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31화 (31/530)
  • 031화. 모용세가의 사정

    철가장과의 비무에서 어이없이 패배한 이후, 모용세가의 대제자 모용진은 모든 것을 전폐하고 술과 방탕한 생활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모용미는 허전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오라버니도 이젠 마음을 잡으셔야 하는데.’

    모용진은 그녀의 친오라버니는 아니다.

    외아들이 두 손녀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가주 모용단천은 먼 친척들 중에 사내아이를 양손자로 들여 모용진이란 이름을 주었다.

    총명하고 무재가 있어 가주의 기대를 받아 왔는데, 지난번 패배 이후 아예 검을 포기한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사실상 모용세가의 다음 대를 이어 갈 모용진이 이러하니, 모용미로서는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우.’

    차마 겉으로는 내색을 못하고 모용미는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가주의 칩거와 대제자의 방황,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하필이면 이런 어려운 때에라니.

    “수고하셨어요, 심 총관님.”

    “네, 큰 아가씨.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심 총관은 공손히 인사를 올리곤 자리를 떠났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잠시 서 있던 모용미는 서찰을 손에 쥔 채 만휴정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사박.

    “할아버지, 소녀이옵니다.”

    모용미가 방문 앞에서 말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헛기침 소리는 들어오라는 뜻이다.

    모용미는 가만히 방문을 밀었다.

    달칵.

    방문이 열리자 서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모용단천의 모습이 보였다.

    짙은 눈썹과 긴 수염, 그리고 강렬한 눈동자를 가진 모용단천은 대단히 인상적인 무인이었다.

    그러나 요 몇 달 사이 부쩍 노쇠한 듯, 눈빛에서 흘러넘치던 패기도 많이 사라져 버렸다.

    사박.

    모용미가 들어섰지만 모용단천은 눈도 돌리지 않는다.

    탁.

    모용미는 문을 닫고 모용단천 앞에 다소곳이 절을 올렸다.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흠.”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헛기침뿐이다.

    그러나 모용미는 개의치 않고 들고 있던 서찰을 탁자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사락.

    “표국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모용단천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모용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이제 그만…….”

    그러나 모용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됐으니 그만 나가 보거라.”

    모용단천은 눈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모용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만 물러나련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은 듯 말을 돌렸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모용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탁.

    손녀 모용미가 방을 나가자 혼자 남은 모용단천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불쌍한 것.’

    손녀를 볼 때마다 모용단천의 가슴은 아려 왔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할아버지의 품에서 곱게 잘 자라 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다.

    이제는 저 착하고 고운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급격히 기우는 가세를 저 연약한 어깨로 지탱하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다.

    “후우.”

    모용단천은 기어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할아비가 부족해서 애꿎은 손녀까지 고생을 시키다니…….’

    이유나 상황이야 어떻든 결국 모든 책임은 가주인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더욱 나설 수가 없었다.

    평생 지켜 온 무인의 자존심은 패배를, 그리고 패배한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세가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가녀린 손녀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는 셈이 된다.

    그래서 모용단천은 칩거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 비무에서 죽었다면 좋았으리란 생각까지 하면서, 모든 것에 의욕을 상실한 채로 말이다.

    “후우.”

    모용단천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쉬었다.

    펼쳐 놓은 서책은 아까부터 한 장도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무심코 눈을 내리던 모용단천은, 문득 손녀가 놓고 간 서찰을 발견했다.

    부스럭.

    모용단천은 서찰을 들어 화려한 색의 매듭을 풀었다.

    매듭에 묶인 종이를 벗겨 내자 서찰을 곱게 싼 또 다른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또?’

    모용가주는 종이를 벗겨 내며 눈살을 찌푸린다.

    두 번이나 곱게 싼 것을 보니 서찰을 보낸 사람은 무척 세심하거나 혹은 소심한 사람이다.

    이런 경우 내용도 그와 비슷하기 마련이니, 모용단천으로서는 벌써부터 탐탁잖을 수밖에 없었다.

    바스락.

    드디어 서찰이 들어 있는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아갈 듯 유려한 필체로 ‘모용세가 가주 친전’이라 적혀 있고 천외비처 창룡검주(天外秘處 蒼龍劍主)라는 서명이 되어 있다.

    모용단천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이런 거창한 명호를 쓰는 사람이 있군.’

    과도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명호였다.

    무슨 엄청난 사람이라도 되는 듯 과장된 명호를 쓰는 것은 지나도 한참 지난 유행이다.

    모용단천은 서찰을 쓴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옛날 사람이거나 혹은 아주 풋내기라고 판단했다.

    아마도 이것은 다분히 후자의 경우이리라.

    ‘비무에 패했다고 이런 것들까지 내게 서찰을 보내다니…….’

    모용단천은 입맛이 썼다.

    ‘내가 우습게 보이긴 우습게 보이나 보군.’

    마음이 편치 못하니 손길이 부드러울 리 없다.

    모용단천은 거칠게 봉투를 열어 서찰을 꺼냈다.

    언뜻 보아도 예닐곱 장에 이르는 장문의 서찰이었다.

    모용단천은 못마땅한 얼굴로 첫 장을 펼쳤다.

    바스락.

    “쯧.”

    첫 구절을 읽자마자 모용단천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도 이 이야기인가…….’

    서찰은 자신의 비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다.

    만일 ‘아쉬운 패배’라고 적혀 있었다면 모용단천은 보지도 않고 구겨 버렸을 것이다.

    그런 서찰은 보나마나 뻔하디뻔한, 듣기 좋은 말로 기분이나 맞춰 주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읽은 다음에는 오히려 자괴감이 드는, 그런 서찰 말이다.

    ‘흐음.’

    모용단천은 의외의 눈으로 서찰을 바라보았다.

    기분을 맞춰 주려는 말 같은 건 없었다.

    서찰은 오히려 일전의 비무를 간단히 서술하며, 모용단천이 간과한 몇 가지 부분들을 짚어 가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제법이군.’

    모용단천은 이 서찰을 쓴 사람이 영 풋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적하는 바가 날카롭고 꽤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를 되새기는 것이 누군들 기쁘랴?

    모용단천의 찌푸린 인상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이 정도야 나도 이미…….’

    패배한 비무를 누가 되새겨 보지 않을까?

    서찰의 지적은 모용단천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지금 지적하는 것들을 미리 알았다 해도 비무의 승패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바스락.

    모용단천은 서찰을 한 장 넘겼다.

    그러고 보니 서체가 날아갈 듯 멋스러우면서도 안정되어 있고 힘이 넘치는 것이 꽤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아마도 문(文)과 무(武)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사람인가 보군.’

    계속 읽어 내려가던 모용단천의 희끗희끗한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이제 서찰은 모용가의 검로의 흐름, 일컬어 검류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모용단천은 속으로 혀를 찼다.

    모용세가의 검이라면 천하에 자신만큼 아는 이도, 자신보다 잘 아는 이도 없다.

    철이 들기 전부터 검을 잡아 왔고 선조들의 수많은 심득과 절학을 몸에 익혀 왔다.

    모용단천에게 모용세가의 검은 이미 자신의 한 부분, 아니 자기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신의 앞에서 어찌 감히 모용가의 검류를 논한단 말인가?

    그나마 좋아지려던 기분이 갑자기 확 잡친 듯한 느낌이었다.

    “쯧.”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며 모용단천은 잠시 고민했다.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아니면 당장 찢어 버릴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질대로 하자니 곧 들어올 손녀를 볼 면목이 없다.

    찢어진 서찰을 보면 모용미의 그 고운 얼굴에 근심이 가득 어릴 테니까.

    “후우.”

    한숨을 쉰 모용단천은 탐탁잖은 시선으로 편지를 훑어보며 장을 넘겼다.

    부스럭.

    짹짹, 포로롱.

    방문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오고 한동안 방 안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방 안에 흐르던 고요한 분위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졌다.

    바삭.

    서찰을 쥔 모용단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원인은 바로 모용단천 자신이었다.

    ‘이, 이건…….’

    모용단천의 손은 어느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모용단천의 눈동자도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서찰에 쓰인 문장은 마치 천둥처럼 모용단천의 뇌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자신이 곧 모용가의 검이다.

    그렇게 한평생을 자부해 왔는데 그 자존심이 지금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 닿는 문장마다 놀라움이 가득했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항상 눈앞에 있었으나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그 경지가 이 서찰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누군가가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려 보여 주는 듯한, 그야말로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어린아이가 느끼는 흥분과 경이였다.

    “아아…….”

    평생을 가문의 검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비로소 가문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경이에 관일검 모용단천의 온몸에 전율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관조(觀照)였다.

    ***

    “할아버지, 소녀이옵니다.”

    차를 가지고 온 모용미는 방문 앞에서 모용단천을 불렀다.

    그러나 늘 들리던 헛기침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모용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처럼 자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늘 인기척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모용단천이었다.

    그녀는 잠시 기다렸다가 들고 온 차탁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사락.

    문을 열자마자 범상치 않은 기세가 방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응?’

    모용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가주 모용단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우우웅.

    팽팽하게 당겨진 방 안의 공기가 가주 모용단천을 중심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앉아 있는 모용단천에게서는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손에 쥔 서찰에 시선을 집중한 채 모든 것을 잊은 듯한 모용단천의 모습.

    모용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

    무가(武家)의 여자로 살아온 지 이십여 년, 이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다는 순간, 그 깨달음의 순간이 지금 모용단천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할아버지!’

    모용미는 가슴에서 북받쳐 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행여 작은 소리라도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모용미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더욱 뒤로 물러나 방문 앞 뜰에 섰다.

    사락.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그녀는 닫힌 방문을 향해, 아니 방 안에 있는 모용단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단아하고 깨끗한 그녀의 옷이 더러워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박.

    모용미는 땅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늘이 우리 모용세가를 버리지 않으셨음이니.’

    또르륵.

    한 줄기 눈물이 모용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디 대성(大成)을 기원하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용미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주저 없이 발걸음을 돌려 만휴정을 나섰다.

    눈가엔 미처 감추지 못한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모용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