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아까처럼 검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운현은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금의위도 아닌 학사가 황궁에서 검을 지니고 있다가는 언제 목이, 말 그대로 진짜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운현이 수련 때 검을 쥘 수 있는 것도 금군교두가 함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휙, 휙.
운현은 익숙한 동작으로 나뭇가지를 몇 번 휘둘렀다.
그러나 마뜩잖은 표정은 풀리질 않았다.
모양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지만 무게라든가 느껴지는 감각이 진짜 검과는 비교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불평을 할 수도 없다.
자금성의 외조(外朝)에는 나무가 전혀 없기에 이런 나뭇가지 하나 구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래도 이런 걸로 하면 자세가 좀 달라질지도…….”
이리저리 휘둘러 보던 운현은 나뭇가지를 마치 검처럼 쥐고 자세를 잡았다.
사뭇 익숙해 보이는 그 자세는 아까 도진 교두와 함께 수련했던 검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후우.”
숨을 고르는 운현의 표정은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언제 시작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운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도, 우렁찬 기합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운현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끊임없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무공과는 사뭇 다른, 어찌 보면 춤 같기도 하고 도진 교두가 말한대로 체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운현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이내 운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탁.
운현의 발이 제자리로 돌아와 섰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처음과 같은 동작을 다시 반복했다.
땀이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운현은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허공에 선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곡선이었지만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했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운현은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무언가 부족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중간에 자세가 조금 틀렸던 것 같은데, 역시 나뭇가지라 그런 건가?”
운현은 나뭇가지를 들고는 ‘너 때문이야’라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쏘아본들 나뭇가지가 부끄러워할 리도, 미안해할 리도 없다.
문득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 운현이 한숨을 내쉬며 나뭇가지를 내렸다.
“까다롭기도 하지. 자세가 조금이라도 틀려선 안 된다고 해 놓고, 그렇다고 너무 형식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고 하니……. 어쩌라는 거야?”
운현이 이번에 투덜거린 대상은 바로 이름 모를 백호전의 학사였다.
―검식이 끊임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되 처음과 마지막이 한결같아야 하며…….
운현은 보고서에 쓰여 있던 글귀를 떠올렸다.
백호전의 학사는 대단히 꼼꼼하고 집요했다.
학문을 하는 이로서 마땅히 치밀해야 하고, 때로는 치를 떨 정도로 집요해야 한다는 것은 운현도 당연히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그런 운현조차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보고서의 요구 사항은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끝에 가서는 ‘이러함이 마치 여심(女心)을 대함과 같다’고 써 놓았으니 운현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투덜거리던 운현은 문득 서생 시절 소위 잘나가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아마 그들이라면 이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야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이 잘나가는 동안 운현은 그냥 책벌레였으니까 말이다.
“일충현 교두라면…….”
운현은 일충현 교두를 떠올렸다. 그건 그가 잘나갈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일충현은 금군교두다.
당연히 자신보다야 더 이 검식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뜸 이 책을 들고 가서 ‘이걸 가르쳐 주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학사나 금군교두라는 입장 이전에 너무나도 무례한 일인 것이다.
“결국 혼자 하는 수밖엔 없는데, 정말 이러면 되긴 되는 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바로 그걸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수련이다.
어찌 보면 이 보고서의 결론은 바로 이 단조로운 열두 가지의 검식이었다.
‘보고서’의 저자는 이 검식을 완전히 익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기(氣)가 천지에 충만함을 알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건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 일충현 교두가 한, ‘모든 고수는 내공의 고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한동안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운현이 고개를 저었다.
“갈 길이 멀다. 이런 생각 하느니 한 번이라도 더 해 보는 게 낫겠지.”
책에 따르면 숙련된 무관이 최소 만 번을 반복해야 감을 잡을 수 있고, 십만 번을 수련해야 검식의 참뜻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무관도 아닌 학사라면 갈 길이 더욱 멀다는 것은 굳이 헤아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만 번이라…….”
운현이 이 검식을 혼자 연습하기 시작한 것도 겨우 여섯 달 정도다.
자신도 모르게 수련 횟수를 헤아려 보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세어 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확신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러다 평생 걸리는 거 아냐?”
투덜거리면서도 운현은 나뭇가지를 세우며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것은 도진 교두도 감탄했던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자세였다.
어느새 햇볕이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운현의 부드러운 곡선은 끊일 줄을 몰랐다.
***
운현이 소위 ‘보고서 검식’의 수련을 마친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나서였다.
어느새 어스름이 내려앉으려 하는 것을 깨달은 운현은 서둘러 문연각으로 돌아왔다.
“아, 박 환관.”
자신의 지정 좌석이 되어 버린 잡서 구역으로 들어서던 운현은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운 학사님이시로군요, 호홋.”
박 환관도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서책이 펼쳐져 있기에 근처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항상 열심이시군요, 니예.”
운현은 쑥스러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책만 펼쳐 놓고 오후 내내 딴짓했다고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럼 수고하시와요. 소인은 이만……. 호호홋.”
“아, 그리하게.”
운현이 자리로 발길을 옮기는데 문득 박 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참, 운 학사 나으리.”
“응?”
운현이 돌아보자 박 환관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나으리께서도 오늘 창음각으로 오시지요?”
“창음각?”
운현이 반문하자 박 환관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예. 오늘 공연할 극단은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다 들었사와요. 모르긴 해도 꽤나 볼만하지 않을까요?”
“창음각이라…….”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창룡전의 관리 사일천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기는 했다.
황상께서 베푸시는 공연이 있으니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별 관심 두지 않고 그냥 넘겨 버렸다.
“나도 가 보고 싶긴 한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좀 급하게 되지 않았나? 아무래도…….”
운현이 말하는 급한 일이란 바로 창룡전에 제출할 보고서 작성이었다.
지난 일 년간 창룡전의 관리 사일천은 사실상 운현을 방치하다시피 놓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이 계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젠 슬슬 결과를 낼 때가 되지 않았나?
창룡전 관리 사일천이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진 것이 두 달 전이다.
별일 아닌 듯 말했지만 운현으로선 이번 보고서가 앞으로의 갈림길이 될 터, 그야말로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운현은 두 달 전에 잡아놓은 초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정성스레 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니예.”
박 환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공연은 절세 미녀와 비운의 장수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던데 정말 아쉽군요. 그럼 저는 이만…….”
박 환관의 말에 운현의 귀가 솔깃했다.
“자, 잠깐.”
“니예?”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일세, 황상께서 특별히 베푸시는 공연에 불참한다는 것도 신하로서 불충일 테고, 게다가 그런 이야기라면 자료 조사 차원에서도 상당히 도움이…….”
운현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박 환관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리고 있었다.
곧이어 운현이 정말 묻고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 창음각이, 정확히 어디 있는 건가?”
첫날 황궁을 헤매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박 환관은 웃으며 아예 운현을 데리러 오기로 했다.
그렇게 박 환관이 사라지고 나자 운현은 자리로 돌아와 서책들을 정리했다.
탁, 탁.
차곡차곡 쌓여 가는 서책들을 보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사실 내가 지금 공연이나 볼 때는 아니지만…….”
운현은 눈앞에 놓여 있는 열 권 남짓한 책을 쳐다보았다.
시대 순으로 보고서를 내기로 결심한 운현이 첫 번째 보고서의 자료로 추려낸 것이다.
지난 두 달간, 운현은 이 열 권 남짓한 책을 밤을 새워 가며 읽고 또 읽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테지.”
지난 일 년간의 수련이 헛된 것은 아니어서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고수들의 비무 기록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보다는 잘 진행되었다.
운현은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며 얇은 책 한 권을 골라 품에 넣었다.
창음각에 가지고 가서 틈나는 대로 보기 위해서다.
“잘하면 오늘도 밤을 새워야겠군.”
창음각에서 책을 볼 시간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때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 학문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다.
품에 안은 책을 만지작거리며 운현은 문연각 밖으로 나왔다.
혹여라도 시간에 늦을까, 그는 박 환관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
운현은 갑자기 낯선 세계에 떨어진 듯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은 창음각은 꽤나 웅성거리고 있었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아 보였다.
그중에서 오직 운현만이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박 환관이 신경을 써 준 탓인지 자리가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문제는 주변에 앉은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박 환관은 모셔야 할 분이 있어 떠났고,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아는 사람이래 봤자 일충현 교두와 창룡전 관리 사일천, 그리고 박 환관 정도지만.
게다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궁녀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운현의 귓가를 사뭇 자극하고 있었다.
“어머, 얘. 너 취향도 참 특이하다, 호호호.”
“왜? 저 정도면 괜찮은 편 아냐? 보아하니 학사님인 것 같은데, 한림원 소속이실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싶지만 아무래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부근에 학사로 보이는 인물은 자신뿐이니 말이다.
“얘는 정말. 저 사람 몰라? 창룡전 학사잖아. 왜 그, 무공을 배운다는…….”
“정말? 저 사람이?”
놀란 시녀는 종알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몰랐어. 그런데 첫인상 다 망가진다. 고고한 학사님이 그게 뭐야?”
“그러게? 무관들처럼 건장한 것도 아니고 정말 주책이지, 뭐. 꼴사나운 것도 모르고 말야, 호호호.”
운현은 얼굴이 벌게지며 동시에 머리로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선 궁녀들 멱살을 붙잡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무공 배우는 데 당신들이 보태 준 게 뭐 있냐?’고 말이다.
그러나 운현은 고개를 돌려 노려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아서라. 황새의 큰 뜻을 참새들이 어찌 알랴.”
혼자 중얼거리긴 했지만 입맛이 쓰다.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이지만 어찌 저런 이야기를 당사자가 듣는 곳에서 저렇게 대놓고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꽤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