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금의위의 학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날리며 풍류검이 날카롭게 파고들고, 패력도가 모든 것을 부숴 버릴 듯 정면으로 맞받아 간다.
그리고 격돌의 순간, 풍류검이 몸을 낮추며 패력도의 가슴으로 뛰어든다.
패력도의 당황한 얼굴과 풍류검의 결연한 눈빛이 교차하며 찰나의 순간에 승부는 갈려 버리고 만다.
한순간 머릿속에서 펼쳐진 장면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그리고 결과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무 내내 열세에 몰려 있던 풍류검이 패력도의 가슴에 긴 검흔을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풍류검이 마지막에 패력 파천도의 허점을 찔렀거든요. 이로써 패력도는 다시 한번 고배를 마시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운현의 말에 유재섭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럴 줄 알았다니? 한창 신나던 이야기의 흥분이 싸늘히 식는 듯한 느낌이다.
‘쳇, 알긴 뭘 알아? 자기가 보기라도 했나?’
붓을 놀리던 운현이 이상한 느낌을 눈치챘는지 유재섭을 쳐다보았다.
유재섭이 급히 눈을 내리 깔았지만 이미 운현이 그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왜 그러시오? 정말 그럴 줄 알았단 말이오.”
“아, 뭐. 물론 대단하신 나으리시니 당연히 그러셨겠지요. 네, 네.”
유재섭은 짐짓 다른 곳을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말만 듣고 실제 움직임을 더듬어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직접 본 사람들조차도 다시 재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전해 듣는 입장에서야 오죽하랴?
그런 일이 가능한 경우라면 보통 한 가지뿐이다.
듣는 상대방이 이미 경지에 이른 대단한 고수일 경우다.
그들은 하나만 들어도 가히 열을 더듬어 알 정도니까.
그러니 유재섭에게는 운현의 말이 그저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간 글 좀 읽었다는 사람들이란…… 그냥 솔직하게 감탄하면 자기 위신이 깎이는 줄 아나? 쳇.’
“아니, 정말이라니까?”
심드렁한 유재섭의 반응이 오히려, 아니 당연히 운현의 성질을 긁었다.
흥분한 운현은 붓까지 내려놓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마지막에 풍류검이 패력도의 가슴으로 파고든 것 아니오? 이렇게, 이렇게 말이오!”
운현은 빈손을 마치 검처럼 움직이며 말했다.
“아, 네. 물론이지요. 나으리의 안목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헤헤헤.”
유재섭은 운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나 고개를 숙였다고 이야기꾼의 자존심마저 숙인 것은 아니다.
‘그것도 내가 다 말한 거잖아? 제길, 힘이 없는 게 죄다. 그렇게 미리 다 알면 왜 물어봐? 자기 혼자 다 하지.’
유재섭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요즘 예언자들이란 것들은 맨날 늦게 온다니까? 일 다 끝나고 나타나선 이럴 줄 알았다느니 어쨌다느니. 에이, 내 더러워서.’
은근히 맺힌 게 많았던 듯 고개를 숙인 유재섭의 푸념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유재섭이 자세를 낮추자 난감해진 사람은 바로 운현이다.
지금의 이 모습은 누가 봐도 운현이 지위를 이용해 억지로 유재섭을 내리누르는 듯한 형세가 아닌가?
더구나 옆에서 금의위들이 보고 있다.
운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크흠.”
순식간에 흥분이 가라앉은 운현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아, 내가 조금 흥분한 것 같소. 나도 모르게 그만 큰 소리를……. 이제 됐으니 고개를 드시오.”
“아이고, 아니올습니다요. 그저 제가 분수를 모르고 그만…….”
탁.
운현은 가볍게 탁자를 내리쳐 유재섭의 말을 막았다.
“됐다지 않소. 어쨌든……, 수고했소.”
어색한 헛기침을 다시 한번 흘린 운현은 내려놓았던 붓을 들어서 기록을 마무리했다.
슥, 슥.
운현의 붓이 춤추듯 내달리는 것을 보고 있던 유재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이제 다 끝난 것인지요?”
“오늘은 그렇소.”
운현은 붓을 멈추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유재섭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면 저는 언제 집으로…….”
그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운현이 붓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산서성에서 이름난 이야기꾼이라더니, 아는 이야기가 이게 다요?”
갑작스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운현의 기세에 유재섭이 주춤했다.
“서, 설마요.”
유재섭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게 다일 리가 없잖습니까? 제가 직접 본 것만 해도 다 얘기하려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탁.
갑자기 운현이 책을 덮었다.
“알았소. 그럼 내일 봅시다.”
“네?”
유재섭이 멍한 표정이 되어 있는데 운현이 주섬주섬 필기구와 책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수고하셨소. 그럼 오늘은 이만 쉬시오.”
유재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사이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 나으리!”
운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유재섭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나으리. 헤헤.”
자신의 어깨에 놓인 금의위의 손을 흘깃 쳐다본 유재섭은 어색하게 웃었다.
운현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유재섭이 무언가 따지려다가 포기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당신도 수고했소.”
운현은 금의위에게도 인사했다.
“고맙소, 나중에 봅시다.”
금의위는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했고, 운현은 발길을 돌려 전각 밖으로 나섰다.
“아참.”
막 전각을 나서던 운현이 고개를 돌려 유재섭을 쳐다보았다.
어깨에 금의위의 커다란 손이 얹힌 채 식은땀을 흘리는 유재섭을 보며,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까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오. 알겠소?”
유재섭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까 운현이 비무의 결과를 짐작한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말을 마친 운현은 고개를 돌려 전각 밖으로 사라졌고, 남은 유재섭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금의위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하아아!”
쿵, 쿵.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기합 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가 넓은 훈련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제칠식!”
수염이 가득한 텁석부리 무관이 크게 호령하자 훈련장의 금의위들이 일제히 발을 내디디며 주먹을 내지른다.
쿵.
“하아아!”
금의위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는 훈련장 한쪽에는 금의위 소속의 금군교두들이 앉아 있었다.
일충현 교두를 비롯한 그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창 훈련 중인 금의위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일충현 교두님.”
문득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일충현 교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진다.
“어서 오시오, 운 학사.”
인사를 건넨 사람은 운현이었다. 일충현 교두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운현은 자리에 앉으며 다른 교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십시오.”
물론 처음부터 운현이 이렇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현이 금의위 훈련장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교두들은 운현을 무시하고 혹은 적대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충현 교두가 운현을 정중히 대하고 운현이 무공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인 것이 그들의 호감을 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운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모습을 나타내자 어느새 운현은 교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간단한 예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일은 다 끝나셨소?”
운현이 자리에 앉자 일충현이 물었다. 운현은 하소연하듯 대답한다.
“어제 간신히 마감했는데 오늘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그나저나 올해 새로 들어온 금의위들의 움직임이 꽤 좋은데요?”
운현은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는 신입 금의위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훈련장에 있는 이들은 올해 무과에 급제하여 금의위에 새로 소속된 무관들이다.
일충현 교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다들 의욕이 넘치니 교두들이 속깨나 썩을 것 같소.”
주위에 있던 몇몇 교두들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수련은 좀 어떻소, 운 학사?”
“딱히 이상한 것은 없습니다만…….”
운현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검식을 펼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길어졌다?”
“네. 예전엔 한 시진이면 서너 번은 검식을 수련한 것 같은데, 요즘은 한 번 하고 나면 한 시진이 훨씬 넘어갑니다. 두 번 했다간 해가 지려고 할 지경입니다.”
일충현 교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예전에 운현이 백호수련검을 펼쳐 보이던 때가 떠오른 것이다.
그때도 운현은 서너 번이라 했지만 사실 그보다 몇 배나 많이 하지 않았던가?
“수련이 깊어지면 오히려 느려지는 법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일충현 교두의 대답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익숙해지면 더 빨라져야 하는 것 아닐까?
무언가 석연찮았지만 운현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훈련장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렬!”
텁석부리 교두의 우렁찬 목소리에 신입 금의위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 섰다.
도진 교두가 일충현 교두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부스럭.
운현도 얼른 자신이 가지고 온 빈 서책과 붓을 꺼냈다.
“이제부터 비무를 시작하겠다!”
훈련장에 나선 도진 교두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비무다. 알겠나? 쓸데없는 호승심으로 다치는 일이 없도록.”
그러나 첫 비무는 언제나 긴장되고 과하게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특히 이들처럼 의욕이 넘치는 젊은 신입들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입 금의위들의 눈동자는 벌써부터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내 차례는 언제 오는 거지?”
기다리던 신입 금의위 한 명이 초조한 듯 중얼거렸다.
“그야 네 차례가 되면 오겠지.”
다른 신입 금의위들이 킥킥 웃었다.
앞에서는 비무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기다리는 이들에겐 그저 지루할 뿐이었다.
처음에야 긴장으로 눈도 떼지 못했지만, 신입 금의위들은 이내 옆 사람과 잡담까지 나누고 있었다.
물론 목소리는 한껏 낮췄지만 말이다.
“저 문관은 누구지? 저기 저쪽 말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신입 금의위들의 시선이 교두들 쪽으로 향했다.
기세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금군교두들 틈에 보기에도 가냘파 보이는 젊은 문관이 섞여 있었다.
손에는 붓과 책자를 들고 있었고, 신입들의 비무를 유심히 지켜보며 무엇인가를 적어 넣기도 했다.
“설마 저 문관이 우리를 평가하는 건가?”
또 다른 목소리에 신입 금의위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언제나 문관들과 비교되며 은근한 비하에 질려있던 그들이다.
이제 금의위가 되어 자존심이 한껏 고양되어 있었는데, 같은 금의위도 아닌 문관의 평가가 달가울 리 없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고 몇몇 날카로운 눈초리가 문관에게 향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어? 저 사람, 그 창룡전이라던가 하는 곳의 학사잖아. 선배들이 말해 준……, 운 학사였나?”
“아하.”
팽팽하게 번져 나가던 적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문을 모르는 신입 금의위 한 명이 물었다.
“운 학사? 학사가 금의위에 대체 왜…….”
“황태자 전하 소속 학사인데, 무공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더군.”
옆자리에 있던 신입 금의위가 그에게 대답했다.
“금의위 훈련장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온 게 벌써 삼 년째라던데?”
“삼 년? 학사가 금의위 훈련장에?”
“그래. 일충현 교두의 제자란 말도 있지만 정식 사제관계는 아니고……. 뭐, 제법 무공을 보는 안목도 있어서 도움을 받은 선배들도 있다고 하더라고.”
“도움을 받는다고? 뭘? 어떻게?”
듣고 있던 신입 금의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