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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3화 (23/530)

023화. 학사의 검

스윽.

운현의 손이 텅 빈 허공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검을 쥐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사락.

당연하게도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운현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우우우.”

빈손에 검이 잡히리라곤 생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잡힐 것만 같았다.

그저 손을 뻗어 쥐기만 하면 말이다.

운현은 눈을 떠 자신의 텅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어제의 그 경험이다.

명색이 학사임에도 도저히 글로 옮길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사실 하려 든다면 못 할 것도 없으리라. 평생을 붓을 쥐고 살았는데 글로 옮기자면 어떻게든 못 하랴.

그러나 두려웠다.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이는 그 환상 같은 경험이, 언어와 문장에 끼워 맞추다가 그만 산산이 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적어 두지 못한다는 건 또 그것대로 불안하다.

‘설마 이러다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어쩌면 잊혀지고 왜곡되고, 혹은 색이 바랠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연약한지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결국 남는 것은 오로지 기록뿐이다.

그러나 왠지 이번만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백호수련검의 결론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백호수련검의 결론이 자신을 찾아낸 것이라는 근거 없는 느낌 때문이었다.

“에이.”

덜컹.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이럴 게 아니라 목검이나 받으러 가자.”

운현은 문연각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떠난 빈자리에는 그간 운현의 골치를 썩이던,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아닌 서책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

병기창을 담당한 금의위는 무척이나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운현을 알아보는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도 그는 운현에게 신분패를 요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한참을 살펴보았다.

무슨 목검 하나에 이런 유난인가 싶었지만, 자금성에서 이해되지 않는 규칙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아마도 예전에 누군가 목검을 들고 패악이라도 부렸나 보다라고,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누군가 엄연히 목검도 검의 분류에 든다며 이런 쓸데없는 규칙을 만들었거나.

신분패에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는지 금의위는 운현의 금의위 병기창 출입을 허락했다.

“따라오시오.”

그가 앞서가고 운현이 뒤를 따랐다.

경계를 서고 있는 금의위들의 살벌한 눈초리를 느끼며 운현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황궁에서 학사로 보낸 지 십이 년이요, 금의위 훈련장에 출근하다시피 한 지도 벌써 칠 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그러니 지금 경계를 서고 있는 금의위들은 모두 운현이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운현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친근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쩐지 그들의 얼굴에서 낯설음마저 느껴진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병기창의 입구에 다다르자 운현을 인도해 온 이가 경계를 서고 있는 금의위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목검 하나에 생각보다 절차가 까다롭군. 그냥 연무장에 있는 것으로 아무거나 줘도 되는데…….’

문제는 금의위 연무장엔 목검이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 진검들뿐이니 아무래도 창고를 뒤져야 할 터이지만, 차라리 연무장에 있는 진검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저 투덜거려 보았을 뿐이다.

그사이 대화가 끝났는지 함께 온 금의위가 운현에게 손짓을 했다.

운현이 다가가자 낯선 소음과 함께 커다란 금의위 병기창의 문이 열렸다.

그그긍.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함께 온 금의위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어가 보시겠소?”

“들어가도…… 괜찮습니까?”

운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금의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충현 교두님의 부탁도 있으셨고, 신원도 확실하니 원하시면 들어가 보셔도 괜찮소.”

금의위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금의위 병기창을 구경이나 하랴.

“좋소. 그럼 따라오시오.”

금의위가 앞장섰다. 살짝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병기창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작은 소음과 함께 병기창의 문이 닫혔다.

‘우와!’

운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주위에 가득한 각종 병기들은 그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가능하면 가까이서 살펴보고 싶었지만 금의위의 매정한 발걸음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덕분에 운현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이오.”

갑자기 들린 금의위의 목소리에 운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금의위의 뒤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검들이 그제야 운현의 눈에 들어왔다.

“허어!”

운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검이…….”

숫자뿐만 아니라 종류도 다양했다.

운현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명색이 학사인 데다 문연각에서 십여 년을 넘게 지냈으니 수많은 책으로 가득한 서가는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검이 이토록 많이 모여 있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장 가까운 검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아!”

순간 운현은 흠칫했다. 그러고는 금의위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금의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한 손을 허리에 찬 검에 얹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허락이 떨어지자 운현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스르릉.

“호오.”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날카로운 검이었다.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칼날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피부에 전해지는 듯했다.

‘처음엔 이런 검만 쥐어도 무언가 뿌듯했지.’

운현은 일충현 교두에게서 처음 검술 자세를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난생처음으로 검을 손에 쥐어 보았다.

햇빛에 번쩍이는 검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엄청난 힘을 얻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십 년이 넘은 얘기군.’

스릉, 탁.

운현은 검을 검 집에 넣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자금성에 들어오자마자 일충현 교두로부터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창룡전 학사로서 십이 년이라는 것은 운현의 무공 수련 경력도 벌써 그만큼이라는 것을 뜻한다.

“응?”

늘어서 있는 검들을 조금 지나쳐 걷다가 운현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검을 들어 보았다.

“아! 이건…….”

휘릭.

운현이 검을 뽑자 검 날이 희한하게 휘청거린다.

“연검이오.”

금의위의 굵직한 목소리가 조금 뒤에서 들려왔다.

“자칫 손목이 잘리기 십상이니 조심하시오.”

금의위 훈련장에서 본 적은 많아도 직접 연검으로 수련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손안에서 부드럽게 휘청거리는 검 날을 막상 대하고 보니 신기하기만 하다.

운현은 연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휘릭, 휙.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 날이 이리저리 휘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연검의 움직임이 꽤나 신기해서 운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스륵.

아쉬운 듯 천천히 연검을 검 집에 넣으며 운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벌레 잡을 때 이런 검이 있었으면 정말 편했을 텐데…….”

그러나 어차피 그림의 떡이다.

연검을 한 번 바라본 후 운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을 못 가 멈춰 서야 했다.

옆에 놓여 있는 검을 바라보며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특이한 검인데? 검 집도 없고, 게다가 검 날이…….”

운현이 멈춰선 곳은 꽤 커다란 검들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묵직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정말 이상한 건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종이 한 장 베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수련용 검인가?”

운현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금의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오.”

운현이 고개를 돌려 금의위를 바라보았다.

“그 중검(重劍)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건 일충현 교두님 같은 분들뿐이오.”

“아!”

금의위의 말을 듣는 순간 운현의 머릿속에 중검을 든 일충현 교두가 그려졌다.

커다란 검을 쥐고 산악처럼 버티고 서서 천천히 검식을 펼쳐 나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엄청난 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야, 이거 그림 되겠는걸?’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품을 뒤지며 무언가 적을 것을 찾았다.

그러나 빈손으로 온 터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잘 기억해 두어야겠군. 그나저나 이게 바로 중검이라.’

중검 역시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그러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운현은 신기하기만 했다.

“목검은 바로 다음에 있소.”

금의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운현의 출입을 허락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충현 교두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목검 한 자루 들고 와서 건네주는 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운현이 황궁 병기창을 볼 수 있었던 건 사실 일충현 교두 나름의 배려였던 것이다.

‘아, 그렇지.’

금의위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운현의 시선이 가 닿는 곳에 목검이 몇 자루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목검은 앞서 본 검들에 비하면 너무나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사실 금의위에서 목검을 사용할 일이 어디 있으랴?

당연히 그 수가 많을 리 없고, 다른 검들에 비해 허술하게 관리되기 마련일 것이다.

구태여 병기창까지 와야 했던 것도, 너무 중요해서가 아니라 아예 필요가 없어 희귀한 탓이니 말이다.

그러나 운현의 얼굴엔 살짝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후훗.’

운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투박한 목검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 수 년간 언제나 손에 쥐었던 그 목검의 친숙함은,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는 검들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운현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크흠.”

운현이 목검을 계속 쳐다보고 있자 금의위가 헛기침을 했다.

“적당한 것을 골랐으면 나가도록 합시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뭉툭한 날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네가 내 검이로구나.”

운현의 부드러운 시선이 닿는 곳에 투박한 목검 하나가 가만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흐음, 그래서 어찌 되었소? 모용세가의 가주가 결국 비무에 응했소?”

하남성에서 왔다는 이야기꾼은 운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전통 있는 모용세가로서는 어떻게든 철가장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려 했습지요.”

한창 이야기에 흥이 오르고 있는 듯 이야기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흥 세력인 철가장의 장주 일도양단 철무웅의 실력도 부담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모용세가로서는 이기든 지든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 싸움이었으니까요.”

이야기꾼의 입에서 튀는 침방울을 피하느라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새로 온 이야기꾼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반면 하남성의 패주이면서도 전통 있는 모용세가의 이름에 항상 눌려 있던 철가장으로서는 절호의 기회 아닙니까? 놓칠 리가 만무하지요.”

운현이 백호수련검의 결론을 보았거나 말았거나 일상은 여전히 계속된다.

목검을 새로 받은 운현은 다음 이야기꾼의 소환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하루 종일 목검만 들고 살고 싶지만 세상 사는게 그리 만만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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