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비무 이야기나 해 보시오
심 총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의뢰받은 표국이 그렇게 기억한다는데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모용미는 생각에 잠겼다.
‘상인이라니, 혹시 기세를 안으로 갈무리한 내가 고수일까?’
“허어, 하북성이라…….”
모용미의 상념은 탄식하듯 새어 나온 모용단천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하남성과 하북성. 그렇게나 가까운 곳이었는데도…….”
하남성과 하북성이 비록 붙어 있기는 하나 생각처럼 가까운 것은 아니다.
대륙은 넓고 한 성(省)이라도 어지간한 나라에 필적하니, 아무리 인접한 성이라 해도 옆 마을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단천이 그리 말한 것은 그의 아쉬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말해 주는 것이리라.
“반드시 하북성에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지나는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북성에서 모용세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의 단서가 끊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조사를 위해 파견한 제자들은 아직 북경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심 총관의 말에 모용단천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조금 더 힘써 보라고 전하게.”
심 총관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가주의 지시를 받들었다.
사실 더 이상의 조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예전 같으면 미련 없이 걷어버렸으리라.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모용단천의 심정이었다.
“흐음.”
모용단천은 아직도 아쉬운 듯 서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것은 모용미에겐 아주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모습이었다.
하남성의 패자, 모용단천은 모용미에겐 자상한 할아버지이자 흔들리지 않는 절대자였다.
심지어 모용단천이 비무에서 패배하고 만휴정으로 칩거했던 때에도 모용미의 확신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모용단천은 화려하게 재기했다.
모용미가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기뻐한 것도, 그리고 할아버지 모용단천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더더욱 굳어진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그 모용단천이, 창룡검주라는 신비인과 연락이 닿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토록 아쉬워하고 있다.
심지어 은연중에 지극한 공경의 태도까지 보이고 있지 않은가?
‘천외비처 창룡검주…….’
모용미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문제의 서찰은 모용미도 이미 읽어 보았다.
그녀는 모용단천 외에 유일하게 그 서찰을 보도록 허락받은 사람이었다.
과연 서찰의 내용은 참으로 대단했다.
이리도 깊은 통찰을 어찌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하게 표현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모용단천에게는 기연에 가까웠던 그 내용이, 모용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는 못했다.
대단하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을 수 있었지만 새로운 경지에 올라서거나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탁탁탁.
다급한 발소리가 멈추고 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가주님.”
모용단천이 눈짓하자 심 총관은 지체 없이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모용단천과 모용미는 말없이 심 총관을 기다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모용미의 눈빛에선 긴장이 흘렀지만 모용단천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탁.
심 총관이 다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은 얼굴로 심 총관이 말했다.
“철가장을 비롯한 다른 문파 사람들이 지금 모용세가 앞에 모여 있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모용미는 놀란 표정으로 모용단천을 쳐다보았다.
“가주님, 이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모용단천에게 말을 꺼내던 모용미는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모용단천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 것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붕(鵬)이 날갯짓을 시작했는데 어찌 모래먼지가 일지 않겠느냐?”
탁
모용단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문을 나섰다.
‘모래먼지라…….’
뒤에 남은 모용미는 모용단천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문득 그녀의 입가에도 짧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
“그래서, 어찌 되었소? 관일검이 재비무에서 이겼소?”
눈을 빛내며 묻는 운현의 목소리에 이야기꾼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히 관일검 모용단천이 보란 듯이 승리했죠. 일도양단 철무웅은 자신의 애도 흑살까지 놓친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복수전 아니겠습니까? 녹야평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환호 속에…….”
“그건 됐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장황하게 늘어나려는 이야기꾼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운현은 이야기꾼에게 물었다.
“그 뭐냐……, 관일검 모용단천이 마지막으로 썼다는 그 한 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오?”
말이 중간에서 끊긴 이야기꾼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본 게 아니니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제대로 본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하더군요. 물론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관일검의 동작을 잡아내었겠지만, 저 같은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어디…….”
그러나 이미 운현은 이야기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일말의 아쉬움을 담고는 있었지만 운현의 표정은 오랜만에 활짝 펴지고 있었다.
“과연 관일검이 이겼구려.”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
운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일말의 아쉬움이 있는 것은 자신의 서찰에 대한 모용가주의 반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관일검 모용단천이 이겼다지만 딱히 자신의 서찰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도 서찰까지 보낸 상대가 이겼다니,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반갑게 느껴지는 운현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하남성의 패주 자리를 빼앗긴 철가장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지요.”
이야기꾼은 짐짓 목소리를 낮춰가며 흥미진진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나 운현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됐소. 어차피 당신이 직접 본 것도 아니라 했잖소?”
“아니, 그래도 이게 보통 일입니까? 지금 철가장의 역습이 막 시작되려는 판인데 여기에 과연 모용세가가 어떻게 대처했을지…….”
이야기꾼이 흥분한 어조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운현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당신이 현장에 있지 않아서 모용가주의 마지막 한 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지 않소? 그 얘긴 이제 됐으니 당신이 직접 본 비무에 대해서나 말해 보시오.”
“카아!”
이야기꾼이 아쉽다는 듯 탄식하며 고개를 젓는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놓치시다니, 외당 당주 모용미의 당당하고도 아름다운 활약과 의기 넘치는 모용세가 제자들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으신다면 어디 가서도…….”
침을 튀겨 가며 입담을 자랑하던 이야기꾼은 무언가 싸늘한 분위기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운현은 이야기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됐소.”
짧은 말이었지만 이야기꾼은 목을 어깨 사이로 감췄다.
보아하니 더 이상 너스레를 떨 것 같지는 않아서, 운현은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놓았던 붓을 들었다.
“그럼 이제 안휘성에서 당신이 직접 목격한 비무 이야기나 해 보시오.”
이야기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이 학사야 어디 무서운 구석이 있을까마는, 좌우에 버티고 서서 호랑이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는 금의위의 기세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에, 그러니까 먼저 제가 직접 본 비무라면 당연히 안휘성에 혜성같이 나타난 고수 독고랑에 대한 이야기를…….”
슥슥.
높다란 전각 안에 울려 퍼지는 이야기꾼의 낭랑한 목소리 속에, 운현의 붓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
“아, 박 환관.”
문연각으로 돌아오던 운현은 입구에서 눈에 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막 문연각으로 막 들어가려는 환관 박규였다.
“운 학사님.”
박 환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운현도 정중히 고개를 숙여 박 환관의 인사에 답했다.
예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박 환관에게 몇 번 말했는데도 계속 이러니 운현이 예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전 일은 끝나셨는지요?”
박 환관이 묻자 운현은 문연각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강 끝냈네. 아직은 며칠 더 걸리겠지만…….”
대답하는 운현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이제는 남는 게 시간이니 상관있겠나?”
약간은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운현의 표정은 평온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문연각 잡서 구역에 들어섰고, 운현은 가지고 온 서책과 필기구를 정리했다.
“이번 이야기꾼 소환은 꽤 오랜만이지요?”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인지 몰라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네.”
“그거 다행이군요.”
박 환관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운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박 환관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부탁할 서찰이 하나 더 있네.”
운현은 서탁의 책들 사이를 뒤져 서찰 하나를 찾아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두툼한 데다 정성스럽게 수실로 매듭을 한 서찰이다.
박 환관은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운현의 서찰을 받았다.
“헤에, 지난번 서찰을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연모의 정이 아주 뜨거우십니다, 후훗.”
“이 사람, 실없는 농담은 그만두게.”
운현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박 환관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 참, 혹시 은자가 더 필요하지는 않나? 보낸 서찰이 제법 여럿 될 터인데…….”
박 환관이 서찰을 품에 넣는 것을 보며 운현이 물었지만 박 환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넉넉합니다. 어차피 오가는 사람들 편에 부탁하는 것이니 은자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훗.”
“그런가? 어쨌든 고맙네.”
운현의 말에 박 환관이 다시 고개를 젓는다.
“고맙기는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박 환관이 슬쩍 운현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금의위 훈련장에는 이제 안 가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어인 일이신지요?”
“아, 그거…….”
운현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총 책임자로 새로 온 금군교두가…….”
―뭐? 학사? 학사면 학사답게 서책이나 파고 있을 것이지 금의위 훈련장엔 무슨…….
운현의 귓가에 그 걸쭉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 새로운 금군교두가, 소위 말하는 연줄을 타고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훈련장에 있던 문관 차림의 운현을 보고 당연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창룡전? 하긴 이렇게 어정쩡하니 그 따위 학사밖에 못 되는 거겠지.
운현의 차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례했다. 그리고 단호했다.
―당장 나가게. 여긴 놀이터가 아닐세.
그것으로 끝이었다.
운현은 더 이상 금의위 훈련장에 찾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있는 게 금의위들의 훈련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모양이네.”
“저런!”
박 환관이 혀를 찼다. 그러나 운현은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덕분에 나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네.”
어쩌면 그 금군교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다.
무공을 수련한다고 무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 새삼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창룡전 학사로서 황태자 전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애초부터 가망 없는 일이었던 데다, 일부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난 것도 확실하니 관리로서도 내일이 없다.
“그럼 이제 무공 수련도 그만두시는 것인가요?”
박 환관이 넌지시 묻는다.
운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아, 그건……. 실은 좀 다른 걸 하느라고…….”
“다른 거라니요?”
박 환관이 반짝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