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주화입마
“그래, 갑자기 긴히 물어볼 말이 무엇이오, 운 학사?”
일충현 교두의 말에 회상에서 깨어난 듯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긴히 물어볼 것이 있다며 일충현 교두를 이곳 자그마한 전각까지 불러낸 사람은 운현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각에 도착하자 운현은 무언가 회상에 잠긴 듯 텅 빈 공터를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기다리던 일충현 교두가 넌지시 재촉을 하자 그제야 운현의 시선이 일충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괜찮소.”
일충현 교두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운현은 조금 시선을 떨어뜨리며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실은 예전에 주셨던 목검이 그만 못 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운현은 또 한동안 말이 없다.
일충현 교두는 가만히 그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수련에 무슨 변화라도 있었소?”
운현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일충현 교두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일충현 교두는 미소로 답했다.
그저 목검이 못 쓰게 된 것만으로 이런 표정을 보일 운현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운현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과연 일충현 교두에겐 감출 수가 없다.
운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지만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마치 세상에 누구도 하소연할 이를 찾지 못하던 사람이 그제야 상대를 만난 듯한 표정이다.
“저, 일충현 교두님.”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일충현 교두를 바라보았다.
“제가 혹시, 주화입마에 든 것 아닐까요?”
일충현 교두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굳은 얼굴로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가 의아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는 주화입마라니.
그러나 일충현 교두는 웃을 수 없었다. 운현의 눈빛이 꽤나 진지한 까닭이다.
일충현 교두는 가만히 운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러나 운현은 불안한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주화입마가 아닙니까?”
“아니오.”
일충현 교두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정말 운 학사가 주화입마에 들었다면 이렇게 내 앞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주화입마’란 주로 내공 수련 중에 사고로 내력과 진기를 크게 다치는 것이다.
평생 쌓아 온 무공을 잃거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경우도 많고, 반신불수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운현이 주화입마가 아니라는 것은 비단 이러한 증상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엄청난 내공이나 고도의 수련이랄 것도 없을 학사에게 대체 무슨 주화입마란 말인가?
일충현 교두의 확고한 대답에 운현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후우, 그렇군요.”
작은 한숨을 내쉰 운현은 무의식적으로 전각 옆 공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충현 교두가 운현에게 물었다.
“주화입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오, 운 학사?”
“실은…….”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가 백호수련검식의 결론을 본 것 같습니다.”
일충현 교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론을 보았다니, 그럼 검식의 끝을 보았단 말이오?”
검식의 끝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 검식을 모두 익혔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검식의 끝을 본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검의(劍意)를 모두 깨우쳤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강호의 고수들에게조차 어려운 일이거늘, 어찌 무림인도 아닌 학사가 검식의 끝을 본단 말인가?
그러나 일충현 교두의 물음에 돌아온 운현의 대답은 애매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일충현 교두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런 것 같다라니, 대체 무슨 말이오?”
검의를 깨달은 자가 그것을 깨달았는지 아닌지조차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 아닌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운 학사.”
운현은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보았으나 모른다?”
일충현 교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운현의 말을 반복했다.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간 것도 아니고, 납득이 간 것도 아니니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저 스스로에게도 설명이 되지 않으니 깨달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그저, 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운현은 자신도 답답한 듯 일충현 교두를 쳐다보았다.
일충현 교두는 진지한 눈빛으로 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운현을 바라보다가 일충현 교두는 빙긋 미소 지었다.
“축하하오, 운 학사.”
“네?”
운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일충현 교두의 미소는 여유로웠다.
“깨달음을 직접 전하지 않고 단지 수련검식만 남긴 것은 그 깨달음을 말로 전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러니 운 학사가 깨달았다 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러나 일충현 교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분명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적어도 자기 자신만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무엇인가 깨달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았다’라는 것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운현에게 일충현 교두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운 학사가 보았다는 백호수련검식의 결론을 나에게도 한번 보여 주겠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운현이 줄기차게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는 그가 한번만 검식을 펼쳐 보이면 알 일이다.
“아, 저…… 제 목검은…….”
운현은 말을 흐렸다.
“아참, 아까 목검이 못 쓰게 되었다고 했소?”
일충현 교두가 허리에서 검을 풀었다.
“우선 이 검을 쓰시오.”
일충현 교두가 검을 내밀자 운현은 눈이 동그래졌다.
“일충현 교두님의 검을 제가 어떻게…….”
부드러운 미소가 일충현 교두의 입가에 어렸다.
“괜찮소. 잠시 빌려주는 것이 무슨 대수겠소? 게다가 백호수련검식의 결론을 견식 하는데 이 정도야 당연하지 않겠소? 천하에서 오직 운 학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오.”
무인이 자신의 검을 빌려주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검을 내어 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운현은 일충현 교두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뢰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일충현 교두님…….”
운현이 머뭇거리는 것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일충현 교두가 덧붙였다.
“딱히 결론이 아니어도 괜찮소. 그저 그동안의 수련 성과를 한번 보여 준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해 보시오.”
사실 수련 중에는 자신의 성취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충현은 운 학사가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다.
게다가 자신의 말 그대로 그것은 세상에서 운 학사만이 알고 있는 것 아니던가? 백호수련검식을 익힌 사람은 천하에 오직 운 학사뿐이니 말이다.
운현은 일충현 교두가 내민 검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현듯 어젯밤의 일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검을 쥔다면 어제의 환상이 다시금 검 끝에서 펼쳐질 것만 같았다.
슥.
운현은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받아 들었다.
그동안 자신의 손처럼 익숙해져 있던 목검과 달리 일충현 교두의 검은 그 무게만으로도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운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푸른 검 날이 햇빛에 반짝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예전엔 몰랐다.
그러나 이제 와 보니 일충현 교두의 검은 섬세함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운현은 홀린 듯 일충현 교두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교두님!”
누군가의 목소리가 일충현 교두의 주의를 끌었다.
“도진 교두 아닌가?”
일충현 교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진 교두가 전각 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도 교두?”
“급히 가 보셔야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도진 교두가 말했다.
일충현 교두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알았네.”
일충현 교두는 운현을 돌아보았다.
“아쉽지만 백호수련검의 결론은 나중에 봐야 할 것 같소.”
아쉬운 것은 운현이 더하다.
말 그대로 손안에 들어온 검이 다시 나갈 판이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검을 갈무리했다.
스릉, 탁.
햇빛에 무지개를 그리던 칼날은 작은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운현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일충현 교두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검을 받아 든 일충현 교두는 미소를 지으며 운현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아! 제 목검은…….”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 일충현 교두에게 운현이 황급히 말을 건넸다.
일충현 교두는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가면서 이야기해 둘 터이니 금의위 병기창에 가서 새 것으로 하나 받도록 하시오.”
‘병기창?’
목검 하나 받는데 병기창까지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일충현 교두는 곧 도진 교두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전각 사이로 사라지는 일충현 교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물어볼 것이 많은데…….”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밖엔 없다.
운현은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차라리 일충현 교두의 검을 쥐어 보지 못했다면 아쉬움이 덜했을 것이다.
익숙하던 목검마저 부서져 버린 지금, 운현은 텅 빈 손이 그저 쓸쓸하기만 했다.
“문연각에 갔다가 새 목검이나 받으러 가야겠군.”
운현은 허전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문연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문연각에 돌아와서도 운현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서책을 꺼내 들었지만 나오는 것은 까닭 모를 한숨뿐이다.
한동안 그렇게 책을 편 채로 멍하니 앉아 있던 운현은 정신을 추스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마음을 다진 운현은 쥐고 있던 서책에 시선을 던졌다.
그가 습관처럼 집어 든 그것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비무 기록들 중의 한 권이었다.
“흐음, 어제 보던 그 책인데…….”
단정하게 따로 정리되어 있는 열 권 남짓한 책들, 바로 운현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책이다.
그 속에서 펼쳐진 고수들의 몇몇 검로는 운현에겐 풀 수 없는 난해한 수수께끼였다.
문연각에 오면 항상 습관적으로 펼쳐 들었지만 언제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덮어야만 했던 책들.
그러나 오늘만은 조금 달랐다.
“음……. 당연한 검로로군.”
탁.
운현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른 책을 꺼내들었다.
“이것도 별다른 건 없고…….”
탁.
운현은 또 다른 책을 들었다.
“이상하군.”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왜 이해가 안 됐던 거지?”
이런 당연한 걸 몰랐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그냥 한 번만 봐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검로들 아닌가?
탁.
운현은 책을 덮었다.
그리고 탁자에 단정하게 쌓여 있는 책들을 눈으로 주욱 훑었다.
시선이 책에 닿을 때마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검로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운현은 중얼거렸다.
“이것도 그렇고, 저것도 마찬가지고……. 볼 게 없군.”
의자에 등을 기대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정작 이해해야 될 건 이해가 안 되고 괜히 딴 것들만…….”
평소의 난제들이 단번에 전부 해결되었지만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한숨을 쉬던 운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