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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8화 (38/530)

038화. 고독객 독고랑

파아악.

운현의 목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자 공기가 일렁였다.

그것은 무언가를 휘둘렀을 때 일어나는 바람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허공을 메우고 있던 정적이 운현의 검에 쭈뼛 놀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부우웅.

다시 한번 허공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운현의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일그러졌다.

그리고 마지막 제삼식(第三式).

후욱.

운현의 검이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웅, 웅.

이미 멈춰선 운현의 검 주위로 마치 큰 북을 두드린 듯한 진동이 느리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운현은 그 자세 그대로 서서 온몸으로 그 진동을 느꼈다.

점차 사라지는 여운 속에, 일렁이던 주변의 기운도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후우우.”

운현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짧은 세 검식이었지만 그는 한참 동안 호흡을 골라야 했다.

“으음, 이 정도로 힘이 들 줄은 몰랐는걸…….”

숨을 고르던 운현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과연 실전검(實戰劍)이라는 건가, 아니면 어딘가 잘못된 걸까?”

운현이 새로운 검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일충현 교두의 말을 받아 적은 책을 뒤적거리다 ‘수련검’과 ‘실전검’에 대한 언급을 발견하고서부터였다.

수련검과는 달리 기를 일시에 폭발시키는 것과 같다는 실전검.

바로 그 단어에 운현은 흥미를 느꼈다.

처음 착안한 것은 백호수련검 십이식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할 줄 아는 검식이라고는 백호수련검뿐이었으니까.

선배라 할 수 있는 백호전 학사가 평생을 걸려 창안한 것을 마음대로 고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주해를 달고 출전을 밝히면 상관없겠지’라며 그냥 넘어갔다.

‘뭐, 어차피.’

학계에서 선배들의 노고에 기대지 않고 그냥 튀어나오는 논문은 없다. 출전만 명확하면 상관은 없으리라.

물론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운현뿐이겠지만.

‘우선 첫 검식은 빠르고 날카롭게, 인데.’

운현은 이 새로운 검식을 백호실전검 삼식(白虎實戰劍 三式)이라 이름 지었다.

처음엔 빠르고 날카롭게, 두 번째는 부드럽게, 그리고 마지막은 무겁게.

이것이 운현이 백호 수련검을 재구성하면서 가졌던 생각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게 정말 실전검인지 확인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

크게 무리한 발상은 아닌 듯한데, 일충현이 살아서 이 검식을 보았다면 과연 무어라 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눈살을 찌푸리며 이게 뭐냐고 하셨을지도 모르고.’

일충현의 모습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운현은 투박한 목검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래서야 어디 비무는 꿈도 못 꾸겠는걸.”

운현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십여 년을 훨씬 넘도록 검을 수련했다. 그리고 일충현 교두로부터 내공을 전수받았다.

본래 학사인지라 스스로 무인이라 여긴 적은 없지만 스스로의 성취가 작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 강호의 고수들하고야 어디 비교가 되겠는가마는…….’

그래도 실력으로는 명문 출신의 무림인에 뒤지지 않으며, 논검(論劍)으로는 고수들에게도 함부로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고 여겨 왔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 번쯤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애초에 실전검이라는 단어에 흥미를 가진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이 만든 실전검을 한 번 펼치고는 이렇게나 호흡에 허덕여야 한다면, 비무는 아예 꿈도 못 꿀 것이 아닌가?

“강호의 고수들은 이런 무지막지한 검을 수십, 아니 수백 번씩 쏟아 낸다고 하니 과연 왜 그들을 내공의 고수라 하는지 알겠군.”

운현은 잡념을 털어 내듯이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그보다는 이 백호검도 문제로군. 생각한 대로라면 이보다는 더 가볍게 펼쳤어야 하는데, 이러면 학사검(學士劍)이나 창룡검(蒼龍劍)도…….”

운현이 생각한 것은 백호 실전검으로 끝이 아니었다.

단지 기존에 있던 것을 정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학사로서의 자존심 문제다.

모름지기 자신만의 무엇이 없어서야 어찌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랴?

그래서 운현이 생각한 나머지 두 검은 학사검과 창룡검이었다.

‘학사검은 일단 가장 단순한 검식이 목표인데…….’

박 환관에게 말했던 가장 단순한 검식이 바로 학사검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검로조차 정해지지 않은 것이었지만, 운현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이루고 싶어 하는 검식이기도 했다.

‘성현께서도 이르시기를 하나의 도(道)로 모든 것을 꿰뚫었다 하셨으니 어찌 검에도 그런 것이 없겠는가?’

검 또한 도(道)다.

백호전 학사가 검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했다면, 자신은 진정한 도로서의 검을 구현해 보고 싶었다.

문연각의 수만 권 서적들 속에서도 그런 것은 없었다.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학사란 원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학문에 평생을 거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창룡검.

“후우.”

한숨부터 나왔다.

언젠가 자신이 보았던 꿈같은 세계에서 미처 못 다한 바로 그 검무.

지금이라도 검 끝에서 펼쳐질 것만 같으면서도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같이 아련한 향수 속에만 남겨져 있는 검로.

그것이 바로 창룡검이었다.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마치 언제라도 돌아가야 할 고향처럼 운현의 마음이 향하는 검.

‘언젠가는…….’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운현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쩌면 자신의 수련은 결국 그 단 하나의 검로, 창룡검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후우.”

어느덧 밀려오는 회한에 운현은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모름지기 큰 산을 보고 넓은 길을 가는 법.”

백호 실전검은 이 정도면 되었다.

지금은 섣부른 실전검보다 수련검에 더 집중해야 할 때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창룡검은 평생 구경조차 못 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운현은 쉽게 목검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 딱 한 번만 더 해 보자.”

뭐라 하는 사람도 없건만 운현은 마치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목검을 세웠다.

마음이 검이 목검에 겹쳐지며 무형의 기운이 희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백호실전검 제일식의 시작이었다.

***

안휘성 동부에 위치한 소호는 아름다운 풍경과 풍부한 수산 자원으로 널리 알려진 호수다.

그러나 오늘 호숫가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광경도, 명승고적도 아니었다.

“하아!”

채앵, 챙.

푸른 칼날이 빛을 뿌리고, 찰나의 순간에 생사가 교차한다.

검을 들고 맞선 두 사람의 모습은, 눈만 깜박여도 그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현란하게 얽혀 들었다.

“큿!”

한 사내의 얼굴에 주름이 졌다.

검은 두 사람 모두 들었지만 승기를 잡은 쪽은 한 사람뿐, 다른 한 사람의 얼굴에는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타합!”

파아악.

패색이 짙어 가는 국면에서 무언가 전기를 마련해 보려는 의도였을까?

수세에 몰리던 사람이 커다란 기합 소리와 함께 크게 도약했다.

“받아랏!”

땅에 있던 사람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파악, 찌잉.

날카롭고 작은 소리가 호변에 울려 퍼졌다.

숨마저 죽인 채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려 냈다.

“오오오.”

“고독객이로군. 과연…….”

“쯧쯧쯧, 너무 성급했어. 몰린다고 무조건 뛰어오르면 그게 도망이지 공격인가?”

웅성대는 소리들이 삽시간에 사람들 가운데 퍼져 나갔다.

털썩.

공중으로 도약했던 사내는 허리를 감싸 쥔 채 비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예리하게 베어진 옷 사이로 긴 검흔이 보이고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과, 과연 고독객……. 멋진 승부였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사내가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고독객 독고랑의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멋진 승부? 이런 어설픈 비무를 멋진 승부라고 하나?”

모욕당한 상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고독객은 묵묵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비무에 이겼지만 그의 표정은 험악하기만 했다.

상대는 제법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데다가 실력이 있다고 소문난 무인이었다.

그러나 직접 검을 맞댄 상대는 독고랑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쯧.’

독고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강호의 소문은 믿을 수 없다지만 아예 속 빈 강정에 불과했으니 고독객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모르는 군중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야, 이제 안휘성 최고의 고수는 명실공히 고독객이 되는군.”

“그러게 말일세. 이제 안휘성을 평정했으니 다음은 어디로 갈까? 소문대로 무당파나 소림사로 찾아갈까?”

“글쎄, 이제 비무는 그만하고 슬슬 개파(開派)를 해야 할 시점 아닌가?”

“이 사람아, 사방에 적들뿐인데 무슨 문파를 열겠나? 개파는 이미 포기했다고 봐야지.”

안휘성에서 고독객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고독객 독고랑은 그러한 논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저벅, 저벅.

비무를 마친 고독객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길을 열었다.

지금 누가 감히 고독객의 길을 막아서랴?

고독객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사람들 틈에서 머뭇거리며 고독객에게 말을 걸었다.

“대, 대협.”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중년의 사내가 포권을 하며 깊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어정쩡한 자세에 사람들은 일제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무언가 자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도전자라든가 말이다.

탁.

고독객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가 닿았다.

“대협의 승리를 추,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고독객은 말이 없었다.

그 차가운 시선에 사내는 급히 품을 뒤적였다.

“저는 표국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 이걸 대협께 전해 드려야겠기에…….”

사내는 품속에서 곱게 싼 두터운 서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독객은 아무런 말 없이 그 서찰을 받았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서찰을 전한 사내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기다리게.”

고독객의 차가운 목소리에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던 사내의 몸이 굳어 버렸다.

찌익.

애초부터 주변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던 고독객은 그 자리에서 서찰을 뜯었다.

그리고 두툼한 몇 장의 편지를 꺼내 들고 펼쳐 읽기 시작했다.

“뭐야, 표국 심부름꾼이었군.”

“쳇, 난 또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려나 했더니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국 심부름꾼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몇 사람이 서찰의 내용에 관심을 가졌지만 감히 고독객의 어깨 너머로 편지를 훔쳐볼 만한 담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정작 안절부절못하게 된 사람은 서찰을 전한 표국 심부름꾼이었다.

‘제, 젠장…….’

애초에 고독객에게 가는 서찰이라는 것 자체가 골칫덩어리였다.

고독객 독고랑은 거처조차 일정하지 않은, 홀로 떠도는 늑대와 같은 무인이다.

그나마 비무를 벌이는 장소만은 언제나 잘 알려져 서찰을 전하기엔 어려움이 없다지만, 결국 비무 후에 서찰을 전해야 한다는 뜻 아닌가?

비무의 열기가 식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게다가 고독객의 표정이 영 마음에 걸린다.

‘방금 이겼다면서 표정이 왜 저래?’

고독객은 비무의 승자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사뭇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찰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사뭇 흉흉하기까지 해서 심부름꾼의 불안은 더더욱 커져갔다.

‘이, 이러다 오늘 세상 하직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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