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이야기꾼 소환
유재섭은 내심 잔뜩 움츠러든 채 불안하게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좌우에는 두 명의 건장한 무관들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살벌한 기세를 흘리고, 사방에는 커다란 붉은 기둥과 이곳저곳에 장식된 고풍스러운 용의 문양들이 가득했다.
유재섭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내가 범의 아가리에 들어온 것이 확실하구만.’
평생을 눈치 하나로 살아온 자신이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이곳이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는 금지(禁地)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귀신 곡할 노릇이냐?’
유재섭은 타고난 달변과 재빠른 눈치로 산서성에서 이름을 날린 이야기꾼이다.
적어도 자신의 분야라면 누구도 함부로 못 할 정도가 되었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았는데, 어느 날 자신을 찾는 ‘소환령’이라는 것이 관가에 나붙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소환령’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다른 곳도 아닌 관가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것도 찜찜했다.
자신같이 ‘때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한다’는 신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법을 집행하는 관가란 아무래도 멀리하고 싶은 대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의원과 관가는 멀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의원과 관가가 아니라 측간과 처가였던가?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어쨌든 그 ‘소환장’이라는 것이 자신의 출두를 요구할 뿐, 죄명을 적어 수배를 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는 관가에 출두하기로 결정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얼토당토않은 죄명을 덮어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관가에 출두했지만 의외로 난폭한 일은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 때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게 옳은 말이다.
덕분에 한시름을 놓았지만 그를 소환한 사람은 산서성 지방관이 아니었다.
유재섭은 난데없이 인상 험악한 무관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아 영문 모를 곳으로 끌려와 버렸다.
‘틀림없이 자금성이야, 자금성.’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높다란 붉은 담, 황금빛 지붕, 그리고 곳곳에 용의 조각들이 가득한 이곳이 자금성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란 말인가?
북경에 이런 곳이 절대 흔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옆을 지키고 선 이 두 명의 무관 역시, 그 무섭다는 금의위가 분명했다.
문제는 과연 이 자금성의 누가, 한낱 이야기꾼에 불과한 자신을 소환했느냐 하는 것이다.
꿀꺽.
눈빛 흉흉한 금의위들을 슬쩍 훔쳐보며 유재섭은 침을 삼켰다.
이유야 어쨌건 지금 자신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오랫동안 단련된 그의 직업적 감이 외치는 것은 물론이요, 그가 아는 바로도 자금성이라면 자신 같은 사람의 목숨 하나쯤 벌레만도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역시 처음부터 그냥 튀는 게 나았으려나?’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귀하신 분의 기분을 거스르는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재섭은 즉시 그 생각을 털어 내 버렸다.
‘아니야.’
백번 생각해도 출두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자금성까지 관련된 일에 그냥 튀었다가는 무슨 역적죄를 덮어쓸지 모르니까.
‘범의 아가리에 들어왔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만이 살길이다.’
유재섭은 마음을 다잡았다.
범의 아가리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대우를 보아하니 무언가 살아날 여지가 보이는 것도 같다.
그는 자신의 운과 판단력을 믿고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로 결심했다.
달칵.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전각으로 들어섰다.
유재섭이 고개를 돌리는데, 옆에 섰던 금의위들에게서 굵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학사님.”
“안녕들 하시오? 수고들 많소. 오늘 당번이신 모양이구려.”
금의위들의 굵은 목소리에 현관으로 들어오던 사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재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자금성의 관리치고는 그다지 권위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람 괜찮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젊은 문관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 학사구나.’
사실 그 문관이 학사라는 건 금의위의 인사가 아니었어도 짐작했을 것이다.
마치 ‘나 학사요’라고 얼굴에 써 놓은 것 같은 그는, 조금 지쳐 보이긴 했으나 눈빛은 꽤나 초롱초롱했다.
‘응? 학사?’
유재섭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처럼 생긴 모습이 학사가 맞기는 한 모양인데, 금의위들과 저토록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을 보니 조금 의아하다.
그가 알기로도 문관과 무관은 저렇게 자연스럽게 친분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유재섭은 방심하지 못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내 목숨을 쥐고 있는 호랑이로구나.’
아무리 비리비리한 서생처럼 생기고 인상이 좋아도 그는 자금성의 관리다.
게다가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는 유재섭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그런 사람 말이다.
긴장한 유재섭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탁, 탁.
그사이, 몇 권의 책이 탁자 위에 놓이고 필기도구가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
유재섭은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러니까 산서성의 유재섭이오?”
“네, 넷!”
긴장했던 탓일까? 유재섭의 목소리는 평소 그답지 않게 조금 갈라졌다.
그 목소리에 운현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긴장한 모양이군. 하긴…….’
난데없이 이런 상황이면 누구나 긴장할 만하다.
그러나 운현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았다.
차라리 긴장하고 있는 편이 운현으로서는 더 편하다.
운현은 고개를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며 굳은 목을 풀었다.
‘으음, 어제 마감하느라 밤을 새웠더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오늘부터 당장 또 일이라.’
운현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바로 어제 보고서 하나를 마감했는데 오늘 또 새로 소환된 이야기꾼이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일정을 잡아 놓은 창룡전 관리, 사일천을 속으로 원망하며 운현은 새로 소환된 이야기꾼의 신상명세를 펴 들었다.
“크흠.”
못마땅한 얼굴로 운현이 헛기침을 하자 그의 안색만 살피고 있던 유재섭이 움찔했다.
운현은 짐짓 못 본 척하며 묵묵히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적힌 내용이 상대에게 보이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별것 없네.’
서류에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대는 그저 조금 이름이 알려진, 평범한 이야기꾼일 뿐이니까.
하지만 운현은 사뭇 심각한 내용이라도 적혀 있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시간을 끌었다.
건너편에 있는 유재섭의 안색이 점점 불안해져 가는 것을 확인하고 운현은 서류를 덮었다.
탁.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소?”
운현은 나지막이 목소리를 깔았다. 이것도 다 창룡전 관리 사일천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유재섭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운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흐음, 그럴 테지…….”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이었지만 듣는 유재섭으로는 가슴이 철렁한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런 표정이란 말인가.’
유재섭은 용기를 내었다. 아니, 용기라기보다는 당연하고도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저, 죄송하오나 대체 무슨 연유로…….”
하지만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재섭은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되었다.
“흐음.”
운현은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서류를 뒤적였다.
그리고 짐짓 유재섭의 눈을 외면한 채 사무적인 태도로 빠르게 말했다.
“뭐, 사실대로만 말하면 특별히 심각한 일은 없을 거요.”
그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재섭을 더욱 겁먹게 만들었다.
잘못하면 특별히 심각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유재섭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을 힐끗 훔쳐보며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렇게라도 안 하면 이 사람들의 허풍은 끝이 없다니까.’
황명을 받아 소환되는 이야기꾼은 적어도 한 성을 대표하는 실력을 가진 자들이다.
이야기꾼에게 실력이니, 대표니 하는 게 웃긴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실력의 격차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저들의 감각이나 눈치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쯧, 처음에 멋모르고 잘해 줬다가…….’
처음에 소환되어 온 사람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해 줬다가 온갖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어차피 이렇게 겁을 줘 봤자 며칠 지나면 귀신같이 감을 잡고는 한껏 너스레를 떨어 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사람들이다.
강호 무림에 고수들이 있다면 이들은 바로 이야기꾼계의 고수들이니까.
운현은 붓을 들었다. 그리고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재섭에게 사뭇 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무림인들의 비무를 직접 목격한 일이 있소?”
***
“아, 그런데 말입니다. 수비에 급급해 보이던 풍류검이 어느새 검을 눕혀 패력도의 허리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패력도 역시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재섭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느새 허리를 뒤로 꺾은 패력도가 풍류검의 공격을 피하면서 그대로 대도를 쳐 올리는데, 풍류검의 머리카락이 그만 후드득 잘려 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다치진 않았지만 귀공자 같은 외모를 뽐내던 풍류검으로서는 그야말로 통한의 일격이었지요, 크아.”
운현은 유재섭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쉬지 않고 붓을 놀렸다.
종이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붓은 유재섭의 이야기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지만, 운현의 머릿속에서는 풍류검과 패력도라는 두 사람의 비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부드럽고 예리한 검을 구사하는 풍류검이란 사내, 그리고 강한 힘과 파괴력을 자랑하는 패력도.
별호 그대로의 특징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부딪히며 혹은 흘리며 검과 도를 주고받았다.
풍류검의 부드럽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패력도의 커다란 도가 거침없이 공기를 가른다.
“승기를 잡은 패력도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몰아쳐 갔습니다. 그 커다란 도를 마치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풍류검을 난타하기 시작하는데, 풍류검으로선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셈이라 아니할 수…….”
“잠깐.”
유재섭은 얼굴을 찡그렸다.
한창 이야기에 흥이 오르고 있는데 운현이 중간에서 끊고 들어온 것이다.
“패력도가 정확히 어디를 공격한 거요? 혹시 그의 동작이 어땠는지 기억하오?”
운현의 물음에 유재섭은 잠시 기억을 더듬고는 이내 손으로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가리켰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곳하고, 여기. 그리고 이곳을 이런 식으로…….”
유재섭의 설명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붓을 놀렸다.
사실 무림인의 초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일반인은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유재섭은 과연 이름을 날릴 만한 이야기꾼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소환령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설명을 끝낸 유재섭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수세에 몰린 것 같던 풍류검은 패력도의 공격을 살짝 흘리며 거리를 벌렸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지막 한 수를 위한 숨 고르기에 들어갔죠. 그때 풍류검의 외모는 사뭇 흐트러져 있었고, 패력도 역시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은 각자의 성명절기라 할 수 있는 풍류일검과 패력 파천도였습니다.”
풍류일검과 패력 파천도는 이미 유재섭이 설명해 준 초식이었다.
운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선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운현의 머릿속에 아직 유재섭이 말하지 않은 결전의 순간이 마치 그림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