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보고서 검식
“수고하셨습니다, 도 교두님.”
일충현이 돌아오지 않은 채 운현의 수련은 끝났다.
몸은 피곤하지만 눈빛은 생기넘치는 운현이 도진에게 예를 표했다.
도진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운 학사께서도 수고하셨소.”
“그럼 저는 먼저…….”
“그러시오.”
운현이 책과 필기구를 챙겨 전각을 떠나자 굳은 얼굴로 서 있던 도진이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후우.”
금군교두 도진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힘든 수련 시간은 또 처음이군.’
도진은 들고 있던 검 두 자루를 갈무리했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고, 또 하나는 일충현 교두가 수련용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어쩐지 피곤해서 어딘가 앉을까 생각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충현 교두였다.
도진은 반색을 했다.
“일충현 교두님.”
다가온 일충현은 도진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답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좀 늦었나 보군. 운 학사는 갔소?”
“조금 전에 떠났습니다.”
일충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일충현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뭐, 별거 있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충현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도진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일충현이 먼저 말하지 않는데 자신이 캐물을 수는 없다.
“그보다 수련은 어땠소? 운 학사의 질문이 좀 당황스러웠을 텐데.”
일충현이 묻자 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숨을 쉬며 도진 교두가 말했다.
“그런 수련생은 진짜 처음입니다.”
일충현의 얼굴이 웃음이 살짝 걸렸다.
“그랬을 거요.”
짐작이 간다는 듯한 그 말에 도진은 하소연이라도 하듯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검이란 무엇이오?’라고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에서 열까지 궁금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대답을 해 주면, 그걸 또 전부 받아 적고 있더군요.”
도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상대가 자신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적고 있으니 간단한 대답을 하기 전에도 잠깐 멈춰서 생각을 해야 했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도 답답해서 직접 초식을 보여 줬더니, 오히려 질문이 더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또 안목은 어찌나 예리한지…….”
금군교두 도진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 오늘 검을 제일 많이 휘두른 사람은 운 학사가 아니라 바로 저일 겁니다. 이때껏 제가 배운 초식은 전부 다 쏟아 낸 것 같군요.”
일충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도진의 옷은 제법 흐트러져 있었다.
“다음부터 그런 질문에는 도 교두가 역으로 질문을 해 보시오. ‘운 학사는 검이란 무엇이라 보시오?’라고 말이오. 그럼 대답하기가 한결 쉬워질 거요.”
일충현의 말에 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요? 이렇게 피곤한 수련생은 절대 사절입니다, 사절.”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소?”
그 말에 도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던가’ 하고 놀랐던 것이 생각났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스쳐 지나는 바람이 한결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재미라…….”
도진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일충현 교두의 입에서 재미라는 말이 나오다니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 해 본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요 일 년간 일충현 교두의 변화는 어쩌면 운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군교두 도진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일충현 교두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전 사양하렵니다.”
“후후후.”
도진의 말에 일충현은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것은 이제껏 도진이 보지 못한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
문연각으로 돌아온 운현은 기분이 좋았다.
오늘 하루, 도진 교두에게서 건진 수확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도 교두는 보기보다 좋은 사람이군. 일충현 교두는 웬만해서는 잘 보여 주지 않는데 말야.”
중얼거리던 운현은 들고 온 책을 한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붓을 다듬었다.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도진의 검법에 대한 문장을 적어 두려는 것이다.
일충현 교두는 늘 ‘화려한 기예에 눈을 빼앗기지 말라’고 했었기에, 도진 교두가 오늘 보여 준 현란한 검법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빼앗길 만한 기예라도 보여 주고 나서 그렇게 말하면……, 쳇.”
투덜거리긴 했지만 사실 운현은 일충현 교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언제나 무수한 잎들뿐이다.
정말 그 실체를 알고 싶다면 감추어져 있는 기둥과 뿌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외면의 화려함에 눈을 빼앗겨선 절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충현 교두의 대답을 좋아하는 거지만.’
일충현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운현의 난데없는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자신의 일에 진짜로 정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때문일까?
오늘 같은 화려함은 없었지만 일충현 교두가 가끔 보여 주는 간단하고 수수한 동작들은 오래도록 운현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사락.
서책을 펴고 붓을 든 운현은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으음.”
금군교두 도진의 검에서 펼쳐지던 화려한 검법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붓이 일필휘지로 서책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검이 무지개를 뿌리니 천하의 모든 것이 숨을 죽이도다. 그 몸짓이 선녀의 손짓같이 부드러우나 독사의 이빨처럼 죽음을 부르며…….”
십수 년의 서생 시절 동안 갈고닦은 유려한 문체로 운현은 도진 교두의 검식을 묘사했다.
제법 흥이 넘쳤는지 운현은 꽤 여러 줄을 적고 나서야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문장을 다시 한번 읽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숨을 살짝 불어 먹을 말리고는 조심스럽게 책을 내려놓았다.
“자, 이젠 잡서들과 한바탕 또 씨름해야 할 차례군.”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책상 한쪽에 단정하게 쌓여 있는 서책의 무더기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 따로 놓여 있는 한 권의 책은 바로 백호전의 학사가 썼다는 ‘무림 방파에 전승되는 무공 근원의 통전적 접근에 관한 보고서’였다.
운현은 쉽게 손을 뻗지 못하고 서책 무더기와 백호전 학사의 책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사뭇 갈등하던 운현이 결국 손을 뻗은 것은 결국 백호전 학사의 책, 운현이 간단히 ‘보고서’라 부르는 서책이었다.
“잠깐만 보면 되겠지.”
운현은 자신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보고서’를 펼쳐 드는 그의 눈은 벌써 빛나고 있었다.
“가만 있자, 오늘 도진 교두의 검로(劍路)가 아마…….”
운현은 익숙하게 책장을 넘겼다.
이 ‘보고서’에는 황제에 대한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공의 기원이며 무공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장황하게 전개된 후에는, 저자가 바라본 가장 근원적이며 이상적인 검로가 서술되어 있었다.
소위 말하는 강호 무림의 비급은 아니었다.
그곳에 적혀 있는 건 검법 자체가 아니라, 모름지기 이상적인 검로는 이러해야 한다는 원칙, 혹은 조건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여기로군.”
운현은 심각한 눈빛으로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책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듯 운현은 완전히 책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고는 중얼거렸다.
“영 아닌걸? 전혀 달라. 다른 곳에 있는 동작이었나?”
운현은 책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이미 책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는 운현이다.
처음 찾은 부분이 아니라면 다른 부분은 볼 것도 없다.
이곳저곳 찾아보던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위력적인 검식이었는데 이 책의 서술과는 전혀 다르군. 그래도 일충현 교두가 보여 준 검식은 조금 비슷한 면이 있기라도 했었는데.”
책을 내려놓으며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쪽이 잘못된 거지?”
운현의 책상에는 언제나 이 ‘보고서’가 놓여 있다.
그것은 이 책이 대단히 재미있다거나 혹은 엄청난 무공 비급이어서가 아니었다.
운현이 이 책에 애착을 갖는 것은 자신과 같은 학사가 무림에 대해 쓴 책이라는 것과, 또한 학사의 관점에서 무공을 다룬 책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저자 스스로 ‘무공의 본질적 핵심에 대해 체계적이며 통전적으로 논하였다’라고 적었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문제는 운현을 제외하고는, 아니 사실은 운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명색이 금군교두인데, 설마 도진 교두가 틀렸을 것 같진 않고…….”
오늘 운현은 도진 교두의 화려한 검식에 꽤나 끌렸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검식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던 경지와 가장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달랐다.
아예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럼 역시 이 보고서가 틀렸다는 건가?”
혼자 중얼거려 봤자 대답해 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운현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책을 노려보았다.
“평생을 연구해서 쓴 책이라…….”
일생의 역작이라 해도 결국 검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는 학사가 쓴 책이다.
금군교두와 이 보고서 중 어느 쪽이 옳을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확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운현은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이 백호전의 학사가 틀렸다고 결론짓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이름 모를 학사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너무 비참한 일이 될 테니까.
“뭐, 잘 모르겠으면.”
덜컥.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해 보면 되는 거지.”
이 ‘보고서’에 적힌 것은 이상적인 검로에 대한 서술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놀라운 점은 이 책의 저자가 그 이상적인 경지에 이르는 수련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보고서의 결론이자, 저자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기도 했다.
글자 한 자마다 지극한 정성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안 되면 말고.”
운현은 ‘보고서’를 한쪽 옆구리에 끼고 문연각을 나섰다.
잘 모르겠으면 직접 해 보는 것이 이전의 자신에겐 지극히 생소한 방식이라는 것도, ‘잠깐만 보겠다’던 결심도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
운현의 발길이 닿은 곳은 방금 전까지 수련을 했던 작은 전각이었다.
지난 일 년간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이곳에서, 운현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처음엔 여기가 그렇게 지긋지긋했는데.’
지긋지긋한 정도가 아니었다.
온몸이 쑤시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을 정도로 아팠던 적도 있었다.
정말 수련을 때려치우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이게 적응한다고 하는 것인가?’
힘든 수련이 평범한 일상이 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일충현 교두의 사정으로 수련을 하지 않은 날, 운현은 자신의 몸이 다른 날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때부터 운현은 수련이 주는 장점을 하나하나 깨닫게 되었다.
“풋.”
생각에 잠겨 있던 운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꿈에도 나왔지.’
두 번 나왔다.
한 번은 악몽으로, 그리고 한 번은 무언가 엄청난 경지에 오른 신나는 꿈으로.
혼자 미소 짓던 운현은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 버렸다.
‘자, 그러면…….’
운현은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자그마한 전각 뒤편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꼭 검만 한 길이를 가진 나뭇가지였다.
운현이 직접 숨겨 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