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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8화 (28/530)
  • 028화. 별리(別離)

    탁.

    “후우.”

    백호수련검 십이식을 끝낸 운현은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가다듬었다.

    검식을 펼치며 흥분되었던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검을 쥐지 않고 검식을 펼쳐 내는 것은 운현에겐 정말이지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던 운현이 눈을 떴다. 그리고 일충현을 향해 몸을 낮췄다.

    “형님…….”

    일충현은 부드러운 미소로 운현을 맞았다.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던 일충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했네.”

    일충현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 젖은 눈으로 일충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남겨 줄 만한 것이 하나 더 있었군.”

    “네?”

    운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일충현의 엄한 목소리가 운현의 귀를 때렸다.

    “무릎을 꿇게.”

    운현은 놀라 일충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진지했다.

    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탁, 탁.

    사뭇 과장된 행동으로 의관을 가다듬은 운현은 일충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인이 제일 먼저 싸워야 할 상대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네.”

    옥에 앉은 일충현이 엄한 어조로 말했다.

    “힘을 가진 자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 자네가 힘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힘이 자네를 다스릴 것이요, 결국은 자네를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네. 그러하니 자네는 항상 진실 됨을 지켜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되고, 검을 다스리는 자가 되게.”

    “그리하겠습니다.”

    운현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 의미를 알고 대답한 것은 아니다.

    일충현의 교훈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인도 아닌 자신 같은 학사에게 무슨 힘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일충현의 유언이다.

    일충현 자신이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을, 지금 운현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운현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좋네.”

    운현의 대답을 들은 일충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앉게.”

    운현이 일충현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설명은 없다.

    엉거주춤 일어난 운현은 돌아앉았다.

    “좀 더 가까이.”

    일충현의 말에 운현은 몸을 옥에 바싹 가져다 대었다.

    뒤에서 일충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가능하면 강호의 은원과는 얽히지 말게. 그다지 소용은 없는 충고겠네만…….”

    등 아래쪽에 일충현의 손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고르게 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을 하거나 호흡을 놓치면 안 되네.”

    운현이 뭐라고 반문할 사이도 없었다.

    후우욱.

    엄청한 무엇인가가 운현의 등 뒤 혈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현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기운이었다.

    ***

    툭, 툭.

    무릎 꿇은 운현의 옷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 앞에 일충현이 초췌한 얼굴로 정좌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일러둘 말이 있네.”

    차분한 목소리로 일충현이 말을 꺼냈지만 운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도 당당하던 일충현의 목소리가 지금은 끊어질 듯 가늘기만 하다.

    “내가 자네에게 내력을 전수했다 하여 수련을 게을리해선 절대 안 되네. 본래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법.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더 힘들지도 모르니까.”

    일충현의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나도 내공이라면 꽤나 정순하게 키워 왔다고 자부하는 데다, 자네의 백호수련검이 진기도인의 효능이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네. 자네가 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음을 아는 터라 큰 걱정은 없네만…….”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일충현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강하게 빛나던 일충현의 눈에는 지금 완연한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자넨, 그저 검만 수련하게.”

    “형님…….”

    운현이 부르는 의미를 모르지 않으련만 일충현은 끝까지 그의 수련에 관한 얘기를 놓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운현의 수련을 돌봐 줄 수 없게 된 일충현으로서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한시라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되, 이제부턴 수련할 때에 검을 쥐지 말게.”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충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가녀린 목소리에는 혼자 남겨질 운현에 대한 염려가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방금 한 것처럼 마음으로 검을 세우고 하게. 자네라면 검을 쥐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의외의 대답이었지만 일충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운현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저 같은 사람에게…….”

    운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눈에서 흐르는 굵은 눈물이 뒷말을 대신했다.

    일충현은 따뜻한 눈길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 마음 쓸 것 없네. 어차피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니.”

    선택은 끝났고 후회는 없다.

    일충현은 운현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부드럽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이제, 가게.”

    일충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

    운현이 불러 보았지만 일충현은 눈을 감았다.

    정좌한 그의 모습은 운현의 목소리에도 흔들림 없이 굳건하기만 했다.

    “형님…….”

    운현의 목이 메어 온다.

    그러나 일충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가 이제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을 운현은 알았다.

    사락.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고는 거친 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일충현에게 큰절을 올렸다.

    “제가 형님의 동생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형님, 부디, 부디…….”

    운현은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곧 죽음을 직면할 사람에게 무어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밤을 새워 익혔던 명문장도, 머릿속 가득한 지식도 지금 운현의 마음을 표현해 주지는 못했다.

    운현의 가슴이 다시금 조여 오며 뜨거운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바스락.

    눈물을 흘리며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저벅.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닦지 않았다.

    슬픔으로 가슴이 메어 왔지만 울음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강한 형님 앞에서 약한 동생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저벅, 저벅.

    운현은 잠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운현은 자신의 의형을 보냈고, 일충현은 그렇게 자신의 의제와 이별했다.

    끼이익, 쿵.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혔다.

    여전히 눈을 감은 일충현의 입에서 그제서야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창룡전(蒼龍殿)……. 과연 용(龍)이 사는 곳이었군.”

    일충현의 입은 다시 굳게 다물어졌다.

    희미한 불빛 아래 흔들리는 어둠만이 일충현 교두를 감싸 안았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따랑.

    전각 추녀에 달린 풍경이 소리를 냈다.

    지나는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운현은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 학사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 관철훈 교두.”

    운현을 부른 사람은 훤칠한 키의 관철훈 교두였다.

    무과의 장원이었고, 방안과 비무하다 큰일을 당할 뻔한 무관이다.

    훈련을 마치고 금의위 교두로 지원하여 도진 교두 밑에서 근무하다가 현재는 정식 교두가 된 상태였다.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철훈 교두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운현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에 답했다.

    “어쩐 일이시오? 이런 곳까지…….”

    운현이 웃는 낯으로 묻자 관철훈 교두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지나던 길입니다.”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운현은 그 안에 담긴 배려를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전각 앞 공터를 잠시 쳐다보던 관철훈 교두는 운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훈련장에는 이제 안 오십니까?”

    관철훈 교두가 묻자 운현은 가볍게 웃어 보인다.

    “이젠 반길 사람도 없는데 그곳엔 가서 무엇하겠소?”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그리 부드럽지 못하다.

    관철훈 교두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다른 이들이 웃습니다.”

    예기치 못한 말에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관철훈 교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운 학사님이 일충현 교두님의 유품을 수습하셨다는 것도, 그리고 교두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것도 모두들 알고 있습니다.”

    운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듣고 서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나약함을 보이시니 어찌 사람들이 웃지 않겠습니까?”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의 강렬한 시선은 마치 운현을 몰아세우는 듯했다.

    “일충현 교두가 뒤를 맡긴 사람이, 그저 심약한 학사 나부랭이에 불과했다고 말입니다.”

    따랑.

    조용한 풍경 소리가 전각에 울려 퍼졌다.

    운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관철훈 교두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운현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 일충현은 사흘 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조차 은밀히 이루어져서, 운현이 소식을 들은 것도 박 환관을 통해서였다.

    다행히 도진 교두와 다른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파직을 당해 황궁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잊혀졌다.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역모’라는 죄목은 어느 틈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 버렸고, 자금성은 발 빠르게 새로운 사람들에게 적응해 갔다.

    그러나 사라져 간 이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지금 운현과 이야기하고 있는 관철훈 교두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따랑.

    바람이 부는지 작은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말없이 관철훈 교두를 쳐다보던 운현이 결국 시선을 내렸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일충현 교두는 죽어 가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는데, 의제인 자신이 남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후우.”

    결국 운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긴, 내가 언제는 반기는 사람이 있어서 갔던 것도 아니고…….”

    운현은 고개를 들어 관철훈 교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신세 좀 지겠소.”

    관철훈 교두는 더 이상 다른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운현에게 인사를 했다.

    관철훈 교두가 구태여 운 학사를 챙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을 써 주는 것은 이제 일충현을 추억하는 것이 두 사람뿐인 까닭이다.

    운 학사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저벅, 저벅.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관철훈 교두가 멀어져 가자 운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한가득 운현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얹고 옷 안에 걸린 작은 반지를 매만졌다.

    운현의 입에서 다시금 긴 한숨이 새어 나온 것은 풍경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려온 다음이었다.

    “후우, 하겠습니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해야지요. 형님께서 명하신 일을 이 어리석은 의제가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탄식하듯 중얼거린 운현은 천천히 전각 앞 공터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운현은 자세를 잡고 서서 호흡을 고르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후웅.

    푸른 하늘도, 화려한 자금성도 사라진 그의 시야에 거친 목검 한 자루가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운현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아무도 모르는 그 검을 손에 쥐었다.

    ***

    쏴아아.

    거친 장대비가 황금빛 지붕을 두들겨 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왔다.

    처마 끝에서 일제히 떨어지는 물줄기들과, 건물 기단에 입을 내밀고 있는 수십, 수백 개의 용머리 조각 배수구에서 흘러나오는 빗물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현의 보이지 않는 검은 빗속을 뚫고 거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촤악.

    운현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물보라가 튄다.

    젖어 버린 옷은 무겁기만 하고,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시야를 가린다.

    그러나 운현의 동작은 한순간도 막힘이 없었다.

    휘이잉.

    거친 바람이 불자 운현의 옷자락이 크게 휘날렸다.

    그러나 마음으로 날을 세운 운현의 검은 비바람에 아랑곳 않고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후우웅.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검은 아무것도 자르지 못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자르지 못할 것이 없었다.

    비바람도, 먹구름도, 그리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갖가지 회한과 상념들조차도.

    운현의 검은 거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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