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모용세가의 비상
콰과곽.
“받아라!”
철무웅의 도, 흑살이 모용단천의 허점을 노리고 사정없이 짓쳐 들었다.
카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도와 검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카가가가각.
모용단천의 청강검은 철무웅의 흑살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치잇.’
철무웅은 혀를 찼다. 그러나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휘릭.
자신의 도를 막고 있던 모용단천의 청강검이 어느새 뱀처럼 유연하게 자신의 팔을 향해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타하아!”
위기의 순간, 철무웅은 오히려 더욱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다.
자칫 양패구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만 모용단천이 원하지 않았다.
캉.
검과 도가 튕겨 나고, 두 사람의 공방은 짧은 휴식을 맞이했다.
다시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젠장!’
철무웅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억지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분명히 주도권은 철무웅 자신이 쥐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금씩이나마 실리를 챙기는 쪽은 상대편이다.
게다가 늙은 모용단천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건만 정작 자신은 숨이 가빠오고 있으니 철무웅의 속이 뒤틀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으드득.
철무웅은 이를 악물었다.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이쯤에서 수세(守勢)로 전환하여 기회를 엿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철무웅이 그런 식으로 싸움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일도양단이라 불리지도 않았으리라.
그때였다.
사락.
모용단천의 자세가 변했다.
그는 몸 가까이 두고 있던 청강검을 천천히 내밀어 똑바로 철무웅을 향했다.
드디어 모용단천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선 것이다.
‘옳지.’
철무웅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자신의 풀리지 않는 난제 앞에서 상대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철무웅은 숨통이 확 뚫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큰 짐을 벗은 듯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황했다.
‘뭐야. 내가…….’
자신이 받고 있던 심리적 압박이 생각보다 더 컸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타앗!”
모용단천의 강한 기합 소리가 녹야평을 울렸다.
동시에 그의 청강검이 철무웅의 미간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그 날카로운 공격을 날려 버릴 듯 철무웅의 입에서도 엄청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아!”
일도양단 철무웅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콰앙.
두 사람의 내력을 실은 흑살과 청강검이 격돌하자 마치 폭음 같은 커다란 소리가 녹야평에 모인 사람들의 귀를 울렸다.
관일검 모용단천은 자신의 목숨조차 도외시한 듯 치명적인 공격으로 일관했고, 철무웅 역시 엄청난 기세로 흑살을 휘둘러 모용단천의 청강검에 맞부딪혀 갔다.
두 사람의 도와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귀를 찢는 큰 소리가 녹야평에 울려 퍼졌다.
쾅, 콰앙.
철무웅은 그야말로 마음껏 흑살을 휘둘러 나갔다.
이제껏 자신의 공격에 소극적인 수비로 일관하던 모용단천이 왜 이런 공방전에 나섰는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사실 이런 난타전이야 말로 일도양단 철무웅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 바로 이래야지!’
철무웅은 말 그대로 자신의 전력을 쏟아 내고 있었다.
서로의 도와 검에 깃든 기세에 두 사람의 옷자락이 마치 폭풍에 휘말린 듯 펄럭거릴 정도였다.
그 호쾌함에 녹야평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선 절로 찬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공방이 길게 갈 수는 없었다.
콰앙, 쾅.
철무웅의 표정은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만은 알 수 있었다.
흑살과 청강이 격돌할 때마다 자신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흑살을 움켜쥔 손이 저릿저릿 울린다.
상대의 검에 실린 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철무웅은 당황했다.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공방이라면 평생 밀린 적이 없었는데, 늙은이라고 비웃었던 모용단천이 자신을 조금씩 압도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자신의 마음속에서 ‘패배’라는 두 글자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음을 철무웅은 부인할 수 없었다.
‘제길, 이놈의 늙은이…….’
철무웅은 모용단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모용단천의 얼굴에는 흥분이나 기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담담하기까지 한 모용단천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철무웅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어떤 생각 하나가 철무웅의 뇌리를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서, 설마…….’
그건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든 순간, 수많은 의혹들이 순식간에 해소되기 시작했다.
왜 관일검 모용단천이 그리도 담담하게 비무에 임했으며, 이때까지 소극적인 수비로 일관해 왔는가?
그리고 왜 이제야 적극적인 공세로, 그것도 철무웅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이런 난타전으로 나섰는가?
으득.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눈앞에 있는 모용단천의 담담한 눈빛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모용단천에게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아아!”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솟아 올라왔다.
마치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철무웅은 흑살을 휘둘렀다.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던 패배 따위, 그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부우웅.
일도양단 철무웅의 흑살이 섬뜩한 소리를 내었다.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설령 눈앞의 모용단천이라 해도 단숨에 박살을 내 버릴 듯한 기세였다.
지금 흑살에 담긴 것은 바로 일도양단 철무웅의 자존심이었다.
콰과과각.
철무웅의 엄청난 공격에 사람들이 한순간 숨을 멈췄다.
그의 도에 담긴 기세는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쉭.
순간 모용단천의 청강검이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철무웅이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지극히 낯선 검로였다.
카아앙.
한 줄기 청아한 소리가 녹야평을 뚫고 지나갔다.
녹야평엔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고, 모용단천도 철무웅도 움직임을 멈췄다.
서로 엇갈린 채 마치 석상인 양 서 있는 두 사람.
관일검 모용단천의 손엔 청강검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지만, 일도양단 철무웅의 손에는 더 이상 흑살이 없었다.
퍽.
잠시 후 둔탁한 소리가 지면에서 울려 퍼졌다.
녹야평의 대지에 박힌 커다란 도 한 자루는 바로 철무웅의 흑살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정적이 깨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와아아아!”
모용세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비무를 지켜보던 백원 대사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용단천 대협의 승리요!”
순식간에 녹야평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철가장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일었지만,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사실 마지막 공방이 어떻게 되었는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나 결과는 분명했다.
사람들은 유서 깊은 명가, 모용세가의 승리에 환호했다.
“와아아아!”
요란한 함성 속에서 관일검 모용단천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청강검을 갈무리했다.
철무웅은 아직도 패배를 실감하지 못하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용단천은 철무웅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비무였소.”
답례를 기대하지는 않은 듯 모용단천은 그대로 돌아섰다.
“잠깐.”
갈라진 철무웅의 목소리에 모용단천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철무웅은 일그러진 얼굴로 모용단천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마지막 초식. 그건, 무엇이었소?”
자신의 흑살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모용단천의 청강검이 그려 낸 검로.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검로였지만 동시에 너무나 익숙한 모용세가의 검이기도 했다.
바로 그 일검이 평생 놓쳐 본 적 없는 흑살을 그의 손에서 튕겨 나가게 했다.
자신의 손목이라도 자르지 않는 한 절대 놓게 할 수 없으리라 자부하던 그의 흑살을.
“후후.”
모용단천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부족한 본가의 검로 중 하나일 뿐이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얼굴에 피어오르는 자부심을 숨길 수는 없었다.
철무웅은 모용단천의 얼굴이 살짝 상기된 이유가 비무의 승리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모용단천을 흥분케 한 것은 바로 방금 전 그 초식의 성공이리라.
“허나 그 검로가 세상에 나온 것은, 아마도 이번이 두 번째일 거요.”
첫 번째는 아닐 것이다.
창룡검주라면, 얼굴도 모르는 그라면 이미 예전에 이 검로를 펼쳐 내었을 테니까.
사락.
그 말을 끝으로 관일검 모용단천은 몸을 돌렸다.
털썩.
철무웅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애초부터 모용단천에게 철무웅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관일검 모용단천은 처음부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머리 위, 저 높은 곳에서 말이다.
“와아아아아!”
“모용세가! 모용세가!”
녹야평에 가득한 사람들의 환성이 관일검 모용단천과 모용세가를 향해 터져 나왔다.
녹야평을 뒤흔드는 환호성 속에 철가장 장주 일도양단 철무웅은 그렇게 망연히 주저앉아 있었다.
***
신흥 철가장의 위세는 삽시간에 위축되기 시작했다.
비록 하루아침에 철가장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모용세가가 다시 힘을 되찾은 이상 하남성의 패자로 군림하는 것은 이제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아니, 이대로라면 철가장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요즘 모용세가는 날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철가장의 모사, 장경규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과거 은연자중 하던 것과 다르게 아주 노골적입니다. 정말이지 그 기세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려하는 세가들도 있으나 마땅한 방법도 없고……”
철가장의 기세가 꺾이고 모용세가가 잘나가고 있으니 철가장 장주, 철무웅의 심사가 편할 리 없다.
“뭐? 방법이 없어?”
철무웅은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아! 그럼 대체 뭘 보고하러 온 거야! 지금 내 앞에서 모용세가 잘나간다고 염장 지르는 거야? 지금 네가 내 성질 시험해 보는 거냐?”
상황이 단박에 험악해지자 장경규의 목이 쑥 들어갔다.
이러다 무언가 날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날아오는 것은 없었다.
‘젠장, 자기가 보고하라고 해 놓고는…….’
장경규가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철무웅이 짜증 섞인 소리로 말했다.
“에이, 시펄. 노인네가 갑자기 회춘을 했나…….”
“어디서 그 귀하다는 고려 산삼이라도 구한 건 아닐까요?”
장경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회춘엔 그게 최고라던데. 아니면 몇 백 년 묵은 뱀을 푹 고아서…….”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씨불이는 거냐?”
철무웅이 눈을 부라리자 장경규는 다시 목을 쑥 집어넣었다.
“어휴, 저걸 자를 수도 없고…….”
철무웅이 한탄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대체 이유가 뭐야?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