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변고(變故)
“대체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는가? 이미 보직을 받은 금의위의 실수라면 일충현 교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운현이 동의를 구하듯 물었지만 박 환관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높으신 분들께는 달리 보이시는 모양입지요, 니예.”
자금성은 말 그대로 용담호혈(龍潭虎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다.
그간 자금성을 휩쓸고 지나간 크고 작은 폭풍이 대체 몇 번인지 알 수 없고, 그에 휩쓸려 목숨을 잃거나 관직을 박탈당한 사람의 수도 셀 수 없다.
그들이 모두 진짜로 목숨을 잃을 만한 큰 실수나 죄가 있어서 그런 일을 당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운현이야 자금성 안의 절해고도인 창룡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일충현 교두님께 책임을 물으려 한단 말인가?”
뭘 모르는 학사의 답답한 물음에 박 환관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이유 같은 건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 운현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평소 일충현 교두님은 전혀 드러내지 않으십니다만…….”
박 환관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그분은 전통 있는 무가의 자손이신지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사옵니다. 게다가 윗분들 중엔 은근히 일충현 교두님을 거북해 하고 있던 분들이 계셨던 터라…….”
그건 운현이 생각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확한 대답이기도 했다.
결국 일충현 교두가 고관들이 내치기에 가장 좋은 패라는 뜻이다. 적당히 무게감 있으면서도, 평소 치워 버리고 싶었던 패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네!”
탁.
운현이 탁자를 내려치며 강하게 말했다.
“허나…….”
박 환관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운현은 격앙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충현 교두님만큼 자신의 책무에 충실한 분이 어디 있는가! 내 결코 이 일을 묵과하지 않겠네.”
‘헤이요.’
박 환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절해고도의 원주민인 주제에 거센 폭풍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묵과하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박 환관의 이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황상께 소(疏)를 올려서라도 반드시 이 일을 바로잡고야 말겠네.”
“니옛?”
이번에 놀란 것은 박 환관이다.
“소라면, 상소문 말입니까요? 우, 운 학사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내심 박 환관은 당황했다.
사실 지금 자금성 내에 몰아치고 있는 폭풍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아예 작정을 하고 나선 듯 ‘반역 모의’라는 섬뜩한 단어마저 튀어나오고 있었다.
명분이야 무엇이건 상대 계파의 목적은 간단했다.
이 기회에 적대 계파가 가진 금의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해, 즉 자기 계파의 핵심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 계파는 일충현을 내버린 것이고 말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만일 운현이 일충현 교두를 두둔하는 상소라도 올렸다간 단번에 이 폭풍에 휩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무도 지켜 주지 않고 누구도 편들어 주지 않는, 두 계파 모두가 적대시하는 대상으로서 말이다.
“이럴 때가 아닐세. 생각난 김에 지금 바로…….”
운현은 대뜸 자세를 바로 하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박 환관은 황급히 그를 불렀다.
“운 학사님!”
운현이 고개를 돌린다.
박 환관은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학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곳 황궁은 갖은 계략이 난무하는 곳이옵니다아.”
박 환관은 미소 지었다.
“설마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도 않으시고 비천한 소인의 말만으로 소를 올리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상소문을 올린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상소문 한 장 때문에 유배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 또한 부지기수이니, 박 환관의 말대로 섣불리 손댈 일이 아니다.
이 정도면 운현이 조금 주저하리라고 박 환관은 생각했다.
그러나 운현의 반응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확인 같은 건 필요 없소.”
운현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차피 내가 당사자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도 없는 일. 결국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을 수밖에 더 있겠소? 그렇다면 나는 내가 믿는 사람들의 해석을 택하겠소.”
운현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붓을 들었다.
그 당찬 대답에 잠시 혼란에 빠져 있던 박 환관이 가까스로 물었다.
“해, 해석이라니요?”
운현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같은 사실이라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해석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소.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오. 그러니 이것은 결국 누구를 신뢰하느냐의 문제요.”
붓을 든 운현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박 환관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일충현 교두님은 이따위 일로 해를 입으셔서는 절대 안 되는 분이고, 박 환관 역시 단 한 번도 내게 허튼 일을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오. 나는 두 사람을 믿소.”
‘세상에…….’
박 환관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어려운 말을 잔뜩 늘어놓긴 했지만 결국 박 환관 자신의 말만 믿고 상소문을 쓴다는 말이다.
‘어리숙하다는 건 진즉에 알았지만 이다지도 어리숙할 데가…….’
환관 박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신을 믿는다는데 무어라고 하랴? 박 환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은 속에서 무언가 뭉클한 것이 올라와 말문이 막히기도했고 말이다.
사락, 사락.
운현의 붓은 벌써 종이 위를 일필휘지로 질주하고 있었다.
박 환관은 입을 꾹 다물고 운현이 상소문을 쓰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건, 박 환관도 어쩔 수 없었다.
“잘 부탁하네.”
“니예. 걱정 마시와요, 호호호.”
박 환관은 운현의 상소문을 품에 안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고개를 숙여 운현에게 인사를 한 뒤, 박 환관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가 사이를 빠져나왔다.
“헤효.”
문연각을 나서며 박 환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 생활이 벌써 십 년이 넘었는데도 사람이 참…….’
박 환관은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얄팍한 상소문 한 장에 목이 달아난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걸 운 학사 정도 되는 사람이 왜 모른단 말인가?
‘자, 운 학사님의 이 상소문을 어떻게 할까나?’
운현에게서 상소문을 건네받는 것은 간단했다.
‘접수하는 곳이 어딘지 아시는지요오?’ 하는 말로 박 환관은 운현의 상소문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상소문까지 작성하고, 게다가 그걸 이렇게 쉽게 맡기는 운현을 보며 환관 박규는 어이가 없었다.
“별수 없지, 양 환관에게 저녁이라도 한 끼 사는 수밖에…….”
양 환관은 전국에서 올라온 상소문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환관이다.
맡은 일이라야 그저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뿐이니 무슨 힘이 있으랴만, 맨 위에 놓인 상소문과 맨 아래 깔린 상소문은 꽤 큰 차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지금 품 안에 안고 있는 상소문은 제일 바닥에 깔릴 것이다.
가능하면 누구의 눈에도, 물론 황제의 눈에도 띄지 않게 말이다.
“후훗.”
환관 박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까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을 믿는다’라고 말하던 운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헤라, 양 환과아안. 이거 조오오기 바닥에 차악 깔아 주게나아.”
양 환관에게 할 말을 마치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환관 박규는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걸음 뒤로 작은 웃음소리가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조롱이 아닌, 유난히 밝고 따뜻한 웃음소리였다.
***
우웅.
목검이 허공을 가르자 희미한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검로는 차가운 시냇물처럼 부드럽게 공간을 흐르고, 가냘픈 소리는 작은 여울처럼 조용히 울려 나고 있었다.
위잉.
운현의 목검이 또 한 획을 공중에 그렸지만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여린 울음소리뿐, 운현의 목검은 백호수련검식의 검로를 따라 조용히 움직여 나갔다.
그 목검에는 낯선 기운이 희미하게, 그러나 확실히 어려 있었다.
탁.
“후우.”
운현이 긴 숨을 내쉬는 것과 함께 백호수련검 십이식이 끝났다.
살짝 숨을 몰아쉬던 운현은 자신의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일렁이던 기운은 어느새 사라지고 목검의 투박한 검 날이 두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운현은 가만히 검 날을 쓰다듬으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역시 지난번처럼은 안 되는군.”
백호수련검의 수련을 시작하며 운현은 꽤 마음이 두근거렸었다.
그때처럼 눈앞이 열리는 경험을 또다시 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
아쉬움이 가득 밀려왔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으로 운현은 허전한 마음에 위안을 삼았다.
이젠 백호수련검식이 무엇을 말하려는가도 충분히 알겠고, 목검에도 희미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백호전 학사가 이르기를 검이 스스로 진동을 시작하면 수련의 초입에 든 것이요, 검에 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면 수련이 완숙해진 것이며, 천지에 기가 충만함을 깨닫게 되면 이로써 수련이 끝난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백호전 학사의 기록에 따르면 수련이 끝나는 날도 머지않았다.
“훗.”
백호전 학사를 생각하니 운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은 같은 학사인 내가 자신의 검식을 익힐 줄은 생각도 못 했겠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책에서도 숙련된 무관의 경우를 항상 예로 들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도 가상하다고 생각해 주시구려. 학사인 내가 진짜 검도 아닌 목검을 들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만하면 정성이 갸륵하다고 해 줄만 하지 않소?”
설마 목검을 들고 수련할 줄은 백호전 학사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 수련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호전 학사가 놀라는 모습을 상상하며 운현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일충현 교두님은…….”
목검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또 일충현 교두의 일이 생각난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별일이야 없겠지.’
상소문을 박 환관에게 맡기고 나서 운현은 언제나처럼 금의위 훈련장을 찾았다.
언뜻 보기에 훈련장의 분위기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교두들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혐의다. 교두님은 괜찮을 거야.’
마음 한쪽 구석에서 올라오는 염려를 털어 버리듯, 운현은 스스로 다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상소문이 무슨 큰 힘이야 되겠냐마는, 어쨌든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고 안심이 되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운현은 목검을 들어 보며 살짝 눈을 찌푸렸다.
“왜 초입에 한다는 진동은 안 하고 그냥 넘어갔던 거야?”
자신의 검에서 검명이 났던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는 것을 운현이 알 리 없었다.
“아, 벌써 시간이…….”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아쉬운 듯 바라보고 운현은 목검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각 사이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뒤로 천천히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
박 환관이 염려한 폭풍은 곧 찾아왔다.
콰당.
운현이 벌떡 일어서자 문연각의 고풍스러운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하지만 지금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 박 환관?”
박 환관에게 묻는 운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대답하는 박 환관의 표정 또한 밝지 않았다.
“니예. 밤사이 투옥된 고위 관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요.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줄줄이 잡혀온 사람들 중에는 무장이며 무관들도 적지 않은데…….”
박 환관은 머뭇거렸다.
“그중에 일충현 교두님과 다른 금군 교두들도 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