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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3화 (33/530)

033화. 녹야평의 비무

“이봐, 자네는 어떻게 보나?”

웅성거리는 군중 속에 있던 한 남자의 말에 옆에 섰던 사내가 혀를 찼다.

“어떻게 보고 말고 할 게 있나? 모용세가가 지겠지.”

그의 대답에 처음 질문했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전통의 모용세가인데, 다시 비무를 하자고 할 정도면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닐까?”

그러나 처음 대답한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분위기나 기세라는 게 있는 법일세. 지난 일 년간 모용세가에 어디 그런 게 느껴지던가? 손녀는 가까스로 가문을 추스르느라 정신이 없고, 대제자는 아예 술에 빠져 사는 데다가 가주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잖나? 그런 모용세가가 이제 와서 철가장을 꺾는다고?”

“하긴…….”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말대로였다.

“게다가 시간이 너무 짧아. 비무에 패하고 일 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큰 성취를 이룬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가주 모용단천이 젊은 사람도 아니고, 어디서 절세 비급이라도 익히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일세.”

“역시 마지막 발버둥이라는 건가…….”

사내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철가장이 하남성의 패자라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유서 깊은 모용세가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모용세가의 몰락에 미소를 짓는 사람도 존재했다.

바로 오늘 비무의 승자가 될 철가장 장주, 일도양단 철무웅이었다.

“크흐흐, 역시 사람들이 보는 눈은 있군.”

우락부락한 철무웅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철가장의 모사(謀士) 장경규로부터 비무장의 분위기를 전해 들은 탓이다.

그러나 정작 말을 전해 준 모사 장경규는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장주님, 표정 관리를…….”

“크흠.”

일도양단 철무웅은 헛기침 소리를 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회복했다.

“거참, 맘대로 웃지도 못하다니…….”

투덜거리는 철무웅에게 장경규는 고개를 조아리며 속삭였다.

“이제 철가장은 명실공히 하남성의 패자입니다. 장주님께서 모용세가에 뒤떨어지지 않는 의젓함을 보이셔야 패자다운 위신도 살고 사람들도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야 그렇지만……, 에잉.”

철무웅은 이런 격식이나 예절 같은 것이 영 마뜩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성격 때문에 전통 있는 모용세가가 더 눈에 거슬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무웅의 성격대로 했다면 오늘날의 철가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장경규가 있었기에, 가진 것은 무력밖에 없는 철무웅이 오늘의 위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니 모사 장경규의 말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었다.

“저쪽은 어때?”

철무웅은 힐끔 고갯짓을 하며 장경규에게 물었다.

저쪽이란 바로 오늘 비무의 상대인 모용세가 쪽이다.

“글쎄요? 제자들까지 일체 말이 없으니 도무지 분위기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클클클, 그게 바로 상갓집 분위기라는 것이다.”

철무웅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용세가 녀석들, 아마 한 발을 관짝에 들여놓은 기분일걸? 오늘이 지나면 전부 다 짐을 싸야 할 테니까 말이야. 클클클.”

“장주님, 표정 관리.”

모사 장경규의 조용한 한마디에 철무웅의 웃음소리는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럼 백원 대사께 비무의 시작을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남성은 소림사의 앞마당이다.

비무 당사자는 철가장과 모용세가지만 형식상 주최자는 어디까지나 소림사였고, 당연히 소림사의 고승이 전체의 비무를 주관해 나갔다.

장경규가 물러가고, 철무웅은 멀리 보이는 모용세가 쪽 진영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유서 깊은 명가의 저력인지 뭔지, 오늘 끝장을 내 주마.”

철무웅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그의 말대로 될 것 같았다.

지금은 말이다.

***

소림사의 백원 대사가 비무에 앞서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가장 장주, 일도양단 철무웅조차도 그랬다.

“저놈의 늙은이.”

철무웅은 거친 어조로 투덜거렸다.

지금 그의 심기를 긁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저편에 앉아있는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모용단천의 표정이었다.

긴장과 흥분의 기색이 역력한 자신과 달리 모용단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너무나 허허로워 어찌 보면 아예 승부를 포기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가문의 모든 것을 걸고 재비무를 자청했겠는가?

바로 그것이 마음에 걸려 일도양단 철무웅의 심사가 편치 못한 것이다.

“대체 뭐지?”

철무웅 역시 타고난 무인이다.

이성적인 판단 이전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상대에 대한 불안감이 계속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장주님.”

모사 장경규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느새 사방이 조용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신과 관일검 모용단천에게 향해 있었다.

철무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묵묵히 앉아 있던 모용단천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옷을 벗어 옆에 선 손녀 모용미에게 건네는 그 모습에 철무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면…….’

모용단천의 모습은 대단히 자연스러웠다.

그저 겉옷을 맡기는 것뿐이었지만 그 동작이 물 흐르듯 유려하기까지 하다.

이전 비무를 할 때의 경직된 모습과는 너무나 딴판이다.

‘……쉽지 않을지도.’

자신도 모르게 철무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귓가에 모사 장경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비무만 끝나면 이제 하남성에서 장주님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장경규는 이미 승리를 따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철무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호 무림에선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만일 모용단천이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거나, 혹은 절치부심 무공을 갈고닦는다는 소식이라도 들렸다면 철무웅은 결코 재비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가 은거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익히 알고 있기에 선뜻 재비무를 받아들인 것인데,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했다.

슥.

철무웅은 자신의 애도, 흑살(黑殺)에 손을 뻗었다.

손에 와 닿는 익숙한 도의 감촉을 느끼며 철무웅은 지긋이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후우.”

잡념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모사도, 계책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오로지 도 한 자루에 운명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순간들 속에서, 철무웅은 승리를 쟁취하며 오늘의 철가장을 일구어 온 것이다.

번쩍.

철무웅은 눈을 떴다.

“간다.”

짧고 굵은 한마디를 모사 장경규에게 남기고, 철무웅은 자신의 애도 흑살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이 천천히 비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철무웅은 짐짓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모용단천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두 사람의 귓가에 백원 대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모두 일파의 수장이시니 훌륭한 비무를 보여 주실 것으로 믿소. 또한 이것이 비무라는 것을 각별히 명심하여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당부드리오. 두 분의 비무는 소림에서도 기대하는 바가 크오.”

백원 대사는 두 사람에게 소림사의 존재를 환기시킨 후 자리로 되돌아갔다.

시작 선언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바로 이 두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들이니까.

“흐음, 그간 푹 쉬셨소? 듣자하니 통 밖에 나오질 않으셨다던데?”

은근한 불안이 철무웅의 입을 먼저 열게 했다.

그러나 관일검 모용단천은 자신의 애검, 청강(淸剛)을 맞잡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당황한 철무웅이 다급히 포권하는데 모용단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남성의 패주이신 귀하와 오늘 이렇게 비무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오.”

철무웅은 믿을 수가 없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전통있는 명문세가랍시고 자신을 늘 무시하던 모용세가였다.

그러나 지금 모용단천은 철무웅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있는데다가, 자기 입으로 철가장을 하남성의 패주라고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철무웅은 고개를 들었다.

관일검 모용단천의 표정엔 비웃음도, 조롱의 기색도 없었다.

자기비하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인사는 진심인 것이다.

철무웅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긴장했다.

‘……젠장.’

철무웅은 모용단천이 쉽지 않은 상대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세를 꺾이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철무웅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무슨 겸양의 말씀을. 나도 오늘은 모용세가의 저력을 꼭 한번 견식하고 싶소이다. 저번에는 영 기대에 못 미쳐서 말이오.”

짐짓 도발의 말을 흘렸지만 모용단천은 흔들리지 않았다.

‘쯧.’

철무웅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이 정도에 상대가 걸려들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말은 됐고, 시작합시다.”

철무웅이 말했다.

모용단천은 가만히 자신의 애검, 청강을 뽑았다.

스릉.

철무웅 역시 자신의 애도, 흑살을 빼 들었다.

곧고 날카로운 모용단천의 청강과 두텁고 휘어진 철무웅의 흑살.

두 사람은 형식적인 의미에서 서로의 무기를 세 번 가볍게 부딪혔다.

챙, 챙, 챙.

세 번의 짧은 금속성은 이것이 생사를 건 결투가 아니라 비무임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차이는 없었다.

비록 죽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서로의 가문과 문파의 운명이 이 비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저벅.

두 사람은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모용단천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한 그대로인데 반해, 철무웅의 커다란 눈동자는 날카로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철무웅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타하!”

카앙.

검과 도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모용단천은 가볍게 철무웅의 공세를 흘려 내었다.

물론 철무웅도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부웅.

철무웅의 도가 바람소리를 내며 모용단천의 허리를 파고 들어왔다.

모용단천의 청강검은 기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치잉.

두 사람의 무기가 엇갈리며 거북한 소리를 냈다.

탁.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벌렸다.

공방은 짧았다. 어차피 상대의 경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방금 전 한 번의 부딪힘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늙은이가 방구석에서 세월만 죽인 줄 알았더니…….’

철무웅은 모용단천을 노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검 끝이 더 날카로워졌군.’

과연 관일검 모용단천이다.

모르긴 몰라도 비장의 한 수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스륵.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쉽사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철무웅은 천천히 자신의 흑살을 들어 올렸다.

어쩌면 그건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길게 끌수록 불리한 쪽은 자신이었다.

“하아압!”

철무웅의 도가 바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챙, 챙, 채앵.

검과 도가 부딪히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에 땀을 쥔 채 두 사람의 비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철가장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했던 사람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비웃기라도 하듯 철무웅과 모용단천의 비무는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는 공방을 거듭했다.

“이봐, 어째 일도양단 철무웅이 밀리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모여 섰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말하자 옆 사람이 더듬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 그런가? 그래도 철무웅이 계속 공세를 이어 나가는 걸로 봐서는…….”

“쯧쯧, 공격만 하면 뭐하나?”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자 혀를 찬 남자가 들으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먹혀드는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사람들 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번져 나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비무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를 보이고 있는 쪽은 오히려 관일검 모용단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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