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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4화 (24/530)

024화. 빗나간 예측

이야기꾼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전통 있는 세가의 명예를 모욕당했으니 그저 좌시할 수도 없는 일. 결국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단천은 철가장의 비무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두 세가가 전면전을 벌이진 않았구려?”

운현의 질문에 새로 온 이야기꾼이 고개를 저었다.

“수틀린다고 무조건 들이박으면 그건 사파지요. 게다가 소림사가 바로 지척에 있는 하남성 아닙니까?”

이야기꾼은 장황하게 말을 이었다.

“비록 소림사가 패권 다툼에 직접 나서진 않지만 무림세가의 전면전까지 방치하진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소림사는 무림의 태산북두니까요.”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의 이야기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두 가문은 비무대회라는 이름으로 한바탕 자웅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먼저 두 가문에서 선별된 아홉 명의 제자들 간의 비무가 있었죠.”

이야기꾼은 말을 멈추고 슬쩍 운현의 눈치를 살폈다.

“전부 다 이야기해야 합니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소. 그쪽은 나중에 들어도 되니까 일단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도록 합시다.”

이야기꾼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역시 이야기의 맛을 아시는군요. 그럼 지엽적인 문제는 생략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크흠, 크흠.”

이야기꾼이 헛기침을 하자 운현이 옆에 있던 잔을 쓰윽 밀었다.

“차 여기 있소.”

“아, 감사합니다.”

꿀꺽.

목을 축인 이야기꾼은 눈을 빛내며 말을 계속했다.

“결국 결판은 가주들 간의 비무에서 나기 마련이지요. 철가장의 장주 일도양단 철무웅과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비무대에 올랐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모용세가가 불리했습니다. 바로 전 비무에서 대제자인 모용진이 어이없이 패한 데다가, 한창 기세를 타고 있는 일도양단 철무웅의 도를 상대해야 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철무웅은 자신만만하게 공세에 나섰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며 운현의 눈앞에 마치 그림처럼 비무 장면이 펼쳐졌다.

부우욱.

일도양단 철무웅의 도는 매서웠다.

한창 기세를 타고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철무웅은 과감한 공격으로 관일검 모용단천을 몰아갔다.

채앵, 챙.

하지만 명문가의 저력은 쉽사리 승리를 넘겨주지 않았다.

관일검 모용단천은 차분한 검로로 철무웅의 변칙적인 공격들을 무산시켜 나갔고, 상대의 틈을 노려 예리한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빼앗긴 싸움의 승기를 되찾아오지는 못했다.

강호 경험이나 가문의 검술로 보아 관일검 모용단천이 더 유리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싸움의 기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고 있었다.

우웅, 콰앙.

이제 비무는 단순히 검과 도의 부딪힘을 넘어 서로의 전력을 담은 충돌로 번져 갔다.

각자의 보법들이 어지러이 얽혀 들고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위기의 순간들을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비무는 마지막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아!”

갑작스러운 운현의 탄성에 한창 침을 튀기던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이야기를 중단당한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없는 항의를 슬며시 묵살하며 운현은 넌지시 물었다.

“모용가주가 이겼겠구려?”

“네?”

이야기꾼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운현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미리 결과를 예측당한 이야기꾼의 반응은 언제나 둘 중의 하나였다.

놀라움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이럴 때면 상대의 기분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 필요하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한 말이오.”

운현의 말에 이야기꾼의 표정이 풀렸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저는 또…….”

이야기꾼은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비무는 결국 관일검 모용단천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

“에엑?”

갑자기 터져 나온 괴상한 외침에 이야기꾼은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야기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놀란 사람은 오히려 운현이었다.

“모용가주가 졌다고?”

운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야기꾼을 쳐다보았다.

이야기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졌습니다. 이로써 모용세가는 하남성의 패권을 사실상 잃어버리고…….”

그는 끊어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운현의 관심은 지금 뒷이야기에 있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운현은 손을 들어 이야기꾼을 제지했다.

“모용가주가 질 리 없는데? 혹시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오?”

이야기꾼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진다.

아무리 이곳이 자금성이라지만 이야기꾼에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있다.

“잘못 알다뇨? 제가 이 두 눈으로 직접 본 비무입니다. 그러는 나으리께서는 보지도 못했으면서 왜 자꾸…….”

“아니, 그게 아니고 말이오.”

덜컹.

다급한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붓을 검처럼 쥐고 앞으로 쭉 뻗었다.

“마지막에 말이오, 모용가주가 혹시 이렇게…….”

운현은 검을 휘두르듯 붓으로 공중에 곡선을 그려 나갔다.

“아이쿠, 나으리! 먹이 튑니다요!”

기겁한 이야기꾼이 몸을 뒤로 빼고 옆에 섰던 금의위들도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운현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식의 검식을 쓰지 않았소?”

운현은 일말의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이야기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야기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무슨 검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관일검 모용단천은 그런 검식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니, 물론 그렇겠지만 말이오.”

관일검 모용단천의 유명한 검식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꾼이 설명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방금 전 자신이 펼쳐 낸 검식이 없다는 것도 운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그가 쓰는 모용세가 검로의 흐름이란 걸 생각해 보면…….”

이야기꾼이 몰라서 그렇지 모용세가의 검법에는 분명 이런 검로가 존재할 것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이건 모용세가 검로의 흐름을 보면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과 같은 검로이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이길 수 있는 비무를…….’

운현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졌지?”

“실력이 철무웅보다 못하니 진 것이지요. 옛말에도 이르기를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고…….”

운현의 의문에 이야기꾼이 명쾌한 해답을 내려 주었지만 운현은 납득할 수 없었다.

‘모용가주가 철무웅보다 못하다고? 그런 놀라운 검법을 가지고 대체 어떻게…….’

운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도양단 철무웅의 실력도 대단하긴 하지만 벅찬 상대로 보이진 않았다.

모용세가의 검이라면 분명히 승리해야만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일부러 진 건가?’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가문의 명예와 존망이 걸린 비무에서 일부러 질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가주가.

운현은 이야기꾼을 노려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정말 모용가주가 졌소?”

“네, 졌습니다.”

이야기꾼은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운현을 마주 쳐다보며 말했다.

운현은 눈을 부라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이야기꾼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은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정말이오?”

드디어 이야기꾼이 화가 났다.

“나으리!”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자꾸 이러시면 저 갈랍니다!”

***

“허, 거참…….”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연각 계단을 올랐다.

“왜 졌지?”

습관적으로 문연각 관리에게 인사를 하고 서가들을 지나면서도 운현은 온통 모용가주의 비무 생각뿐이었다.

길길이 화내는 이야기꾼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돌아오는 길이지만, 여전히 운현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덜컹.

운현은 자리에 앉아 자신이 기록한 서책을 펼쳤다.

그리고 관일검 모용단천의 비무를 찾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흐음.”

사락.

운현은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토해 나갔다.

그러나 기록된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관일검 모용단천, 패(敗).

자신의 눈에는 관일검 모용단천이 마지막 검식으로 승리하는 장면이 이토록 생생한데, 비무 기록은 운현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끄응“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운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지?”

“안녕하십니까요, 운 학사님.”

운현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 박 환관.”

목소리의 주인공은 환관 박규였다. 박 환관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운현도 살짝 고개를 숙여 박 환관의 인사에 답했다.

“오늘도 책을 가지러 왔소?”

운현의 물음에 박 환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니예, 지나는 길에 학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박 환관은 슬쩍 운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심려가 크실 줄 압니다만, 너무 염려 마시와요. 니예.”

“응? 아, 아니 방금 그건…….”

운현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운현의 해명은 이어지지 못했다.

“워낙 일충현 교두님과 각별한 사이시니 걱정이야 되시겠지만, 높은 분들이 하시는 일이니 다 깊은 생각이…….”

예상치 못한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박 환관?”

며칠 전 보았던 도진 교두의 굳은 얼굴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불안한 예감에 운현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충현 교두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요?”

운현의 목소리가 커지자 박 환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아직 못 들으셨단 말입니까요?”

***

“그게 정말이오?”

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박 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니예. 높은 분들이 하시는 일을 저희 같은 것들이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이번 일은 아무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운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박 환관의 말에 따르면 이제 갓 보직을 받은 금의위 한 명이 무언가 실수를 해서 높으신 분의 심사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저 단순한 실수였지만 상황은 어이없게 전개되었다.

서로가 꼬투리만 찾아 으르렁거리던 두 계파의 전면적인 충돌로 격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사자였던 금의위는 당장에 투옥되었고 책임론은 일파만파 번져 갔다.

잘못하다간 이 일로 인해 한 계파의 뿌리가 뽑혀 나갈 기세였다.

공격을 당한 계파는 어떻게든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문제는 그 책임을 덮어쓸 사람이 바로 일충현 교두가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전혀 들으신 바가 없으셨던 것입니까?”

박 환관은 운현의 표정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금시초문일세.”

“아, 그러셨군요오.”

박 환관은 말끝을 흐렸다.

그 무뚝뚝한 창룡전 관리 사일천이나, 고지식한 무관인 일충현 교두는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퍼뜨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일이 터진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모르다니, 역시 창룡전은 자금성 안의 외딴섬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그 고도(孤島)의 주민이, 지금 박 환관 앞에서 당혹과 참담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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