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학사의 무공(1)
“아, 그, 그것이 말일세…….”
운현은 금방 말을 꺼내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무공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땀 냄새 찌든 관복을 입고 다닐 것인지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운현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박 환관에게 털어놓았다.
“사실은 말일세. 내 요즘 무공을 조금, 수련하고 있다네.”
“니예? 아니 그럼 정말로 금군교두 일충현 나으리한테 무공을 배우고 있으셨단 말입니까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박 환관의 반응에 운현의 얼굴은 대번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자, 자네 그걸 어찌 알았나!”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옵고……. 정말 나으리께서 무공을 배우신단 말입니까요? 학사님께서요?”
박 환관이 반문했지만 운현은 반쯤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러니까 그걸 어찌 알았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아!”
“아니, 뭐 그야…….”
박환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금성이 크다지만 알고 보면 아주 좁은 곳입니다요. 제아무리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며칠만 지나면 모든 사람이 알게 될 정도니까요, 니예.”
운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운현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서, 설마 내가 일 교두와 만나는 일이…….”
“호홋. 니예, 물론이지요. 나으리께서 금군교두와 무언가 하신다는 건 저희 사이에선 꽤나 유명한 이야기랍니다. 물론 두 분이 무엇을 하시는 건지에 대해선 의견이 꽤나 분분했었지만 말이죠, 호호홋.”
자금성이 넓다지만 환관들에게는 손바닥 안이다.
이곳에서 평생을 지내며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자금성 한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싫어도 저절로 알게 된다.
더구나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환관들에게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생명과 직결되기도 했다.
그러니 운현이 한 달 동안 매일 금군교두와 만나 무공을 수련하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금군교두와 창룡전 학사의 비밀스러운 만남.
이 소문은 삽시간에 환관과 궁녀 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평소 고지식하고 윗사람에게 잘 보일 줄 모르는 금군교두 일충현과, 의관을 번듯하게 차려 입은 신출내기 창룡전 학사가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일까?
환관과 궁녀 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창룡전의 운 학사가 금군교두 일충현 쪽으로 연결되는 줄을 잡은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무관인 금군교두, 그것도 고지식한 일충현인가 하는 것은 제쳐 놓더라도 말이다.
“학사님도 보통이 아니시군요, 니예. 무공을 배운다는 빌미로……, 후훗.”
박 환관은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울상을 짓고 있는 운현에게 인사를 했다.
“축하드립니다요, 나으리.”
“그,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무슨 난데없는 얘기냐는 듯 울상을 짓는 운현을 보며 박 환관은 씨익 웃었다.
“이제 곧 높으신 나으리가 되실 테니 더러워진 관복 정도야 제가 당연히 힘을 써 드려야 되겠지요, 니예. 호호홋.”
그건 의례적인 인사말이자 운현을 띄워 주는 겉치레의 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린 운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학사인 자신이 무공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그 꼴사나운 모습을 자금성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니.
털썩.
운현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는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운현의 귀에 박 환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또 뵙겠사와요, 나으리.”
박 환관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사박, 사박.
서가를 걸어가던 박 환관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 어차피 무공을 배운다는 거야 핑계일 테니 이런 소문도 잠깐이겠지만…….’
문득 박 환관은 고개를 살짝 돌려 뒤에 멍하니 앉아 있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다지 좋은 줄이라곤…….’
확실히 좋은 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일충현 같은 실력자를 금군교두로 썩히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쪽 줄은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하다.
고개를 갸웃하던 박 환관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운현이 어떤 줄을 붙잡건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탁, 탁, 탁.
한시바삐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박 환관은 종종걸음으로 문연각에서 사라졌다.
뒤에 혼자 남은 운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
다음 날, 금군교두 일충현은 수련을 하는 운현의 몸놀림이 조금 달라진 것을 느꼈다.
여전히 일충현의 말을 따르고는 있었지만, 운현의 자세에서는 이전과 같은 열정도, 언제나와 같은 성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운 학사, 무슨 일이 있으셨소?”
운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일충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 교두. 혹시, 자금성 내에서 나에 대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들어 보셨소?”
일충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소문 같은 건 잘 모르는 편이오. 무슨 소문인데 그러시오?”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내가 일 교두로부터 무공을 배우는 것에 대한 소문이 떠도는 것 같소.”
“그렇소? 흠, 역시 그랬군.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거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일충현을 바라보았다.
“역시라니, 알고 계셨소?”
일충현은 고개를 저었다.
“소문을 들어 본 적은 없소. 하지만 요 근래 쳐다보는 눈들이 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뿐이오.”
“쳐다보는 눈?”
운현이 반문하자 일충현은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전각들 사이를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운현의 눈에 전각들 모퉁이 사이로 무언가 당황한 듯한 그림자가 휙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일충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특별히 이상한 기색은 없기에 그냥 놔두고 있었소. 아마도 운 학사가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이 신기했던가 보오. 운 학사가 들으셨다는 그 소문의 근거지는 저들일 거요.”
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마 대놓고 일 교두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왜 그냥 놔두었냐는 무언의 항의였다.
그러나 금군교두 일충현은 그런 운현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기고 있었다.
“운 학사.”
일충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시오?”
운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일충현은 여전히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왜 운 학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것인지 아시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운현의 대꾸는 여전히 곱지 않았다.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알고도 그냥 놔둔 일충현에게 심사가 뒤틀린 탓이다.
그런 운현의 모습을 금군교두는 여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창룡전에 대해서는 모르는 바가 아니오. 또한 그곳에 왔던 이전 학사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 운 학사처럼 직접 무공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도 없었소.”
운현이 고개를 돌려 일충현 교두를 바라보았다.
일충현 교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힘이 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고지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요령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싫어하오. 나 또한 무인인지라 머리를 굴려 어려움을 피하는 사람들보다는, 그 고난을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오.”
말하는 일충현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운현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운 학사께서 정면 돌파를 결심했다면 절대 고개를 돌리지 마시오. 뒤를 돌아다보지도 마시오. 운 학사께서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어려움과 부끄러움을 견디기로 이미 작정한 것이 아니오?”
‘아!’
순간 운현의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뒤를 이은 것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장원급제자라는 알량한 자존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자신은 이제 장원급제자가 아니다.
모든 서생의 위에 서서, 보장된 미래를 한 손에 움켜잡아 부러움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자신은 자금성 내에서도 홀대받는 창룡전의 학사, 그것도 주어진 일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는 운현을 보며 일충현이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소? 지금이라도 무공을 배우는 것을 포기하시겠소?”
운현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세를 바로하고 일충현 교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셔서 고맙소.”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일 교두의 말대로 내 힘껏 해 보겠소. 부디 계속 도와주시오, 일 교두.”
운현의 얼굴에는 새로운 결의가 가득했다.
금군교두 일충현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그럼 제일식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합시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일충현 교두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일식! 서는 것은 산과 같이, 정립여산(正立如山)!”
일충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절도 있게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일충현 교두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남에게 지적받았을 때 인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상대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젊은 문사다.
아무리 금군교두라 해도 자신의 지적에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운현을 쳐다보는 일충현 교두의 눈에는 감탄과 알지 못할 회한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
자그마한 전각에서 일충현을 기다리고 있는 금군교두 도진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아직 일충현 교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도, 일충현 교두가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부탁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일충현 교두가 아직 이곳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자신이 조금 일찍 나온 탓이고, 그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해 줄 수 있었다.
정작 금군교두 도진의 불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 도 교두, 벌써 나왔소?”
뒤에서 일충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진은 자세를 바로하고 두 손을 모아 절도 있게 예를 올렸다.
“교두님을 뵈옵니다.”
일충현 교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도진의 예에 답하며 말했다.
“이젠 같은 교두이니 편하게 대함이 어떻소?”
“아, 아닙니다. 감히 어찌 교두님과…….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도진은 작년까지만 해도 일충현 교두의 아랫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금군교두로 승진한 것이다.
십여 년이 넘게 금군교두로 있는 일충현으로서는 새로운 일도 아니었지만, 평소 일충현 교두를 존경해 오던 도진으로선 송구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적인 부탁을 쾌히 들어주어서 고맙소. 운 학사는 곧 올 거요.”
운 학사라는 말이 나오자 도진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교두님,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감정이 실린 도진의 목소리에 일충현 교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교두님께서 왜 운 학사 같은 사람에게 일 년씩이나 무공을 전수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교두님께 대한 윗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은 터에…….”
“도 교두가 벌써 그렇게 윗분들의 눈치를 살피는 줄은 몰랐군.”
도진은 흠칫했다.
그러나 도진을 쳐다보는 일충현 교두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도 교두도 알겠지만 나는 출세에는 뜻이 없소. 그리고 운 학사에게 내 무공을 전하는 것도 아니오. 사제 간의 예를 올린 것도 아니고, 운 학사는 금의위 소속의 무관도 아니니까. 단지…….”
일충현 교두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자세만 좀 지도해 주는 정도랄까…….”
“자세요?”
도진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