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3화 (3/530)

003화. 지식의 보고, 문연각

황태자의 개인 서고에 있는 책들은 온통 허황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한 글자도 믿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깊이 있는 고찰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운현은 결심했다.

이런 쓰레기에서 완벽한 꽃을 피워 내는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기로 말이다.

그로부터 사흘간, 운현은 자신의 첫 보고서에 매달렸다.

허황된 자료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떠도는 사회 현상의 근저에 주목했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해 냈다.

각종 고전을 기반으로 자신의 날카로운 통찰을 접목하고, 실현 가능한 적절한 정책을 제시하는 동시에, 뛰어난 책들이 그러하듯 얇기까지 한 보고서를 말이다.

운현은 자신했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황태자가 운현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무림고사(武林故事)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을 단 얇은 책자 하나를 들고 운현은 당당하게 창룡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자신이 쓴 보고서가 얇은 것을 감사해야 했다.

사일천은 첫 장을 읽자마자 그 책자를 운현에게 냅다 집어 던져 버렸으니까.

파라락.

자신의 가슴에 부딪힌 보고서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운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사일천은 운현의 심정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싸늘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자네더러 이따위 주제넘는 글을 쓰라고 했나? 무림고사에 대한 고찰? 자네의 생각이나 의견 따위를 감히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 건가? 지고하신 황태자 전하께?”

관리의 목소리는 운현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자네의 관점 따위 누구도 관심 없네.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살아 있는 무림의 모습이야. 알겠나?”

운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그런 그에게 관리는 차갑게 말했다.

“다시 하게.”

운현은 허리를 굽혀 내동댕이쳐진 얇은 책자를 들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하게’라는 그 짧은 말을, 그 후로도 운현은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야만 했다.

***

“후우.”

지난 며칠간을 되돌아보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일천이 보고서를 다시 내던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운현이 밤을 새워 만든 보고서들은 채 몇 장을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하게’라는 소리와 함께 되돌아왔다.

이제는 사일천이 입만 열어도 그 소리가 나올 것만 같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촉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일천의 얼굴만 봐도 절로 목이 움츠러드니 초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찌해야 하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넌지시 요령이라도 가르쳐 줄 만한데 사일천은 언제나 무뚝뚝하고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마치 회색의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황태자 전하의 마음에 드는 보고서를 쓴단 말인가?’

용안(龍顔) 한 번 본 적도 없는 황태자의 마음에 들 보고서를 쓰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사일천은 입을 다물었고, 본이 될 만한 것들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곤 황태자의 개인 서고에 가득한 쓸데없는 잡서들 뿐, 결국 운현은 답답한 마음에 최후의 선택을 했다.

바로 문연각을 찾아가는 것이다.

‘문연각에서도 단서를 못찾으면 그야말로 끝인데.’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식의 보고인 문연각에도 없다면 더 이상 찾아볼 곳은 없다.

하지만 과연 그곳에 황태자 전하의 취향을 만족시킬 방법이란 게 있을까?

‘마음에 든다’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 말이다.

“설마 이대로 파면당하는 건…….”

발걸음을 옮기던 운현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 정도 일로 황실의 학사가 직책을 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자신은 장원급제를 한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것도 장담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자신의 맡은 일조차 제대로 못 하는 사람에게 계속 자리를 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자금성에서라면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후우.”

막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내딛던 운현의 눈에 네모반듯한 연못이 들어왔다.

운현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높다랗게 걸린 커다란 현판에 문연각이라 쓰인 황금색 글자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연각’이라는 현판을 본 순간 운현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황제의 대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천하의 모든 진귀한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여기가 문연각…….”

모든 지식의 보고라는 문연각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문연각이 작아서가 아니다. 방금 지나온 자금성의 공식 궁궐들, 태화전이나 보화전이 터무니없이 큰 것이다.

비록 태화전 같은 위엄이나 장대함은 없었으나 문연각은 고아한 향취를 물씬 풍겨 내고 있었다.

운현은 방금 전까지의 염려 같은 건 잊은 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연각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뭔가, 자넨?”

문연각으로 들어선 운현을 맞이한 것은 퉁명스러운 관리의 물음이었다.

운현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창룡전의 운현이라 합니다. 이곳 문연각에서 찾아볼 책이 있어 이렇게 수고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문연각 관리는 마땅찮은 표정으로 운현을 쳐다보다가 표지가 금박으로 되어 있는 커다란 책을 펼쳤다.

“창룡전의 운현, 운현이라……. 구름 운(雲) 자를 쓰는가?”

“네, 그러합니다.”

운현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며칠 전 같았으면 관리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기가 죽어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 며칠간 사일천에게 당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창룡전이라, 창룡전……. 음, 여기 있군. 자네의 허가 등급은…….”

커다란 명부를 훑어가던 관리의 얼굴에 조소가 걸렸다.

“훗.”

그는 짧은 웃음을 흘리고는 운현을 쳐다보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쪽 구석에 잡서로 분류된 곳이 있네. 자네에게 허가된 구역은 그곳뿐이니 각별히 유의하게.”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잡서(雜書)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것은 분류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치가 없는 책을 말한다.

문연각은 서적을 분류할 때 분야가 아니라 그 중요성과 가치를 따진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황제의 대전이요, 그다음으로 성현들의 경서가 위치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단계를 넘어 가장 바닥에 위치한 책들, 이 문연각에서 가장 하급에 속하는 책들이 바로 잡서다.

“못 들었나? 자네에게 허락된 구역은 그쪽뿐이란 말일세. 실수라도 감히 다른 구역의 책에 손을 대어선 안 되네. 그랬다간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걸세.”

문연각 관리는 윽박지르듯 운현에게 말했다.

‘허어, 문연각의 서적을 보는 데도 등급이 있단 말인가.’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문연각에 들어서며 두근거리던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문연각 관리는 커다란 책에 무엇인가 적어 놓고는 책을 덮었다. 그의 관심은 이미 운현을 떠나 있었다.

탁.

책 덮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등을 거칠게 떠미는 손길 같다고 느끼며 운현은 무거운 발걸음을 문연각 안쪽으로 옮겼다.

“어머나, 운현 진사님 아니시온지요오?”

빽빽하게 늘어선 서가(書架)들 가운데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운현은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앞쪽에 갈색 태감의를 입은 환관이 서 있었다.

운현이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동안, 환관은 그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왔다.

“아, 자네는…….”

환관이 미소를 지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진사님을 창룡전으로 안내했었습지요, 니예.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가운 마음에 그만 무례를 범했사와요오.”

슬쩍 운현의 표정을 살피며 환관이 말을 흘렸다.

일반적으로 환관들은 특이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자금성 내에서 노비나 마찬가지로 취급받는다.

게다가 완전한 남성이 아니라는 신체적 이유 때문에 환관들은 자신들을 향한 수많은 적의와 경멸의 시선을 견뎌 내야 했다.

지금도 이 환관은 운현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환관이 먼저 인사를 건넨 것에 대해 이 젊은 문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불쾌해할까? 아니면 모욕이라 여기며 화를 낼까?

그러나 운현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 아닐세. 무례는 무슨…….”

운현은 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자네를 만나니 반갑네.”

그건 운현의 진심이었다.

이곳 자금성에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은 오직 눈앞에 있는 이 환관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도 오직 그뿐이다.

그간 참으로 힘들었던 때문일까? 그저 한 번 만났을 뿐인 이 환관이, 운현은 정말로 반가웠다.

“그래, 자네가 이곳엔 웬일인가?”

눈동자에 이채를 떠올리던 환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니예, 소인이 모시는 분께서 서책을 찾으셔서 이렇게 걸음하게 되었습니다. 진사님께서 이곳 황성 내에 거하시게 되었다 들었습니다만, 지내시기는 어떠하신지요?”

운현은 그가 자신의 소식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을 염려해 주는 것이, 비록 그것이 인사치레라 해도 정말 고마웠다.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환관의 물음에 답했다.

“그저 황태자 전하의 성은에 감읍할 따름이지. 나는 잘 지내고 있네.”

운현의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자금성 내의 거처가 허름한 객잔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황태자 전하가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주셨다는 거처는, 사실상 환관이나 궁녀 들의 처소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었다.

“잘 지내신다니 다행이군요, 니예. 바쁘신 걸음을 붙잡아 죄송하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환관은 두 손을 모으고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 그, 그럼 다음에 또…….”

운현은 조금 더듬거리며 환관의 인사에 답했다.

환관은 운현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책이 가득한 서가들 사이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은 운현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손을 대기라도 하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거라던 바로 그 서가들이었다.

‘그러니까 저 환관이 나보다 등급이 높은 게로군.’

입안이 씁쓸한 것을 느끼며 운현은 서가 사이로 발을 옮기는 환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 발길을 돌리려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탁.

운현은 발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환관을 바라보았다.

갈색 태감의를 입은 환관의 뒷모습이 막 서가 사이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이, 이보게!”

운현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이곳이 정숙해야 하는 문연각이라는 것도 지금은 안중에 없었다.

다만 환관이 사라지기 전에 그를 불러 세워야 한다는 초조감이 운현을 몰아세웠다.

“이보게, 잠깐만!”

빽빽하게 늘어선 서가 사이로 환관의 하얀 얼굴이 빼꼼 하니 고개를 내밀었다.

“니예?”

운현의 간곡한 부탁에 환관은 한참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무림의 이야기들이지요.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한, 이를테면 고수들의 비무(比武) 같은 것이랍니다, 니예. 예전에 황궁을 방문했던 무림 고수의 이야기에 그만 흠뻑 빠지셨으니까요.”

환관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그때부터 무림에 대한 여러 기록이나 서책 들을 구하신 것 같긴 하지만……. 호호호, 황실 기록이란 것이 어디 재미가 있기나 한가요. 온통 딱딱하고 번잡한 이야기들뿐이니 말이옵니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선 학사가 필요하셨던 것이지요. 그분의 뜻에 따라 황실에 있는 기록을 정리하고 흥미롭게 다시 구성해서 들려줄…….”

운현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알아챘는지 환관은 짐짓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런 명석하고 충성스러운 학사님 말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그쪽으로 학문의 방향을 잡으시면 그리 많이 어긋나지는 않을 테지요, 니예. 그럼 저는 이만…….”

환관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하지만 운현은 감사의 말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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