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백호수련검 십이식(2)
일충현 교두의 흐뭇함은 길지 못했다.
허탈한 표정으로 일충현 교두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어,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려는 건지…….”
운현은 지금 한창 자신의 첫 ‘백호수련검 십이식’을 펼쳐 내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자세가 연이어 펼쳐지고, 그때마다 운현의 검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미세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문제는 운현의 백호수련검이 끝나지를 않는 것이다.
이미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운현의 눈빛은 여전히 초롱초롱했다.
그동안 일충현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인식조차 못하는 듯했다.
“완전히 몰입된 상태로군.”
똑같은 검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현의 검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지막 검식을 첫 검식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운현의 백호수련검을 지켜본 지도 벌써 반 시진이 넘어간다.
‘아마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겠지.’
그러나 일충현 교두는 운현의 수련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시간을 잊은 채 검에 몰두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련한 향수 때문이었을까?
운현을 지켜보는 일충현 교두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결국 운현이 스스로 수련을 멈춘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 더 지나서였다.
“후우.”
땀에 젖어 버린 운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거두었다.
운현의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 끝나셨소, 운 학사?”
“아, 네.”
그제야 일충현 교두의 존재를 깨달은 듯 운현이 새삼 예를 표하며 쑥스럽게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수련검식이라 그런지 서너 번만 해도 이렇게 땀에 젖어 버리는군요.”
‘서너 번?’
운현의 말에 일충현 교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한 시진 동안 자신이 본 것만 해도 벌써 이십여 회가 넘었다.
아무래도 운현은 일충현 교두의 생각보다 더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럼 하루에 수련 시간은 얼마나 되오?”
“일단은 한 시진 정도로 하려고 합니다만, 하다보면 늘 시간이 넘어 버려서……. 아마 두 시진 정도는 하는 것 같습니다.”
“두 시진이라.”
두 시진이면 오후 전부나 마찬가지다.
듣기로는 보고서 재촉도 심하다 하던데 그렇게나 시간을 들일 정도면 얼마나 운현이 푹 빠져 있는지 알 만한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검로가 대단히 부드러운 것 같소. 백호검보다는 차라리 선녀검이나 천의무봉검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소?”
일충현 교두의 말에 운현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그건 너무 여성스러운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운현의 대답에 일충현 교두는 웃음을 지었다.
“운 학사, 강호의 여협들은 오히려 남자보다 더 무섭다오. 허허허.”
그저 지나가듯이 던진 말이었지만 운현은 흥미를 보였다.
“여협? 여자 무림인 말입니까?”
“그렇소. 여하튼 검식의 이름이야 운 학사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하면 될 터이고.”
일충현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왕 잡은 검이니 열심히 수련에 정진하도록 하시오. 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리다.”
도와준다는 말에 눈을 빛내는 운현을 보니 열심히 하라는 말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운현을 보며 일충현 교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조차 잊을 정도의 몰입이라……. 학사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학사가 만든 수련검이라 그런 것인가?’
대다수의 무관들에게 학사란 참으로 기이한 종족이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그 어려운 책을 항상 끼고 사는 것도 그렇고, 말장난처럼만 보이는 난해한 내용을 끝까지 파고드는 그 집요함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지난 오 년간 엄청난 질문 공세에 직접 시달려 본 일충현 교두로서는 운현의 이런 학사적 성품에 대해서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게다가 같은 학사가 창안한 검식이라니…….’
아마도 운현의 몰입은 학사적 집요함과 처음으로 수련하는 검술에 대한 애착, 그리고 정확한 자세를 요구하는 백호수련검식의 특징이 결합된 결과일 것이다.
학사가 창안한 것을 학사가 익히니 어쩌면 체질적으로 더 맞았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여하튼 운 학사에게는 잘된 일이군.’
“아차!”
갑작스러운 운현의 목소리에 일충현 교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왜 또 그러시오, 운 학사?”
운현은 낭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말씀해 주신 것들을 미처 못 적었습니다.”
최근엔 무언가를 새로 적을 일이 없어 방심했다.
안타까워하던 운현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일충현을 바라보았다.
“저기 혹시 다시 말해 주실 수는…….”
그러나 벌써 한 시진이나 지난 이야기다.
아무리 일충현이라 해도 그 내용이 전부 기억날 리가 없다.
“그게……. 뭐라고 했는지 나도 기억이 안 나서…….”
얼버무리는 일충현 교두의 대답에 운현은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
오전 수련을 마친 운현은 언제나처럼 문연각에 들러 기억나는 대로 일충현 교두와의 대화를 적어 두었다.
전부 다 떠올리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지만 어쨌든 최대한 기록을 정리했다.
그리고 운현은 오후 수련을 위해 다시 문연각을 나섰다.
‘백호수련검이라, 아주 괜찮은 이름이군.’
운현은 일충현 교두가 지어준 이름을 되뇌며 미소 지었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일충현 교두에게 숨긴 셈이 되었는데, 도와준다는 약속까지 받았으니 홀가분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날아갈 듯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황태자 전하의 인정을 받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보시는지, 안 보시는지도 알 수 없는 보고서를 위해 밤을 새워야 하다니…….’
생각할수록 기운 빠지는 이야기다.
황태자 직속이라지만 여태껏 황태자 전하의 용안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하긴, 황태자 전하를 뵙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
어쩌면 황태자가 무림에 관심이 없어졌고, 창룡전 같은 건 진작에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일부러 외면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운현은 어느새 자신이 수련하던 곳에 도착했다.
전각 뒤편에 감춰 두었던 나뭇가지를 찾아낸 운현은 적당한 자리를 잡고 나뭇가지를 휙휙 휘둘렀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확인할 것……이라.’
일충현 교두가 해 주었던 말을 되새기며 운현은 나뭇가지 끝을 응시했다.
결론은 스스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백호수련검 십이식이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운현뿐이다.
천하에 오직 운현만이 이 백호수련검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으음, 그동안 깨달은 거라면…….’
수련검을 통해 얻은 것은 많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는 검로, 단순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검식들.
무엇보다 문장에 불과한 비무 기록을 생생하게 연상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수련검식의 덕이 컸다.
하지만 이 검식이 본래 의도한 바, ‘천지에 기가 가득하다’라고 말할 만한 것이라면 아직 감이 잡히는 것이 없다.
‘내공을 수련하는 검이라…….’
일충현 교두의 말을 생각하며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기로 내공이라면 단전에서 시작되는 기이한 힘이다.
내공을 사용하면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고, 오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 어느 것도 해당되는 바가 없었다.
대다수 다른 학사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저 잔병치레를 잘 안 하게 된 정도라고나 할까?
‘사서삼경을 거의 다 까먹은 점도 다르겠지.’
오 년 동안 오직 무공에 관한 책만 읽고 생각하고 썼다.
그러니 머릿속이 온통 무공뿐인 것도 당연하다.
“그나저나 일충현 교두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 내가 검을 수련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스윽.
나뭇가지를 검처럼 똑바로 세우고 운현은 백호수련검 제일식의 자세를 취한 후 지긋이 눈을 감았다.
이제까지의 모든 생각들이 마치 환영처럼 운현의 머릿속에서 걷혀 가고 오직 백호수련검의 검로만이 남았다.
그리고 운현이 눈을 뜬 순간, 나뭇가지는 이미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거침없는 항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
“후우.”
검식의 수련을 마친 운현은 천천히 나뭇가지를 거두었다.
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운현은 나뭇가지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아직 부족한가 보군. 아까 검으로 할 때는 혹시나 하고 기대했었는데…….”
오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검식을 수련했다.
아까 일충현 교두에게는 하루 한 시진에서 두 시진이라 했지만 사실 해가 지고 나서야 시간이 지난 것을 깨달은 적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운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서생 시절, 밤새워 책을 읽다가 눈이 부셔 고개를 들면 그제야 해가 떴음을 깨닫는 때도 많았으니까.
운현은 자신이 몇 번이나 수련하는지 계산해 보았다.
정확한 횟수는 모르겠지만 한 시진에 서너 번이라 해도 하루에 열 번은 넘게 한다고 봐야 한다.
“그럼 오 년, 아니 만으로 사 년이면 대강 세 봐도 만 번은 훨씬 넘었군. 책에서 말한 대로 동작도 감이 잡히는 것 같고…….”
운현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다른 손으로 쓰윽 쓰다듬었다.
사실 운현의 셈은 정확하지 않다. 아까 일충현 교두가 본 대로라면 운현은 하루 열 번이 아니라 오십 번에서 백 번은 백호수련검을 펼치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까지는 검이 아니라 나뭇가지여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운현은 나뭇가지를 몇 번 휘둘러 보았다.
그의 얼굴엔 살짝 아쉬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아직도 떨리기엔 한참 모자란다는 거로군. 이러다간 할아버지가 돼서야 결론을 알겠는걸?”
운현이 말한 ‘검이 떨린다’는 표현은 백호전 학사가 쓴 표현이었다.
백호수련검의 검식이 제자리를 찾고 수련이 궤도에 올랐을 때의 징조가 검이 떨리는 것, 바로 진동하는 것이었다.
“검로에 거침이 없고 수련이 완숙해져서 초입에 들면 검이 스스로 진동을 시작한다고 했는데…….”
운현은 나뭇가지를 검처럼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잡았다.
“이런 건가?”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는 점차 세차게 흔들더니, 이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건 운현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오옷.”
휙, 휙휙.
얼굴을 굳히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를 떨고 있던 운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참내.”
운현은 자세를 풀고 나뭇가지를 거두었다.
그와 함께 나뭇가지에서 나던 진동 소리도 멈췄다.
검식 중에 자연스럽게 진동해야 할 것을 이렇게 억지로 흔들어 대니 스스로 생각해도 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뭐, 진동을 하건 말건 간에 내가 좋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
자신이 백호수련검에 매달리는 것은 무슨 커다란 성취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운현은 다시 한번 피식 웃고는 나뭇가지를 숨기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귓전에서 자그마한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애애앵.
“웃!”
운현은 팔을 살짝 움직여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틱, 틱.
작은 소리와 함께 벌레 두 마리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해가 지니까 벌레들이 설쳐 대는군.”
여름이 다가왔는지 벌써부터 벌레들이 극성이다.
운현은 나뭇가지를 숨겨 두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참, 내일부턴 일충현 교두가 목검을 구해 주기로 했잖아?”
이제 더 이상 나뭇가지를 고이 모셔 둘 필요는 없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일충현 교두는 운현에게 한 가지 선물을 더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금의위 훈련장으로 오라고 했고.”
예전 같으면 난색을 표했을 것이다.
금의위 훈련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학사의 체면에 손상이 간다고 여겼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일충현 교두의 말에 반색을 했다.
그렇잖아도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수련하는지 궁금하던 참이다.
금의위들의 훈련이라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운현 개인적으로도 무척 관심이 가는 일이고 말이다.
휙.
틱, 티딕.
일충현 교두의 약속이 생각난 운현은 기쁘게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운현은 무심결에 나뭇가지를 휘둘러 신경에 거슬리는 벌레 몇 마리를 잡아 냈다.
손으로도 쫓는 게 고작인 벌레들을 운현은 가볍게 나뭇가지를 휘둘러 잡아 내고 있었지만,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