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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4화 (14/530)
  • 014화. 검명(劍鳴)

    “오늘 조회는 이상일세.”

    사일천은 벌써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책을 펼치고 있었다.

    운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은 더 있었지만 어차피 관리란 상명하복, 사일천이 더 이상 용건이 없다는데 뭘 더 어쩔 수가 없다.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린 뒤 운현은 창룡전을 물러나왔다.

    사일천은 슬쩍 고개를 들어 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벌써 오 년이라……. 꽤 버티는군.’

    사일천은 감회에 잠겼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운현이 한 달을 못 버틸 줄 알았다.

    다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건, 혹은 온갖 연줄을 동원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든 말이다.

    그러나 운현은 사일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문연각에 들어가서 잡서들과 씨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금군교두에게 무공을 배우고, 이제는 제법 쓸 만한 보고서들을 작성해 내고 있었다.

    이제 운현은 창룡전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물론 창룡전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일천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운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많이 컸군. 이제는 제법 반항할 줄도 알고.’

    사일천이 노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현은 풀 죽은 모습으로 터덜터덜 창룡전을 나가고 있었다.

    ***

    습관적으로 문연각으로 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쫓겨날 걱정은 없게 되었다만…….”

    처음 사일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 ‘괜찮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하늘에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보고서의 재촉이 심해질수록 자신의 성공이 가까운 징조라고 믿었다.

    그러나 곧 손에 잡힐 것 같던 그 성공이 지금에 와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아침 조회 때마다 사일천에게서 보고서를 재촉받는 일뿐이니, 절로 한숨이 나올 법도 하다.

    “그나마 남은 즐거움이라곤 나뭇가지나 쥐고 휘두르는 것뿐이로군.”

    운현은 중얼거리며 문연각으로 들어섰다.

    문연각 관리는 이제 운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운현도 그저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칵.

    자리에 앉자 책상 위에 단정하게 놓여 있는 일곱 권의 서책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운현이 읽고 있는 무림에 대한 기록들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백 번을 읽으면 절로 그 뜻을 알게 된다고 했건만…….”

    운현은 탁자에 있는 서책으로 손을 뻗었다.

    이 책들은 문연각의 무림에 관한 기록 중에서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내용이 난해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곳 문연각에 있는 무림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읽고 또 읽어서 거의 외울 정도이고, 그 내용 또한 머릿속에 환하게 들어가 있다.

    “백 번도 넘게 읽은 것 같은데 왜 이해가 되지 않는 걸까?”

    그는 중얼거리며 책을 폈다.

    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이 무인은 왜 여기서 이 초식을 사용한 거지?”

    머릿속에 먼 옛날의 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검을 든 두 사람이 바람 부는 황야에서 마주 선다. 스산한 바람은 갈대를 흔들며 지나가고 주위는 적막이 감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검은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한 치의 양보도,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 검과 검의 격돌.

    검광이 번뜩이고 예정된 수순처럼 초식과 초식이 교차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한 사내의 검이 불가해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야!’

    운현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대체 뭐지? 왜 여기서 이런 초식이 나온 걸까?’

    알 수가 없다.

    전개대로라면 분명히 나와야 할 초식 대신에 전혀 다른 검로가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 검로는 상대를 완벽하게 굴복시켜 버렸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종내는 일충현 교두에게도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문장만으로 실제 검로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는 아주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검로의 흐름,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그 검식을 펼쳐 낸 의도는 알 수 있지 않냐고 하자 일충현 교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으니 고수라 하는 거라오.’

    그 표정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서 운현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운현은 더더욱 깊이 그 비무 기록들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쳐다보고 읽어 보고 심지어 꿈까지 꿔 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막혀 버린 책들이 바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일곱 권의 책들이었다.

    ‘흐음.’

    운현은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홀로 앉아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고, 때로는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벌리기도 하는 운현의 모습은 매우 이상해 보였다.

    그러나 한참 후에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낮은 신음 소리였다.

    “으으음, 모르겠군. 이것도 아닌데…….”

    책을 덮으며 운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많은 시간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어느새 수련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린 운현은 주섬주섬 필기도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백 번으로 이해가 안 되면 만 번이라도, 아니 이해가 되는 때까지 계속 읽는 수밖에.”

    달칵.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해진 서가들 사이를 지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연각을 나서는 운현의 어깨 위로 초여름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

    운현이 향한 전각에는 이미 일충현 교두가 와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운현은 걸음을 빨리했다.

    “일충현 교두님.”

    운현이 다가와 정중하게 예를 올리자 일충현 교두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셨소, 운 학사.”

    운현은 들고 온 필기도구와 책을 전각 한편에 내려놓고 일충현 교두 앞으로 돌아왔다.

    일충현 교두는 들고 있던 창과 검을 운현에게 건네주었다.

    “오늘은 창법과 검법을 수련하도록 하시오.”

    일충현이 건네주는 창과 검을 두 손으로 신중하게 받아 든 운현은 뒤로 조금 물러서서 일충현 교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운 학사도 제법 모양새가 잡혀 가는군.’

    일충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운현은 자신이 책을 놓았던 곳에 조심스레 검을 세워 둔 뒤, 창을 들고 돌아와 자세를 잡았다.

    “하아!”

    창을 든 운현이 기합을 내질렀다.

    그 기합 소리에 일충현 교두는 일전에 도진 교두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저 기합 소리는 몇 년이 지나도 전혀 나아지질 않는군요.

    눈살을 찌푸린 채 운현을 바라보던 도진 교두의 표정이 생각나자 일충현 교두는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살짝 흘렸다.

    운현의 기합 소리에 기세가 실리지 않았다는 것은 일충현 교두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운현이 자신들과 같은 살기등등한 기합을 내지르게 된다면 어딘지 모르게 더 어색할 것만 같았다.

    ‘학사는, 학사인 채로가 제일 자연스러운 것이지.’

    황궁 십팔반 무예의 기본형 수련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무관도 아니고 근골 또한 받쳐 주지 않는 운현에게 그 이상의 수련은 어차피 불가능했다.

    결국 운현과 일충현 교두의 수련 시간은 무공과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운 학사는 언제나 질문거리가 넘쳤다.

    처음엔 무공과 무림이란 것 자체에 대한 질문들이, 그리고 몇 년간은 주로 문연각에서 읽는 비무 기록에 대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요즈음은 무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묻는 편이지만, 가끔씩 난데없이 세상이나 인생에 대한 질문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후훗.’

    일충현 교두는 그런 시간들이 좋았다.

    사양하겠다던 도진 교두도 가끔씩 들러 운현의 수련을 도와주는 것을 보면 그도 그리 싫지는 않은 듯했다.

    지금 운현이 창과 검을 수련하고 있는 것도 실은 배웠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한 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일충현 교두는 묵묵히 서서 운현의 수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응?’

    일충현 교두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운현이 검을 수련하던 도중이었다.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이 일충현 교두의 귀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일충현 교두의 신경이 단번에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자금성, 붉은빛의 금지된 성이며 일충현 교두는 이곳을 지키는 금의위다.

    그 어떤 작은 기척이라도 절대 섣불리 넘어갈 수는 없다.

    일충현 교두의 한쪽 손은 어느새 허리에 찬 검 손잡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하아!”

    아무것도 모른 채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운현의 기합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일충현 교두는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의 신경을 일깨웠던 이질적인 느낌은 그 모습을 쉽사리 다시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것도 잡아낼 수 없었던 일충현 교두가 경계를 막 늦추려는 찰나, 그리고 운현의 검이 또 다른 궤적을 그려 냈을 때였다.

    웅.

    갑자기 일충현 교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운현이 들고 있는 검이었다.

    “검명?”

    일충현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서게 한 것. 그것은 대단히 미세한 검 울음소리[劍鳴]였다.

    ‘설마…….’

    의아한 시선을 운현의 검에서 떼지 못하는 일충현의 귓가에 얼마 전 도진 교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일 교두님, 방금 운 학사의 검에서……, 검명이 나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무척이나 주저하며 입을 연 도진의 말이 그때는 착각이라 생각했다.

    자신도, 그리고 도진 교두도 주의해서 보았지만 운현의 검에서는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마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도진 교두는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운 듯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몇 달이나 지난 지금, 일충현 교두 자신이 운현이 펼치는 검식에서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다.

    ‘검명이라니…….’

    사실 금의위들에게서 검명이 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검식을 펼칠 때 아련한 소리가 들리는 것은 검에 내력이 실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단지 힘으로만 휘두르던 경지를 벗어났다는 것이니, 금의위라면 굳이 신경을 곤두세울 만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학사의 검식에서 검명이라니.

    한 줌의 내공조차 없을 터인 운현의 검식에서 검명이 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자신이 건네준 검이 무슨 신검(神劍)도 아닌 다음에야.

    “운 학사!”

    일충현 교두는 강한 목소리로 운현을 불렀다.

    한창 검술에 집중하고 있던 운현은 일충현 교두의 고함 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의아한 시선으로 일충현 교두를 쳐다보았다.

    “네?”

    일충현 교두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지금 따로 수련하고 있는 무공이나 내공심법이 있는가?”

    운현은 움찔했다.

    자신이 남몰래 ‘보고서 검식’을 연습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 일충현에겐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충현 교두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운 학사! 문연각에 있다고 해서 다 믿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금군교두 일충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운현은 아무 대꾸도 못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함부로 수련하다가 주화입마라도 들면 어쩌자는 것인가!”

    일충현 교두는 진짜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건 그가 운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기. 사실은 그게…….”

    운현은 낭패한 얼굴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일충현 교두의 분노로 보아, 그동안 남몰래 해 오던 ‘나뭇가지를 쥐고 휘두르는 은밀한 즐거움’도 오늘로서 그 막을 내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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