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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9화 (19/530)

019화. 장원과 방안

금의위가 학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 대체 무엇이 있을까?

신입 금의위의 반문은 당연했다.

그러나 대답하던 신입도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나도 몰라. 하지만 저 사람이 쓴 보고서가 교두들 사이에선 제법 인기라는데?”

“보고서는 또 뭐야?”

누군가 물었지만 어차피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대답이 나오지 않자 신입 금의위들의 호기심은 금방 다른 주제들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금군교두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학사에 대한 날카로운 반감은 확실히 줄어들어 있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고 태도를 명확히 하는 것 역시, 무인들의 본능적인 버릇이었기 때문이다.

***

“그쳐!”

도진교두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운현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허어.”

주변의 교두들도 같은 마음인 듯 모두의 눈빛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운현의 말에 일충현 교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순간적으로 주저한 것이 패인이오. 상대의 창이 가진 거리상의 이점을 너무 간과한 탓이겠지만…….”

어느새 운현의 붓은 종이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일충현의 말을 받아 적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직 아쉬움을 떨쳐 내지 못한 듯 운현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아깝군요. 아까 거기서 검기를 날릴 수 있었다면 충분히 이겼을 승부인데.”

운현의 말에 일충현 교두의 입에서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운 학사, 내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일충현 교두가 운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문연각에 남아 있는 기록들은 고수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절정고수라 할 만한 이들에 대한 것이오. 그들이 검기를 마음대로 뿌린다고 해서 모든 무인이 검기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충현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최근 소환한 이야기꾼이 검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소?”

“아닙니다. 실은……, 얼마 전에 문연각 등급이 올라 새로운 비무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일충현은 빙그레 웃었다.

“등급이 올랐다니 축하하오. 이제야 황태자 전하께서도 운 학사를 알아보셨나 보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어쨌든 그런 건 이제 상관없습니다.”

운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자신의 일에 대한 인정이라면 이미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벌써 팔 년, 햇수로 구 년간이나 쫓겨나지 않고 창룡전 학사의 직책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참 어리석지.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을…….’

운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전 창룡전 관리 사일천과 술을 나누며 들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창룡전 학사로서 인정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미 짐작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창룡전은 세상의 끝, 학사의 무덤일세.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드물게 술에 취한 사일천은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과거 백호전의 학사 역시 그랬다.

그는 뛰어한 성과를 올렸지만, 바로 그 때문에 평생 백호전 학사로 지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창룡전에 운현이 꿈꾸던 희망 같은 건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저 맡은 바 소임이나 열심히 해야지요. 그게 사람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운현은 체념한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일충현 교두는 고개를 저었다.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오. 그래서 사는 재미란 게 있는 거 아니겠소? 실망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 보시오.”

“저는…….”

운현이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였다.

“준비!”

도진 교두의 커다란 목소리에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신입 금의위 두 사람이 새로운 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똑같이 검을 무기로 택한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오, 저 둘은 이번 무과의 장원과 방안 아닌가?”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교두들의 시선이 비무대로 집중되었다.

장원과 방안은 무과 시험의 수석과 차석을 의미한다. 일충현 교두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비무대를 응시했다.

“무과에선 종이 한 장 차이로 장원과 방안이 갈렸다던데, 볼만하겠군.”

다른 교두의 말은 모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비무대에 선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사뭇 심상치 않았다.

지켜보는 운현은 물론, 비무를 진행하는 도진 교두마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작!”

도진 교두의 호령과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검을 든 두 사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방안을 차지한 신입 금의위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채앵.

날카로운 검격이었지만 상대에겐 통하지 않았다.

장원을 차지한 신입 금의위는 그 공격을 너무나 가볍게 막아 냈다.

“훗.”

그건 비웃음이었다.

방안의 표정이 굳었다.

“이, 이놈이…….”

무인에게 자존심은 때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차석을 의미하는 ‘방안’이라는 호칭이, 누군가에겐 오히려 모욕이기도 하다.

방안의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하아!”

챙, 채채챙, 채앵.

방안의 검격은 격렬했다.

그러나 지켜보던 교두들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쯧.”

“넘어갔네.”

“저렇게 쉬 흥분해서야…….”

교두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충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힘이 과하군. 공세에만 집착하느라 오히려 검로가 경직돼 버렸어.”

운현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방안의 움직임은 형편없었다.

마음만 급해서 커다란 동작으로 허점을 만들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반격에 몰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보기에는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상대의 도발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다.

‘길어야 다섯 수 안에 끝나겠군.’

운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다섯 수만에 방안은 장원의 검에 목을 내주고 말았다.

“그쳐!”

장원의 검이 방안의 목덜미에 가 닿자 도진 교두가 비무의 중지를 명령했다.

방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장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장원의 눈빛은 싸늘했다.

휙.

방안의 목에서 검을 거두며 장원을 차지한 신입 금의위가 말했다.

“겨우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가서 허둥대는 꼴이라니.”

차가운 시선으로 장원은 말했다.

“그래서 너는 평생 방안인 거다.”

방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교두들의 눈빛이 마치 조롱처럼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뿐이랴?

다른 신입 금의위들의 비웃음과 조롱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크윽.”

방안이 고개를 떨궜다.

장원은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런!”

지켜보던 운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의 눈동자는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곳이 금의위 훈련장이라는 것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같은 동료라는 상관하지 않았다.

―너는 평생 방안이다.

마치 선고와도 같은 싸늘한 목소리만이 그의 귓가에 웅웅거렸다.

비웃는 동료들의 웃음소리와 경멸의 눈초리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패배한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가며.

그러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에게 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나서는 안 되었다.

쉬익.

언제 자신이 검을 들었는지, 어떤 검식을 펼치고 있는지도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모욕한 자의 등이 무방비로 자신의 검 앞에 놓여 있었고, 놀란 상대의 얼굴이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승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승리를 방해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 교두……!”

파악.

비무대에 있는 도진 교두를 향해 운현이 소리치는 찰나 옆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그러나 운현은 옆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마치 한 줄기 화살처럼, 일충현 교두가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일충현 교두님!”

“도진 교두!”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교두들 사이에서 당혹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직 운현만이 예외였다.

운현은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일충현 교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일충현 교두의 움직임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파라락.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던 일충현 교두가 몸을 회전시키며 자세를 바꿨다.

동시에 그의 허리에서 푸른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그제야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충현 교두라면 충분히 방안의 검을 걷어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운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방안의 검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일충현 교두의 칼날에 낯선 빛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건 설마!’

장원은 자신의 등 뒤로 짓쳐 드는 살기를 느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상대의 검이 자신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오랜 세월 단련한 몸은 이미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틀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의 뛰어난 재능만큼이나 정확하고 분명한 판단이었다.

‘크윽.’

장원이 최악의 상황을 각오한 바로 그 순간.

우웅.

기이한 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의 눈앞을 가르고 내리꽂히는 은은한 빛줄기 하나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그대로 방안의 검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자신을 향해 짓쳐 들던 방안의 검이 장원의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두 동강 났다.

그리고 곧 둔탁한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

퍼퍽.

“크윽.”

신음 소리와 함께 장원과 방안은 서로 반대쪽으로 주르륵 밀려갔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일충현 교두가 내려섰다.

탁.

“이 무슨 어리석은 짓들이냐!”

마치 산악처럼 버티고 선 일충현 교두가 크게 일갈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원과 방안, 두 사람은 구겨지듯 쓰러져 있었고 신입 금의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반으로 잘린 방안의 검이 일충현 교두의 발밑에 나뒹구는 것도, 신입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 뭐야?”

“지금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방안이 난데없이 살수를 쓴 것은 모두가 보았다.

눈앞에서 벌어질, 피할 수 없는 참극을 직감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일충현 교두가 거짓말처럼 나타나더니 두 사람을 동시에 제압해 버린 것이다.

“교두님! 괜찮으십니까?”

도진 교두가 물었다.

“나는 괜찮소.”

일충현 교두가 쓰러진 장원과 방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과도한 호승심을 삼가라 일렀거늘 이런 무모한 짓이라니! 이 일은 결코 가벼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엄한 경계의 말이었지만 신입 금의위 사이에선 감탄이 흘러나왔다.

교두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표정이 번져 나갔다.

“후우, 과연…….”

운현 역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과연 일충현 교두였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그 번개 같은 솜씨를 되새기며 운현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일충현 교두에 대해 감탄했다.

그러다 문득,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옷은 물론 사방에 먹이 튀어 있었다.

붓을 쥔 채로 벌떡 일어난 데다, 자신도 모르게 일충현 교두의 움직임을 따라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붓을 검처럼 쥔 채로 말이다.

그렇게 거침없이 붓을 휘둘렀으니 사방에 먹이 튀는 것도 당연하다.

“쯧쯧.”

운현은 혀를 차며 먹이 번진 관복과 엉망이 된 기록을 챙겼다.

그사이, 훈련장 한 가운데 선 일충현 교두는 미묘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분명…….’

운현이 벌떡 일어선 것과 일충현 교두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들 외에 방안의 돌발적인 행동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 있었던 도진 교두도 그랬다.

금의위도 아닌 운현이 가장 먼저 상황을 알아차린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일충현 교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뒷수습이 먼저다.

“도 교두. 저들을 의국에 데려가도록 하게.”

“네.”

두 사람이 실려 나가고 장내가 정리되자 비무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운현도 엉망이 된 기록들의 정리를 간신히 끝낼 수 있었다.

운현은 다시 눈을 빛내며 비무에 몰두했다.

그렇게 운현의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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