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5화 (15/530)
  • 015화. 백호수련검 십이식(1)

    팔락.

    일충현 교두의 손에서 작은 소리를 내며 책장이 넘어갔다.

    운현은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서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일충현 교두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일충현 교두는 날카로운 눈으로 운현이 가지고 온 ‘무림 방파에 전승되는 무공 근원의 통전적 접근에 관한 보고서’, 그러니까 운현이 간단하게 ‘보고서’라 부르는 책을 한 장 한 장 살펴보고 있었다.

    탁.

    드디어 책의 마지막 장이 끝났다.

    일충현 교두는 고개를 들고 굳은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운 학사가 혼자 수련한 검식은 이것이 전부요?”

    일충현 교두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뿐입니다.”

    “정말 다른 것은 없소?”

    재차 묻는 일충현의 말에 운현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흐음.”

    일충현 교두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나마 다행이구려. 이 검식은…….”

    일충현 교두는 고개를 들어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수련검식(修練劍式)의 일종인 듯하오.”

    일충현의 얼굴이 밝아지자 운현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그러나 제일 안도한 사람은 바로 일충현 교두였다.

    그는 운현이 문연각의 잡서들 속에서 위험한 비급이라도 하나 주워서 멋도 모르고 익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운현이 가지고 온 ‘보고서’를 살펴보니 그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충현 교두의 말에 운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수련검식요?”

    일충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검식을 꼭 그렇게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검식에는 두 종류가 있소. 하나는 수련을 위한 수련검, 그리고 또 하나는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실전검이오.”

    “수련검과 실전검…….”

    운현은 일충현의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때로는 하나의 검식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기도 하오. 그러니 수련검이니, 실전검이니 하는 것은 그저 편의상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오.”

    “그, 그럼 이 검식이 수련검이라는 것은…….”

    운현이 물어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오히려 일충현 교두의 질문이었다.

    “운 학사, 이 검식을 수련하고 난 후의 상태가 어떠했소?”

    “상태라면…….”

    운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이 검식을 수련하고 나면 정신도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더군요. 땀은 좀 흘렸지만 심하게 피로하거나 불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일충현 교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것이 수련검이라는 것이오. 수련검은 기를 활성화시키고 신체를 단련시켜 주기 때문에 수련을 마치고 나면 오히려 기운이 충만해지게 되오. 그러나 실전검은 기를 일시에 폭발시키는 것과 같아서 끝나고 나면 탈진 상태가 되고 만다오.”

    일충현은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운현의 시선도 그를 따라 책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래도 내력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련검식인 듯싶소.”

    “내력을 키우는 것을…….”

    일충현의 말을 똑같이 중얼거리던 운현이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한다.

    “아니, 검식으로도 내공을 키울 수 있습니까?”

    “도가(道家)에는 도인술(導引術)이라는 것이 있소. 혹시 화타 선생의 오금희(五禽戱)를 알고 있소?”

    일충현의 말에 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금희’란 명의 화타 선생이 다섯 동물의 움직임을 본떠 창안한 체조법으로서, 진기를 배양하고 병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것이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충현은 책을 들어 몇 군데를 넘겨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수련검식도 그 오금희처럼 도인술의 원리를 사용한 듯싶소. 일단 검식이 단조롭기도 하지만 검식이라면 거의 반드시 따라오는 내공 구결이 전혀 없이 정확한 자세만을 강조한 것도 그렇고, 게다가 저자가 적어 놓기를 이 검식을 수련하면 기가 천지에 충만함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아!”

    운현이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일충현의 말에 짚이는 것이 있어서다.

    “그건 이 검식의 목적이 기의 수련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충현 교두의 설명을 듣고 보니 하나도 틀린 데가 없을뿐더러, 자신의 짐작과도 맞았다.

    일충현은 잠시 서책을 살펴보더니 운현에게 물었다.

    “이 검식은 따로 이름이 없소?”

    운현이 고개를 저었다.

    일충현 교두는 혹시나 하고 책 표지를 쳐다보다가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검식의 이름치고는 너무 길구려.”

    운현은 어쩐지 자신의 잘못 같아서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그저 ‘보고서 검식’이라고만…….”

    그 말에 일충현 교두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삼류 무공이라도 이름만큼은 거창하게 짓기 마련인데, 기껏 부른다는 이름이 ‘보고서 검식’이라니.

    ‘운 학사다운 작명이군.’

    어느새 일충현 교두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리고 있었다.

    “검식의 이름이 그래서야 되겠소? 그럼 이 책의 저자는 누구요?”

    “정확한 이름은 모르고 그저 백호전의 학사라고만 했습니다.”

    일충현 교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름도 모르는 데다가 무관도 아니고 학사라…….’

    학사라면 아마도 검 한 번 제대로 쥐어 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 뻔했다.

    일충현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운현에게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자가 백호전 학사라 하니, 그럼 이제부터 이 검식을 백호수련검식이라 합시다.”

    그 말에 운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일충현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이 검식을 인정했다는 뜻이며, 또한 허락 없이 무공을 수련한 것에 대해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어쩌면 앞으로 백호수련검의 수련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좋은 이름입니다. 정말 괜찮은 것 같군요. 백호수련검이라……. 백호수련검, 백호수련검…….”

    운현은 일충현이 지어준 이름을 조그맣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동안 ‘보고서 검식’이니, ‘나뭇가지 휘두르기’니 하고 부르던 것에 비하면 이름부터가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하다.

    ‘하긴 평생을 걸려 만들어 낸 것이라니 이름이라도 멋있는 게 좋겠지.’

    그보다는 자신이 오 년간이나 수련한 검식을 일충현 교두가 인정해 준 것이 더 기뻤는지도 모른다.

    운현이 좋은 이름이라며 기뻐했지만 일충현 교두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본디 형식은 껍데기일 뿐이며 정작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고 배웠건만, 요즘 세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오.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더 중히 다루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오.”

    말하는 일충현 교두의 얼굴에는 착잡한 표정이 엇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일충현 교두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응?”

    무엇이 떠올랐는지 운현은 갑자기 번쩍 손을 들었다. 서생 때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교두님!”

    운현의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것은 일충현 교두다.

    코앞에서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운현 덕분에 일충현 교두는 조금 더듬기까지 했다.

    “왜, 왜 그러시오, 운 학사?”

    “저자는 이 책의 결론이자 핵심이 바로 백호수련검식이라고 했는데, 그럼 무공의 근원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결국 내공이라는 뜻입니까?”

    운현의 난데없는 행동과 이어진 장황한 질문에 일충현 교두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일충현 교두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난 후 운현의 질문에 대답했다.

    “으흠, 운 학사의 질문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소만……, 일단 깨달음을 전하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소.”

    “두 가지 방법요?”

    운현이 반문하듯 말하자 일충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를테면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것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깨달은 바를 구결이나 초식 같은 형태로 직접 전수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가르침 받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수련법만 전하는 것이 다른 하나요.”

    운현은 일충현의 말을 되뇌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소. 사실 깨달음이란 말이나 글로 전하기에는 너무 깊고 또한 섬세하오. 때문에 진리나 도를 전한다면서 그 형식만을 전하게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 아니겠소?”

    “아! 그러면…….”

    운현이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말하자 일충현 교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저자가 이 수련검식을 통해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은 직접 익혀 보지 않고는 단언할 수 없다고 보오. ‘기가 천지에 충만하다’는 건 사실 너무 애매한 표현이니 말이오. 내가 설명한 것들 역시 그저 가장 가능성 높은 추측이라 보면 되오.”

    운현은 일충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전 학사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은 이 책의 결론을 바로 십이식의 검식이라 했다.

    왜 결론이 특정한 진술이나 주장이 아니라 ‘검식’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역시, 결론은 직접 확인하라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는 운현에게 일충현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이 검식을 수련한 지는 얼마나 되었소?”

    “아, 햇수로 오 년이 조금 안 됩니다.”

    “오 년이라……. 그럼 지금 한번 해 보시겠소?”

    일충현 교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운현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 저, 그것이…….”

    “왜 그러시오? 운 학사라면…….”

    운 학사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일충현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검식이 조금 까다로운 자세를 요구하는 것 같긴 하지만 운 학사라면 다른 건 몰라도 자세 하나만은 언제나 일품이었다.

    우물쭈물하던 운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은…… 검을 들고 수련하는 건 처음이라서…….”

    일충현 교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금성 내에서 금의위가 아닌 한 누가 감히 검을 들고 검식을 수련할 수 있을까?

    “그럼 그동안은 뭘로 수련했소?”

    “그, 그게. 나, 나뭇가지로…….”

    이제는 아예 기어 들어가는 운현의 목소리에 일충현 교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허허, 나뭇가지로 검을 삼는 고수는 봤어도, 나뭇가지로 검을 수련한다는 사람은 처음이군.’

    “그것 참 고생이 심하셨소.”

    따뜻한 목소리에 운현이 반짝 고개를 든다.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기대감이 초롱초롱 어려 있었다.

    “내가 대신할 만한 목검이라도 하나 구해 줄 터이니 앞으로는 그것으로 하도록 하시오.”

    운현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일충현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본디 도인술이란 그저 흉내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오. 게다가 수련검식이라면 반드시 검을 들고 익히는 것이 옳소. 앞으로는 보다 더 철저하게 검식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시오.”

    운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만 준다면야 무어라도 못할까?

    “그럼 이것이 검으로는 처음 펼치는 백호수련검이 되겠구려.”

    그 말에 운현의 가슴이 뛰었다.

    운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쥐었다.

    일충현 교두가 뒤로 물러서고, 적당한 공간을 확보한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잡았다.

    “후우.”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어찌 보면 사부나 마찬가지인 일충현 교두 앞에서 펼치는 검식이다.

    운현이 긴장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긴장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락.

    곧게 선 운현의 검이 물 흐르듯 천천히 움직여 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운현은 모든 것을 잊고 검식에 빠져들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누가 지켜보고 있는지조차 잊었다.

    운현은 오직 검식에만 몰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호수련검은 한 치의 방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아가씨 같은 존재였으니까.

    우웅.

    운현의 검이 부드럽게 공간을 가르고 지나가자 작은 소리가 일충현 교두의 감각에 흘러 들어왔다.

    ‘역시 운 학사의 검식에서 검명이 났던 건 이 수련검 때문이었군.’

    일충현 교두는 검명의 정체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학사의 검에서 검명이라……, 그런대로 괜찮은 수련검이군. 운 학사도 오 년간 책만 파고든 것은 아닌 듯하고.’

    끊임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운현의 검식을 보며 일충현 교두는 미소 지었다.

    검식에 내력이 실리기 시작했으니 이제 곧 검이 자신의 손보다 더 익숙해질 것이고 검 끝이 손끝처럼, 아니 손보다 더 자신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일충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검도(劍道)에 입문한 것을 축하하오, 운 학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