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옥중결연(獄中結緣)
지난 과거를 이야기하는 일충현의 담담한 목소리가 마치 유언처럼 들려서, 운현은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되었다.
“일충현 교두님…….”
“그냥 형님이라 하게.”
운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일충현의 시선은 부드럽기만 했다.
“싫은가?”
운현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형님……. 아닙니다.”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운현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일충현은 그런 운현을 보며 빙긋 웃었다.
“훨씬 듣기가 좋네. 그러고 보니 자네와 내가 만난 지도 어언 십여 년이 넘었으니 이것도 보통 인연은 아니군그래.”
운현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다시 운현의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어, 이 일충현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그리 눈물이 많아서야……. 이제 그만 마음을 추스르도록 하게.”
곧 목숨을 잃을 사람이 오히려 운현을 위로하고 있다.
일충현의 말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운현의 빰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하지만…….”
운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이 운현의 앞섶을 또다시 적시기 시작했다.
투둑, 툭.
일충현도, 운현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운현이 물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대로 형님께서…….”
운현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일충현은 회한이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방법이라…….”
방법은 있다.
물론 운현이 생각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일충현에게는 있었다.
사실 황궁 내에 일충현의 진짜 실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엔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고 나중엔 스스로 감추었다.
온갖 계략이 난무하는 이곳 자금성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는 결국 오지 않았고 자신은 이렇게 갇힌 몸이 되고 말았다.
일충현은 운현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 해도 가끔은 한 발 뒤로 물러서 주는 것도 필요하다네.”
일충현은 그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아니, 택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옥을 깨뜨리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 후엔 어떻게 될 것인가?
어쩌면 초야에 묻혀 살 수도, 복수를 위해 세력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사람들은 바로 무고한 동료들이다.
고향의 가족이야 어떻게든 피신시킨다 해도 자신과 연관된, 당장 눈앞의 운현을 비롯한 많은 친인들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기개 높은 일충현은, 그리고 무인의 자존심과 긍지는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하랴?
그저 때를 잘못 타고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할 수밖에.
“형님…….”
비록 일충현의 속마음까지 알지는 못했지만, 운현은 그가 결의를 굳힌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포기도, 체념도 아니었다.
무인으로서 일충현의 충정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다시금 고개를 떨어뜨리는 운현을 바라보며 일충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동생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네.”
“네?”
운현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한편으론 우스워서 일충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허허, 자네 얼굴이 엉망이 되었군.”
운현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웃는 낯으로 일충현에게 말한다.
“지금 형님 모습보다야 더하겠습니까?”
일충현은 운현의 말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부탁이시라면…….”
운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일충현은 그제야 생각난 듯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나중에 내 짐을 자네가 좀 맡아 주게. 혹시 기회가 된다면 내 가족들에게 전해 줘도 좋고. 변변찮은 것들이라 남에게 보이기는 좀 부끄럽군. 그래도 남보다야 동생이 낫지 않겠나?”
일충현은 웃으며 말했지만 운현은 다시금 목이 메었다.
지금 일충현은 자신의 유품을 운현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형님…….”
운현은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애써 눈물을 삼켰다.
그런 운현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일충현이 말을 이어 갔다.
“아, 그리고 작은 반지 하나가 있을 테니 자네가 갖도록 하게. 뭔가 주고 싶은데 그런 것밖엔 없군.”
운현의 눈에 다시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하며 고개가 수그러진다.
그러나 일충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오늘이 자네와 나의 마지막 수련이 되겠군.”
“네?”
예상치 못한 일충현의 말에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일충현은 짐짓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자네, 내게 보여 줄 것이 있지 않았던가?”
“아!”
운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하자 일충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네. 자네가 보았다는 그 백호수련검식의 결론을 내게 보여 주게.”
“하, 하지만 이곳은…….”
운현은 조금 머뭇거렸다.
지금은 목검이 아니라 나뭇가지조차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어떻게 검식을 펼쳐 낸단 말인가?
그러나 일충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어서서 자세를 잡아 보게.”
운현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주저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바람이다.
비록 이곳이 옥이라 해도 어찌 그 뜻을 거절할 수 있으랴?
“알겠습니다.”
운현은 일어서서 몸을 똑바로 펴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슬쩍 주위를 살펴보니 어찌어찌 공간은 나올 듯했다.
게다가 그사이 적응이 되었는지 코를 찌르던 냄새도 그리 역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바로 앞에 검이 있다고 상상하게.”
일충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중에 갇힌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고 힘이 실린 음성이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검을 쥐되, 검 전체가 또렷하게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네.”
운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검을 떠올렸다.
부웅.
애써 노력할 것도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자마자 눈앞에 자신의 목검이 마치 실제인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운현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목검을 쥐었다.
스윽.
손을 움켜쥐자 목검의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실제로 있을 리가 없는데도 목검 특유의 둔탁한 감이 손에 전해져 오는 듯했다.
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살짝 숨을 고르고 운현은 목검의 끝을 응시했다.
역시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운현에게는 자신이 쥐고 있는 목검의 끝이 마치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자네가 쥐고 있는 검이 느껴지는가?”
일충현의 물음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검식을 펼칠 수 있겠나?”
운현은 가만히 시선을 움직여 지금 있는 장소의 넓이를 가늠해 보았다.
백호수련검식을 제대로 펼치기엔 조금 좁은 듯도 했지만, 어차피 검이 닿을 리가 없으니 그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무리가 없어 보였다.
운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여 주게.”
숨을 고를 필요도 없었다.
일충현의 말이 끝나자 운현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나갔다.
처음에는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곧 거침없이.
운현의 손에서 백호수련검 제일 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허허.’
운현이 백호수련검식을 시작하자 일충현 교두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어리숙해 보이던 학사가…….’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깜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던 운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무공을 배우면서도 언제나 책과 필기구를 들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해 대던 그 눈빛도 생생했다.
그런데 그러던 운현이 자신 앞에서 검식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일충현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군.’
일충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운 학사도, 그리고 나도……. 정말 많이 변했어.’
강호의 꿈을 접고 무관의 길에 들어섰을 때 일충현이 느낀 것은, 운현이 처음 자금성에 들어와 부딪힌 감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인생을 전부 걸었건만 자신은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충정과 실력보다는 연줄과 간교한 꾀가 더 판을 치는 이곳에서 자신이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라리 세상이라도 어지러웠다면 무언가 길이 보이기도 하련만, 태평한 세상은 자신에게 이곳에서 썩어 갈 것을 강요했다.
자금성에서 자신은 완벽하게 유배되어 있었던 것이다.
‘후후. 운 학사는 나를 만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었지만…….’
그러다 운현을 만나고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게 되었다.
시작이야 어떻건, 무공에 대한 운현의 관심과 쏟아지는 질문들은 일충현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했고 자기 스스로의 대답을 이끌어 내게 했다.
‘다행인 것은 어쩌면 내 쪽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로부터 일충현은 조금씩 변해 가기 시작했다.
거리를 두던 교두들과도 친하게 되었고, 금의위 훈련생들을 가르치는 것에도 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황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좌절에서 벗어나 조금씩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 몇 년간은 행복했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행복했었다.
‘허허.’
일충현은 눈을 감고 조금씩 가슴으로 밀려드는 따뜻함을 음미했다.
그러나 마냥 이렇게 감회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운현더러 검식을 펼치도록 종용한 것은 그저 잠시간의 회상을 위해서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충현은 눈을 떴다.
날카롭고 냉정한 금군교두의 눈빛이, 강호 무림을 종횡하던 고수의 눈빛이 운현의 검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운현은 백호수련검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검이 없다는 것은 아예 잊은 듯, 그의 눈빛과 손놀림에서는 한 치의 허술함이나 어색함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었는지 모른다.
사아아.
여인의 부드러운 옷자락인 양 운현의 손이 흐르고 그 손을 따라 보이지 않는 검이 물결쳐 흘러간다.
그 누구의 손에도 검은 쥐어져 있지 않았건만 운현에게도, 그리고 일충현에게도 백호수련검의 검로는 또렷하고 선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일충현이 눈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음?’
그것은 백호수련검이 아니었다.
지금 운현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은 일충현이 알고 있던 백호수련검과는 너무나 달랐다.
검로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뒤이어 나올 동작이 무엇인지도 일충현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현의 검은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그때의 그 수련검이라고?’
일충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운현이 펼치고 있는 것이 백호수련검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아악, 휘릭.
운현의 소매가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백호수련검식이 이어졌다.
일충현은 운현의 검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은 옥중에 갇힌 몸이라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일충현의 눈빛은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휘익.
운현의 검식이 끝을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일충현은 백호수련검의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아!’
그것은 검로의 변화도, 기세의 차이도 아니었다.
백호수련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도도한 흐름, 바로 그것이 변화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충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의 검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설마.”
일충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운 학사의 검이 나를 뛰어넘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사실은 냉정했다.
강호 무림에서 삼류니, 이류니 하는 우열은 사실 고수의 입장에선 별것 아니다.
조금만 수련에 힘쓰거나 좋은 스승을 만나면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인의 우열이다.
그러나 고수들의 세계는 다르다.
지극히 작은 격차라 할지라도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절대적이다.
그야말로 잔인할 정도로 말이다.
후우웅.
그사이, 일충현의 시야로 이제 막 시작한 운현의 백호수련검 제십이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흔들리던 일충현의 눈동자는 더더욱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