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찍거나, 혹은 예측이거나
“난창 일위강은 신중했습니다. 불같은 성격의 그 난창이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죠. 하지만 상대가 바로 사혼검이었으니까요.”
유재섭은 한창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이리저리 손짓까지 섞어 가며 말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난창 일위강이 수세로 나오니 사혼검도 검을 아끼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보는 사람들로선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지요, 네.”
때때로 운현의 반응까지 살피며 유재섭은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붓을 놀렸다.
“그래도 먼저 공세를 취한 쪽은 난창 일위강 쪽이었겠구려.”
유재섭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운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이야기꾼 유재섭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수세에 몰린 쪽이 돌파구를 찾기 마련 아닙니까?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난창으로서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 드디어 그가 건곤일척의 수를 던졌습니다.”
운현이 눈을 빛냈다.
과연 난창은 어떤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냈을까?
“그것은 난타였습니다.”
“난타?”
운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난창’이란 별호대로 그의 성명 절기는 창을 이용한 화려한 난타다.
그러나 상대는 사혼검, 오랜 실전으로 단련된 사파의 고수에게 이런 성급한 승부수가 과연 먹힐 것인가?
“설마 난창 일위강이 승부를 포기한 거요?”
유재섭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까딱까딱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난창의 인내심이 드디어 바닥났다. 결국 성격을 드러내는구나’라고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유재섭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리고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함정이었습니다.”
“아하!”
운현이 탄성을 내질렀다.
무인들의 비무가 단순히 힘의 충돌 같지만 고도의 심리전이 전개되는 경우 또한 대단히 많다.
전쟁에 전략과 병법이 있듯이, 규모는 다르지만 무인들의 비무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난창 일위강이 상대의 오판을 유도하기 위해 허초를 펼친 것도 흔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혼검이 넘어가겠소?”
운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혼검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이다.
난창의 의도를 한 번쯤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유재섭은 눈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바로 거기에 난창의 진짜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난창이 노린 바는 다름 아니라…….”
“잠깐!”
운현이 손을 내밀어 유재섭의 말을 제지했다.
유재섭은 당황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운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난타가 시작되면 사혼검은 분명히 의심하며 일단 수비에 치중하겠지. 그렇다면 난창이 노린 점은…….’
“아!”
운현이 돌연 탄성을 내질렀다.
한순간 이 비무의 결과가 그림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운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유재섭을 향해 말했다.
“난창이 졌겠군.”
유재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운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사혼검이 의심할 거라는 것이 바로 난창 일위강의 계산이었을 거요. 그러니 경계심 많은 사혼검이 수비에 치중할 동안,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격으로 그에게 회복불능의 손해를 입히려는 속셈 말이오.”
유재섭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 난창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무인의 절기는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만만찮은 내력을 소모한다.
게다가 상대가 수비에만 치중할 것을 알고 있다면, 그야말로 전력을 다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은 사뭇 흥이 오른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난창의 오산이오. 사혼검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결코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아마 수비에 치중하던 사혼검은 갑자기 과감한 공세를 퍼부었을 거요. 그리고 그 결과…….”
운현은 손가락을 마치 검처럼 세우더니 유재섭의 목을 똑바로 겨누었다.
“이렇게 되지 않았소?”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유재섭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운현이 한 동작은, 갑작스레 공세로 나선 사혼검이 승부를 결정지은 마지막 한 수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오오.”
유재섭은 정말 놀랐다.
운현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난창의 성격이 불 같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사혼검이야말로 그런 사람인 것이 분명하오. 그의 검로는 늘 계산적인 것처럼 보여도 실은 무모할 정도의 과감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이 승부사적 기질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것 말이오.”
운현은 흐뭇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사혼검은 한순간 찾아온 반격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던 것이오. 설혹 그게 아무리 함정 같아 보이더라도 말이오.”
“세상에……. 설마 이 비무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유재섭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감탄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갑자기 쑥스러워진 운현이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알고 있던 건 아니고 그저 그럴 것 같아서 그냥…….”
말은 그리했지만 운현의 얼굴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유재섭의 뒤이은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그냥 다 찍어서 맞추셨다는 겁니까? 정말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찌, 찍기는 누가 찍었다고 그러는 거요?”
눈살을 찌푸리며 운현이 말했지만 유재섭은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미리 알고 계셨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럴 것 같아 한 말씀이라 그러셨지 않습니까? 그럼 그게 찍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찍은 게 아니라…….”
운현은 무언가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그러나 보지 않고 맞춘 걸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풀었다? 아닌데……. 추리했다? 이것도 이상하고……. 보였다? 무슨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좀…….’
유재섭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는 계속 ‘그냥 알았다’였지만 설득력이 부족한 건 ‘찍었다’는 단어나 매한가지다.
“후우.”
이야기꾼의 ‘찍었다’는 단어를 대치할 것을 찾던 운현은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찍은 걸로 합시다.”
운현은 정색을 하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냥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한 말은 아니오. 알겠소?”
“그럼요, 학사님께서 어찌 아무렇게나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여하간 정말 대단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유재섭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혹시 과거 급제도 그 찍기 실력으로 하신 거 아닙니까? 하하.”
그건 그저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계속되지 못했다.
탁.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찔끔한 유재섭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노, 농담입니다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 하하, 하하하…….”
그러나 운현은 유재섭을 노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유재섭은 갑자기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시, 실수다. 내가 그만…….’
너무 긴장이 풀어진 것이 화근이었다.
눈앞의 학사가 만만해 보인 데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가로채버리는 통에 심사가 살짝 꼬였다.
그 탓에 자신도 모르게 말속에 뼈가 들어간 것이다.
‘끄응.’
유재섭은 뭐라 말도 못 붙이고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이제는 처분을 기다릴 밖엔 도리가 없다.
“전시(殿試)는…….”
착 가라앉은 운현의 목소리가 전각에 울려 퍼졌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유재섭에게는 유달리 크게 들렸다.
“전부 서술형이오. 찍어서 맞출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소. 알았소?”
그 말을 끝으로 운현은 붓을 들어 기록을 계속해 나갔다.
그제야 유재섭은 식은땀을 훔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 그럼요, 나으리. 헤헤.”
운현이 그냥 넘어가기로 한 듯하자 유재섭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내가 그만 깜빡 잊고…….’
이곳이 자금성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한 것이 실수였다.
유재섭은 다시 한번 경계심을 북돋았다.
그러다 문득 유재섭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다른 데선 그렇지 않은데, 유독 검을 사용하는 비무는 이상하게 예리하단 말야.’
유재섭은 운현을 쳐다보았다.
비무를 목격하지도 않은 학사가 어떻게 결과를 정확히 알아차린단 말인가?
아무리 무공만 연구하는 학사라 해도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가 난창 일위강이나 사혼검과 같은 고수가 아닌 한 말이다.
‘에이, 설마.’
유재섭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난창 일위강이나 사혼검은 한 성의 패권을 놓고 다툴 만한 고수들이다.
설마하니 이 연약해 보이는 학사가 그들과 동급일 리가 있는가?
유재섭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본래 무가의 사람이었다던가…….”
겉보기엔 학사지만 무슨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무림의 엄청난 세가 출신이라거나, 아니면 황실의 숨은 핏줄이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자식을 위해 내력과 비급을 전해 주는 건 흔한 이야기 아니던가?
유재섭의 상상력은 나래를 펴고 끝도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응? 뭐라고 했소?”
한창 붓을 놀리던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유재섭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소인의 혼잣말입니다요.”
방금 입을 잘못 놀려 혼쭐이 나 놓고도 또 실수를 할 뻔했다.
오늘따라 일진이 사납다고 느끼며 유재섭은 자신의 경박한 혀를 슬쩍 깨물었다.
사락, 사락, 팔락.
조용한 전각에 운현의 붓 놀리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울렸다.
유재섭은 운현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오늘은 여기까지입니까?”
운현은 붓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대강 끝날 때가 되었다.
“그렇소.”
운현의 눈치를 살피며 유재섭이 말을 이어 갔다.
“저기, 제가 직접 목격한 비무는 이제 거의 끝나 가는데 내일부턴 제가 들은 걸 해 드릴까요?”
바스락.
운현이 책장을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이차 사료(史料)는 주관적 해석의 영향이 너무 강해서 안 되오. 제대로 알고 싶다면 어디까지나 일차 사료에 천착하는 것이 학문하는 자로서 바른 태도일 터. 그런 점에서 각종 개론서라든가 입문서는 일종의 필요악으로서…….”
붓을 놀리며 별 생각 없이 말을 잇던 운현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유재섭이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운현이야 당연하게 사용하는 단어들이지만, 일차 사료니 이차 사료니 하는 것을 유재섭이 알 리가 없다.
“크흠, 하여간 뭐 그런 이유로…….”
운현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기록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면 됐소. 아마도 내일이면 모두 끝나겠군. 그동안 수고하셨소.”
책과 필기도구를 정리한 운현이 막 일어나려는데 유재섭이 급히 말을 꺼냈다.
“아, 저기, 나으리.”
유재섭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그동안 제가 한 일에 대한 보수는 어떻게……. 헤헤헤.”
운현은 놀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언제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도 늘 똑같았다.
“여비 정도는 나올 거요.”
유재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달 가까이 꼼짝 않고 붙잡혀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나오는 게 겨우 여비라면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원하던 것은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쳇, 역시…….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군.’
그나마 여비라도 나온다니 생각한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이 멀쩡히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만일 운현이 엄청난 보상을 약속했다면 오히려 더 불안했을 것이다.
관련된 사람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시도는 권력자들에겐 그리 드물지도 않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금 전 운현의 반응이 지극히 사무적이고 의례적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심각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수고하셨소. 그럼, 쉬시오.”
“네! 나으리께서도 수고하셨습니다!”
유난히 밝고 활기찬 유재섭의 목소리와 함께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려 몇 걸음 옮기던 운현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아참, 아까 그 단어 말인데…….”
난데없는 운현의 말에 유재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단어요?”
“아무래도 ‘예측’이 적절할 것 같소. 그러니까, 결과를 ‘찍은’ 게 아니라 ‘예측’한 거요. 알았소?”
그제야 운현의 말을 이해한 유재섭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와서 날보고 뭘 어쩌라고…….’
지나도 이미 한참 지난 이야기다. 이젠 관심조차 없는 이야기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운현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말이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전시는 각자 독방에서 혼자 치르는 거요.”
유재섭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말을 끝으로 운현은 발걸음을 돌려 전각을 나섰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재섭을 뒤로하고 운현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후후.’
마지막에 나오며 한 말은 남의 답안지를 보고 과거를 급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만만히 보지 말라는 거지. 나, 과거 급제한 사람이라고.’
상대의 착각에 일침을 가했다 생각한 운현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은 장원급제였다고 말하면 유재섭의 놀란 얼굴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하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 자신의 처지가 창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장원이니 방안이니 하는 것들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 날씨 참 좋군.”
운현은 문연각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