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자금성은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번의 과거를 통과하여 진사(進士)가 되기까지 외워야 할 경문의 글자만 사십삼만여 자에 이른다.
수많은 주석과 경전, 역사, 시와 문학에 정통해야 함은 물론이고, 이러한 고전들을 바탕으로 국가정책에 대해 논할 줄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시가(詩歌)까지 창작할 수 있어야 하니, 이십 세 초반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자는 행운이요, 삼십 세가 넘었다 하더라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
자금성(紫禁城)은 대륙의 심장이다.
높고 두꺼운 성벽과 깊은 해자가 사방을 두르고, 황금빛 이중 지붕의 궁(宮)과 전(殿)이 거대한 대칭 구조를 이루는 장엄한 성(城).
자금성은 그 자체가 도시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도시였다.
그러나 자금성을 대륙의 심장이라 일컫는 것은 그 장엄한 규모와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자금성은 대륙을 다스리는 권력의 중심이자 천하의 모든 부귀가 모여드는 곳이다.
권력과 부귀가 살아서 맥동(脈動)하며, 땅에 있으되 이 땅의 것이 아닌 화려하고 고귀한 붉은빛[紫]의 금지된[禁] 도시[城].
그것이 바로 자금성이었다.
중심축을 이루는 커다란 궁궐들의 단순하고도 위압적인 배치에 반해,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금성은 곧 거대한 미로로 변한다.
때문에 이곳에 첫발을 디딘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길을 잃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자금성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첫 방문자들의 시선을 온통 빼앗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거 큰일이군. 자칫하다간 시간에 맞출 수 없겠어.”
관복 차림의 젊은 문사는 땀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그것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그의 커다란 관복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젊은 문사는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화려하고 거대한 자금성은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아까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던 금의위들조차 지금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참…….”
젊은 문사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다시 닦아 냈다.
‘애초에 위치도 잘 모르는 곳을 혼자 찾아간다는 것이 무리였나?’
하지만 찾아가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무시하듯 쳐다보던 관리에게 보란 듯 체면을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마 길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랴 싶어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이 바로 문제의 시작이었다.
“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이러다 자칫 금역(禁域)에라도 발을 딛게 된다면 사달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인데…….”
자금성은 황제의 거처다.
말 그대로 성 전체가 금단의 지역인 이곳에서 무턱대고 발을 옮기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대로 시간에 늦어 버리면 그것 또한 큰일이다. 첫날부터 불성실하다는 낙인이 찍힐 테니 말이다.
“허어…….”
젊은 문사는 낭패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고, 그의 탄식을 듣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화려한 붉은 전각들 사이에서 조그만 사람 그림자 하나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문사의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지 않은 모습이라 금방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건 분명히 사람 그림자였다.
젊은 문사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옳거니.”
그저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에 불과했지만 곤경에 빠진 젊은 문사에게는 그것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었다.
젊은 문사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넓은 궁궐 안을 거침없이 움직이는 저 모습은 분명히 이곳 지리에 익숙한 사람일 터였다.
그러나 잠시 후, 밝은 표정을 짓고 있던 문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런, 저 사람은 환관 아닌가!’
부드러운 갈색 비단에 검은색으로 양쪽 끝을 댄 옷, 발끝까지 내려오는 저 긴 저고리는 분명히 태감의(太監衣)였다.
궁내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아보는 환관들은 많게는 일만 명, 적을 때도 삼천 명이 넘었다. 그러니 젊은 문사가 자금성 내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하필 환관이라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고한 기상을 자랑하는 선비에게 환관은 분명히 꺼림칙한 대상이다. 도움을 요청할 만한 상대는 더더욱 아니다.
‘허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내가 곤경에 처했으니…….’
하지만 젊은 문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궁내의 지리에 익숙한 환관이라면 오히려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갈색 태감의를 입은 환관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젊은 문사의 곁을 지나쳤다.
문사는 태감의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붉은색이 아닌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어흠. 이, 이보게.”
젊은 문사는 어색한 목소리로 환관을 불렀다.
신출내기처럼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문사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행히 환관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니예. 무슨 일이신지요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듯한 이상한 목소리.
젊은 문사는 흠칫 소름이 돋을 뻔 했다.
난생처음 정면으로 바라본 환관의 얼굴은 생소하고 낯선 모습이었다.
수염 같은 건 흔적조차 없었고, 나이가 든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어린 것 같은 그의 반질반질한 얼굴은 생소하기까지 했다.
젊은 문사의 그런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떠오른 것일까? 환관의 눈빛이 조금 이상한 빛을 띠었다.
“흠, 흠.”
젊은 문사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하네. 실은 내가 창룡전을 찾고 있는데 말일세…….”
젊은 문사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환관은 그 말만으로도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하, 길을 잃었구만.’
갓 입궐한 풋내기 문사라는 것은 처음 볼 때부터 감을 잡았다. 저 어색한 관복 입은 모습 하며 낭패한 얼굴 표정도 이미 알아차린 지 오래다.
다만 이런 곳에서 왜 젊은 문사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몰랐을 뿐이다.
“창룡전이라시면……. 아, 태자 전하께 가시는 분이시군요? 니예.”
환관의 말에 젊은 문사는 단번에 반색을 했다.
“그, 그렇네. 나는 이번 전시에 장원급제를 한 진사(進士) 운현이라 하네. 이제부터 황태자 전하를 모시게 되었다네, 허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너털웃음을 흘리는 젊은 문사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환관은 자신을 운현이라 소개한 젊은 문사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 네. 운 진사셨군요. 그리도 젊으신데 장원급제라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니예.”
환관은 늘어지는 목소리로 젊은 문사 운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 환관의 얼굴에 이상한 웃음이 감도는 것을 운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환관은 고개를 들고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이처럼 학식이 높으신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창룡전이라면 그리 멀지 않으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니예.”
“그럼 좀 부탁하겠네, 허허.”
환관의 과장된 반응에 우쭐해진 젊은 문사 운현은 짐짓 점잔을 빼며 대답했다.
환관은 가던 발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
“저 문이 황궁의 내성으로 통하는 건청문, 그 뒤로 저 높이 솟은 지붕이 바로 황상께서 기거하시는 건청궁, 그리고 그 뒤가 황후께서 계시는 교태전입니다, 니예.”
탁, 탁, 탁.
환관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재잘거리듯 말했다. 여유가 넘치는지 그 와중에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기까지 했다.
“저 교태전 좌측으로 보이는 지붕들이 바로 서육궁입니다만 황상의 비빈들께서 거하시는 곳이니 가까이 하지 않으심이 좋겠지요. 호호호.”
그러나 정작 뒤따르는 운현은 건물을 돌아보기는커녕 환관의 발뒤꿈치 바라보기도 벅찬 형편이었다.
이 순간에도 환관의 조그만 발은 색색의 자갈들로 포장된 보도 위를 소리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 가고 있었다.
“허억, 헉. 이, 이보게, 조금 천천히…….”
운현의 말에도 불구하고 환관은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환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나으리께서 가실 창룡전이니 바삐 움직이시는 편이 좋을 겝니다. 이미 정한 시간에 늦은 상황이 아닙니까? 후후후.”
환관의 웃음소리에 운현은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첫인상부터 그랬지만 이 환관의 목소리나 웃음소리는 도저히 편안하게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치 여자처럼 좌우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에 진작부터 눈 둘 곳을 모르던 터였다.
“아, 저편으로 보이는 저 커다란 계단은 보화전 뒤쪽으로 통하는 곳입니다. 용이 조각된 저 돌 하나만 해도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진 거석(巨石)이지요. 그리고…….”
환관이 재잘거리듯 다시 설명을 시작했지만 운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지각이고 뭐고 무조건 발길을 멈추고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바로 저곳이 운 진사님께서 찾으시는 창룡전이옵니다, 후훗.”
운현의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
눈을 들자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환관의 얼굴과 그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전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날아갈 듯 화려하게 새겨진 현판의 글자는 분명 창룡전이었다.
현판을 확인한 순간 운현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창룡전으로 가라고 말하던 관리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생생했다.
“오, 저곳이 바로 그 창룡전이로군.”
운현의 목소리에도 힘이 돌아왔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목적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피곤함마저 싹 가시는 것만 같았다.
감탄하던 운현은 옆에 서 있는 환관을 돌아보았다. 환관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고,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나으리. 시간이 늦었을 터인데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환관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그렇군. 그럼 이만…….”
운현은 환관의 인사에 답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급히 발길을 옮겼다.
길을 몰라 헤매던 곤란에서 벗어나고 보니 이제는 시간에 늦었다는 것이 더 화급한 일로 다가온 것이다.
운현은 옷매무새를 매만질 틈도 없이 허겁지겁 창룡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 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환관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헤요, 다른 사람이라면야 정신이 번쩍 나도록 골탕을 먹여 주었으련만…….”
환관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창룡전으로 가는 사람에게 내 어찌 심술을 부리겠나.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니 운과 실력이 꽤 따랐던 모양인데, 이제 그 운도 다한 모양이군. 쯧쯧.”
환관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발길을 돌렸다.
“글깨나 읽는 문사야 널리고 널린 세상. 연줄이 없으면 제아무리 장원급제라도 저런 신세가 되기 마련이지.”
푸념처럼 내뱉으며 환관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팔랑이는 갈색 태감의 위로 오전의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
탁.
두꺼운 책 한 권이 소리를 내며 서탁 위에 펼쳐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관리는 서탁 앞에 꼿꼿이 앉아 가늘게 눈을 뜨고서 말없이 책 내용을 훑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 조금 떨어진 곳에는 조금 전까지 궁을 헤매던 젊은 문사 운현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운현은 앞에 앉아 있는 관리의 안색을 살피며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이래서야 어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다.
허겁지겁 창룡전 안으로 들어온 운현이 본 광경은 서탁 앞에 앉아 있는 한 명의 관리였다.
척 보기에도 자신의 상관임이 분명해 보이는 관리에게 운현은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날카로운 인상의 관리는 그저 한 번 운현을 바라보았을 뿐, 인사는 물론이고 한마디 말조차도 없었다.
그 침묵이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느껴져서, 운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기다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가족이 없군.”
난데없는 말에 운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것도 첫 대면에 물을 만한 주제는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관리는 묵묵히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말 그대로 한 치도 흔들림이 없어서, 운현은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과연 저 사람의 목소리인지조차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뿐, 다른 사람이 말했을 리가 없었다.
“어……. 네, 그렇습니다. 작은 상단을 가지고 계시는 숙부께서 광주에 계십니다만…….”
운현의 대답은 미처 이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