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학사의 무공(2)
자세를 지도한다는 건 경우에 따라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진다.
정말 운 학사의 무공이 경지에 이르렀다면 대단찮은 실수를 지적하는 것 외에는 가르칠 것이 없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학사라는 운현의 신분이 마음에 걸린다.
나무 막대기 하나 제대로 들어 본 적 없을 그 비실비실한 문사가 어떻게 일 년여 만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제아무리 일충현 교두가 가르쳤다지만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 반대도 또한 이상하다.
어떻게 일충현 교두가 일 년여를 넘게 가르쳤는데 아직도 자세인가?
금군교두 도진은 헷갈렸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일충현 교두의 표정이다.
일 년여를 가르친 사람이 자세밖에 모르는데 저렇게 기분 좋은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듣고 보니 운 학사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구려.”
일충현 교두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해를 넘겼다.
그동안 일충현 교두와 운현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해 왔다.
오늘도 일충현 교두의 피치 못할 사정만 아니었다면 그가 직접 운현을 지도했을 것이다.
“저기 운 학사가 오는구려.”
일충현 교두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관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학사 한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책과 필기구를 들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서원에 가는 서생의 차림 그대로였다.
도진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 사람은 무공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인가?’
무공을 수련하러 오면서 관복을 차려입고 온다는 것부터가 도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도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일충현 교두는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 교두도 보면 알 거요. 운 학사는 가르치고 싶어지는 수련생이라오.”
도진의 눈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저벅, 저벅.
가까이 다가온 운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일충현 교두에게 인사했다.
일충현 교두도 주먹을 쥐어 포권 하며 운현의 인사에 답했다.
“운 학사, 이쪽은 금군교두 도진이라 하오. 도진 교두, 이분이 운 학사시오.”
일충현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나는 창룡전 소속 학사, 운현이라 하오.”
운현은 깊이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지만 도진 교두는 가볍게 포권 하고 말았을 뿐이다.
“도진이라 하오.”
운현은 고개를 돌려 일충현을 바라보았다.
일충현이 그의 시선에 답하듯 말했다.
“이분은 나와 함께 금군교두를 맡고 있소. 오늘 운 학사의 수련을 도와 달라고 내가 부탁했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일충현 교두가 이미 말했던 일이다.
바스락.
운현은 곧 자리를 잡고 옆구리에 끼고 온 책을 꺼내 들었다.
지켜보던 도 교두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운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책을 꺼낸 운현은 스스럼없이 일충현 교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일 교두, 어제 교두께서 설명해 준 것 중에…….”
“아, 운 학사. 그것 말이오만.”
필기도구를 꺼내들고 있던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일충현 교두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수련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소. 나중에 돌아와서 질문에 답을 해 주리다.”
운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을 덮었다.
조금 순서를 바꾼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수련이 끝나고도 붓을 놀릴 정도의 힘이야 이제는 충분히 남아 있으니까.
운현은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고 일충현 교두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그럼 백타 제일식부터 제십이식까지 전반 십이식을 먼저 해 보시오.”
운현은 일충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목소리가 운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아!”
그 기합 소리에 금군교두 도진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기합이랍시고 터져 나온 목소리가, 도진이 듣기에는 애기 울음소리만도 못하게 들린 탓이다.
휘릭, 휙.
그러나 곧이어 운현의 초식이 펼쳐지기 시작하자 도진의 찌푸려진 눈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금군교두 도진은 눈동자를 빛내며 감탄을 흘렸다.
“호오…….”
“정말 좋은 자세지 않소, 도 교두?”
옆에서 일충현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운현에게 못 박혀 있었다.
“괜찮은, 아니 정말 좋은 자세입니다. 발 딛는 위치도 정확하고 동작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군요. 호흡도 꽤 안정되어 있는 것 같고, 시선도 정확히 봐야 할 곳을 보고 있는 데다 잘못된 습관 같은 것도 없군요.”
그 목소리에 운현에 대한 멸시나 반감은 없었다.
도진의 눈빛은 어느새 냉철한 금군교두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운현의 동작을 살피며 금군교두 도진은 하나하나 분석하듯 지적을 이어 나갔다.
“동작과 동작 간의 전환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아 각 초식의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정도면 생각보다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군요.”
과연 그랬다.
운현의 움직임은 숙달된 금군교두인 도진의 눈으로도 흠잡을 데 하나 없었다.
아마 도진이 본 자세 가운데, 물론 어디까지나 ‘수련생’이라는 전제 아래서 얘기지만, 가장 완벽에 가까운 것일 터였다.
“올바른 지적이오.”
일충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 학사는 각 동작의 의미를 움직임 하나까지 이해하고 있소. 저 자세는 그 때문에 가능한 것이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일충현 교두시로구나. 일개 학사를 일 년 만에 이 정도까지…….’
고개를 끄덕이던 도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아!”
여전히 애기 울음소리만도 못하게 들리는 운현의 기합 소리를 들으며 도진은 말을 계속했다.
“저 초식이 본래 저렇게 느린 초식이었습니까?”
일충현 교두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물론 아니오.”
“그런데 왜…….”
도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일충현 교두를 쳐다보았다.
일충현 교두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도진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게 현재 운 학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빠르기요.”
“네?”
“동작에 내력이 실리지 않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제야 도진은 운현의 동작을 보는 동안 내내 그의 신경에 거슬렸던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운현의 기합 소리에는, 아니 그의 동작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기세(氣勢)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금군교두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무공은 올바른 자세가 기본이다.
자세만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면 된다.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올바른 자세’의 정의니까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훌륭한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기껏 저 정도뿐이라니…….’
도진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쉽군요.”
“뭐가 말이오?”
일충현 교두가 묻자 도진은 운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력만 받쳐 줬다면 꽤 가르쳐 볼 만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긴 그 전에 근골(筋骨)이 문제가 되겠지만…….”
일충현 교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학사요, 도 교두. 근골이 괜찮고 내력이 있었다면 무관이 되었겠지 학사가 되었겠소? 그리고 말이오…….”
일충현 교두는 지나가는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운 학사의 장점은 좋은 자세만이 아니라오.”
도진은 일충현의 말을 들었지만 그리 마음을 두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운현의 모습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단점들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운 학사의 훌륭한 자세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근골도 그렇지만 본래 완력이 부족한 것 같군요. 저래 가지고 부(斧), 아니 창이라도 제대로 들 수 있었습니까?”
“아직 거기까지 안 갔으니 알 수 없지 않겠소?”
“네?”
도진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일충현을 돌아보며 반문했다.
창술까지 가지도 않았다니?
일 년이 지났는데 설마 아직 십팔반 무공을 끝내지 못했단 말인가?
“도 교두, 다시 말하지만 그는 학사요. 금의위가 아니라오.”
일충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사이 운현의 백타 십이식이 끝났다.
수련을 끝내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운현에게 일충현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고하셨소, 운 학사. 그럼 백타 후반 십이식까지 마친 후에 검법을 수련하시오. 도 교두는 특히 검법에 뛰어나니 운 학사께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오.”
약간 상기된 운현의 얼굴이 도진을 향했다.
그의 눈빛이 기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금군교두 도진은 볼 수 있었다.
운현은 곧 백타 후반 십이식을 시작했다.
“하아!”
여전히 마음에 안 차는 운현의 기합 소리를 한 귀로 들으면서 도진은 일충현에게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직 검(劍)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검은 얼마 전에 마쳤소. 그러니 도 교두가 직접 자세를 가르쳐 줄 필요는 없소. 단지…….”
운현의 초식을 보고 있던 일충현 교두가 고개를 돌려 도진 교두를 바라보았다.
일충현의 얼굴에는 조금은 장난기 서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중간중간 질문에는 좀 대답을 해 줘야 할 거요.”
“질문요?”
도진이 반문했지만 일충현 교두는 슬쩍 웃고는 고개를 돌려 운현의 수련모습을 쳐다보았다.
금군교두 일충현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도진 교두마저 감탄한 운현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운현에게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무공에 대한 순수하고도 단순하며 집요한 질문들이었다.
황궁의 무공은 강호의 무공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무(武)를 도(道)로까지 생각하는 방파들이 있는 강호의 무공들에 비하면 황궁 무공은 효율과 실리, 그리고 통일된 집단행동을 우선으로 한다.
이것은 무력 집단으로서 최단시간 내에 다수의 적을 유효적절하게 제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무공에 대한 깊이 있는 깨달음이 끼어들 여지가 적고, 무공에 대한 개인의 순수한 열정 같은 것은 뒤로 밀리기 마련이다.
일충현 교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다른 교두들과는 달리 강호와 조금 인연이 있었던 그였지만 이곳 황궁에서의 생활은 황궁의 녹을 먹는 무관의 생활이지, 무도(武道)를 깨우쳐 가는 무림인의 생활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운현을 만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무공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들, 바깥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던질 수 있는 원초적인 궁금증들.
그런 질문에 대답하면서 일충현은 어느새 예전의 그때로, 무공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일충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운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도진에게 포권 하며 말했다.
“그럼 부탁하오, 도 교두.”
“네, 교두님.”
도진도 마주 포권 하며 답하자 일충현은 곧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일충현의 그 뒷모습이 왠지 처량해 보여서 도진은 입맛이 썼다.
‘조금만 영리하게 처신하셨다면 충분히 고위 무관이 되셨을 분이건만…….’
하지만 일충현 교두가 영리하게 처신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이 자신이 일충현 교두를 신뢰하는 것이니까.
게다가 지금은 예전에 느껴지던 차가운 태도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전의 일충현이라면 사적인 일을 부탁하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아!”
여전히 귀에 거슬리는 운현의 기합 소리가 도진의 상념을 깨웠다.
금군교두 도진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백타 후반 십이식을 펼치고 있는 운현을 보며 도진은 혀를 찼다.
‘일 년이라……. 그렇게 오래 걸렸으니 자세가 나쁠 수가 없지. 하지만 저래 가지고서야 황궁 십팔반 무공을 모두 마치려면 몇 년은 걸리겠군. 저걸로 무슨 도를 닦는 것도 아니고…….’
운현의 초식 전개는 답답할 정도였다.
학사인 운현으로서야 장족의 발전이겠지만, 금군교두 도진의 눈에는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자세는 정말 훌륭하군. 이번에 새로 들어온 금의위들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야.’
“하아!”
귀에 거슬리는 운현의 패기 없는 기합 소리에 도진 교두는 눈살을 찌푸렸다.
‘학사는 학사. 결국 학사의 무공이란 건.’
도진의 속내는 자신도 모르게 기어이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체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