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잡서 삼만 칠천 권
한동안 멍하니 서서 자신 앞에 가득 꽂혀 있는 잡서들을 바라보다가, 운현은 허허로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랬단 말인가…….”
저벅.
운현은 문연각을 나와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허어, 그랬단 말이지.”
자신이 대단한 특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진작에 접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주신 거처라는 것을 본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황태자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는 창룡전이란 건물도 그랬다.
창룡전은 자금성의 공식적인 궁궐들인 외조(外朝)와는 달리 내정(內庭)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전각에서 근무하는 창룡전 소속 학사는 냉막한 표정의 사일천과 자신뿐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무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그 ‘무림고사에 대한 연구 조사’라는 것에 열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황태자에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을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이곳 문연각에서 운현은 그 ‘무언가 아니다’라는 느낌의 정체를 대면해야만 했다. 그것은 이곳 자금성에 있는 자신의 진실한 위치였다.
“그러니까 결국 황태자 전하의 취미 전담 학사라는 게 내 진짜 직책이로군. 허허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천석의 쌀, 황금의 집, 아리따운 여자라…….”
문득 권학가 한 구절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글 속에 천석의 쌀이 있고, 글 속에 황금의 집이 있으며, 글 속에 아리따운 여자가 있다.
“글 속에 황금의 집이 있긴 있었는데…….”
운현은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남의 집일 줄이야.”
가슴 한가운데가 구멍이 뚫린 듯 휑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염없이 한숨을 쉬던 운현은 휘적휘적 창룡전을 향했다.
가 봤자 있는 것은 그저 무림에 대한 잡서들뿐이겠지만, 그래도 이 넓은 자금성에서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창룡전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운현은 위태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저물어 가는 석양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
자금성의 환관 박규는 기분이 좋았다.
때는 아직 초여름, 자금성은 지금이 가장 지내기 좋은 날씨다.
찌는 듯한 여름이 되면 조금만 움직여도 등에 땀이 흘렀다. 언제나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환관들에게 여름은 땀으로 푹 젖어 버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겨울도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공식 행사가 이루어지는 자금성의 외조(外朝)는 따로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날, 꼼짝도 않고 한자리에 서서 공식 행사의 수발을 드는 것은 그야말로 얼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지금처럼 따뜻하고 움직이기 좋은 날들은 일 년 중에서도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니, 그야말로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호, 호호…….”
두 손을 모으고 종종걸음을 옮기는 환관 박규는 어느새 콧노래까지 조그맣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건청문을 나와 보화전과 중화전을 통과하여 태화전을 스치듯 지나는 그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탁, 탁, 탁.
어느새 그의 앞에 검은색 지붕의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황금색 지붕 일색인 이곳 자금성 내에서 유일하게 검은색 지붕을 가진 곳, 물을 뜻하는 검은색이 화재를 막아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이곳이 바로 문연각(文淵閣)이었다.
사박, 사박.
환관 박규는 가벼운 걸음으로 문연각 계단을 올랐다.
달칵.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박규는 깊이 고개를 숙여 문연각 관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문연각 관리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환관 박규에게 소속을 밝히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위세 좋은 관리라 해도 황족들에겐 벌레 목숨만도 못하다.
그리고 환관은 그 황족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비록 문연각 관리라 해도 환관 박규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깔보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친근한 말을 건네는 일도 없다. 자금성의 관리인 그에게 환관이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꺼림칙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환관 박규는 깊숙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서가 쪽으로 향했다.
사박, 사박.
‘어디 보자, 오늘은 어떤 책을 드려야 하나?’
가장 앞에 보란 듯 전시된 대전은 눈도 돌리지 않고 지나쳤다.
모든 지식의 집대성이라는 대전은 그 권수만 해도 만여 권이 넘는다.
수천 명의 학자들이 몇 년이나 걸려 만들어 낸 대작임에는 분명하지만, 너무나 많은 분량 때문에 오히려 보는 이가 없다.
무엇보다 황제의 윤허를 얻을 수 있는가도 문제고 말이다.
그러므로 문연각의 가장 앞자리를 자랑스럽게 차지하고 있는 대전은, 이 자금성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는 또 다른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호, 호호…….”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음률을 따라 환관 박규는 콧노래를 흘렸다.
서가 한 곳에 멈춰 선 그는 손가락을 들어 빼곡히 쌓인 책들을 위아래로 훑어가기 시작했다.
춤추듯 가볍게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문득 멈춰 섰다. 그것은 그가 마땅한 책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환관 박규는 귀를 기울였다. 방금 들렸던 소리는 분명 누군가의 한숨 소리였다.
“허어, 생각은 했지만 이건…….”
서가 저편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쫑긋하고 있던 환관 박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하!’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챈 그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소리가 난 쪽으로 가까이 갔다.
서가 몇 개를 돌아서자 그가 생각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어머, 이런. 나으리 아니십니까요?”
환관 박규의 인사에 서가를 바라보며 한숨짓던 인물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창룡전 소속의 학사, 운현이었다.
“아, 자네로군.”
돌아보는 운현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환관 박규는 순간 의아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니예. 운 진사 나으리.”
환관 박규는 고개를 들고 운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운현의 안색은 여전히 생각보다 밝았다.
‘흐음?’
운현은 창룡전 소속 학사다.
국가정책이나 나라의 백년대계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저 황태자의 무림에 대한 흥미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곳.
그곳이 바로 창룡전이다.
그 실상을 알아차린 예전의 학사들은 하나같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며칠씩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넋이 빠진 얼굴로 돌아다니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지내던 이들은 결국 며칠 못 가 다들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니 이렇게 편안히 말을 건네는 운현의 표정이 환관 박규에겐 사뭇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자네 이름도 모르고 있군그래.”
운현의 모습을 살피던 환관 박규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니예, 소인의 이름은 ‘규’라 하옵니다. 성은 박씨를 쓰고 있지요.”
“아아, 박 환관이었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규라고? 특이한 이름이군.”
환관 박규는 미소 지었다.
“가문의 이름에 누를 끼치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어찌 받은 이름을 쓰겠습니까? 그저 소인이 되는 대로 붙인 이름이지요, 니예.”
운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환관 박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남성을 포기한 환관은 궁녀와 달리 언제나 멸시와 조소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 입장을 배려하지 못한 것이 운현은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아, 내 미처…….”
운현이 더듬거리며 당황해하자 환관 박규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영락없는 궁녀의 모습이었다.
“호호, 미천한 소인에게는 당연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니예. 호호호.”
운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잠시 후 환관 박규가 웃음을 멈추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으리께서 오늘도 문연각에 나오신 것을 보니 어제는 원하시는 책을 찾지 못하셨는지요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던 운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 그것이…….”
운현의 시선이 자연스레 서가로 향했다.
다른 서가들의 책들이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놓여 있는 반면, 운현의 앞에는 분류도 없이 그저 서가를 메우고 있을 뿐인 책들이 가득했다.
“이 구역의 책이 모두 몇 권이나 되는지……, 혹시 알고 있나?”
운현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환관 박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글쎄요? 이쪽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 정확한 권수야 누가 알겠사옵니까만, 그래도 대강 삼만 칠천 권 정도는 되는 것으로…….”
“허어!”
운현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나왔다.
삼만 칠천 권.
말이 삼만 칠천 권이지 하루에 한 권을 읽는다 해도 백 년이 걸리는 숫자다.
어찌 보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 할 수도 있었다.
황궁과 한림원의 학사들이 저술하는 책만 해도 일 년에 수백 권씩 쏟아져 나오는 데다, 이 구역은 ‘잡서’ 아닌가?
“삼만 칠천 권, 삼만 칠천 권이란 말이지…….”
운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태자가 왜 학사가 필요했는지 넘치도록 납득이 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라 해도 이런 엄청난 잡서의 더미 속에서 찾아내라고 한다면 암담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찾아낸 책들이란 것들이 재미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딱딱한 것들이라면, 제아무리 흥미가 당기는 일이라 해도 정나미가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서가를 보며 한숨짓고 있는 운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환관 박규가 옆에서 말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잡서이지요, 니예. 주욱 훑으시면서 무림에 대한 것들만 뽑아내시면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요오.”
그 말대로였다.
삼만 칠천 권이라 해도 그것을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림에 대한 것들만 뽑아낸다면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삼만 칠천 권 전부의 제목을 들춰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루에 백 권의 책 표지를 들춰 본다 해도, 제목을 확인하는 것에만 드는 시간이 꼬박 일 년이다.
운현은 앞이 암담해졌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 물러서는 것은 군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다짐하며 새로운 결의를 다진 것이 바로 오늘 새벽이다.
게다가 누가 뭐라 해도 미래의 하늘, 황태자 소속의 학사가 아닌가?
이 일을 잘 해낸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단단히 다졌던 새벽의 결의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결의를 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도 든다.
대장부의 결의가 하루해를 채 넘기지 못한다면 이 무슨 창피스러운 일인가!
“허어어.”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옆에 서 있는 환관 박규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눈치채고는 얼른 얼버무렸다.
“큼, 흠. 아, 고맙네. 박 환관.”
환관 박규는 운현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와요오.”
환관은 눈치가 빠르다. 박규는 특히 그것에 뛰어났다.
상대의 심사가 불편할 때는 일단 발을 빼는 것이 최선이다.
“아, 그리하게. 그럼 나중에 또…….”
운현의 인사를 뒤로 흘리며 환관 박규는 발걸음을 돌려 서가로 돌아갔다.
등 뒤에서 운현의 맥 빠진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결국 또 책하고 씨름하는 신세인가…….”
환관 박규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하긴 명색이 장원급제자이니 책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봐 왔을 것이다.
아마도 이제는 관리로서 자금성의 화려한 날들을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서삼경도 아닌 잡서를, 그것도 삼만 칠천 권을 눈앞에 둔 신세가 되었으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꼬리를 빼지 않는 걸 보니 가상하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나…….’
처음엔 다들 무언가 방법을 찾아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이대로 썩지 않으려면 연줄이든 뇌물이든 동원해서 무조건 다른 곳으로 빠져야 한다.
관직을 내어놓고 낙향해서 서당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십수 년을 공부해서 가까스로 통과한 시험인데 누가 그렇게 쉽사리 내던질 수 있겠는가?
‘하긴 연줄이 있었다면 애초에 저런 신세가 되지도 않았을 테지.’
그러니까 저렇게 한숨만 내쉬는 수밖엔 없는 것이리라.
어느새 환관 박규의 손가락은 오늘 빌려 갈 책 위에 머물러 있었다.
정성스럽게 놓인 책 서너 권을 뽑아 든 그는 서가를 뒤로하고 종종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