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기연(奇緣)
“심 총관님.”
만휴정을 나선지 얼마 가지 않아 모용미는 심 총관을 발견했다.
심 총관은 그녀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네, 큰 아가씨.”
모용미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인지 심 총관이 진지한 눈빛으로 모용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세가의 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출입을 삼가도록 하세요.”
심 총관으로서는 난데없는 말이련만, 노련한 그는 반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모용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또한 세가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러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세요. 필요하다면 당분간 모든 일을 쉬게 해도 좋습니다. 모두에게 엄히 일러 철저히 단속해 두도록 하세요.”
심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세가 내에 있는 일대제자부터 삼대제자까지 전부 소집해서 만휴정을 지키라 이르세요.”
일대제자로부터 삼대제자라면 모용세가의 기명제자인 데다 핵심 전력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지만 오랜 시간 모용세가의 검을 수련한 무사들이었다.
“만휴정입니까?”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휴정을 밤낮으로 지키되, 새 한 마리 넘어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이 시간부터 만휴정 주위에 금족령(禁足令)을 내리고 금역(禁域)으로 선포합니다. 만휴정에 접근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저지하도록 하세요.”
모용미의 지시는 거침이 없었다.
본래라면 가주가 폐관 수련에 들어가는 것이 옳겠지만, 지금으로선 이런 방법으로라도 가주를 보호하는 것이 모용미로선 최선이었다.
아직 영문을 모를 텐데도 심 총관의 대답은 간단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모용미는 말을 덧붙였다.
“만휴정 입구 앞에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상아를 찾아서 제게 데려오세요. 저희도 당분간 그곳에 머물며 만휴정을 지킬 것입니다.”
모용상아는 모용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다.
심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평생을 총관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심 총관은 모용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조용하게 질문을 던졌다.
“만휴정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모용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가족 같은 심 총관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으리라.
모용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며 눈동자가 빛났다.
“기연(奇緣)입니다.”
“네?”
앞뒤 없는 모용미의 대답에 심 총관이 반문했지만,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 간단한 대답을 끝으로 모용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만휴정으로 향했다.
사박, 사박.
모용미의 발걸음 소리는 금방 사라졌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심 총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주인의 지시를 받았으니 지체할 수는 없다.
심 총관은 세가 안쪽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포르릉, 짹, 짹.
고요한 만휴정에 새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가득하던 팽팽한 기세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지만, 좌정한 모용단천은 석상처럼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모용단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잠시 후, 모용단천이 눈을 떴다. 깊고 커다란 그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번뜩였다.
그의 시야에 제일 처음 들어온 것은 바로 서탁 위에 놓인 서찰이었다.
모용단천은 서탁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바스락.
그의 손이 닿자 종이들이 소리를 낸다.
모용단천은 사뭇 조심스럽게 흐트러진 서찰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모용단천은 봉투를 찾았다.
봉투는 서탁 옆에 구겨진 채로 뒹굴고 있었다.
모용단천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천외비처 창룡검주’라는 명호에 기분이 상해 거칠게 봉투를 벗겨 낸 것이 떠오른 까닭이다.
바삭.
모용단천은 봉투를 집어 들고 천천히, 꼼꼼하게 구겨진 것을 폈다.
단정하게 정리한 서찰들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고 나서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사락.
“천외비처 창룡검주…….”
그토록 어색하던 명호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름을 소리 내는 것만으로도 육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폭풍 속에서 굳건히 서 있는 검주(劍主)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니, 그 유려한 필체마저 새삼 남다르게 보일 정도다.
‘강호에는 숨은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더니…….’
강호 무림에 숨은 고수가 많다는 것 정도야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 말이 이처럼 강렬하게 느껴지는 때가 또 있었던가?
회환에 잠긴 듯 서찰의 서명을 바라보던 모용단천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서찰을 들었다.
방 한쪽에 있는 작은 문갑을 열고 서찰을 넣어 두는 모용단천의 자세는 사뭇 경건하기까지 했다.
탁.
작은 소리를 내며 문갑이 닫혔다.
모용단천은 방 안을 돌아보았다. 조용하고 단정한 방 안, 이제껏 편안하게 느껴지던 만휴정이 갑자기 좁아 보인다.
모용단천은 웃음을 흘렸다.
“후훗.”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만휴정에 머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뱃사람이 수평선 너머를 동경하듯, 무(武)의 새로운 지평을 추구하는 것이 무인의 본능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바라본 검(劍)의 지평은 자신이 이제껏 알고 있던 것들을 단숨에 깨뜨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모용단천의 가슴이 마치 소년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으니, 내가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모용단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빛나는 눈동자에서는 새로운 패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덜컹.
만휴정의 방문이 열리고 모용단천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는 뜰 앞에 서 있는 모용미와 모용상아, 그리고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세가의 제자들을 발견했다.
“음?”
모용단천이 채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모용미가 날아갈 듯 절을 올렸다.
“대성(大成)을 경하드리옵니다.”
옥구슬 구르는 듯 아름다운 목소리의 뒤를 이어 우렁찬 함성이 만휴정으로 주위에서 터져 나왔다.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열린 문 사이로 총관의 모습이 보인다. 그 뒤에 질서 정연하게 서 있는 제자들의 모습도.
그제야 모용단천은 모용미가 자신의 출관(出關) 아닌 출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새삼 모용미를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허허, 대성(大成)이라…….”
모용단천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대성이지, 대성이고말고!”
뜰 아래로 내려선 모용단천이 모용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 못난 할아비 덕에 네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할아버지.”
모용미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이젠 할아비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할아버지!”
옆에 있던 어린 모용상아가 모용단천에게 매달렸다.
모용단천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모용상아의 작은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래, 너도 수고했구나. 상아야.”
“헤헤.”
밝게 웃는 상아의 미소에 마주 웃어준 모용단천은 고개를 들었다.
“심 총관.”
“네, 가주님.”
심 총관이 빠른 걸음으로 만휴정 안으로 들어왔다.
모용단천은 그에게 신뢰의 미소를 보내며 지시를 내렸다.
“철가장에 서신을 띄우게. 모용세가는 철가장에 정식으로 비무를 요청한다고.”
“아!”
옆에 있던 모용미에게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용단천, 아니 모용세가가 드디어 재기의 용틀임을 시작한 것이다.
모용단천은 모용미를 향해 한번 웃어 주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건을 달게. 이번 비무에서 지면 모용세가는 봉문을 하고 하남성을 떠날 것이라고.”
“네?”
이처럼 확실한 지시에 심 총관이 반문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도 가주의 말을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옆에서 모용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그러실 필요까지는…….”
그러나 모용단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철가장은 이제 하남의 패자다. 그런 철가장을 상대하는데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쪽에서도 거절의 명분이 서지 않을 것이고.”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모용단천이다. 그는 철가장이 비무를 회피할 것을 막기 위해 절대 거절하지 못할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지난 비무로 모용세가를 꺾고 사실상 패자로 군림한 철가장으로서는 모용세가와의 재비무가 달가울 리 없다.
그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비무를 피한다면 그만큼 모용세가의 재기(再起)는 멀다.
그러나 전통 있는 모용세가가 가운(家運)을 걸고 비무를 신청하는데 그것을 회피했다간 철가장은 순식간에 하남성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모용세가의 저력을 은근히 경계하는 철가장으로선 후환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며칠이나 되었더냐?”
모용단천이 나지막이 모용미에게 물었다.
조금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모용미는 즉시 알아들었다.
서찰을 받고 폐관(閉關) 상태에 든 지 며칠이나 지났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모용단천이 의식적으로 서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오늘이 사흘째입니다.”
“사흘째라…….”
무엇을 생각하는 듯 모용단천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진이는?”
진이라면 대제자 모용진을 말함이다.
모용미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대제자 모용진은 아직도 기루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라고 일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됐다.”
모용단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모용미의 말을 막았다.
이곳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물론 대제자의 방황에는 모용단천 자신의 잘못도 없지 않으나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대제자 모용진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더했다.
“그럼 너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해라. 그동안 수고 많았으니 편히 쉬고 제자들도 모두 쉬도록 일러라.”
“네, 할아버지.”
모용미와 모용상아가 날아갈 듯 인사를 올렸다.
심 총관도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고 나가려는데 모용단천이 그를 불러 세웠다.
“심 총관.”
심 총관은 모용단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모용단천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주변이 모두 물러간 것이 확인되자 모용단천이 목소리를 낮춘다.
“입이 무겁고 믿을 만한 아이들 몇을 선별하게.”
심 총관은 가주의 말이 이어지길 묵묵히 기다렸다.
“일전에 온 서찰의 발신인을 찾되 은밀히 해야 하네. 일단은 서찰을 전해 온 표국에서 시작해야겠지.”
모용단천은 나지막이 말을 계속했다.
“쉽게 찾을 수 없을 터이니 어려운 일이 될 것일세. 하지만 우리 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문이 나서는 절대 안 되네. 알겠는가?”
심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단천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어쩌면 이 일의 결과에 따라 세가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게.”
심 총관의 눈이 움찔했다.
평생을 모용세가를 섬겨 왔지만 이 정도의 일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세가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니?
그러나 심 총관을 쳐다보는 모용단천의 눈은 더없이 진지하기만 하다.
“가 보게.”
모용단천이 말을 끝내자 심 총관은 깊숙이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고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다시금 조용해진 만휴정을 돌아보며 모용단천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창룡검주만 찾을 수 있다면 오대세가(五大世家)로 올라서는 것도 꿈은 아니지.”
모용단천은 빙긋이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무인 특유의 열정과 패기가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
모용세가가 철가장에 다시 비무를 요청한 사실은 삽시간에 하남성 전역에 번져 갔다.
철가장의 패권이 어느 정도 인정되기 시작하던 상황에서 모용세가의 이런 행동은 큰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일부에선 전통의 모용세가가 드디어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도 했고, 일부에선 꺼져 가는 불꽃의 마지막 번쩍임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모용세가가 힘들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한 관측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가장에서는 두말 않고 모용세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비무 당일.
하남성 전체의 뜨거운 관심사답게 모용세가와 철가장의 비무장소인 녹야평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