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일상(日常)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박 환관에게 답했다.
“아니, 별것은 아닐세. 그저 검도 들지 않고 검을 수련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
“아하! 그 이상한 춤 같은 것이라는 게 바로 검을 들지 않고 검을 수련하시는 거였군요.”
운현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지만 박 환관은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 그것도 소문이 났나?”
“후훗, 운 학사님이야 본래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으니 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딴에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해 주는 말이었지만 운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이런저런? 그게 대체……, 에휴.”
그 이런저런 소문이란 게 뭔지 물어보려다 운현은 포기했다.
대체 어떤 소문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데다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다.
자신의 평판이란 게 어차피 위엄이나 고고함 같은 거하곤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어진 것 같으니 박 환관 말대로 신경 안 쓰는 게 속 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나셨다는 건?”
“아, 그게…….”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온 박 환관의 물음에 운현은 다시 쑥스러운 표정이 된다.
“검식(劍式)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해서 말일세.”
“호오, 검식을 말입니까요?”
박 환관은 흥미를 보이며 눈을 빛냈다.
설명을 더 듣고 싶어 하는 박 환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슬며시 외면하며 운현은 말을 흐렸다.
“남에게 말할 만한 건 못 되네. 뭐랄까, 그저 어린아이도 휘두를 수 있을 만한 그런 단순한 걸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서 말일세.”
박 환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껏 만든다는 게 어린아이도 휘두를 수 있을 만한 단순한 검식이라…….’
그런 박 환관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운현은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천하의 많은 검법들이 결국은 단순한 움직임에서 시작하는 것 아닌가? 천하의 수많은 서법들이 결국 여덟 가지 운필법(運筆法)에서 비롯하듯이 말일세. 그래서…….”
운현은 말을 흐렸다.
그러나 박 환관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과연.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것입니까? 기회가 닿는다면 저도 꼭 한번 보고 싶군요오.”
“그,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닐세.”
운현은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그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박 환관은 연신 싱글거렸다.
그러나 오래 끌지는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박 환관이 일어서자 운현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또 보세.”
“니예, 학사님께서도 보중하시와요.”
깊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 박 환관은 종종걸음으로 문연각 잡서 구역을 나왔다.
문연각 입구 계단을 내려오며 그는 손을 품에 넣어 운현에게서 받은 서찰을 만지작거렸다.
“자, 이건 또 누구한테 맡길까나…….”
서찰을 부탁할 사람은 많다.
황궁과 연이 닿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널렸으니 말이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박 환관은 운현의 서찰을 품은 채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
스윽, 슥.
촛불 아래 운현의 붓이 이리저리 질주했다.
붓끝에서 피어오르는 묵향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고운 백지는 날아갈 듯한 글씨로 물들고 있었다.
바스락.
가끔씩 종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려날 뿐, 진지하게 눈을 빛내는 운현의 얼굴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탁.
마지막 획을 내리긋고 나서 운현은 붓을 내려놓았다.
“후우.”
긴 숨을 한번 내어 쉰 운현은 검은 글자들이 용틀임하고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백지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그곳에는 오늘 만난 이야기꾼이 말해 준 비무 내용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로써 또 한 편의 보고서가 완성된 것이다.
“후우우.”
또 한 번의 긴 한숨은 조금 전과 사뭇 의미가 달랐다.
‘문장 하나도 가벼이 적어 내린 것 없건만…….’
그러나 이 보고서가 빛을 보는 날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서가 한구석에 박혀 있다가 어느 날 쓰레기처럼 태워지거나 버려지는 것이 아마도 이 보고서의 정해진 운명이리라.
‘차라리 이 독고랑이라는 사람이 이 보고서를 본다면…….’
누구나 자신의 일에는 관심을 보이는 법이다.
이 보고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독고랑이라면 이 장편의 보고서도 대단히 진지하게 읽어 줄 것이다.
아마도 열의까지 가득 담아서 말이다.
‘후후.’
보고서를 내려다보던 운현은 자연스럽게 독고랑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독고랑이라…….’
안휘성을 휘젓고 있다는 이 독고랑이라는 사내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이름난 문파라면 정파나 사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 비무를 요청했다.
대부분의 문파는 당연히 비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독고랑은 과격한 방법으로 상대의 비무를 이끌어 냈다.
그가 언제나 이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의 무례에 분노한 상대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검술은 독고랑이라는 이름을 안휘성에서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다음 행적이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지.’
그 명성에 끌려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독고랑은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도움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새 붙어 버린 고독객이라는 별호처럼, 그는 홀로 떠도는 낭인 같은 사람이었다.
‘고독한 검객, 독고랑.’
독고랑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비무를 벌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는 오직 검만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운현도 그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의 행적을 따지기 이전에 그의 검로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느새 운현의 머릿속에서 고독객 독고랑의 검로가 그림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의 검을 종잡지 못한다고 했던가?’
독고랑의 검로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적만큼이나 그의 검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단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독고랑은 무엇을 찾아 비무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의 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에게 고독객 독고랑은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운현은, 어쩐지 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검에 답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검의 길이란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거듭되는 비무 속에 변화해 가는 그 검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운현은 알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른다는 고독객의 마음조차도 운현에게는 보이는 듯했다.
그것은 바로 고독객 독고랑의 검 자체가 가르쳐 주는 수수께끼의 해답 같은 것이었다.
‘그가 아직 비무를 계속하는 것은 자신이 만족할 만한 답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겠지.’
운현의 얼굴이 어느새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 빛나고, 가슴속엔 문장들이 이리저리 춤추기 시작한다.
‘흐음.’
운현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새로운 검식과 연관해서 고독객 독고랑이라는 사내의 검이 던진 질문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에게 답해 주고 싶은 가슴의 말들은 어느새 유려한 문장이 되어 하나둘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으음.’
운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식으로 써서 보낸 서찰이 벌써 여러 통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운현은 일말의 자책을 느꼈다.
이름난 고수에게 자신을 감추고 서찰을 보내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일이다.
학문하는 선비로서 떳떳치 못한 일인데다 학사로서 할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변명거리는 충분했다.
‘서찰을 보낼 것인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써 놓기라도 하자.’
유혹은 양심의 가책을 쉽게 우회했다.
이곳 자금성 한구석에서 썩어 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반발도 가세해서, 운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붓을 들었다.
슥.
이런 식으로 써 놓은 서찰 중에 보내지 않고 그냥 놔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잊어버렸다.
지금 운현의 머릿속에는 고독객 독고랑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이 온통 물결치고 있었다.
사락, 사락.
운현의 붓이 어느새 묵향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주저함은 없었다.
독고랑에게 해 주고 싶은 자신의 말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 서찰에 쓰일 검로는, 고독객 독고랑의 검에 대한 운현 나름대로의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사아악.
붓이 춤추고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가 날아갈 듯한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몰입된 운현은 상기된 얼굴로 붓을 놀렸다.
그렇게 자금성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따랑.
작은 공터에 잔잔한 풍경(風磬)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공터 한가운데 운현은 투박한 목검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자금성의 다른 화려한 곳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한 자그마한 공터였지만, 일충현 교두에 대한 추억과 함께 운현에게는 그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흐음.”
운현은 목검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무언가 신경을 거슬리는 듯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느낌이 조금 이상한데…….’
그날 이후 운현은 목검을 쥐지 않고 수련을 해 왔다.
그 덕분에 이상한 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그래도 일충현 교두가 당부한 일이니 운현으로서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다시 목검을 쥐게 된 것은 자신의 새로운 검식을 시험해 보려는 것과 고독객 독고랑에게 보낼 서찰에 쓴 검로를 시전해 보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목검의 감촉이 조금 낯설다는 것이다.
“거참.”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으로 검을 쥐었을 때는 항상 이 목검의 감촉을 떠올리고는 했는데, 막상 다시 목검을 쥐어 보니 어느새 달라진 것이다.
오히려 실제로 목검을 쥔 지금이 더 어색할 정도다.
‘이것도 수련의 당연한 결과인가?’
궁금하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다.
게다가 이 미묘한 감촉의 차이가 운현에게는 꽤나 신경에 거슬렸다.
이리저리 손을 바꿔 쥐어 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마음으로 검을 쥐던 그 감촉과 다르다.
운현은 영 마뜩찮은 듯 목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옳지!”
한동안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운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어차피 있지도 않은 것이니…….’
마음으로 검을 쥔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검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쥐고 있어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마음의 검인데, 빈손에 쥐나 목검에 겹쳐 쥐나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슥.
운현은 목검을 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분히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마음으로 검을 쥐었다.
목검을 쥐고 있던 손 위에 천천히 마음의 검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우웅.
‘그래.’
운현은 순간 쥐고 있던 목검의 감촉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확인했다.
‘바로 이거다.’
자신도 모르게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실제 목검이야 달라진 것이 있으랴마는 손을 통해 전달되는 감각이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손에 쥔 것보다 더 분명하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뚜렷한 마음의 검.
그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운현의 검이었다.
우우웅.
천천히 눈을 뜨고 보니 목검에 낯선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마음의 검을 수련하기 전까지 그의 목검에 서렸던 기운과 흡사해 보였지만 더 분명하고 또렷했다.
‘형님…….’
이 놀라운 변화는 아마도 일충현 교두의 덕이리라.
그가 남겨 준 내력이, 그 뜨거운 정(情)이 아직도 운현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사락.
갑자기 그리움이 솟아오르며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가슴께를 만졌다.
옷 아래 있는 작은 반지의 감촉을 확인하는 운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형, 일충현 교두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당했다.
그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은 절대 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도 단지 힘이나 권세를 가진 강함이 아니라 당당하게 삶을 대하는 진실로 강한 인간, 곧 군자(君子)이자 대장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윽.
운현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푸른 하늘이 운현의 검 끝에 아스라이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