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투서(投書)
“운 학사님.”
문연각에 앉아 있던 운현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짐작하고 있던 운현의 얼굴에는 벌써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박 환관.”
예상했던 대로 박 환관이 웃음을 머금고 운현 앞에 서 있었다.
박 환관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그저 간단한 인사로도 충분하련만, 박 환관은 항상 운현을 깍듯하게 대했다.
운현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에 답했다.
“요즘 좀 바쁜 듯하더군. 잘 지냈나?”
운현이 말을 건네자 박 환관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소인이야 늘 그렇습지요. 그보다…….”
박 환관은 슬쩍 운현이 앉아 있던 서탁으로 시선을 던졌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하시는 듯하옵니다?”
“재미있는 일? 아, 이거…….”
운현은 서탁에 펼쳐져 있던 책을 슬며시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운현이 붓을 들어 무언가 적고 있던 책에는 단지 글뿐만 아니라 그림 같은 것들도 제법 그려져 있었다.
박 환관의 주의를 끈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것도 아닐세. 시간이 좀 남아서 소일 삼아…….”
“헤에.”
운현의 쑥스러운 표정에 박 환관이 짐짓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간이 남으시다니요? 금의위 훈련장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가시는 데다, 문연각에 가장 늦게까지 계시는 분도 바로 운 학사님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야 그렇네만…….”
운현은 슬쩍 머리를 만졌다.
“요즘은 보고서 독촉도 거의 없고, 이야기꾼 소환도 좀 뜸하고 해서 말일세.”
박 환관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스쳐 갔다.
일부러 밝게 이야기를 끌어 가려 한 것인데 방향을 잘못 잡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다른 취미가 생기신 모양이지요. 뭐, 좀 지나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호호홋.”
박 환관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렸지만 운현은 오히려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닐세. 오히려 바빴던 때가 이상한 게지. 이제야 창룡전 학사의 일상이 된 것 같네.”
자금성을 휩쓴 폭풍이 지나간 이후 벌써 계절이 바뀌었고 운현의 일상도 많이 변했다.
창룡전 관리 사일천은 더 이상 운현에게 보고서 독촉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꾼의 소환도 크게 줄었다.
어찌 된 까닭인지는 몰랐지만, 아마 일충현의 일로 인해 윗사람들의 눈 밖에 난 탓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운현은 예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초조하기도 했고,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니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모든 학사들이 부러워하는 최상의 환경 아닌가?’
독촉하는 일도 없다.
등급 제한은 있지만 모든 지식의 보고라는 문연각 출입도 자유롭다.
좋아하는 검술도 마음껏 수련이 가능하고, 금의위 훈련장에도 언제든지 얼굴을 내밀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거야말로 운현이 바라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초조한 것도 불안한 것도 없어졌다.
일충현도 이런 마음으로 지냈으리라 생각하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그렇게 운현은 불안을 털어 버렸다.
그럼에도 가슴 한편이 아직 쓸쓸한 것은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소인이야 무얼 알겠습니까만, 그래도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이 있을 테지요. 니예.”
운현의 표정에 그늘이 졌었는지 박 환관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운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으로 대답했다.
“지금도 충분히 좋네, 허허.”
***
“그럼, 먼저 가 보겠네.”
“니예, 살펴 가시와요.”
박 환관은 운현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운현도 가볍게 답례를 한 후 금의위 훈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문연각 계단에서 바라보며 박 환관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옥에 갇힌 일충현을 방문한 탓에 운현이 윗사람들 눈 밖에 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나마 별 볼 일 없는 창룡전 학사라는 것과 형식상 황태자 소속이기에 그냥 놔두고는 있지만, 언제 그들의 인내가 바닥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누구나 불안해하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반드시 뽑아내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껏해야 쫓겨나는 정도로 끝날 것이라는 점이지만, 박 환관으로서는 운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곳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복마전 같은 이곳 자금성에서 운현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인 때문이다.
“하긴, 여기가 아니라도 조금 드물긴 할 테지…….”
운현의 어리숙한 모습을 생각하며 박 환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별 상관도 없는 일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은, 운현의 그 약삭빠르지 못한 심성 탓인지도 모른다.
“에효, 나도 참 사서 고생이라니까. 큭큭큭.”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뒤에 따라붙은 웃음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그 작은 웃음소리가, 운현의 평안한 일상을 지켜 내고 있는 박 환관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전각 사이로 사라지는 운 학사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박 환관은 발길을 돌렸다.
***
운현이 처소로 돌아온 것은 언제나처럼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다.
탁.
운현은 문을 닫았다.
의관을 정리하고 잠시 쉬던 운현의 시선은 곧 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에 머물렀다.
요즈음 운현은 자신이 예전에 작성했던 보고서나, 이야기꾼들의 기록들을 다시 들춰 보고 있었다.
어색한 문장을 발견했을 때는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이야기꾼들의 기록 중에서 미처 물어보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바스락.
운현은 서탁 앞에 앉아 책을 꺼내 들었다.
팔락.
우연이었을까?
무심코 펼친 곳은 모용세가 가주와 철가장 장주의 비무를 적은 부분이었다.
운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기록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운현은 순식간에 기록에 빠져들어 갔다.
“흐음.”
한참 동안 읽어 가던 운현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역시 모용가주는 모용세가의 검식에 담긴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데…….’
하남성의 유서 깊은 세가,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철가장 장주 일도양단 철무웅과의 비무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운현의 눈에는 마지막 검식으로 승리하는 모용가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운현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의 그 검식을, 모용가주는 결국 펼치지 않고 패배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자기 가문의 검을 가주가 모르다니…….”
그때도 그러했지만 지금 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살펴봐도 모용가주는 이길 수 있었던 비무를 진 것이다.
운현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역시 일부러 진 것일까?’
그러나 이유가 없다.
“혹시 높은 경지를 깨닫기 위한 수련의 일환이었다거나…….”
하지만 하필 가문의 존망을 건 비무에서 그리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념을 털어 버리듯 고개를 저은 운현은 다시금 곰곰이 따져보았다.
“흐음.”
하남성의 모용세가는 전통 있는 가문이다.
가문의 검에 대한 연구 또한 깊을 것이 분명하니, 운현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용가의 가주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전통이 깊고 오래된 만큼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이 굳어 있을 가능성 또한 크다는 점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정작 본인에겐 보이지 않는 수가 훈수를 두는 입장에선 훤히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운현에게 떠올랐던 마지막 검식은 본래 모용세가에 없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같은 흐름이라고는 하지만, 바라보기에 따라서는 변칙이나 임기응변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 가문의 전통에 따라 외면당했다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음, 아마 그렇겠지. 역시 그랬을 거야.”
그렇게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한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결국 모용가주는 그 검식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확실하군. 아니면 알았더라도 쓸 생각을 못 했거나.”
이해되지 않던 난제를 해결한 운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와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뿌듯함이 피어오르는 것은, 모용가주 정도의 고수가 놓친 것을 잡아냈다는 자신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도 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운현은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듣기라도 했다면 그보다 부끄러운 일이 없다.
운현은 짐짓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아서라. 자존자대도 정도껏이지. 네가 알고 있는 것을 강호 무림의 고수가 모르겠느냐?”
모용세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모용가주라면 평생을 무공에 바쳐 온 고수다.
고작 십여 년 넘게 검 하나만 휘둘러 온 자신보다 나아도 몇 배는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은 학사가 아닌가?
“자신의 부족함조차 모르는 자가 하수이며, 자신의 허섭함, 아니 수양이 깊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고수라 했거늘…….”
금의위 훈련장에서 제일 설쳐 대는 사람들이 바로 갓 들어온 신입 금의위들이다.
운현 자신도 서생 시절에 어설픈 풋내기들을, 쥐꼬리만 한 지식을 믿고 설쳐 대는 이들을 질리도록 보아 왔다.
그런 추태를 운현 자신이 반복할 수야 없었다.
“뭐, 어쩌면 지금쯤은 모용 가주도 깨달았을지도 모르고…….”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철가장과 재비무 날짜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시간이 꽤 지났으니 벌써 모용세가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우.”
잡념을 털어 내려는 듯 운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것이 있다.
혹시 모용가주는 가문의 전통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아직도 자신이 간과한 것을 모르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왜 패배했는지, 사실은 이길 수도 있던 비무였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어.’
애정 어린 한마디의 충고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운현도 익히 아는 바다.
한참을 생각하던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충고라니……. 아서라, 괜한 웃음거리만 되고 말 것을…….”
운현은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검을 든 사람들의 자존심이야 금의위들을 접하며 익히 아는 바이다.
심지어 갓 금의위에 들어온 신입들조차 훈수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나중에는 운현에게 객관적인 판단과 충고를 요청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들이 그럴진대, 하물며 한 성의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던 패주라면 더욱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충고를 한 사람이 일개 학사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더더욱 뻔하다.
어느 모로 보나 일찌감치 신경을 끄는 것이 옳은 일이다.
‘으음.’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인다.
모용가주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정말 감탄할 만한 명문장이다.
하지만 괜히 남의 웃음거리나 된다면 그 일을 또한 어쩔 것인가?
“허어!”
머릿속에선 말하고 싶은 문장이 쉼 없이 솟아나고, 그래선 안 된다는 초조한 마음은 하릴없이 방 안을 오락가락하게 한다.
불안한 듯 방 안을 서성이며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지만, 사실 운현의 눈은 진작부터 탁자 위의 지필묵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끄응.’
서탁 앞을 오락가락하던 운현은 결국 결심을 굳혔다.
“그래, 비웃으면 어떤가? 어차피 나야 모르는 일 아닌가?”
생각해 보니 그 머나먼 곳에서 자신을 비웃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들의 반응을 알려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전통 있는 모용세가의 가주쯤 된다면 함부로 남의 말을 우습게 여기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 그게 상식적인 반응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치 큰 짐을 벗은 듯 마음이 홀가분하다.
바로 그때였다.
‘그렇지! 아예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기명으로 투서(投書)하면 될 것 아닌가?’
결심을 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누구인 줄 어찌 알랴?
어차피 감사의 답장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니 구태여 밝힐 필요도 없다.
운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쯤 되고 보니 아까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가 따로 없었다.
덜컹.
고민이 사라진 운현은 즉시 서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하고 붓을 들었다.
아직 채 먹을 묻히기도 전인데 머릿속에선 벌써 붓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일말의 불안과 부담마저 없어지니 그야말로 최적의 집필 환경이다.
스윽.
운현은 상기된 얼굴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붓은 신들린 듯 종이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