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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8화 (8/530)

008화. 백호전의 보고서

“악! 아고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문연각 돌계단을 오르던 운현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운현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온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군.”

운현이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몇 안 되는 계단을 오르다가 발이 조금 삐끗했을 뿐인데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온몸의 근육이 통증을 호소하니, 평소에 모르던 근육의 존재감마저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기본이다.

“그저 한 시진 동안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그 한 시진 동안 운현은 팔을 들고 자세를 잡은 후 온몸을 긴장시킨 상태로 서 있어야 했다.

처음엔 점잖고 사람 좋아 보이던 일충현 교두였지만 실제 수련에 들어가자 한 치도 봐주는 것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질라 치면 가차 없이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지곤 해서, 지금 운현은 다리뿐만 아니라 팔, 허리, 목까지 안 아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첫날인데 벌써 이래서야……, 휘유우.”

간신히 문연각에 들어온 운현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부터 이러니 앞으로 견뎌 낼 일들이 까마득하다.

그래도 그의 마음이 뿌듯한 것은 한쪽 옆구리에 끼고 있는 책 덕분이었다.

운현은 책에 눈길을 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역시 정식으로 배우는 것이 확실히 다르군.”

오늘 운현이 받아 적은 문장은 제법 많았다.

만일 무턱대고 책을 읽어서 이 정도를 이해하려 했다면 아마 족히 서너 달은 걸렸으리라.

생각난 김에 운현은 책을 펼쳐 오늘 적은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생소한, 그러나 이제는 그 뜻을 대강이나마 알게 된 단어와 설명들이 책에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글씨는 뒤쪽으로 갈수록 흐트러졌고 맨 뒷쪽은 말도 아니게 엉망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시진의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팔을 제대로 놀리는 것도 힘겨웠으니까.

“잊기 전에 이걸 다시 정리해야 할 텐데…….”

사실 맨 뒤쪽은 별로 적은 것도 없었다.

다시 말해 주는 일충현 교두를 보아 어찌어찌 붓 놀리는 흉내를 낸 것뿐, 사실은 당장이라도 붓을 놓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심정이었으니 제대로 적혔을 리가 없다.

탁.

“휴우우.”

운현은 책을 덮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의자에 기대고 나니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지금 당장은 정리고 뭐고 일단 쉬고만 싶었다.

“음? 이게 무슨 냄새지?”

문득 운현은 코끝을 스치는 쾨쾨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무심코 자신의 옷소매에 코를 대어본 운현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으윽. 이, 이거 옷에서 냄새가…….”

그건 바로 자신의 땀 냄새였다.

밖에서는 바람이 조금씩이라도 불어 느끼지 못했지만, 실내에 들어오니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토록 땀을 뻘뻘 흘렸으니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이걸 어떡하지?”

운현은 난감했다.

여벌 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한 벌씩 갈아입을 정도는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며칠 못 가서 당장 입을 옷이 없어질 것이다.

‘선비 체면에 직접 옷을 빨 수도 없고…….’

운현은 훈련 중에 땀 흘린 것을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히 아까 일충현 교두가 옷을 벗으라고 권하긴 했다.

사실 운현도 벗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예의상 한 번 거절했는데, 일충현 교두가 다시는 옷 벗으라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한 번 권하고 말기는……. 금군교두씩이나 되는 무관이 그렇게 소심해서야…….”

운현은 괜히 애꿎은 일충현 교두를 들먹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다음부터 한 번만 얘기하면 그냥 벗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래선 옷이 감당을 못 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던 운현의 눈에 탁자 한쪽에 단정히 쌓여 있는 몇 권의 책이 들어왔다.

“자아, 그럼…….”

탁자에 놓여 있는 것은 지난 한 달간 수많은 잡서를 뒤져 찾아낸 책들이다.

어제까지는 바라보기만 해도 막막하던 이 책 더미가 지금은 왠지 만만해 보인다.

“어디 한번 볼까?”

운현은 맨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바로 며칠 전 골라낸 책이었다.

‘무림 방파에 전승되는 무공 근원의 통전적 접근에 관한 보고서라…….’

여러 사람에게 읽히기에는 애초에 포기한 듯한 그 제목을 보면서 운현은 문득 어떤 친근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이런 딱딱한 제목의 책들만 끼고 살았지.’

그것도 이젠 예전의 일이다.

잡서만 뒤진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이건만, 예전의 일들이 까마득한 옛날처럼만 느껴졌다.

팔락.

책을 넘기자 큼지막하게 쓰여진 ‘서언(序言)’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고로 머리말에 책의 모든 것이 쓰여 있는 법. 내용은 안 읽었어도 머리말만 읽는다면 최소한 읽은 척은 할 수 있지.’

십수 년간의 수험 생활로 몸에 밴 쓸데없는 요령을 떠올리며 운현은 빽빽이 들어찬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늘의 뜻을 따라 용상(龍床)에 앉으신 황제 폐하의 지극하고도 넘치는 은혜를 따라 백호전(白虎殿)의 학사로서 소임을 맡게 된…….’

황궁에서 작성된 여느 보고서처럼 책의 서언은 황제에 대한 찬사로 시작하고 있었다.

운현은 지루하게 이어지는 의례적인 문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운현의 시야에서 검은 글자들이 조금씩 흐려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그의 눈꺼풀은 자연스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슥.

운현의 고개가 살짝 떨어지고 금방 규칙적인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새액, 새액.

막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황궁의 오후는 따뜻했다.

피곤에 지친 운현은 어느새 작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도로롱, 도로롱.

문연각에는 때아닌 소음이 자그맣게 퍼져 나가고, 창으로 들어온 산들바람은 운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렇게 운현은 꿀맛 같은 오후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

운현이 복잡한 제목의 보고서를 다시 펴 든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가 훌쩍 지난 후였다.

금군교두 일충현이 지도하는 무공 수련은 꽤나 엄격했고, 그동안 제대로 몸을 움직여 본 적이 없는 운현으로서는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그 이상한 호흡법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운현은 문연각으로 기다시피 겨우 돌아와선 책에 머리를 파묻고 졸아 버리곤 했다.

그러니 책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잡서들을 분류하는 것조차 멈춰 선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에 적응해 가는 생물이라던가?

졸음에 빠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더니 드디어 오늘은 책을 펴 들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이 복잡하고 긴 제목의 책을.

바스락.

천천히 서언을 읽어 내려가던 운현은 책장을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지금 황태자 전하와 똑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으리란 법은 없지만…….”

책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저자는 ‘백호전’이라는 곳의 학사였다.

그리고 이 백호전은 공교롭게도 지금 운현이 있는 창룡전과 아주 똑같은 곳이었다.

선대 황제 중의 누군가가 무림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고자 황태자 시절에 세운 것이 바로 백호전이었다.

황태자는 황제가 되어서도 백호전을 계속 유지했고, 책의 저자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학사였다.

“그러니까 이 책을 쓴 사람은, 말하자면 내 선배가 되는 셈이군.”

운현은 책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백호전이라니. 어디, 아니 언제 있었던 거지?”

알 수가 없었다.

서언에는 그저 ‘황상께서’라고만 적혀 있을 뿐,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칭호나 언급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책에 따르면 저자는 자신의 일을 아주 효과적으로 충실히 수행했다.

심지어 황제가 붕어(崩御)한 후에도 백호전은 유지되었다.

선황이 세운 백호전을, 뒤를 이은 황제들이 닫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대의 황제들이 같은 취미를 가지지는 않았던 듯, 저자는 백호전에서 그저 책이나 보며 놀고먹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며 몇 대의 황제를 모시던, 아니 지켜봤던 저자가 늙어 자금성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저술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생의 유일한 저작인 셈이었다.

“이 사람이 했던 것 중에 혹시 남아 있는 건 없나?”

운현은 뒤로 책을 후루룩 넘겨 보았다.

지금 당장 운현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테면 모범 답안지 같은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지은 백호전 학사가 한 것이 가장 그에 가까운 것일 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것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더구나 이 책을 문연각에 비치하도록 배려한 황제에 대한 찬사가 이토록 거창한 것을 보니 저자의 다른 성과물들, 이를테면 선대 황제가 좋아한 무림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꽤 적어 보였다.

“참으로 아쉽군.”

운현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예상치 않은 응답이 튀어나왔다.

“무엇이 그리 아쉬우신지요, 나으리?”

낭랑한 목소리에 운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 태감의를 입은 환관 한 명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아, 박 환관!”

반가움에 운현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환관 박규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니예, 소인 박 환관이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요오.”

“그, 그러게 말일세. 하, 하하.”

반가운 표정이었지만 대답하는 운현의 말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깃들어 있었다.

환관 박규는 짐짓 모른 체하며 운현에게 물었다.

“무슨 안타까운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오?”

운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 별거 아닐세. 그저 그냥 혼잣말로……, 하하하.”

말하면서도 운현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눈만이 아니다.

아예 거리를 두려는 듯, 운현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박 환관을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혼잣말이셨군요. 소인은 또 무슨 일이라도……, 어머?”

환관 박규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니, 나으리의 관복에 얼룩이 지지 않았습니까요? 게다가…….”

박 환관은 말을 흐렸다.

하지만 소맷자락으로 코를 가리는 그의 모습은 말보다 더 확실하게 운현의 가슴에 꽂히고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요?”

소매로 코를 가린 박 환관은 운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미, 미안하네.”

운현은 낭패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내가 조금 사정이 있어서 이, 이리되었네.”

운현이 박 환관에게서 거리를 두려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야속하게도 금군교두 일충현은 첫날 이후로 결코 웃옷을 벗으라는 권유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운현의 관복은 여기저기 구겨진 것은 물론이고 얼룩마저 번져 있었다.

그나마 가장 나은 옷이 이러니 다른 옷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실 운현 본인은 잘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도 쾨쾨한 냄새가 근처에 진동할 정도였다.

한 손으로 코를 가린 박 환관은 한숨을 쉬더니 짐짓 지나가는 듯한 말로 말했다.

“뭐, 소인이 힘을 쓴다면 나으리의 관복 정도야 어떻게 해 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만서도…….”

“저, 정말인가, 박 환관?”

운현의 반응은 박 환관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반색하는 운현의 표정과 달리 박 환관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하지만 소인도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아야, 남에게 부탁을 해도 할 터인데 말입니다요.”

운현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박 환관을 피하려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무공을 배우는 것을 들킬지 모른다는 염려였다.

학사인 자신이 금군교두에게 무공을 배우고 있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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