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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3화 (13/530)
  • 013화. 잘 풀려도 문제다

    “크흠.”

    상념을 떨치려는 듯 운현은 짐짓 큰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창음각을 둘러싼 이층 누각의 앞자리는 황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앞쪽 무대 가까운 자리에는 고관들이, 그리고 운현이 앉은 곳부터 궁녀와 환관 들이 앉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 자리 배치는 운현의 현재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언젠가는.’

    운현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저 앞쪽으로 나설 날이 있겠지.’

    이층 누각 어딘가에는 아직 용안조차 뵙지 못한 황태자 전하가 계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공연을 즐길 날이 올 것이다.

    황태자의 곁이 아니라면 최소한 저 앞쪽에서라도.

    운현은 그렇게 믿었다.

    채앵.

    공연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무대에 시선이 집중되고,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창음각에서 돌아오는 운현의 발걸음은 사뭇 들떠 있었다.

    박 환관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였다.

    지금 운현의 머릿속엔 온통 방금 보았던 공연 장면들만이 가득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창음각에서의 공연은 기대 이상이었다.

    운현은 말 그대로 극(劇)에 흠뻑 빠져들었다.

    음악이며 배우들의 연기며 흠잡을 곳이 없었다.

    절세 미녀를 연기한 배우가 사실은 남자라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어쨌든 운현은 공연에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현을 사로잡은 것은 극 전체에 흐르던 그 호쾌함이었다.

    “과연 이러니 황태자 전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도 하군. 역시 보기를 잘했어.”

    운현은 자신의 초안을 상당 부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공연을 통해 고수들의 비무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운현은 정말 큰 것을 배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약간 아쉬운 점은 있었지. 다른 건 몰라도 무공에 대한 설정은 좀 허술한 것 같아.”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예전 같으면야 아무것도 모르고 봤을 테지만, 그래도 일 년을 수련으로 지내고 나니 공연 중에 나오는 무공이나 결투 장면이 상당히 어설퍼 보였던 것이다.

    “거기선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이엽!”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극중에 나왔던 주인공의 동작 하나를 고쳐서 해 보다가 화급히 손을 거두었다.

    혹시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슬쩍 좌우를 살펴본 운현은 서둘러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른 가서 적고 싶은 문장이 머리에 가득했다.

    ‘좋아. 왠지 잘 풀릴 것 같은데?’

    운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발길을 재촉하는 운현의 가슴은 미래의 희망으로 사뭇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다섯 해가 지나갔다.

    ***

    “후우우우. 젠장.”

    운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아갈 듯 멋진 필체로 새겨진 창룡전 현판도, 셀 수 없을 만큼 보아 온 지금에선 그저 심드렁하기만 했다.

    “너무 잘 풀려도 문제군.”

    터덜터덜 창룡전으로 들어서는 운현의 발걸음은 힘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언제나처럼 사일천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서책에 무엇인가 적고 있었다.

    ‘저 사람은 대체 뭘 저렇게 늘 하고 있는 것일까?’

    운현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창룡전 관리 사일천을 바라보았다.

    창룡전의 유일한 관리이자 또 다른 학사인 그와 매일 얼굴을 마주친 지가 벌써 오 년여다.

    오 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운현은 사일천을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얼 보고 있는 건가?”

    차가운 목소리가 운현의 귀를 울렸다.

    운현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모으고 익숙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고개를 들자 사일천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고서는?”

    운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두 달에 한 번도 벅찹니다. 제대로 하려면 적어도 석 달은 주셔야…….”

    탁.

    ‘또 덮는군. 완전히 버릇이라니까.’

    운현이 무심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일천은 쉽게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버릇은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펴면 용건이 끝났다는 뜻이다.

    대체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달 만에 완성해서 제출했던 적도 있지 않은가?”

    사일천의 말에 운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특별한 경우입니다. 항상 그렇게 보고서를 제출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황태자 전하께 드릴 보고서인데 서두르다가 자칫…….”

    “예전에도 말했네만.”

    운현의 말은 사일천의 차가운 목소리에 끊어졌다.

    “자네의 할 일은 자신의 일을 기한 내에 해내는 것일세. 황태자 전하께서 자네의 보고서를 마음에 들어 하실지는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사일천의 냉담한 말에 운현의 입이 대놓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만약 잘못될 경우 문책받는 것은 제가 아닙니까?”

    사일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운현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운현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당돌한 운현의 태도에 결국 사일천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윗사람은 말일세, 절대로 아랫사람이 최선을 다한다고 믿지 않네. 그러기에 언제나 어제보다 나은 것을 요구하기 마련이지.”

    씁쓸한 표정으로 사일천이 말을 이었다.

    “자네도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명심하는 게 좋을 걸세. 튀어나오는 것도 뒤처지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걸 말일세. 지금은 영웅이 필요한 세상이 아니니까.”

    말하는 사일천의 표정은 어딘가 허탈해 보였다.

    덕분에 운현도 조금 숙연해졌다.

    “그러니까 자네가 한 달 만에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이상, 위에서는 언제나 그 이상을 요구한단 말일세. 알았나?”

    운현은 사일천의 말을 납득했다.

    그러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료가 부족합니다.”

    사일천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자료가 부족하다니? 문연각의 잡서가 몇 권인데 그 많은 책이 벌써 바닥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문연각의 잡서가 삼만 칠천 권 이상이라도 무림에 대한 책은 오백 권을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정확히는…….”

    운현이 잠시 손가락을 헤아리면서 무언가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오백서른일곱 권이지요. 거기서 비무의 내용까지 기록한 서책은 더 적습니다. 그러니까…….”

    운현이 다시 손가락을 헤아렸다.

    “삼백예순네 권이군요. 그것도 연대가 겹치거나 차마 비무 기록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것까지 다 포함해서요.”

    사일천은 묵묵히 운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공감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보고서 한 권을 작성하는 데는 평균 열 권 정도의 자료가 필요합니다. 제가 제출한 보고서만 해도 벌써 서른 권에 가까우니까…….”

    “정확히는 스물일곱 권이지.”

    운현의 말을 사일천이 끊었다.

    운현이 주춤하는 사이 사일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황태자 전하께 제출되었네. 자네로선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닌가?”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운현은 목까지 올라온 뒷말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었잖습니까?’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자신의 글을 마음에 들어 했다든가, 혹은 수고를 치하한다든가 하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오히려 박 환관으로부터 자신의 보고서가 필사되어 황궁 내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제법 인기가 있었는지 누군가는 자신의 보고서에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고 한다.

    하긴 고고한 한림원 학사들마저 어려운 고서보다 백화소설을 즐겨 찾는 시대니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문제는 그런다고 운현에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는 황태자 전하의 인정은 고사하고 그 흔한 승진조차 소식도 없다.

    사정이 이러니 운현으로서는 정말 황태자가 자신의 보고서를 읽는 건지조차 의심이 가는 판국이다.

    ‘하긴 승진되어 봤자 단둘뿐인 창룡전에서 뭘 바라겠냐만…….’

    운현은 속으로 중얼거린 생각 대신 다른 말을 입으로 내뱉었다.

    “자료도 없고 시간도 부족한데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잘 풀린 셈이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촉이 심해져서 보고서를 써 내느라 허리가 휠 정도다.

    그렇게 낸 보고서가 벌써 스물일곱 권이다.

    자금성에 들어온 지도 벌써 햇수로는 오 년 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나아질 기미는 전혀 없다.

    그러니 운현의 입이 튀어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자네가 시간이 부족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닌가?”

    사일천의 낮은 목소리에 운현이 움찔한다.

    그러나 운현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제 수련은 보고서를 쓰는 데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설마 닭의 배를 갈라 달걀을 꺼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운현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사일천은 피식 웃었다.

    “어쨌든 자료는 걱정하지 말게. 강호 무림에 널리고 널린 게 고수들이며, 무림인들의 싸움이 날마다 끊이지 않는데 설마 자료가 없겠나.”

    “그 강호에 넘쳐나는 고수들의 자료를, 지금 이 자금성 구석에 박혀 있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운현이 항변하듯 말했지만 사일천의 대답은 간단했다.

    “소환하게.”

    “네?”

    운현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자 대번에 사일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두 번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운현으로서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환이라니 그게 무슨…….”

    난데없는 말에 운현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사일천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자네는 명색이 자금성 학사가 아닌가? 황명으로 소환하면 감히 누가 오지 않을 수 있겠나?”

    “지금 무림의 고수들을 소환하란 말씀이십니까?”

    탁.

    책상 위에서 나는 가벼운 소음과 함께 사일천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누가 무림 고수들을 소환하라고 했나? 그들이 소환한다고 올 사람들인가? 이야기꾼들을 불러들이면 되지 않는가? 강호 무림의 온갖 일에 대해 떠드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말이야.”

    “아하!”

    운현은 그제야 사일천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강호 무림에는 온갖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전문적인 이야기꾼들이 있다.

    운현도 예전에 과거 준비를 위해 묵었던 객잔에서 늙은 이야기꾼 하나가 침을 튀겨 가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이야기꾼들을 만날 수 있다면 문연각에 있는 자료들보다는 훨씬 많은 비무 자료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직접 비무를 목격한 당사자들이 아닌가?

    ‘어? 잠깐. 그러면…….’

    운현은 방금 떠오른 질문을 그대로 사일천에게 던졌다.

    “그러면 왜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이야기꾼들을 만나시지 않는…….”

    운현의 말은 사일천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끝을 맺지 못했다.

    “자네는 지금 지엄하신 황태자 전하께 그런 천인들을 직접 만나시라고 말하는 것인가?”

    운현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속이 편치는 않았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천하다고 몰아붙일 것까지야…….’

    고고한 황족들이라면 제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절대 이야기꾼 같은 사람들을 만나려 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서생 시절의 운현만 하더라도 그들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이야기꾼들을 소환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 자네가 직접 만나 보도록 하게. 허풍이 심한 자들이니 어처구니없는 말에 속지 않도록 주의하고.”

    사일천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듯 빠르게 말했다.

    “명심하게.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살아 있는 무림의 진짜 모습이지, 이야기꾼들이 꾸며낸 허풍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말일세.”

    사뭇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운현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보고서를 낼 때마다 사일천이 해 온 이야기다.

    바로 그 ‘진짜’ 때문에 자신이 문연각에 있는 잡서를 전부 들춰 봐야 했고, 무림에 대한 오백서른일곱 권의 책을 읽어야 했으며, 비무 내용을 기록한 삼백예순네 권은 거의 외우다시피 파고들어야 했다.

    오죽하면 꿈에도 몇 번이고 나왔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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