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네? 무림이라고요?
“잘됐군.”
앞에 앉은 관리는 고개도 들지 않고 짧게 말했다.
‘잘됐군?’
운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엇이 잘됐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이 없다는 것이 잘됐다는 말일 리는 없으니 아마도 경제력 있는 숙부를 두어 다행이라는 뜻이려니 했다.
숙부가 없었다면 과거를 치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터니 말이다.
비록 응시 자체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과거 준비에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서원의 학비, 생활비는 물론 시험이 열리는 도시까지 가는 여비에다 책값과 온갖 잡다한 비용까지 생각하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아무 일도 못 하고 오직 책만 붙잡고 살아야 하니, 평범한 서민으로선 힘에 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만 하더라도 숙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과거를 치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바스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전각 안에 울렸다.
짧은 질문을 던졌던 관리는 다시 말이 없고, 운현은 초조한 마음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 내야 했다.
“기거할 곳은 얻었나?”
관리의 건조한 목소리가 운현의 귀에 울렸다. 그조차 오히려 반가워서 운현은 반색을 하고 대답했다.
“집은 얻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는 객잔에 머물고 있습니다만 이제 곧…….”
그 지긋지긋한 객잔.
비가 새는 건 물론이고 이물질이 섞여 나오는 끔찍한 음식에 역한 냄새까지.
운현이 묵은 객잔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 낡은 객잔도 오늘로서 끝이다.
이제는 어엿한 관리가 되었으니 보란 듯이 북경에 집을 장만할 것이다.
“잘됐군.”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관리가 말했다.
“네? 그게 무슨…….”
관리의 말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탁.
관리가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자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운현의 어깨가 움찔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자금성, 곧 대륙의 심장이자 권력의 핵심인 바로 그 황궁이 아닌가?
관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본분은 오직 황상의 뜻을 받드는 것에 있으니, 임금께서 죽으라 하시면 신하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君要臣死 臣不得不死]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네. 알겠나?”
운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관리의 말은 반쯤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운현에겐 이곳이 가진 엄청난 의미를 실감케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은 막중한 의무감이 주는 자부심이자, 거대한 힘을 가진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는 가슴 뿌듯한 확신이었다.
운현의 눈동자는 대번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리는 운현의 반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또한 자네는 황태자 전하의 총애로 특별히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그 기대를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되네.”
그 말에 운현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과거에서 높은 성적을 얻은 세 명을 특별히 장원, 방안, 탐화라 한다.
이들은 직접 황제를 배알하여 관직을 제수받는데, 일반적으로는 한림원 소속 학사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운현도 의례히 그렇듯 한림원으로 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황태자가 직접 자신을 지목하여 창룡전으로 오게 한 것이다.
그야말로 생각도 못한 출세였다.
황태자는 권력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 바로 미래의 하늘이기 때문이다.
“자네는 앞으로 황태자 전하의 뜻에 따라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은 연구와 검토를 통해 완벽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터인즉…….”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던 운현의 귀에 무언가 이상한 단어가 걸려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특정 분야라 하심은…….”
말을 꺼내던 운현이 순간 움찔했다.
자신 탓에 말이 끊긴 관리가 차가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운현은 이곳이 자유로운 질문이 허용되던 서원이 아님을 깨달았다.
운현은 입을 다물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크흠.”
관리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자네에게 특별히 문연각 출입 권한을 하사하셨네.”
운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문연각은 황궁 서고의 이름이다.
모든 지식의 집대성이라는 대전(大典)을 비롯해 수많은 책과 서화의 보고이자,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곳.
바로 그 문연각 출입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운현은 이 믿을 수 없는 행운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앞에 앉은 관리는 사무적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또한 황태자 전하께서 언제 부르실지 모르니, 앞으로 자네는 자금성 내에 기거하도록 하게. 사흘 후 입궁할 때에는 모든 준비를 갖춰 오도록. 오늘은 이만 가도 좋네.”
관리의 말이 끝났다. 그러나 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그의 머리가 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자금성 내에…… 기거하라고?’
그러니까 자금성에 거주하라는 뜻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이곳, 자금성에 말이다.
다시 책을 펴던 관리는 꼼짝 않고 있는 젊은 문사를 쳐다보며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가 보게. 그리고 사흘 후엔 늦지 않도록 하게.”
관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운현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네, 네.”
운현은 황급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여 아직 이름도 듣지 못한 자신의 상관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허둥지둥 창룡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관리는 운현이 완전히 밖으로 나가자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전시의 장원급제자, 진사 운현이라…….”
관리는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곳에는 방금 물러난 운현의 이름과 여러 사항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중에 광주에 가서 숙부의 일이나 도우면 되겠군. 머리는 좋은 것 같으니.”
탁.
관리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창룡전에는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
저벅, 저벅.
운현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황태자 소속의 창룡전 학사, 문연각의 출입 허가, 그리고 자금성에 거주하라는 명까지. 그 무엇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도 분명 걷고 있지만 발이 땅을 딛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저벅.
운현은 발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하고 거대한 자금성은 어디로 시선을 돌리든 놀랍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황금빛 이중 지붕은 날아갈 듯 아름답고 금빛 글씨를 새긴 현판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붉은빛의 화려한 담들 사이로는 금방이라도 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이제부터 내가 여기서 살게 된단 말이지? 바로 이곳, 황금의 집에서…….’
운현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권학가 한 구절이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글 속에 천석의 쌀이 있고 글 속에 황금의 집이 있으며 글 속에 아리따운 여자가 있다.
한창 놀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방에 틀어박혀 고리타분한 책과 글을 외우라고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일이다.
여덟 살부터 천자문과 몽구를 거쳐 논어, 맹자, 주역, 서경, 시경, 예기, 대학, 중용, 좌전에 이르는 사십삼만여 자를 암송하고 나면 그 몇 배에 달하는 주석, 경전, 역사서, 문학, 시가로 이어지는 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참기 어려웠던 것은 그 오랜 기간의 시험과 시험, 그리고 또 시험들이었다.
그때마다 스승들은 이 권학가를 불러 주며 학생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스스로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노래.
공부는 등한시한 채 놀고 있는 일부 서생들을 부러운, 혹은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며 다짐했던 바로 그 노래였다.
‘과연, 과연 책 속에 황금의 집이 있었군그래.’
정말 글 속에 황금의 집이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황금의 집이.
혹여 누가 보기라도 할세라 운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그의 입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 믿어지지 않는 행운에 가슴이 터질 듯 벅찼다.
하지만 소리를 내어서도, 심지어 활짝 웃어서도 안 된다. 이곳은 금역(禁域) 중의 금역, 대륙의 심장 자금성이 아닌가?
운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그야말로 날듯이 가벼웠다.
***
“후우.”
운현의 긴 한숨이 푸른 하늘 사이로 부서져 나갔다.
초여름의 따사로운 햇살은 단단한 돌길마저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정작 그 위를 걷는 운현은 그런 정취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무림이라니……,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터덜터덜 길 위를 걷는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관복을 입고, 누구나 감탄할 법한 자금성의 넓은 길을 걷고 있건만, 운현의 걸음은 그저 무겁기만 했다.
보란듯 장원급제를 했을 때는 모든 고생이 끝났다고 믿었다.
황태자의 창룡전에 소속되고, 자금성에서 머물게 되었을 때는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꿈같은 날들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운현에게 주어진 ‘연구 분야’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네? 무림이라고요?”
운현의 반문에 관리, 사일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창룡전 소속이자 운현 외에 유일한 관리이자 학사인 사일천은 말하자면 운현의 직속 선배였다.
“그래, 무림. 소림이니, 무당이니, 화산이니 하는 것들 말일세.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나?”
“아, 아니 물론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운현은 말끝을 흐렸다.
들어 본 적은 있다. 한 걸음에 하늘을 날고 물 위를 평지같이 걸으며 검 하나로 바위를 가른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무림이라는 단어가 왜 난데없이 ‘황태자 전하께서 지시하신 특정 분야’에 나온단 말인가?
“그럼 됐군. 가서 자네의 일을 하도록 하게.”
관리는 더 이상 용건이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운현은 아직 용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무림에 대한 연구 조사는 왜……. 읍!”
운현은 신음과 함께 말을 삼켰다.
관리, 사일천이 어느새 서슬 퍼런 눈동자로 운현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일천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히 주제넘은 질문이로군.”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차가웠다.
“이유를 알려고 하다간 자네 목숨이 길지 못할 걸세. 관리의 본분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있음을 명심하게. 알겠나?”
서슬에 질려 대답도 못 하고 있는 운현에게 사일천은 말을 이었다.
“옆방에 가면 황태자 전하의 개인 서고가 있네. 그곳에 있는 책들을 기초로 연구 조사를 시작하게. 일러두네만,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벽하고 현장감 있는, 살아 있는 무림의 모습이네. 알겠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일천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지금 운현이 알 리가 없다.
사일천은 귀찮다는 듯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운현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물러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현은 황태자 전하의 개인 서고에서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 있는 ‘자료’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모름지기 책이란 고금의 진리요 성현의 살아 있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책은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경건한 자세로 대해야 하며 꿈에서라도 절대 불경스럽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황태자의 개인 서고에 있는 책을 대하는 내내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것도 책이라고 나온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