
영호준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의 기행에 뭔가 의도가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도요?”
“그렇습니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이유 없는 선행은 없습니다. 서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해 준다는 그 창룡검주가……. 아, 어떤 이들은 그가 검선의 강림이라고까지 한다죠? 여하튼 그가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 정도의 고수가 정말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요?”
“확실히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청진 도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무림맹의 의제로 삼을 정도라고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영호준이 말했다.
“사람이 죽었거든요.”
“네?”
놀라는 청진도사에게 영호준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요 몇 달간 일어난 일련의 의문사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몇몇 무인들이 비밀스러운 비무를 벌이다 죽은 것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그 몇몇 무인은 모두 일파의 문주급이었고, 상대는 하나같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도 빼먹으시면 안 되지요.”
영호준이 말을 보탰다.
“그들의 죽음에 창룡검주가 관계했단 말입니까?”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매화검 영호준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누군가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받아들인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거절한 자는 목숨을 거두는 생과 사의 선택을 말입니다.”
청진 도사는 등골이 오싹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설마 무림맹은…….”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이 현 무림맹 체재의 근간을 흔드는 위협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청진 도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무림맹은 결코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림맹에 도전하는 것은 곧 무림맹 체재를 이루는 거대 문파들에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무림맹은 강호 무림의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거대 문파들이 장악한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림맹이 이 일을 위협이라고 인정했다면,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을 일이 아니군요. 무림맹에 주어진 권한으로 창룡검주의 서찰을 회수하고, 즉시 면밀한 조사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화검 영호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
바로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며 젊은 여인이 방에 들어왔다.
화사한 얼굴에 그린 듯 아름다운 눈썹, 빛나는 눈동자와 윤기 흐르는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