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천외비처 창룡검주
“후우우.”
운현은 긴 숨을 내쉬며 붓을 거뒀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붓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십여 장에 이르는 장문의 편지가 되고 말았다.
한동안 보고서를 쓰지 않아서인지 그간 머릿속에 쌓인 문장들이 기회를 만나 튀어나온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서명을…….”
습관적으로 서명을 하려다가 운현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보내자니 그 또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서명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창룡학사라고만 할까?’
운현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학사라 하면 틀림없이 가벼이 볼 터인데…….’
아무리 내용에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한들, 서명에 ‘창룡학사’라고 되어 있다면 코웃음을 칠 것이 분명하다.
‘대체 학사가 검에 대해 무엇을 안단 말이냐?’ 하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벌써부터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운현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휙휙.
운현의 붓이 거침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이곳 자금성에 홀로 내팽개쳐진 신세에…….”
휘릭.
“창룡전의 학사이면서도 의형의 뜻에 따라 검을 다스려야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탁.
마지막 획을 긋고 나서 운현은 붓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멋스러운 필체로 뚜렷이 쓰여 있는 서명을 바라보며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천외비처 창룡검주(天外秘處 蒼龍劍主)라…….”
이곳 자금성에서 속세와 한참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으니 천외비처란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요, 의형 일충현이 이르기를 검을 다스리는 자[劍主]가 되라 하였으니 이 또한 운현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의외로 어감은 좋군.”
자신의 서명을 바라보던 운현이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살펴보았다.
‘이런, 어느새…….’
운현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사이 밤이 깊어 침소에 들 시간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이대로 편지를 놓아두고 잠자리에 들 수는 없다.
“자고로 퇴고는 문인의 당연한 책무인 것. 어찌 다듬지도 않은 문장을 함부로 내보인단 말인가?”
운현은 흐트러진 종이를 정돈하고 다시 정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문장에 빠져 버린 운현의 머릿속에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 훨씬 지났다는 사실 같은 것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
“이보게, 박 환관!”
환관 박규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저쪽에서 의관을 갖춰 입은 학사 한 명이 바삐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나, 운 학사님.”
운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박 환관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운현도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에 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요, 운 학사님? 이렇게 저를 다 찾아오시고…….”
박 환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문연각도 아닌 곳에서 운현이 부른 것으로 보아 자신을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아, 저기. 박 환관에게 내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서…….”
운현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박 환관에게 말했다.
“혹시 자금성 밖으로 서찰을 전할 수 있겠나?”
환관 박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서찰 정도라면야 부탁할 사람이 딱히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의 얼굴에는 금방 화색이 돌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박 환관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그 예상이 들어맞은 듯하다.
“저기, 그럼…….”
운현은 들고 있던 서책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색실로 곱게 매듭을 한 서찰이 박 환관의 눈에 들어왔다.
운현은 서찰을 박 환관에게 내어 밀었다.
“이 서찰을 표국에 좀 맡겨 줄 수 없겠나? 그냥 아무 데나 맡겨도 상관없으니…….”
환관 박규는 운현이 내민 서찰을 바라보았다.
공적인 서신이라면 자신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으니 개인적인 서찰이 분명하다.
박 환관의 입가에 금세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호오, 운 학사님. 갑자기 어인 연서(戀書)이옵니까?”
연애편지냐는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운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여, 연서라니! 그런 말 말게. 나는 그저 아는 사람에게 안부나 전하려고…….”
“후후훗, 농담이옵니다, 농담.”
탁.
혹여 운현이 마음이라도 바뀔까, 박 환관은 잽싸게 그의 손에서 서찰을 낚아채 갔다.
“꽤나 정성이 들어간 서찰이로군요?”
여러 겹으로 곱게 싼 서찰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박 환관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떤 소저신지 참 좋으시겠사와요, 호호홋.”
“이, 이 사람. 그런 게 아니래도……. 아참.”
운현은 품을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 이건…….”
“그건 또 무엇입니까요? 같이 보내실 건가요?”
박 환관의 물음에 운현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표국에 서찰을 맡기는 데 얼마나 드는지를 몰라서 되는 대로 은자를 조금…….”
한눈에 보기에도 주머니는 그리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운현이 내민 은자 주머니를 내려다보던 박 환관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후훗, 서찰 하나에 그리 쉽게 은자 주머니를 꺼내시면 어쩝니까? 이러다간 금방 빈털터리가 되실걸요?”
그러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앞으로 내 몇 번 더 이런 부탁을 할 것 같은데, 그때마다 수고를 끼치느니 지금 맡겨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일세. 이건 자네가 가지고 있다가 서찰 보내는 데 써 주게.”
운현이 ‘앞으로’라는 말을 쓴 것은 오늘 아침 서찰을 정리하며 든 생각 때문이다.
모용세가에 보내는 글을 정리하다 보니 모용단천 외에도 몇몇 사람들의 이름이 운현의 머리를 스쳐 갔다.
그동안 이야기꾼들의 비무 기록을 검토하며 은근히 호감이 갔던 고수들이거나 혹은 안타깝게 비무에 진 사람들이었다.
비록 운현이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아도, 그들의 검로나 비무에 대해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진면목이랄까 하는 것들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모용세가에 보낼 서찰을 정리하던 운현에게 그들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물론 아직 결심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보낼 확률이 다분하다.
그래서 운현은 박 환관에게 앞으로 몇 번 더 부탁을 할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뭐, 굳이 주신다면야…….”
박 환관은 운현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작은 주머니를 받았다.
짤랑.
“사양할 이유야 없습지요, 호홋.”
박 환관이 은자 주머니를 받아 들자 운현은 그제야 한숨 놓았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고맙네. 그럼 부탁 좀 하세.”
“니예, 염려 놓으시와요. 호호홋.”
박 환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나중에 보세.”
어느새 운현은 박 환관에게 인사를 건네며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니예. 살펴 가시와요, 운 학사님.”
박 환관은 고개를 숙였지만 운현은 손을 휘휘 흔들고는 금의위 훈련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점차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 환관은 슬며시 손에 든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짤락.
은자 소리가 자그맣게 울렸다.
기댈 곳 없는 환관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돈과 권력뿐이다.
때문에 환관들은 주는 돈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받아 내고자 머리를 굴린다.
그러니 아까 박 환관이 운현의 은자 주머니를 사양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박 환관이 결국 운현의 은자 주머니를 받아 든 것은 돈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풋. 가난한 학사님의 은자 주머니라……. 언젠가 돌려 드릴 날이 올 테지.”
작은 은자 주머니를 품에 넣고 박 환관은 슬쩍 하늘을 살폈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 박 환관의 옷을 휘날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효, 조용한 날이 없어요, 조용한 날이.”
중얼거리던 박 환관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자그마한 박 환관의 뒷모습은 화려한 자금성의 전각 사이로 금방 사라져 갔다.
***
모용세가의 아침은 조용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위로 따스한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지만 세가 안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무사들의 수련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박.
고즈넉한 모용세가의 건물들 사이로 가녀린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부드러운 걸음마다 절도가 느껴지는 그녀는 바로 모용세가의 손녀, 모용미였다.
사박, 사박.
고요한 세가를 가로지르며 모용미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이미 분주한 하인들의 왕래와 제자들의 기합 소리로 사방에 활기가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용세가 전체가 사람 하나 없는 듯 조용하다.
모용미에게는 낯선 아침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광경이다.
‘그럴 만도 하지.’
세가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같은 세가의 분위기 속에서 누군들 눈치를 보지 않으랴?
모용미도 그런 하인들이나 제자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끼익.
작은 문을 지나, 모용미는 가주 모용단천이 거하는 작은 정자에 도착했다.
이곳 만휴정은 느긋한 쉼이라는 그 이름처럼, 전대 가주가 머물며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용세가의 현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의 거처가 되어 있었다.
철가장의 가주, 철무웅과의 비무에서 패한 뒤로 이곳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세가의 상황은 가주가 칩거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큰 아가씨, 오셨습니까?”
만휴정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노년의 사내가 모용미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다.
모용미 역시 그에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안녕하세요, 총관님.”
모용미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세가의 일을 맡아보고 있는 심 총관이었다.
평생을 세가를 위해 일해 온 노년의 심 총관에게 모용미는 자연스럽게 존대를 했다.
“할아버지께서는요?”
사실 물을 필요는 없었다. 심 총관의 곤란한 표정을 보니 모용단천이 오늘도 만나 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노년의 심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일어나신 듯합니다만…….”
심 총관은 말끝을 흐렸다.
가족과 마찬가지인 심 총관이건만 가주 모용단천은 그마저도 물리쳤다.
가주 모용단천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손녀인 모용미와 모용상아뿐이었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가주님께 서찰 하나가 도착해 있습니다.”
심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품에서 작은 서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젯밤 늦게 표국에서 도착한 것입니다.”
심 총관이 내민 서찰을 받아 들며 모용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보내는 것인지 써 있지 않군요. 따로 전언이 없던가요?”
“네, 없었습니다.”
모용미는 조심스럽게 서찰을 살펴보았다.
좋은 종이에 화려한 끈으로 매듭을 한 서찰은 한눈에 보기에도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서찰 어디에도 보내는 이의 이름이나 가문명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흐음.’
모용미는 잠시 망설였다.
가주가 비무에서 패하자 한동안 수많은 서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은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서찰들이었지만 가끔은 욕설과 저주로 가득한 쓰레기 같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서찰들은 한결같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대대에 걸친 덕행의 결과가 기껏 이것이란 말인가?’
비록 일부의 서찰이라지만 회의가 든 것도, 크게 낙담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아예 서찰 자체가 드물게 되었지만, 그 아픈 기억이 아직 생생한 모용미로서는 이 서찰을 가주에게 전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제가 전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밖에 특별히 전하실 것은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지금 모용세가의 실질적인 가주 역할을 해 내고 있는 것은 바로 모용미였다.
물론 세가의 일을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는 심 총관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총명하고 사리분별이 밝은 모용미는 훌륭하게 세가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해 냈다.
하남성의 패권을 상실하고 가주가 칩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가가 단번에 와해되지 않은 것은, 전통 깊은 세가의 저력과 동시에 모용미가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이 되어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가주의 빈자리를 모용미가 전부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모용단천의 복귀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아가씨.”
심 총관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모용미는 서찰에서 시선을 들었다.
“아, 모용진 오라버님은요?”
총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대제자께선 여전하십니다.”
“그래요…….”
모용미의 얼굴에도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