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5화 (5/530)
  • 005화. 금군교두 일충현

    운현과 책의 본격적인 씨름은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창룡전의 학사 운현은 꼭두새벽부터 문연각으로 갔고, 하루 종일 그곳에서 지냈다.

    오전에는 책들을 들춰 보면서 무림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것들을 골라냈다.

    책들을 골라내는 것도 큰일이었다. 하루에 제목을 확인하는 책은 족히 수십 권이 넘었다.

    그러나 무림에 대한 책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고서에, 누가 지었는지조차 불명확한 책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제목마저 희미해서 내용을 읽어 봐야만 하는 책들도 있었다.

    그렇게 오전을 분류로 지내고 나면 오후에는 이전에 찾아 놓은, 무림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운현에게 무림이라는 주제는 한 번도 다루어 본 적이 없는 분야였다.

    당연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닥치는 대로 읽는 수밖엔 없었다.

    이 책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저 책에서 이해하고, 저 책에서 설명하지 않았던 것을 또 다른 책에서 찾아내는 식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그가 얻은 것은, 뜻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잡다한 단어들뿐이었다.

    운현은 지쳐 갔다.

    “휘유.”

    운현은 앞에 쌓인 책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앞이 막막하다.

    지난 한 달간 애써 봤지만 진척이라 해 봤자 한 줌 모래만도 못하니, 이래서야 황태자 전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예 꿈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삼만 칠천 권이라…….”

    문제는 이 엄청난 숫자의 잡서였다.

    이 가운데 황태자 전하가 원하시는 무림에 대한 이야기들이 묻혀 있을 텐데 그걸 찾아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삼만 육천 권 정도로는 줄었겠지.”

    운현은 중얼거렸다. 지난 한 달간 제목을 확인하고 넘긴 책이 못 잡아도 대강 천여 권을 되리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더 암담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중 백분지 일이 무림에 대한 책이라 해도 삼백육십 권, 하루에 한 권을 읽는다면 꼬박 일 년을 읽어야 할 양이다.

    손가락을 꼽아 보며 계산하던 운현이 문득 손을 멈췄다.

    “하루에 한 권을 읽을 수나 있으면…….”

    운현은 옆에 따로 놓아둔 책을 쳐다보았다.

    열일곱 권의 책.

    지난 한 달간 찾아낸 것이 열일곱 권에, 읽은 것은 그중 겨우 아홉 권이다.

    그것도 태반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넘어간 책들이다.

    “이대로라면 읽는 데만도 삼 년이 넘게 걸리겠군.”

    문제는 읽는 것에 있지 않다.

    읽어도 알 수 없으니 그것이 문제다.

    게다가 이해한다고 다가 아니다.

    이것을 황태자 전하가 좋아할 만한, 그것도 꽤 마음에 들어 할 정도의 이야기로 바꾸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시가(詩歌)라면 제법 운치 있게 써 내겠지만 이런 이야기라면 손을 대 본 적도 없다.

    “후우.”

    운현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천하에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으니 어떡하든 이곳에서 자리를 잡는 수밖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던 운현은 문득 서글퍼졌다.

    경제력 있는 숙부의 도움으로 무사히 과거 공부를 마치기는 했다.

    그러나 멸시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숙모의 얼굴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숙모에게 자신은 하릴없이 돈이나 축내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이번에 장원을 하고 나서 가장 기뻤던 것 중 하나도 숙모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런데 그것이…….’

    운현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행운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꼬여 버렸다.

    과연 세상일이란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직접 깨달은 셈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주저앉아 있다가는 결국 썩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한숨만 내쉬어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덜컹.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연각의 고풍스러운 의자가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 나갔다.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한 가지가 더 있었다.

    ***

    “하아아아! 하압!”

    건장한 청년들이 일사불란하게 기합을 내질렀다.

    자금성 한쪽 구석에 위치한 광장에서, 웃통을 벗어젖힌 젊은 청년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오식(第五式)!”

    가장 앞에 선 남자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자 청년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쿵.

    “하아아압!”

    청년들이 일시에 발을 내딛는 소리가 돌바닥을 울리고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그 기세가 사뭇 삼엄해서 멀리서 바라보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이, 이거 생각보다…….’

    웃통을 벗고 땀 흘리고 있는 이들은 이제 막 금의위에 들어온 신출내기들이었다.

    운현이 과거를 치르고 급제한 것처럼, 저들도 이번에 무과(武科)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무인들이다.

    따지고 보면 운현과 동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관과 문관의 차별은 의외로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훈련 교관인가?’

    젊은 무관들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체격이 크고 수염이 가득한 사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인상이 꽤나 흉악하다.

    ‘……말도 못 붙여 보겠군.’

    운현이 이곳 금의위 훈련장까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에게 무공(武功)의 기초에 대해, 최소한 그 대강만이라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금성 내에서 무공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금의위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그들이 운현을 도와줄까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군.’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가관이다.

    자신 같은 학사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무관(武官)들, 그것도 초보 무관들의 훈련이나 훔쳐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후우, 젠장.”

    무심코 내뱉은 말에 운현은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젠장’ 이라니, 선비로서 감히 입에 담지 못할 말이었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시오?”

    “으학!”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운현은 기겁을 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그렇잖아도 숨어 있던 터에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리니 누군들 놀라지 않겠는가?

    “허어, 참. 이거,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소만…….”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올려다보았지만 햇빛에 눈이 부셔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괜찮으시오?”

    그가 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운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아, 괘, 괜찮소이다.”

    그가 내민 손을 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랑곳없이 운현의 어깨 어림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팔을 들자, 놀랍게도 운현의 몸이 마치 공깃돌처럼 번쩍 들려졌다.

    턱.

    그는 운현을 가볍게 들어 살짝 땅에 내려놓았다.

    얼떨결에 타의로 일어서게 된 운현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가벼운 갑옷을 입은, 제법 점잖아 보이는 중년 무인이었다.

    엄청난 괴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구릿빛으로 물든 얼굴과 옷차림이 그가 무관(武官)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보아하니 문관이신 것 같은데 이곳에는 어인 일이시오?”

    그의 음성은 중후했다.

    운현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흐트러진 의관을 얼른 다듬으며 운현은 무관에게 대답했다.

    “아, 나는 창룡전의 학사 운현이라 하오. 사실은 무공에 대해 좀 물어볼까 해서…….”

    무공(武功). 운현이 지난 한 달간의 사투 끝에 얻은 단어들 중 하나였다.

    “무공?”

    무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그가 아는 문사들은 무공에 관심이 없다.

    아니,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한다. 눈앞의 운현처럼 젊은 학사들은 더욱 그랬다.

    무관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현에게 물었다.

    “특별히 무공이 필요한 곳이라도 있소? 천하에 자금성 학사를 건드릴 간 큰 자는 없을 터인데.”

    운현은 무관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무관은 운현이 누군가에게 폭행이나 협박이라도 당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운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런 게 아니오. 내가 어디 쓰자는 게 아니고…….”

    운현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두(敎頭)님을 뵙습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치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뒤따랐다.

    “교두님을 뵙습니다!”

    돌아본 운현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훈련장에 있던 젊은 무인들은 물론, 수염 가득한 우락부락한 무관까지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번뜩이는 그들의 시선에 운현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운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훈련을 계속하도록.”

    그것은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훈련장의 모든 사람들은 즉시 반응했다.

    “정렬!”

    수염 가득한 무관이 우렁찬 소리로 외치자 젊은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세웠다.

    “제일식(第一式)부터 다시 시작한다. 제일식!”

    쿵, 쿵.

    “하아아!”

    젊은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훈련을 시작했다.

    운현은 새삼 중년 무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운현은 그 중년 무관이, 인상이 부드러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조금 만만해 보였다.

    그런데 모든 무관들이 그에게 예를 표하고, 그의 말 한마디에 훈련을 시작한다.

    ‘뭐, 뭔가 높은 사람인 모양인데…….’

    그사이, 다른 무관이 운현 쪽으로 달려왔다.

    “교두님, 오셨습니까?”

    중년 무인에게 군례를 올린 젊은 무관이 운현을 쳐다보았다.

    “헌데 이분은……?”

    운현을 쳐다보는 그의 눈초리는 사뭇 매서웠다.

    자신도 모르게 운현이 찔끔하는데 교두라 불린 무관이 대답했다.

    “창룡전 소속 운 학사시네. 여쭤 보실 것이 있어서 오셨다는군.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네.”

    “네!”

    젊은 무관은 다시금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고 돌아섰다.

    물론 그 전에 운현을 한 번 더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훈련장으로 뛰어가고 난 후에야 운현은 겨우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소개가 늦었소. 나는 금군교두 일충현이라 하오.”

    자신을 일충현이라 밝힌 무관이 가볍게 주먹을 쥐며 포권 해 보였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포권 하려다가 얼른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아, 나는 창룡전 소속의 학사…….”

    일충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개는 아까 들었소. 그보다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소?”

    “아! 그, 그러도록 합시다.”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운현은 간신히 대꾸했다.

    ***

    두 사람이 옮긴 자리는 사방이 트인 작은 전각이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역시 자금성에 있는 곳답게 고풍스러운 문양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운 학사의 사정이……, 그러했구려.”

    이야기를 들은 금군교두 일충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색은 그리 밝지 못했다.

    운현은 가슴을 졸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결국은 흥밋거리다.

    무공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운현의 부탁이, 어쩌면 자부심 강한 금군교두의 자존심을 건드렸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금군교두 일충현은 시선을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운 학사처럼 황실에 속한 몸이오. 게다가 사정을 다 들었으니 이제 와서 모른 척한다는 것은 사내대장부로서 할 일도 아니고.”

    듣고 있던 운현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러니 아무래도 운 학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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