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세월은 지나고 검은 흐른다
“오늘도 좀 늦었네.”
작은 전각 옆에서 운현이 중얼거렸다.
바쁜 일과를 드디어 마치고 이제야 목검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언제나 수련 시간이 부족하여 아쉬운 운현에게는 해 지기까지 남은 두 시진이라는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자, 그럼…….”
운현은 목검을 꺼내 들었다. 벌써 수 년째 손에 익어 온 목검의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지자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따랑.
전각 처마에 매달린 풍경(風磬) 소리와 함께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에 잡은 목검 끝에 여름 오후의 햇살이 걸리고 불어오는 바람은 뺨을 부드럽게 스친다.
그렇게 한동안 미동도 없던 운현의 목검이 어느 순간 완만한 곡선을 그려 나갔다.
부드럽게 그러나 거침없이.
그것이 백호수련검 제일식의 시작이었다.
―사천성에서 왔소?
불안한 눈빛으로 끄덕이는 이야기꾼에게 사무적인 어투의 질문이 날아갔다.
―사천성이면 당문과 점창파로 유명한 곳인데, 혹시 직접 목격한 비무가 있소?
이야기꾼의 눈빛은 이내 반짝이기 시작하고 운현의 붓은 종이 위를 질주했다.
그리고 비무의 끝에서 언제나처럼 이야기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운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꾼에게 대답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해 본 말이오.
이야기꾼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운현의 눈동자는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찌 되었소?
스륵.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천지를 울릴 듯한 기합도 없다.
그러나 이 순간, 주위의 모든 것들은 숨을 죽이고 운현의 검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호수련검 제이식은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조차도 가를 듯했다.
―우웃, 여기 난방 안 합니까?
북경의 매서운 겨울바람은 학사의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한다.
소환된 이야기꾼의 일그러진 표정 위에 운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날도 추운데 나도 웬만하면 이러고 싶진 않소.
물론 겨울에도 소환을 계속해 달라고 한 사람은 운현이지만 말이다.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신진 고수라 했소?
운현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운현은 이야기꾼에게 바싹 다가갔다.
―비무하는 걸 봤소? 들은 것 말고, 직접 목격한 것 말이오.
위잉.
검 끝에 바람이 일었다.
내리던 눈송이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백호수련검 제오식은 겨울 찬바람 속에 꽃처럼 피어나며 그 자태를 뽐냈다.
차갑고 매서운 추위조차도, 그 앞에선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운 학사님.
젊은 무관의 인사에 운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이거 무과의 장원 아니신가?
―학사님,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 이름은 관철훈입니다.
무관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운현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일충현 교두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렇소? 아직 시간이 이른데……. 뭔가 흥미로운 비무라도 있나 보군.
운현이 급히 책과 필기구를 챙겼다.
―어서 갑시다.
관철훈 신임 교두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앞서고 운현이 질세라 걸음을 재촉했다.
그것은 비공식 금의위 전담 학사, 운현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쉬익.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운현의 검로가 원을 그린다.
목검 끝에 하얀 구름이 걸리자 백호수련검 제칠 식은 높다란 하늘에 잇닿았다.
푸른 하늘도, 그 아래 펼쳐진 자금성의 가을날 풍경도 한 자루 목검의 검로 앞에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머나, 어쨌든 문연각의 잡서를 전부 보신 건 사실이잖습니까아?
환관 박규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운현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거야 제목만 아닌가? 제대로 읽은 건 무림에 대한 것뿐이고…….
박규의 얼굴에 웃음이 걸리지만 운현은 여전히 낭패한 표정이었다.
―제발 내가 문연각 잡서에 전부 통달한 것처럼 얘기하고 다니지 말게. 왜 갑자기 한림원에서 내게 책을 찾아 달라는 협조 요청 공문이 날아온단 말인가? 그렇잖아도 바쁜데……
하지만 환관 박규는 여전히 능청스럽다.
그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얼른 화제를 바꿨다.
―니예, 앞으로는 그렇게 합지요. 아참, 오늘 저녁 창음각 공연 얘긴 들으셨는지요?
―응? 공연?
언제나 그렇듯이 운현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환관 박규의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후웅.
화사한 봄볕 속에 운현의 목검이 춤을 춘다.
백호수련검 제구식의 부드러운 검로를 타고 향긋한 꽃향기가 실려 왔다.
한 자루 검의 자취가 마치 세월처럼 고요히, 그러나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쏴아.
한밤에 퍼붓는 빗소리는 유달리 컸다.
그러나 운현의 처소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은 빗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함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꾼의 기록은 조금 이상한 곳이 있군.
책을 넘기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선 이 초식을 썼을 리가 없는데…….
톡톡.
운현은 손가락으로 서탁을 두드렸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 속에서 운현은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역시 이 부분은 틀렸어.
종내 고개를 젓고 운현은 손을 뻗어 다른 서책을 꺼내 들었다.
여름밤은 깊어 가고 창밖에 빗소리는 요란한데, 그의 손에서는 책이 떨어질 줄 몰랐다.
사락.
비단옷을 스치듯 목검이 바람을 스친다.
운현의 목검은 검로를 따라, 세월을 따라 한결같이 흘러갔다.
그렇게 운현의 백호수련검 제십이식은 끝을 향해 내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아!’
그것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펼쳐 낸 백호수련검식의 끝에서 무엇인가 운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비로소 운현은 알았다.
백호수련검의 열두 가지 검식은 사실 하나라는 것을.
‘그래!’
운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백호수련검은 같은 결론을 말하는 열두 가지의 목소리다.’
마치 두터운 휘장이 걷히듯 백호수련검의 열두 가지 검로가 또렷이 살아 나왔다.
그와 함께 운현의 목검이 새로운 백호수련검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십이식이 언제나 부르던 제일식, 곧 진정한 백호수련검 제일식이었다.
우우웅.
희미한 기운이 목검을 뒤덮었지만 운현은 알지 못했다.
탁.
제일식에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나타나 가만히 속삭이고,
쉬익.
제오식에 함초롬히 미소 지으며,
파라락.
제구식에 새침하니 눈 흘기는,
후욱.
그 아름다운 절세가인의 모습에 운현은 모든 것을 잊었다.
사락.
제십이식에 이르러 운현은 백호수련검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제십이식의 끝에 그것이 있었다.
‘아아!’
그것은 백호수련검식의 결론, 그리고 운현이 지난 세월 동안 문연각의 수많은 잡서들 속에서 찾아내었던 검로들의 결론이었다.
일충현 교두의 가르침 속에도, 도진 교두의 화려한 검식 속에도, 의욕에 가득 찬 신입 금의위들의 검 속에도 분명히 존재했던 그것.
그리고 이야기꾼들의 비무 이야기 속에 등장한 고수들의 검 속에 늘 흐르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 그랬었다. 그랬었어.’
논리도, 근거도, 이유도 없었다. 초식의 구분도, 검로의 흐름도 그 앞에서는 의미를 잃었다.
그것은 그렇게나 도도하게 운현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전각의 처마 끝에도, 울리는 풍경 소리에도, 손에 잡은 오래된 목검에도 가득한 그것.
그것은 바로 운현의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하늘과 땅에 가득한 새로운 세계였다.
우우웅.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와 함께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세상도 잊고 검도 잊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뿐.
그 흐름을 따라 운현의 검은 마치 운명처럼 영원을 향한 검무(劍舞)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검무는 길지 못했다.
파아앙.
한 줄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운현의 눈앞에서 나무 조각들이 날았다.
자신의 목검이 산산조각이 되어 바스라지고 있었다.
공중에 비산(飛散)하는 목검의 파편들과 함께 눈앞에 펼쳐졌던 그 장엄한 세계가 마치 환상인 듯 스러져 갔다.
“아!”
운현이 안타까운 마음에 소리 질러 보았지만 눈앞에 가득했던 그 도도한 가인의 자태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는 모습을 감추었다.
다만 남은 것은 아스라한 봄날의 향기처럼 운현의 주위를 떠돌고 있는 그리움뿐.
“아아…….”
가슴 한구석에 바람이 불었다.
텅 빈 손을 몇 번 쥐었다 펴 보지만 아무것도 없는 손은 허전하기만 하다.
아직도 그 감촉이 손에 생생한데, 바스러진 목검도, 멈춰 버린 검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환상이었을까?”
운현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앞에 흩어진 목검의 파편들이 환상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것이 환상이라면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이 뜨거움과 그리움은 무엇이란 말인가?
운현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주르륵.
알 수 없는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운현은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운현은 문득 주위가 꽤 어둑어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벌써 시간이…….”
어느새 저녁이 되었나 보다. 그러나 운현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백호수련검을 수련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직 자신과 검만 있는 것 같은 감각에 빠져들어서,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적도 많았다.
수련을 하는데 밤낮을 모른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지만 운현은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책에 푹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새벽을 맞이하는 일 같은 건, 운현에겐 이미 흔한 일이었으니까.
슥.
운현은 급히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사내대장부, 그것도 선비가 눈물이라니 이 무슨 추태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부끄럽지는 않았다.
의관을 가다듬고 습관처럼 목검을 챙기려던 운현은 자신의 목검이 부서졌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 그렇지. 아까…….’
운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바닥에 흩어진 나무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어쩌지? 목검이 부서져 버렸으니……. 일충현 교두께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한동안 서 있던 운현은 쓸쓸히 발걸음을 돌렸다.
시간이 늦었다는 것도, 목검이 부서져 버렸다는 것도 사실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지금 운현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자신이 보았던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아련한 향수(鄕愁)였다.
“후우우.”
따랑.
작은 풍경 소리를 귓가에 흘리며 운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운현이 떠난 전각에는 점차 어스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그가 숙소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이미 환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지금은 저녁이 아니라 아침이라는 것을 깨달은 운현이 허탈한 웃음을 흘린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한순간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던 그 놀라운 세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운현은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