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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5화 (35/530)
  • 035화. 계략

    철무웅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단천의 검법이 바뀐 것도 아니다. 내력이 놀랄 만큼 증진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르다.

    뭐라고 꼭 집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의 검은 뭔가 달라졌다.

    게다가 이전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머리 허연 노인네가 젊은 자신보다 더 파격적인 공격으로 자신을 위협했던 것이다.

    그 미묘한 차이를 자신으로선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모용단천은 분명히 자신보다 고수다.

    차마 다시 비무를 청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야!”

    갑자기 철무웅이 소리쳤다.

    장경규가 깜짝 놀라는데 철무웅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진짜 방법이 없냐?”

    장경규가 어색하게 웃었다. 철무웅은 눈을 부라렸다.

    “진짜로 없어?”

    일도양단 철무웅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랫사람, 아니 정확히는 모사 장경규에게 시키는 것이다.

    골치 아픈 문제는 장경규에게 떠넘기고, 복잡한 문제 역시 장경규에게 맡겼다.

    안 되면 엄청나게 닦달을 하며 괴롭히는데, 그러면 장경규는 생각을 짜내 어찌어찌 대책을 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경규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철무웅의 눈이 빛났다.

    “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장경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모용단천의 무공이 갑자기 강해진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문파들이 적지 않습니다.”

    단순한 의구심은 물론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질시와 더불어 탐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모용세가의 위세가 최고조라지만, 하남성의 문파들이 뜻을 모으면 어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철무웅은 잠시 생각했다.

    “네 말은 알겠는데, 그게 되겠냐?”

    “되게 해야지요. 우선 소문을 흘리는 겁니다.”

    “소문? 무슨 소문?”

    장경규가 씨익 웃었다.

    “모용세가가 기연을 얻었다고 말입니다.”

    철무웅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문파들이 뜻을 모은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각자의 생각과 이해득실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욕을 자극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흐음.”

    철무웅이 몸을 의자에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그 반응에 장경규는 자신감이 붙었다.

    “모용단천의 무공에 대한 궁금증은 이미 팽배할 대로 팽배합니다. 그러니 모용세가가 기연을 만나 절세비급을 얻었다고 하면 다들 욕심이 동할 테죠. 그때 넌지시 제의를 하는 겁니다.”

    모사 장경규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걸렸다.

    “이웃사촌 간에 좋은 건 같이 나눠 먹어야 되지 않느냐, 그러니 같이 뜻을 모아 모용세가에 압박을 가하자. 제아무리 모용세가라도 우리가 뭉친다면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뭐라도 토해 내지 않겠느냐? 하고 말이죠.”

    철무웅이 인상을 썼다.

    “나눠 먹자고?”

    장경규는 급히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우리는 비장의 패를 내보이는 겁니다.”

    “무슨 패?”

    “모용세가에 붙는 겁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철무웅이 놀란 표정을 했다.

    장경규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모용세가의 편을 들면 중소 무가들이 암만 모 여봤자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모용세가도 여러 문파에 토해 내느니 우리에게만 넘겨주는 편이 이득이고요. 물론 약조를 어겼다고 다른 문파에서 뭐라고 하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명분 없는 강도질이었으니 대놓고 문제를 제기하지는 못할 겁니다. 철가장과 모용세가가 힘을 합쳤는데 다른 문파들 따위가 감히 상대나 되겠습니까?”

    청산유수로 이어 가는 장경규의 말에 철무웅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장경규는 눈을 반짝였다.

    “가장 중요한 점은 모용단천을 강하게 한 바로 그 무언가를 장주님께서도 가지실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장주님의 무공 또한 큰 진전을 보게 될 것이고, 다음 수순은 당연히 철가장의 세력 확장이 될 것입니다. 다른 문파가 항의를 해요? 그럼 그걸 빌미로 잡아먹으면 그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이 자식…….”

    철무웅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말까지 더듬었다.

    장경규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잔머리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어쩐지 칭찬 같지 않은 말에 장경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철무웅은 이미 흥분하기 시작했다.

    “좋아! 아주 좋아.”

    “아, 그리고 모용세가의 기연은 반드시 비급일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영약은 나눠 먹지를 못하니까요. 뭐, 어차피 모용단천과 비무한 사람은 장주님뿐이니 다들 믿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로 문서 같은 서면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말로 한 약속이야 입 씻으면 그만이지만 서류로 증거가 남아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골치 아파집니다. 동맹에 끌어들일 다른 세력도 잘 계산해서 대신 욕먹을 문파와…….”

    장경규가 추가 사항들을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철무웅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모용세가의 기연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철무웅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어찌하든 기밀성과 신속성이 이 ‘무제한 정의 작전’의 핵심입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시고…….”

    “뭐라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철무웅의 귀에 이상한 단어가 걸렸다.

    말을 이어 나가던 장경규는 철무웅의 물음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이왕이면 작전명이 그럴듯한 게 좋지 않습니까? 맘에 안 드시면 바꿀까요? ‘충격과 공포 작전’이라든가…….”

    철무웅은 장경규를 쳐다보며 같잖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진실 되게 살아야 하는 법이야. 남의 걸 날로 먹자는 강도질에 정의는 무슨 얼어 죽을……. 어쨌든 그대로 실행해. 작전명인지 뭔지는 빼고. 알았어?”

    장경규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아 참.”

    철무웅의 말에 장경규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웃음이 사라지고 굳은 표정이 된 철무웅이 나직하게 말했다.

    “모용단천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혹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자기 것을 강제로 달라는데 순순히 내놓을 상대는 없다.

    상대가 관일검 모용단천이라면 더욱 그렇다.

    장경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철무웅이 말을 끝맺자 장경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장주의 앞에서 물러 나왔다.

    방을 나가는 그를 바라보며 철무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식. 책깨나 읽었다는 놈들은 다 저렇게 음흉하다니까? 겉 다르고 속 다른 놈들 같으니…….’

    탁.

    문을 닫고 나서는 장경규도 역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진실 되게 살아? 조금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나쁜 짓은 제일 먼저 하는 주제에……. 너나 잘해, 인마.’

    장경규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다 문득 생각해 보니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

    번듯한 관리를 꿈꾸던 서생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 일도양단 철무웅 밑에서 일하는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장경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에이, 내가 과거에 세 번 연속으로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쨌든 또 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진짜 큰일은 지금부터라 해야 할 것이다.

    철가장의 내전을 나서는 장경규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

    하남성의 패자로 자리매김한 모용세가의 밤은 분주했다.

    철가장을 꺾은 이후 대외활동이 활발해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모용세가는 밤늦게까지 북적였다.

    그러나 진실로 모용세가의 밤을 밝히고 있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연회장이 아니라 내전 깊숙이 자리한 회의실이었다.

    “지난 한 달간 각 지부들의 현황 보고서입니다.”

    모용미가 얇은 서책을 모용단천에게 올리며 말했다.

    심 총관도 서책 서너 권을 공손하게 가주 모용단천에게 올렸다.

    “세가 내 물자의 이동과 입출을 기록한 보고서입니다.”

    모용단천이 서책을 살피는 사이 모용미가 입을 열었다.

    “전체적인 상황은 대강 보고드린 바와 같습니다. 다만 여남현 지부에서 지출이 많아 심 총관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모용단천이 가주의 업무를 재개하고 나서도 모용미는 여전히 모용세가의 대외적인 일을 맡아야 했다.

    본인은 사양하려 했지만 모용단천은 그녀가 보여 준 능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모용미는 외당 당주라는 직함을 받고 모용세가의 대외적인 활동을 총괄하게 되었다.

    모용미는 가주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여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펴 나갔고, 동시에 시의적절한 대처로 마찰을 최소화하는 데 힘썼다.

    가주 모용단천의 강한 의지와 외당 당주 모용미의 세심한 계획 덕분에 모용세가의 세력은 날로 커져 가고 있었다.

    “흠.”

    가주 모용단천은 보고서를 덮었다.

    “여남현 지부에 대한 외당 당주의 의견은 어떠냐?”

    모용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비록 지출이 많기는 하나 일시적입니다. 여남현은 하남성 남부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요지이므로 오히려 지원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 총관의 생각은 어떤가?”

    심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현재 세가 전체의 입출 상황을 볼 때 여남현의 지출이 그리 우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출 증가세가 여섯 달을 넘긴다면 문제가 되리라 봅니다.”

    “외당 당주, 여남현 지부를 정상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잡고 있나?”

    “넉 달입니다.”

    모용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가주 모용단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외당 당주의 계획대로 실행하도록 하지. 그리고 삼대제자 중 몇 명을 더 여남현 지부에 지원하도록.”

    외당 당주 모용미와 심 총관이 고개를 숙이며 모용단천의 명령을 받들었다.

    모용미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지시하신 조사에 대한 보고입니다.”

    보고서를 훑어보던 모용단천의 움직임이 멈췄다.

    모용단천은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며 심 총관을 바라보았다.

    “심 총관님, 보고하시지요.”

    모용미의 말에 심 총관은 품에서 얇은 서류를 꺼내 공손히 모용단천에게 올렸다.

    바스락.

    모용미 역시 눈을 빛내며 그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심 총관이 보고할 내용은 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저 서류에, 가주가 지시한 은밀한 조사의 결과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모용세가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준, 이곳에 있는 세 사람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창룡검주’에 대해서 말이다.

    사락.

    모용단천의 눈이 빠르게 보고서를 훑었다.

    잠시 후,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역력한 실망의 눈빛이었다.

    심 총관이 송구한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서찰의 발신지가 하북성이라는 것까지는 확인되었습니다만, 의뢰인의 신상에 대해서는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심 총관의 말에 모용미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그럼에도 모용미 자신이나 모용단천이 실망하는 것은 그것에 건 기대가 작지 않은 까닭이었다.

    심 총관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서찰의 운송을 처음으로 의뢰받은 곳은 표국의 하북성 북경 지부였습니다. 담당자에 따르면 의뢰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며 이후 다시 들른 적도 없습니다. 의뢰비는 선불로 지불했고 서찰 위탁은 자주 있는 일이기에 표국에서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모용미가 심 총관에게 물었다.

    “의뢰자의 용모 같은 것은 알아낼 수 없었나요?”

    의뢰자가 신분을 밝히지 않았더라도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모용미의 질문에 심 총관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것도 물어보았으나 기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의뢰자의 분위기가…….”

    잠시 머뭇거리던 심 총관이 말했다.

    “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젊은 상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인요?”

    모용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창룡검주나 그와 관계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무인의 분위기가 풍겼으리라 짐작했던 탓이다.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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