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2) (21/24)
  • 사제의 말은 옳았다. 놋시는 행복할 수 없다. 그는 테스가 원하는 걸 모두 주는 삶을 살지 못한다.

    놋시의 죄는 누구보다 컸다. 짐승이 되는 운명이 아니라 죄의 길에 안주한 게 그의 죄악이다.

    그가 테스에게 지은 죄. 열병의 유혹과 광기 어린 허기가 아닌 놋시가 그의 입술을 좋아하고 그의 손을 삼킨 것. 열이 피어나는 꿈을 꾸고도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 거짓을 듣고 따르며 죄를 저지르고도 안겨 있던 것. 그것이 테스의 동생인 놋시의 죄였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깊은 마음으로 죄를 알고도 모른 척하며 테스의 침을 받아 마시기 전부터 놋시는 테스에게 죄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죄가 없어요! 제가 이렇게 태어난 탓에……. 버섯 독을 먹느라 죽은 겁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놋시는 계속해서 자신을 원망해 왔다. 세상을 탓하려 해봤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저들끼리 약속한 자들이 아무리 잔인해도 그보단 못했다.

    아들을 위해 독을 먹던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 죽음으로 아버지에게서 짝을 빼앗은 그가 아니면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놋시의 죄는 끝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가버렸고 테스도 죄인이 된 겁니다. 나만 아니었다면 없을 죄가, 짐승으로 태어난 나 때문에 타게신이 미쳐서, 태어난 나라를 버리고…….”

    아름답고 곧은 그의 형이 부모를 잃고 나라를 버리고 고향을 불태우고 동생과 몸을 섞었다. 하테가의 초록 눈을 이어받은 위대한 전사가, 누구보다 첫째가는 이가, 잘못된 주인을 만난 탓에 죄의 길에 묶여 버린 것이다.

    놋시는 죄를 거짓으로 가리고 진실을 장식처럼 바꾼 세상에서도 사로나를 버릴 수 없었다. 그가 테스에게 부모의 재가 묻힌 마을을 불태우도록 만들었다면, 죄 없는 자를 죽이게 했다면,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죄였다.

    그래서 진실을 알고 싶었지만 무슨 소용일까? 사실은 이미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다 욕먹고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진실이다. 놋시가 이름도 모를 죄 없는 이들이 나라를 잃고 삶을 잃었으니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매일 쌓여 갔다.

    그런 세상에서도 놋시는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서웠다. 매일 무서웠다. 죄에 익숙해지며 삶이 편해지는 스스로를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아기까지 낳아 버리면.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면 테스는 행복해할 것이다.

    놋시는 그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형을 열병으로 더럽히고도 모자라 각인으로 운명을 삼킨 그가, 아기마저 낳으면. 그러면 테스는……. 영원히 죄의 길에 붙들릴 텐데. 원하는 걸 다 주는 죄의 구덩이에서 머리끝까지 잠길 텐데. 죄를 행하고도 행복한 이가 될 텐데.

    그런데 어떻게 놋시가 그의 아기를 낳고 그 곁에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선 안 됐다. 그는 순수한 생명을 추악한 죄의 결실로 만들 수 없었다.

    그렇지만 죽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죽을 수도 없었다.

    가피타의 물줄기로 다시 걸어 들어가지 못한 그는 길을 떠나야만 했다.

    놋시는 울음을 막지 못했다. 눈물이 마르고 피가 나오길 바라는 이처럼 뜨거운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울기만 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어리석어 미칠 것 같았다.

    “자, 자…….”

    아이를 달래듯 팔을 잡은 사제가 그를 눕혔다. 나달해진 낡은 담요의 냄새가 놋시의 숨을 보듬어 안으며 떨리는 몸을 감싸 왔다.

    “저는, 흐윽, 죄, 죄인입니다…….”

    “그래.”

    사제는 헐겁고 떨리는 목소리로 죄를 고백한 그를 내려다봤다.

    “나도 죄인이다. 나는 아이에게 살인을 가르쳤다.”

    “…….”

    “살아 있는 누가 결백할까.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 없다.”

    “이, 있습니다.”

    “…….”

    “아기가……. 흡, 흐윽. 죄 없는 생명이…….”

    “그래. 아기가 있구나.”

    “…….”

    “아기가 있으니 힘들지. 마음껏 울어도 괜찮다.”

    놋시는 흐느끼며 위를 봤다. 눈물이 줄줄 흘러 눈앞이 흐렸다. 그늘진 얼굴에서 빛나는 노인의 눈이 무슨 색인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잠들 때까지도 노인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사는 게 그렇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니까 계속 사는 거다. 그게 답이다. 울고 화내고. 답답해하고. 도망치기도 하고. 원망하고 탓하면서. 죄를 짓고 나서 그 짐을 지고, 그리고 계속 살아가는 게 사람의 길인 거다.”

    “…….”

    “너를 보니 타게신이 얼마나 편히 지냈는지 알겠다. 죄지은 건 똑같은데 안 그러냐.”

    “아니…….”

    “하려면 그를 욕해야지. 형이라는 녀석이…….”

    놋시는 테스를 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보다 먼저 잠에 빠져든 몸을 어쩔 수 없어 말하지 못했다.

    다음 날 놋시를 보러 사제를 찾아온 데오기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을 얘기했다. 앞다퉈 늘어나던 소문은 며칠 뒤 에트와주를 태우던 불과 함께 왕국 전역에 퍼졌다. 제국에서 온 황제의 알파가 리제크를 죽였다고 모두가 떠들었다.

    체레오의 왕국이 멸망하자 사제는 남은 이들과 마을로 내려갈 준비를 시작했고 데오기는 놋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겠냐고.

    테스는 산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만 밤이 오기 전에 산 밑 마을에 도착했다. 그가 본 것은 놋시가 본 것과 달랐다. 불탔던 밭과 길은 그대로였지만 불빛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이들이 저녁을 해먹은 고소한 냄새가 새싹이 돋은 폐허 위로 떠돌아다녔다.

    인기척을 보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은 테스가 말의 머리를 돌려 버려진 길을 따라간다. 그가 향하는 곳은 사원이 있던 자리였다. 그곳에도 폐허를 가리는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빈 땅에서 나뭇가지를 줍던 사제는 그를 보고도 긴말을 하지 않았다. 리제크가 죽은 것과 체레오가 멸망한 이야기는 에트와주를 태우는 불꽃보다 빨리 달려왔을 터였다.

    “놋시는 산에 있다.”

    “…….”

    저도 모르게 테스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마을의 이들이 놋시를 욕했을까? 그의 부모를 알고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죄를 외면하며 힘들게 했을까?

    말 없는 그에게 익숙한 사제는 미세하게 찌푸려진 얼굴을 보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데오기가 같이 지내자고 했는데 싫다 했어.”

    “혼자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테스는 고개를 깊게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이상 물을 게 없었다. 사제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겠지만 아무도 급하지 않다. 아침이 밝으면 포에가 관리를 끌고 나타나 사제를 도울 것이다.

    검푸른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솟은 산은 기억 속의 모습으로 테스를 반겼다. 그와 함께 걸어오다 지나쳐 간 어둠은 변화를 가렸고 시간을 잊게 만들었다.

    사람의 기척이 끊어진 땅에서 빛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남이 모르는 길로 산에 오르는 테스의 금발 머리가 달빛을 반사했다.

    이 길은 그가 놋시를 위해 수차례 올랐던 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테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열병에 놋시를 뺏기지 않으려 말을 혹사시키던 언젠가와 다르다. 어머니가 알려 준 절벽 아래 동굴에서, 주인의 열병에 붙잡히지 않은 동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테스는 침착함을 가장하고 자신을 억누르며 밤공기에 실려 가듯 움직였다. 달빛이 가려진 숲을 벗어나면 좁다란 절벽에 가까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벌써 여러 날을 말 위에서 보냈는데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말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사제의 편지를 받았을 때, 다피벳의 시체를 찾았을 때, 그전에 앞서 놋시가 저택에서 사라졌다는 섬뜩한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그의 귀에 닿았을 때도 테스는 참았었다.

    그때 그는 참는 것이 나은 위치였다. 그렇다고 믿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놋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놋시는 몇 걸음만 서두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참아야 한다는 현실이 테스를 슬프게 만들었다. 동시에 화나게 했고 이것 역시 지겨워진 감정이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까? 어째서 떠났던 걸까? 테스는 아직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을 놋시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칠 만큼 안도하다가도 어째서 그들이 이제야 만나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숨이 턱턱 막혔다.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또는, 그것조차 그 혼자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테스는 지금 너무나도 두려웠다. 어쩌면 저택을 나간 그 순간부터 놋시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인이 무사한 것만으로 기뻐하던 첫째가는 이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공포에 사로잡혀 떨고 있었다.

    혼자 미쳐 가던 그의 깊은 마음은 하나의 이유를 찾아냈었다. 열병이 닥쳐올 계절에 먼 길을 갔던 놋시는 아마도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놋시는 그를 벌하러 떠났을지도 모른다. 이제껏 모든 죄를 용서하고 참아 주던 그의 동생이, 그의 주인이, 그의 자식을 품고서 이것만은 안 된다며 떠나갔던 걸까.

    말에서 내린 테스의 신경은 점차 예민해져 갔다. 그리운 냄새를 찾으려는 것처럼 커지던 숨이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아졌다.

    여름밤의 벌레가 길고 곧은 금발 머리카락과 서늘한 턱을 건드리며 날아다녔지만 테스는 느끼지도 못했다. 확신을 잃은 육체는 평소의 냉정함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걷는 것만이 가능했다.

    놋시를 보지 못한 며칠은 끔찍하게도 진작 한 달을 넘겼다. 매일을 세던 본능이 손발을 당겼지만 테스는 목줄을 조이듯 내면의 갈망을 잠재웠다. 지금은 성급하게 굴 때가 아니었다.

    복잡하게 엉켜든 분노와 그리움을 짓밟으며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테스의 눈이 서서히 나타나는 가느다란 그림자를 보고 열려 있는 틈새를 본다. 온기로 다가오는 습한 기운과 마음의 열망을 조금씩 느끼게 자신을 허락하고 만다.

    거꾸로 땅에 꽂힌 칼처럼 갈라진 입구가 날카로움을 뺏기고 둥글고 작은 불빛으로 줄어 있었다. 불에 달궈진 돌같이 붉고 노랗지만 차가운 벽이 오래전처럼 그를 반기고, 아는 길을 따라간 테스가 꿈으로 빠져들듯 그대로 재현된 과거 앞에서 멈춰 섰다.

    어둑한 습기 밑에 깔려 있는 작은 화로와 나뭇가지 침대와 떨어진 벽을 따라 흘러가는 뜨거운 물줄기까지.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동굴의 내부가 고스란히 테스의 눈에 들어오고 다음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모두 놋시가 그를 돌아본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놋시가 그를 바라본 순간 테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암흑이 됐던 세상이 하얗게 번졌다 느리게 되돌아왔다. 테스는 품에 안긴 몸을 느끼고 그리워한 체취를 느끼고 뺨에 눌리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한걸음에 달려가 놋시를 끌어안은 테스의 입에서 처음으로 소리가 나왔다. 연달아 거친 숨이 샌다. 물에서 건져진 사람처럼 이제껏 막혔던 숨을 처음 쉬는 헐떡임이 터졌다. 살아서 걷고 말하던 그의 몸이 사실은 죽은 자의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수많은 갈등과 고민이 지워진 테스의 머릿속에 무한한 기쁨과 만족이 들어찼다. 그의 주인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놋시의 체향과 따듯한 체온과 몇 겹의 옷을 뚫고 들리는 심장 박동을 모두 품에 안고서 한참이나 굳어 있던 커다란 등이 지진처럼 떨리며 움튼다. 굽혀져 있던 넓은 어깨가 일어서고 애원하던 고개가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감겼던 테스의 눈이 천천히 열리고 앞을 봤다.

    아니, 놋시를 봤다. 두 팔을 모으고서 그의 품에 갇혀 있는 동생의 검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듯 젖혀지고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보는 것은 그가 아니다. 수천 번 바라봤던 새벽하늘의 눈동자가 테스를 바라봤다. 살아 있는 놋시가, 살아 있는 피가 흐르는데도 투명한 물처럼 빛나고 흐르는 구름처럼 고요한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세상은 정지한 그림이다. 놋시의 얇고 부드러운 입술은 금방이라도 말할 듯 열렸지만 테스는 숨을 쉬는 게 고작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해야 했다. 테스는 놋시의 건강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무사함을 거듭 확인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지 빼놓지 않고 듣고 싶었다.

    그러나 테스의 커다란 손에 만져지는 몸은 살아 있는 놋시였고 그의 다급한 영혼에 스며드는 체취는 바로 곁의 향기였다. 처음으로 욕구를 가르쳐 주고 갈증을 일으켰던 육체가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던 불확실의 세계에서 돌아와 그에게 안겨 있었다.

    놋시의 존재가 숨을 쉬고 만져지는 실체로 그에게 닿아 있는 지금, 무자비하게 솟아난 강렬한 욕망이 테스를 사로잡았다.

    시작은 절실한 접촉이다. 테스는 온몸으로 놋시를 느끼며 안도했고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입을 맞췄다. 습한 공기에 젖어 있는 머리카락과 연한 뺨과 얇은 입술에 입 맞추고 작은 혀끝을 맛보자 멈출 수가 없어졌다.

    “놋시, 놋시…….”

    비벼지고 짓눌리는 입술 사이에서 그는 애원하고 있었다. 부모가 죽었을 때도 통곡하지 않았던 타게신이 우는 아이처럼 동생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제정신이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놋시는 그의 주인이었다. 그들이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매일 밤 숨어 무서워하던 테스의 깊은 마음이 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매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끝없는 기쁨인 것을 도저히 숨길 수 없다. 숨길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테스는 젖어 있는 작은 혀를 빨았다. 고통으로 말라붙어 있던 심장이 살캉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환희에 번쩍이는 전율이 무쇠처럼 단단한 육체를 휩쓸고 전신의 신경을 자극했다. 기억하는 단 하나의 냄새가 폐를 채우고 머리를 마비시키며 유일한 이름만을 되풀이했다.

    “하아, 놋시, 읏…….”

    “아, 잠깐……. 테스, 흐읍.”

    어디에 어떻게 닿는지 알 수 없던 테스의 입술이 마른 어깨의 피부를 더듬었다. 길게 올라붙으며 움푹 들어간 쇄골 위의 그림자에 서늘한 혀가 파고들어 살을 핥고 빠져든다. 바닥에 눕혀진 젖은 머리카락이 여러 차례 더럽혀진 뒤에야 핏줄이 솟은 손등이 흙바닥을 파헤치며 놋시의 머리를 받쳐 줬다.

    테스의 다른 손은 그사이 막아서던 옷자락을 헤쳤다. 목깃이 뜯어지고 소매가 구겨진 윗옷을 벗겨 낸 길고 견고한 손가락이 웅크린 팔을 쓰다듬고 등허리로 파고들었다.

    구걸하다 빼앗아 가는 입술에 작은 신음이 으스러졌다. 열기에 삼켜지는 저릿한 신음 사이로 몇 번인가 이름이 나왔다. 그러다 혀에 막히고 녹아 버린다. 허공을 향해 버려지는 들뜬 숨으로 흩뿌려진다.

    어둡고 까마득한 바닥 위에 하얀 얼굴과 어깨가 모두 드러났다. 놋시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서도 테스는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이름조차 듣지 못한 것 같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닿아 있는 입술의 소중함과 안겨 있는 몸의 따듯함뿐이었고 어서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격렬한 욕구뿐이다.

    테스의 본능에 각인된 뜨겁고 좁은 놋시의 육체가, 동생의 연약한 살결이 자신을 미끄럽게 감싸 주고 틈 없이 달라붙는 감각이 그의 온 신경을 불태우는 환상처럼 되살아나 실현되길 소망했다.

    커다란 손바닥에 붙잡힌 작은 고개가 흔들리고 목덜미를 휘감은 손이 밀어내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테스는 녹슨 칼이 뒤에서 뼈를 뚫고 심장을 찔러 와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육체는 참아 온 광기를 터트렸고 그의 정신은 가까스로 포악한 힘을 조절하던 찰나다.

    놋시의 비명에 들어 있는 낯선 공포가 아니었다면 테스는 아마도 그를 막아선 주인의 명령조차 듣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테스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서 놋시의 속삭임을 들었고 그러고선 무엇도 할 수 없게 됐다.

    “아기가 있다고…….”

    “…….”

    “이, 흐읍, 이렇게, 마구 누르면…….”

    벗은 팔로 배를 감싼 놋시는 다급해 뒤엉킨 호흡 사이로 짧은 기침을 뱉다가도 그러면 안 된다며 애원했고 테스는 눈을 깜빡이는 방법조차 잊어버려 마냥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테스를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놋시는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사제를 만나고부터 그랬다 말하기에는, 사로나에 온 것부터 미친 짓이었고, 따지자면 광기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무서운 진실을 마주하느라 지쳤던 놋시가 사제의 동굴에서 눈뜬 것은 여름 열매를 가져온 데오기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진 순간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전쟁이 나는 건 알아도, 나라가 망할 줄은 몰랐는데.”

    “땅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마을로 내려가야지.”

    데오기는 아침 일찍 나타나 사제에게 체레오의 멸망을 전했다. 멀리 나가지도 않았는데 소문이 돌아 숨어 있던 온갖 이들이 시내로 오고 가는 통에 저절로 듣게 됐다고 한다.

    “체레오가 사라졌군요.”

    “그래. 나도 참 바보 같다. 그런단 말을 들어 놓고도 설마 진짜 그러진 않겠지 싶어서.”

    “…….”

    자책하는 데오기의 말은 반쯤 농담이었지만 놋시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야말로 황제의 말을 지척에서 듣고 전쟁이 시작되는 걸 곁에서 봤는데. 그런데도 이해가 힘들었다.

    꿈도 없는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놋시의 몸은 무거웠다. 머리와 마음도 어수선했다. 하룻밤이 아니라 10년을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그는 데오기가 건네준 물기 많은 열매를 입에 물고서 수도가 불타고 있다는 소문과 리제크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이 끝났고 왕국은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황제의 바람이 타게신의 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산 밑 마을의 이들에게는 먼 곳의 노래처럼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제는 관리를 만나야겠다고 중얼거렸고 데오기는 놋시에게 괜찮냐고 물어 왔다.

    무엇이 괜찮냐는 거지? 놋시는 그녀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데오기는 의아해하는 그를 모른 체해 주며 물기 많은 열매를 자꾸 내밀었다.

    마을 사람들의 삶이 어찌 될지 상의하는 사제와 데오기의 곁에서 한참 듣고만 있던 놋시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곳에서 전쟁의 승패와 상관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사제도 그에게 말할 게 있는 듯했다.

    “타게신이 알고 있다.”

    “…….”

    “네가 왔다고 들었을 때 나는 상황을 몰라서, 너는 아파 누웠다 하고 전쟁이 한창이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여기에 왔다고 편지를 했지.”

    “제가……. 그게 언제인가요?”

    “며칠 지났으니 도착했을 거다.”

    “…….”

    사제는 어울리지 않게 미안한 기색을 보였지만 놋시는 놀랍지 않았다.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모른다는 게 적합했다. 놋시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고향을 향해 먼 길을 왔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한 게 없었다. 사실은 다음 일은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어쩌면 자신은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다피벳의 말을 완전히 믿고서, 테스의 죄를 확신하고서 그걸 보러 온 게 아닐까? 정말로 바보 같던 스스로를 돌이켜 보며 놋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나고 왕국이 멸망했으며 테스가 곧 그를 찾아 이곳으로 올 것이란 말을 듣고서도 놋시는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은 데오기를 도우며 움직일 수 있었고 그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데오기는 말 없는 놋시를 환자처럼 대해 줬다. 중요한 일을 묻지 않으며 하찮은 것들을 물어 왔다.

    그는 사제의 동굴을 나와 돌아가는 길 내내 데오기의 목소리를 들었다. 먹은 게 있는지 얼굴이 왜 그리 부었는지 몸은 아프지 않은지. 세세히 묻는 그녀에게 잘 모르겠다고 말한 놋시는 산을 내려갈 수 있냐는 말에는 그렇다 대답했다.

    아픈 것은 아니었다. 놋시는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지만 정확히 말하기 어려웠다. 사제의 말에 울어서 그렇다 싶다가도 그것부터 이상했다.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기이하게도 이곳에 오고 나서 매일 운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데오기는 그에게 친절했다. 그녀는 놋시가 모르는 이유를 아는 사람처럼 지친 그를 보살폈고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재웠다.

    숨었던 이들이 돌아가는 건 간단하지 않았다. 1년 가까이 산에서 살던 터라 늘어난 짐도 많았고, 내려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낼지도 정해야 했다. 불탄 집을 대신해 주인 잃은 집이 있지만 다른 곳으로 떠난 이들도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조만간 돌아올 터였다.

    비슷하게 비워져 있던 이웃 마을은 어떻게 되는지, 왕국이 사라진다니 시내에 별다른 혼란이 없는지도 알아 둬야 했다.

    사제와 노인들이 상의하고 젊은 축인 데오기가 마을을 넘어 다니며 사람들의 소식을 모으는 동안 놋시는 그녀의 아이들을 돌보고 먹였다. 큰 도움이 되지도 못했는데 데오기는 계속해서 그가 있어 잘됐다는 말을 늘어놨다.

    오래지 않아 날이 정해져 산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됐다. 데오기는 돌아간 뒤에도 이곳에 일궈 놓은 텃밭을 버리지 않고 살릴 거라고 했다. 놋시는 그녀에게 여기서 키우면 특히 좋을 약초를 알려 줬다. 자연스레 자란 것들이 이미 있어 큰 일거리도 아닐 것이다.

    “잘 키우면 값을 받을 수 있어요.”

    “그래. 여름이라 다행이지, 그치, 겨울이면 땅이 얼어서 도통 다니질 못하니까.”

    “맞아요. 비도 안 와서 다행이고요.”

    “그래. 장마가 오기 전에 내려가야지. 겨울 준비를 해야 하니까…….”

    집에 돌아갈 이야기를 하는 데오기의 즐거운 목소리는 듣기 좋은 노래 같았다. 놋시는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말을 맞췄다.

    그들은 버섯과 찻잎을 말하다 흰 뿌리와 검은 뿌리를 얘기했다. 계절을 따라 달라지는 먹거리를 떠들며 그에게 답을 찾던 그녀는 만족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있으니 좋구나. 물어볼 사람이 없어 답답할 때가 있거든.”

    “…….”

    “약초사가 없으니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전에는 조우가 무슨 버섯을 구워 먹더니 아팠는데, 애가 별난 건지 아니면 버섯이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흥얼거리듯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놋시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여름밤 산의 공기, 작은 날벌레들, 아이들의 체취에 섞인 풀잎과 나무 향기가 잊고 지내던 과거의 만약을 답해 줬다.

    한 해 전의 여름에 놋시의 인생이 영원히 뒤바뀌지 않았다면 이것이 그의 삶이었다. 침묵하는 산의 너그러움에 기대 버섯을 따고 약초를 캐며 마을의 이들을 돕는 약초사의 삶, 그의 어머니가 했고 그가 해오던 그것이 계속될 줄 알았던 그의 인생이었다.

    산 밑 마을에 다시 불빛이 생겨난 뒤에도 놋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 데오기는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말했고 그것을 거절하자 산장에서라도 지내라 했지만 놋시는 그것 역시 거부했다.

    남의 눈을 신경 쓰냐는 말이 딱 한 번 나왔지만 놋시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도 여러 번 멀리서나마 그를 본 시점이었다. 말을 걸거나 누군지 묻는 이는 없었지만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다.

    차노륵과 에기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의 자식이 누구인지 아는 여럿은 돌아온 놋시를 보고도 욕하거나 흉보지 않았다.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새로운 희망이 피어난 지금은 아니었다.

    놋시는 거듭해서 데오기에게 남들 때문에 산에 남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놋시는 절벽 밑에 숨어 있는 에기의 동굴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테스를 기다릴 것이다. 작년 이맘때, 모든 것이 뒤바뀐 지난번의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동굴은 많이 변해 있었다. 끓어오르는 온천수와 습하고 더운 공기는 변함없었지만 사람의 기척이 끊긴 걸 알아차린 동물의 흔적이 늘었고 사방이 온갖 것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행히도 나뭇가지 침대는 그대로였고 에기의 손때가 묻은 나무바가지도 깨지지 않은 채였다. 걱정된다며 첫날 쫓아왔던 데오기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튼튼하기도 하지. 주인이 올 줄 알고 기다리던 것처럼 멀쩡하네!”

    “1년밖에 안 지났으니까요.”

    “그래도 물가에선 다 망가지기 쉽다. 그래서, 어디 보자. 근처에 다른 물은 없나?”

    “밖으로 나가서 조금만 내려가면 냇물이 닿아요.”

    “다행이구나. 여름이니까 차가운 물이 필요할 거야…….”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깊은 속까지 더듬거리고 둘러보는 데오기를 보며 놋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랜 세월 에기의 비밀이던 장소를 그녀에게 알려 준다는 게 잘못일까 생각했지만 데오기라면 괜찮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아마도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곳을 찾아와 사람의 기척을 남겨 둬야 했다.

    데오기는 동굴의 청소를 도왔고 음식과 낡은 가죽을 줬다. 산장의 남은 잡동사니를 편한 대로 가져다 쓰고 시간 나는 대로 마을에 내려오라는 말도 했다. 놋시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걱정이 끊이지 않았지만 동굴이 넓고 물이 깨끗한 걸 보며 안심한 것 같았다.

    “이 물은 분명 몸에 좋겠지? 그래도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안 그러니?”

    “고기도 먹을 겁니다.”

    “그래. 너는 이 산을 잘 아니까. 하여간 날 보러 매일 내려와야 해.”

    “그럴게요.”

    놋시가 그럴 리 없는 걸 데오기도 알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내일 만날 사람처럼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고 놋시는 혼자가 됐다.

    처음에는 낯선 감각의 이유를 몰랐다. 물건이 더러워지고 흙바닥이 어지럽던 걸 치우자 모든 게 예전과 똑같았다. 그런데도 놋시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조용하고 아늑하게 그를 숨겨 주던 동굴에서 더운물에 흉터 난 손을 담그면 꼭 옛날 같았다. 그런데도 뭔가 달랐다.

    뒤숭숭한 마음은 하루 내내 그랬다. 해가 지고서 불을 피우고 데오기가 준 음식과 주변의 것들로 저녁을 해 먹고 나자 더는 할 일이 없다. 그러자 나뭇가지 침대에 주저앉게 된다.

    그렇게 돌아온 자리에 앉고 나서. 부모의 집이 사라진 고향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과거의 흔적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나서야 놋시는 무엇이 다른지 알아차린다.

    그는 지금 열병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다. 아기가 생긴 몸에는 열병이 오지 않고, 그래서 이곳에 올 수 있었지만 이토록 뼈저리게 차이를 깨달은 것은 처음이었다.

    놋시가 기억하는 한 그는 열병을 앓지 않을 때 이곳에 온 적이 없다. 오래전부터 동굴에 들르던 에기도 그가 열병을 시작한 뒤에는 혼자 오지 않았다.

    절벽 밑에 숨겨진 작은 동굴은 모자의 괴로운 비밀이 됐고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형제의 비밀로 남겨졌었다.

    여기서 테스를 기다리는 게 옳은 결정이었을까. 놋시의 머리에 의심이 떠올랐지만 다른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달리 있고 싶은 곳도 없었다.

    그래서 놋시는 그곳에서 3일을 혼자 보냈다. 열병을 기다리던 때처럼 고독에 잠겨 테스를 기다렸다.

    고독은 지루함과 달랐다. 주인의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할 일은 많았다. 놋시는 테스와의 재회를 준비해야 했다.

    그들이 해야 할 대화와, 그가 물어 올 질문과 자신이 줄 수 있는 대답을 생각하다 보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고 시간이 마음대로 지나갔다.

    가끔은 망상에 빠졌던 것도 같다. 놋시는 타게신이 군대를 이끌고 올지 아니면 포에와 몇을 데리고 나타날지 알 수 없었고 사로나의 시내에서 그를 어찌 대할지도 알 수 없었다.

    산 밑 마을로 돌아가 불을 피우는 이들이 테스를 어떻게 대할지는 더욱 상상이 불가능했다. 놋시 혼자는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게 가능했지만, 타게신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텐데.

    아니면 사제가 모두를 대표해 테스를 상대할까? 그래도 데오기는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놋시의 정신은 하잘것없고 무의미한 잡념에 잠겨 있다가 다음 순간 무섭고 두려운 생각으로 옮겨 갔다.

    다피벳은 어떻게 됐을까? 알 길이 없다. 어린 왕자와 에체르가 살았다는 건 사람들이 믿지 않는 소문으로 돌았지만 다피벳은 이름이 나올 존재가 못 됐다.

    붙잡혔을까? 아니면 먼 곳으로 도망쳤을까? 또는 사테를 구하러 체레오로 돌아왔을까?

    놋시는 지금에 와서도 다피벳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영원히 모를 것만 같다.

    혼란스럽고 괴롭던 순간을 떠올리다 보면 다시 테스의 이름으로 돌아가게 됐다.

    아기를 가진 걸 안다면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보고선 화낼 터였다. 놋시는 테스가 기뻐하고 동시에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테스는 그에게 어째서 당장 돌아오지 않았냐고 화를 낼 테고 그것은 정당한 분노였다.

    그러나 놋시는 지금도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먼 길을 와서 그렇게 많은 말을 들었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놋시가 죄를 찾아왔다는 사제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행복이 끔찍하다는 놋시의 말도 진실이었다.

    답은 어렵지 않다. 머리로는 그도 알고 있었다. 혹은, 그렇다고 믿었었다.

    살아도 되는지 답할 수 없을 때라도 살아야 한다. 놋시는 부모의 가르침을 기억했고 최선을 다했다.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를 때는 알아내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도 모를 때는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이 죄의 구덩이를 깊어지게 해 자신을 도망치게 만들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테스가 준 놋시의 삶에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는 만족에 잠겨 언젠가 행복을 얻으면 되는 것이었다.

    달콤한 열매와 풍성한 가지의 반짝이는 잎사귀 하나하나가 다 죄의 뿌리에서 자라난 걸 알아도 받아먹고 기대며 살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쉬운 삶을 누가 살지 못할까? 놋시는 자신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테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두껍고 단단한 껍질 틈새로 얇은 가시가 찔러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치고 말았다.

    누군가 그들의 죄를 욕하기를 오래도록 바라던 사람처럼 도망친 스스로를 놋시는 이제 알았다.

    테스가 그렇게나 노력해 모든 죄를 지우고 누구도 욕하지 못하게 해주었는데, 고귀한 이름으로 놋시를 감싸고 단단한 돌벽 안에 정원을 줬는데, 그런데도 도망치고 말았다.

    죄를 품고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사제의 말은 놋시도 아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진실이었다.

    놋시가 죄를 알고 삶을 아는 사람으로 사는 이상 스스로를 용서할 날은 오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놋시는 옳은 길을 찾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떤 길로도 가지 못했다.

    테스를 만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만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놋시는 그곳에서 3일을 혼자 보냈다. 열병을 기다리던 때처럼 고독에 잠겨 테스를 기다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연습하다가 미친 소리 같아 울기도 했다. 작게 뭉쳐 단단해졌다 부드럽게 부풀기 시작한 배를 만지며 사실은 아기가 아니라 죄가 만든 병이 아닐지 무서운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만나거든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런데 테스는 도망쳐 온 사람이 자신인 것처럼 밤과 함께 나타나서는, 타오르는 욕망에 바닥이 새카매진 눈으로 놋시를 내려다봤다.

    테스는 헛것인 양 보였다가 뜨거운 체온으로 닿아 와 놋시의 온몸을 끌어안고 그의 발이 바닥을 딛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놋시는 생각을 잊고 숨을 헐떡였다. 열병처럼 덮쳐 온 포악한 허기에 휘말려 입을 벌리고 혀를 내줬다. 지난번의 여름과 그전의 여름처럼 테스의 서늘한 체취와 길고 단단한 손가락과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는 본능의 만족에 붙잡혔다.

    하지만 지금 놋시의 몸을 차지한 것은 테스의 마지막을 빼앗은 주인이 아니었다.

    그의 배 속에는 더럽고 추악한 욕구가 아니라 죄 없는 생명이 있었고 놋시는 그것을 지켜야 했다. 죽이지 못한 이상 살게 해줘야 했다.

    “아기가 있다고…….”

    “…….”

    “이, 흐읍, 이렇게, 마구 누르면…….”

    두 팔을 웅크리고 배를 감싼 놋시는 다급해 뒤엉킨 호흡 사이로 짧은 기침을 뱉다가도 그러면 안 된다며 애원했고 다음을 알 수 없었다.

    테스는 바닥에 몸을 말고 작아진 놋시를 일으켜 안았다. 주저앉은 그가 놋시를 위한 벽이 되고 바닥이 됐다.

    구부린 무릎 밑에 가파른 손목이 들어가고 굽혀진 등줄기에 커다란 손이 펼쳐진다. 안아 들린 몸이 조심스레 기울어지자 새까맣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넓은 가슴에 기댄다. 크고 단단한 어깨 밑으로 머리가 안기고 긴장으로 굳은 허리에 웅크린 팔이 들어차고 힘이 뭉쳐 곤두선 허벅지 위로 굽혀진 두 다리가 놓였다.

    바닥이 되고 벽이 된 테스의 몸에 받쳐지고 붙들리고 안긴 놋시는 자꾸 몸을 떨었다. 가빠진 호흡 사이 잔기침이 비집고 나왔다. 마른 등을 커다란 손이 쓸어내려도 쉽게 멈추지 않던 기침은 시작처럼 거칠게 짓눌렸다.

    얼굴을 숨기고 숨죽인 놋시는 맨발이었다. 테스는 바짓단 밑으로 던져진 창백한 발목과 핏줄선 발등을 봤다. 흙이 묻은 뒤꿈치를 보이며 힘없이 놓인 발이 추워 보였다.

    조금 전에 발을 씻었을까. 낮부터 춥지 않아 부슬거리는 땅을 밟고 다녔을까.

    짝으로 만들어진 조각처럼 서로에게 맞춰진 둘의 몸이 하나가 되어 숨을 골랐다. 생각은 이제부터다.

    생각은 쉽지 않았다. 억눌렀던 그리움과 참아 왔던 욕망은 테스의 전신을 장악하고 그의 이성을 내쫓았었다. 충동에 휘말린 본능은 언제나처럼 욕망을 좇았고 그가 놋시의 입술을 열고 옷에 가린 몸을 만지며 두려움을 줄 만큼 긴 시간 동안 알파의 육체를 조종했던 것 같다.

    테스는 무덤을 빠져나오는 시체처럼 주변을 돌아봤다. 가까스로 넓어진 시야가 보고도 잊었던 동굴 속 어둠과 자잘한 불빛을 알아차린다. 그리운 체취에만 몰두했던 후각이 온천수의 물비린내를 맡았고 품에 안은 육체의 체온이 아니라 차갑게 느껴지는 동굴의 바닥과 미지근한 공기를 느꼈다.

    놋시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말 한마디 들리지 않았다. 테스의 품에 붙들린 그의 주인은 소리 내지 않으면 보지 못할 거라며 입을 다무는 아이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이기적인 행동으로 겁먹게 한 테스의 탓이었다.

    “놋시.”

    “…….”

    대답은 없다. 떨리는 큰 손이 놋시를 고쳐 안고서 어깨를 어루만지지만 차게 식은 피부는 쉽게 덥혀지지 않았다.

    서늘한 손 밑에서 그보다 차가운 살갗이 지끈거리는 통증으로 테스를 찔러 왔다. 습한 동굴의 안쪽에는 바깥의 밤공기가 닿지 않지만 옷이 찢기고 발이 보이는 놋시는 추워 보였다.

    테스는 놋시의 머리카락에 묻은 흙을 털어 줬다. 놋시는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에게 바짝 붙어 왔다. 머리카락에 묻은 흙도, 조심스레 털어 주는 손도 느끼지 못하는지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을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 놋시를 끌어안고서 테스는 생각을 이어 갔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이제껏 한 번도 놋시는 테스의 품에서 그를 두려워한 적 없었다. 억지를 쓰거나 욕심을 부릴 때조차 등 돌리지 않고 그를 봤다. 슬퍼하면서도 그의 품에 머무르곤 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자신의 실수였을까? 본능의 포악한 욕망에 취해 되찾은 기쁨에 휩쓸려 버린 그가 놋시의 눈에 난폭한 동물로 비쳤을까?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지키려 등 돌릴 만큼 두려웠을까?

    힘들여 끈질기게 답을 구하면서도 테스의 손은 놋시를 놓지 않았다.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이성의 충고가 나타났지만 쉽게 무시당했다. 놋시를 안고서 생각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테스에게 그건 너무나 가혹하다. 젖은 머리카락에 입 맞추는 것조차 하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이다.

    입이 열린 것은 그래서였다. 혼란스럽던 테스의 몸과 마음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소릴 냈다.

    “그래서 떠났던 건가.”

    “…….”

    “아기가 생겨서……. 그것이 싫어서?”

    흐읍, 테스는 가라앉아 고르게 되던 놋시의 호흡이 크게 넘어지는 찰나를 들었다. 그러고 나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되고 그것이 진실인지 두려워졌다. 무의식이 탐욕스럽게 모으던 달콤한 체취에서 다른 걸 찾으려 신경이 날을 세운다.

    아기. 놋시가 그렇게 말했다. 아기가 있다고.

    억압되던 감정이 터지며 테스의 세상이 지진을 겪는다. 앉은 자리에서 겪게 된 어지럼증에 빠르게 전율한 깊숙한 눈매가 허공을 쏘아보며 속을 틀어쥐었다. 놀라운 기적이 다시금 나타나고, 최초로 자각되고, 터져 나오는 기쁨을 참기 위해 어딘가의 핏줄이 터진 것만 같다.

    테스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쇳내를 삼키며 얼굴을 굳혔다. 놋시는 자식을 원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도 원해선 안 된다.

    잔인한 소유욕과 냉정한 판단이 서로를 부수며 엉겨들었다. 모르고 싶은 것들을 참는 테스의 육체에서 근육이 부풀고 소중히 보듬어 안은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절벽보다 가파르던 턱 선이 삭막한 긴장으로 당겨지며 화살을 쏘는 줄처럼 팽팽해진다.

    그러느라 테스는 놋시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스스로를 막으며 쇠처럼 닫히는 표정과 멈춰 버린 쓰다듬을 깨닫고 고개를 든 놋시의 다급한 애원은 전과 달리 여러 번 반복되어야 했다.

    “떠나지 않았습니다.”

    “…….”

    “떠나지 않았어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었지? 놋시는 변명하고 싶었지만 사실을 바꿀 순 없었다. 저택을 떠난 순간은 기억조차 흐릿한 남의 손으로 벌어진 납치였지만 그 후의 이별은 그렇지 않다. 정신없이 살아났던 그는 덤으로 얻은 목숨처럼 무모한 걸음으로 테스가 아닌 다른 끝을 향했었다.

    “다피벳이……. 아기가 있는지 봐줬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놋시가 버리며 지나쳐 온 과거가, 자신이 하고도 남의 말처럼 낯선 시간이 두서없고 서툰 설명으로 테스에게 조금씩 전해졌다.

    더듬거리는 걸음처럼 나온 놋시의 이야기는 언덕을 굴러떨어지고 진창에 빠지며 계속됐다. 그 어딘가에서 테스의 손은 다시 놋시를 쓰다듬어 줬다. 멈추지 않고 그를 일으켜 세우며 어루만졌다.

    테스는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했더라도 놋시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던져진 돌처럼 멈출 수 없어진 그의 입은 혼자서 되는 대로 말을 이었다.

    놋시는 갑자기 쏟아졌던 폭우와 물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얘기하다 귀걸이를 팔았다고 말했다. 그러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유를 찾아 헤맸다.

    다피벳의 외침을 테스에게 말하는 건 어려웠다. 테스가 사로나를 적에게 넘겼다고, 그들의 죄를 숨기려 모두를 죽였다고 외쳤다 전하는 것뿐이라면 이렇게까지 어렵지 않을 텐데. 그 말을 믿었다 고백하는 게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사로나로 왔습니다. 위험하고 어리석었죠. 그런데……. 그때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쳤던 것 같아요. 열이 오르지도 않았는데. 추한 허기처럼 다급했어요. 어떻게든 여기에 와서 사실을 봐야 한다고…….”

    “……어떻게.”

    “예?”

    “어디로, 어떻게 이곳에 왔지. 국경을 혼자 넘은 건가.”

    “배에서 내려 달산으로 갔습니다. 그전에, 칼을 구했어요. 신발도…….”

    “신발이 없었다고?”

    “물에서 잃어버렸습니다. 배에서였나. 다피벳이 옷을 줬지만 신발은 주지 않아서. 아니, 잃어버렸나. 달산에 가기 전에 강물이 넓은 마을이 있어서, 거기서 얼굴을 가리고. 그전부터도 가렸지만……. 나무 진액을 발랐는데, 지금은 바르지 않았지만.”

    어수선한 과거를 애써 뒤지던 놋시가 혼돈을 떨구듯 고개를 숙였다. 그는 어느새 테스의 어깨를 마주 보고 있었다. 가벼운 옷자락 하나로 감춰지지 못하는 곧고 강인한 뼈대가 그에게는 아늑했다. 언제나 그랬다. 껍질 벗긴 나무처럼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대고서 입이 멋대로 속삭인다.

    “귀걸이를 팔았어요.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계속, 가리고 왔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했을 거예요…….”

    팔만이 아니라 다리마저 웅크린 놋시는 테스의 품 안에서 작은 알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배를 감싼 팔을 접힌 다리가 한 번 더 누른다. 무감각해진 발바닥이 곤두선 근육으로 비스듬한 허벅지를 디디자 땅이 된 것처럼 조용하던 테스의 전신이 꿈틀거렸다.

    등을 받쳐 주던 커다란 손이 순간 힘을 실었지만 놋시는 답답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떠나고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구부러진 마른 등의 도드라진 등줄기와 날개 뼈를 커다란 손이 어루만졌다. 한 겹 옷감으로는 막지 못할 체온과 애정이 불로 달군 쇳덩이처럼 확실하게 자국을 남기며 스며들었다.

    익숙하다 못해 몸에 박혀 버린 손짓은 다정하고 유혹적이었다. 마냥 기대고 싶어진 놋시의 머리가 절로 파고들지만 한숨 사이 새어 나온 생각은 달랐다. 그는 더 이상 이럴 나이가 아니다.

    놋시는 이제 어른이었다. 어리광 부리는 애처럼 매달릴 시절은 지났다. 바로 이 자리에서 오래도록 그랬던 것처럼, 테스의 말만 따르며 그들의 죄를 외면하던 어린 시절은 끝나 버린 과거였다. 그에게는 책임이 늘어 있고 그것은 생겨나 버린 아기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테스는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아기가 생겨 그랬냐는 질책은 이상하게 들렸지만 자신도 모르는 답을 찾아 달라는 듯 긴 시간을 모조리 밝혀 놓던 놋시는 그것이 어쩌면 정답이라는 걸 알았다.

    떠난 이유는 아니었을 테지만 마음이 약해진 것은 분명 그로 인해서였다. 놋시가 거부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변화. 성장. 자라나 버린 그들의 죄가, 둘이 아닌 셋으로 늘어나 돌이킬 수 없는 끝에 닿아 버린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벗어나기 싫은 행복으로 자리 잡는 죄의 길이 너무나 끔찍했다.

    “사제님이 그러셨어요. 제가 죄를 찾아서 이리 왔다고.”

    “…….”

    “들었을 때는 곧바른 말이 무서워 울었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저의 죄는 언제나 제 곁에 있으니…….”

    나직해진 목소리보다 커진 숨소리가 흩어진 말을 이었다. 뻐근한 등을 만져 주던 테스의 손가락이 엉킨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놋시의 목덜미와 귓불을 스쳤다. 애틋한 손끝은 고개를 돌리길 바라는 것 같지만 다시는 고개 들 수 없게 안아 오는 팔에 온몸이 조여들었다.

    헤어날 수 없는 죄처럼 살가운 품에서 놋시는 떠오르는 모든 언어로 자신의 불행을 고백했다. 영원히 행복해지지 못할 운명을, 스스로를 견디다 지쳐 버린 자신의 비참함을 어리광처럼 쏟아 냈다.

    놋시의 눈에선 어느 틈에 눈물이 솟아났다. 그렇게 울었는데도 닳지 않은 눈물이 피처럼 흘렀다. 그는 말발굽에 짓이겨진 열매가 됐다. 불안과 죄책감에 떠밀리고 발가벗겨진 영혼으로 바보처럼 울었다. 눈물에 생각이 먹히고 소리가 적셔져 가라앉는 걸 알면서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테스의 모든 꿈을 망쳐 버린 자신을 원망하며 놋시가 물었다. 우리는 어떡해야 하나요?

    그리고 테스는, 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구를 뜻하는지 알 수 없어 목이 메었다.

    테스는 놋시가 쏟아 내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잊어버린 노래를 따라가듯 혼자서 걸어온 놋시의 길은 그의 악몽이 현실로 된 것처럼 생생했고 꿈과 똑같이 이제 와 도울 수 없었다.

    놋시가 혼자 보낸 시간을 들으며 테스는 저절로 그때의 자신이 궁금해졌지만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냉정한 계산으로 놋시의 값을 부를 적을 기다렸던가? 다피벳의 시체를 찾았다는 말에 소금에 절여 가져오라 했던가?

    기억할 필요도 없다. 무능한 알파의 가치 없는 시간은 처절한 후회와 자책에 뒤덮여 흐려진 지 오래다. 테스가 골라내고 간직해야 하는 건 무의미한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놋시의 아픈 경험이었다.

    물에서 살아난 놋시, 빈손으로 길을 떠난 놋시, 어디든 갈 수 있는 발로 기어코 고향에 도착한 놋시…….

    앞뒤를 헤아리며 얼기설기 꿰맞춰 지던 놋시의 이야기는 잠꼬대 같은 혼란에 발을 붙잡힌 현재에서 멈췄다. 갈라진 목소리로 색색거리며 말을 잇던 놋시도 지쳐 멎어 버렸다.

    “데오기가 동굴에……. 저와 함께 왔습니다.”

    “…….”

    “어머니도, 괜찮다 말할 거예요…….”

    얕은 숨처럼 말을 이어 가던 놋시는 쉬겠다는 것처럼 멈추다 잠들었다. 테스는 잠든 몸을 끌어안고 돌처럼 굳었다. 그것이 바닥의 할 일이었고, 생각은 몸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다.

    놋시의 체취는 변해 있었다. 테스는 그립던 향기에 취해 사로잡혔던 처음에는 느끼지 못한 변화를 맡았다. 화려한 저택의 여유와 강렬한 태양으로 크게 핀 꽃이 부재하는 산속에서 놋시는 어린 시절의 냄새를 풍겼다.

    약초와 버섯과 길고 질긴 잎사귀의 향기. 새벽녘에 축축해졌다 정오에도 바짝 마르지 않는 깊은 산의 흙 내음이 오래된 습관처럼 놋시의 손끝 머리끝 입술 끝의 한숨에 돌아와 있다.

    혹시 그것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 그리워한 마음에 낯설지만 알 것 같은 무엇이 늘어 있을까.

    놋시의 잠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고 있었는데. 테스의 어깨가 문득 놀란 듯 들뜨다 눌렸다. 기억 속의 냄새와 영혼에 새겨진 체취를 따라가던 그가 갑자기 숨을 죽인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에 닿을락 말락 기울어져 있던 테스의 고개가 신중하게 깊어진다. 감긴 눈가를 스치고 연한 그림자를 파고든 높은 콧대가 섬세하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광대와 뺨의 굴곡을 따라 귓불에 닿았다.

    목덜미에 부딪힌 입술이 가볍게 열리고 소리 죽여 들이켠다. 물에 빠진 사람이 죽으려고 마시는 물처럼 밀어닥치는 체취에 옅게 섞인 다름을 찾아본다.

    흙과 풀이 묻어도 향기로운 놋시의 몸에서 혹시라도 아기의 냄새가 날까. 어리석고 무지한 희망에 잠깐이나마 잠겼던 테스가 잠시 후 자신을 욕하며 고개를 든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가려진 이마와 살이 내린 뺨이었다. 잠든 눈매에 접혀 든 새까만 속눈썹은 젖은 깃털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가벼워진 몸. 간신히 건강을 되찾았던 놋시의 몸이 한 줌의 뼈처럼 가벼워진 채 그의 품에 돌아왔다.

    놋시는 괜찮을 거라고, 죄는 모두 자신이 가져 괜찮을 거라고 믿었는데. 모두 그의 착각이었다. 자신을 속이고 놋시를 상처 준 거대한 착각.

    아기가 두려워 자신을 떠났냐 묻는 테스에게 놋시는 아니라고 답했다. 변명처럼 토해진 과거에서 테스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진실을 발라냈다.

    놋시를 떠나게 만든 말은 남에게 저질러진 테스의 죄였다. 다피벳이 말했다는 사로나의 죽음이 놋시를 사로잡은 덫이었다.

    무엇이든 따질 것도 없이 모두 테스의 잘못이었다. 놋시가 낯선 땅에서 혼자가 된 것도, 아기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속을 곪으며 괴로워한 것도, 수많은 죄를 견디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가버린 것도 모두 테스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불행하지 않은 게 고작이던 놋시에게 행복을 요구했었나? 테스는 확신하지 못했다. 자신과 같은 만족을 강요하진 않았었지만 행복을 찾던 스스로가 무너진 산처럼 놋시를 짓누른 것만 같다.

    아마도, 다른 이의 비극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놋시는 계속해서 괴로움을 참았을 것이다.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이것이 기회일 수도 있다는 교활한 속삭임이 테스를 유혹했다.

    그는 변명할 수 있었다. 거짓과 진실을 하나로 만들어 세상을 잠재우고 놋시를 위로했던 것처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놋시는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그 답이 궁금해 여기까지 왔다고 말해 놓고도 잊어버렸다는 듯, 그것조차 자신의 죄라는 듯 혼자 속에 품어 버렸다.

    테스가 그를 데려와 거짓 이름을 줬을 때도 그랬고 테스가 그를 지키지 못해 독을 마셨던 때도 그랬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놋시는 테스를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용서하지 못해 떠나 놓고도 그에게 화내지 못한다.

    테스는 찢겨진 옷을 입고 맨발에 흙을 묻힌 채 잠든 놋시를 옮겨 눕혔다. 기억 속의 시간처럼 나뭇가지 침대에 다가선 그가 낯선 가죽과 낡은 담요를 보고 멈칫하지만 놋시가 누울 곳은 이곳뿐이었다.

    그들의 비밀을 위해 테스가 모아 두던 좋은 것은 모두 사라져 있다. 어두운 그림자와 젖은 공기가 아무리 착각을 불러일으켜도 지금은 추억을 돌이킬 때가 아니다.

    털 빠진 가죽과 삶의 냄새가 묻은 담요는 데오기의 것일 테지. 놋시는 자리에 누운 뒤에도 굽힌 몸을 풀지 않았다. 테스는 배를 보호하듯 웅크린 팔과 접힌 다리를 억지로 펴지 않으며 그의 손과 발을 닦아 줬다.

    온천수에 적신 천으로 흙을 털고 온기를 더해 주던 테스의 손이 마른 발등과 창백한 발목을 쓰다듬었다. 탁한 그림자 속에서도 하얗게 드러난 피부 밑으로 잎맥처럼 푸른 핏줄이 비쳐 보였다.

    동굴에는 여름에도 축축하고 차가운 산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낡아도 깨끗한 것들로 놋시를 따듯하게 감싼 테스는 주위를 돌아보며 불씨를 찾아 왔다.

    작은 화로를 옮겨 놋시의 곁에 놔준 뒤에도 부족한 기분에 빈손이 움찔거린다. 모닥불을 피워야 할 것만 같다.

    그것을 핑계로 테스는 밖을 향했다. 마음은 놋시가 보이지 않는 것조차 싫지만 제대로 된 생각을 하려면 잠시라도 머리를 식혀야 한다.

    밖에선 몇 걸음 걸은 것만으로도 냉랭한 산의 어둠에 잠겨 들 수 있다. 작고 보잘것없던 노란 불빛은 어둠 속에서 유일한 온기로 번졌지만 테스는 뒤가 아닌 앞을 봤다.

    높게 자란 나무와 뾰족한 잎사귀들이 달빛 아래 새파랗게 빛나며 돌아온 죄인을 주시했다. 산은 그대로지만 사람의 자리는 그렇지 않다.

    사로나에 온 놋시는 무엇을 봤을까. 테스는 말로 나오지 못한 놋시의 마음을 짐작해 봤다.

    죄를 찾아왔다고. 사제와 만났다는 놋시의 말을 되새겨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제가 말해 준 답은, 놋시가 들었다는 사제의 가르침은 테스에게도 어렴풋이 전해졌지만 그것조차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테스는 그에게 묻지 않는 놋시의 무언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놋시는 죄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놋시는 간신히 화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죄를 당하고 보고 매일 거기에 짓눌리면서도 그의 동생은 다른 이를 위해서만 화낼 수 있었다. 죄인의 무게에 깔려 남을 위해서만 화낼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였을까? 죄를 위해 살해당한 고향의 이들을 위해서였을까?

    놋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테스의 광기가 놋시를 속이고, 야망에 휩쓸려 놋시를 잊고, 욕망에 취해 놋시를 슬프게 하던 때처럼. 그의 죄를 모두 알기 때문에 입을 다문 걸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부인하고 소망하겠지만 놋시의 깊은 마음은 분명 진실을 알았을 터였다.

    사로나의 모두가 죽더라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그를 주인은 진작 알고 있던 것이다.

    테스는 놋시의 괴로움을 보면서도 그의 죄가 후회되지 않았다. 동생의 살을 열고 몸을 섞고, 고향의 삶이 부서지고 태어난 나라가 사라져도 그는 후회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괴로운 것은 놋시가 괴롭기 때문이지 죄로 인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왕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키듯 고향을 버리고 죄를 자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놋시의 착한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깨닫지 않았을까. 그래서 벌을 주려고 그런 게 아닐까.

    테스는 그것이 답이라 믿었다. 오래전부터 소원했지만 정이 깊고 마음이 착해 그러지 못하던 놋시가 새로운 생명과 오래된 죄로 갈기갈기 찢기며 튕겨지듯 발가벗겨져서는, 죄의 길을 벗어나 서로를 벌하려 했다고.

    죄인에겐 벌이 따라야 하지만 테스를 벌할 수 있는 건 놋시뿐이었다. 자신에게 저지른 죄는 모두 다 용서하던 그도 남에게 저지른 죄는 용서할 수 없었겠지. 그래선 안 된다고 믿었겠지.

    별이 가득한 어둠은 아득하게 멀었다. 적막한 하늘 밑에서 테스는 생각을 이어 갔다. 그의 죄를 대신 번민하고 그의 죄를 대신 갚고 있는 놋시의 괴로움은 처음 알게 된 아픔이 아니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던 그도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남들의 시선을 막는 돌벽을 세우고 남들의 욕설을 금하는 황제의 말을 얻어도 진실은 언제나 놋시의 눈동자 안에 남아 있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무거웠던가. 테스가 만든 삶이 너무 사치스럽고 너무 고귀해 그랬던가 생각이 든 순간도 있었다. 아마도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다. 누구도 모르는 산의 동굴에서 둘뿐인 세상일 때조차 동생은 형의 죄를 걱정했고 자신을 탓했다.

    죄를 저지르고도 죄가 아니라 속이던 테스를 위해 어리던 놋시는 혼자 떠나려 했다. 낯설고 먼 곳이라도 괜찮다며 희생을 자처했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놋시가 그의 죄까지 짊어지고 무너진 걸 보면서도 테스는 답을 찾지 못했다. 찾지 않았다.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해 왔다.

    테스는 한때 자신이 산을 보고 자란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냉정한 세상의 위대함에 익숙해진 소년은 사람을 압도하는 죄의 크기에도 쓰러지지 않고 자라 청년이 됐다. 쓰러지지 않는 방법만 아는, 이겨 낼 줄만 아는 사람이 됐다.

    사실은 그 역시 다른 길을 몰라서였다.

    우리는 어떡해야 하나요? 가느다랗게 잠기던 놋시의 목소리에 낮은 속삭임이 더해져도 어둠을 뚫고 갈 곳이 없다. 어두운 숲과 높은 절벽은 답을 알려 주지 않고 살아가라 떠밀 뿐이다.

    그러니 끝은 바뀌지 못한다. 길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놋시는 새벽과 함께 깨어났다. 아스라한 공기가 눈을 가리는 것처럼 앞이 부옇게 번졌다. 시퍼런 기운에 작고 따스한 불빛이 가려진 동굴 안은 어두침침했다.

    잠기운이 사라지며 안개가 물러나듯 시야가 맑아졌다. 천천히 밝아진 허공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러자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름기 적은 산새의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나뭇가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놋시는 오래된 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긴 세월 인이 박여 머리의 구석을 차지한 동굴의 천장과 진흙처럼 습한 벽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손에 잡히는 가죽은 미끄러웠다. 동굴 안쪽의 어둠으로 향했던 고개가 새롭게 흘러든 바람과 거기에 실려 온 기운에 정신을 되찾는다. 순간순간 밝아지는 바깥에서 삶의 냄새가 풍겨 왔다.

    제자리로 돌아온 놋시의 눈은 자신을 봤다. 몸을 받쳐 주는 나뭇가지 침대도, 멍한 자신의 머리도 하나같이 열병의 시절이 떠오르는 반복이었다.

    씻은 기억이 없는데도 보송한 손발이나 벗겨진 상체를 감싼 낡은 담요도 같은 듯 느껴지지만 같지 않았다. 변해 있다.

    놋시가 덮은 담요는 데오기의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코를 묻으면 아이들의 냄새가 날 듯 생생한 기억이다. 그렇게 불붙듯 밀려든 며칠간의 일이 놋시를 일으켰다. 테스가 왔고, 자신을 안았던가? 아니, 그가 울었던가?

    그럴 리 없는 일인데도 놋시는 테스의 울음을 들은 것 같았다.

    불길한 꿈을 쫓아내며 일어선 놋시는 데오기가 준 옷가지를 찾아 입었다. 밖에 나서자 멀지 않은 곳에서 테스가 보였다. 여름의 풀이 길어진 동굴 바깥의 빈 터에서 고기를 굽는 뒷모습이 낯익다. 저 밑의 시내에서는 말이 물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비슷한 듯 달라진 현실이 놋시를 자각시키고 긴장시켰다. 모든 걸 얘기했던 것 같지만 다음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어째서인지 테스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고요한 숲과 익숙한 산이 혼란스러워졌다.

    사실은 테스의 얼굴을 보는 게 무서웠다. 상처 입은 눈을 마주칠 순간이 되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깼구나.”

    “…….”

    “덜 익은 냄새가 역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놓으려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

    테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래서 놋시도 대답할 수 있었다.

    놋시를 돌아본 테스는 깨어 있는 얼굴이었다. 한숨도 자지 않은 사람처럼 눈 밑이 어두웠지만 깊은 눈매의 그늘을 놋시가 착각했다는 듯 맑은 눈빛이다. 장식이 없는 단순한 옷차림으로 칼을 들고 앉은 그는 죽은 새를 다듬고 있던 것 같다.

    모닥불에 구워지고 있는 산새는 두 마리였다. 테스의 속도를 본다면 곧 네 마리가 될 것이다.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놋시는 입 열지 않았다. 그는 한 마리도 다 먹지 못할 테지만 테스는 고기를 낭비하지 않을 터였다.

    불가에 다가와 앉지 않고 동굴로 돌아간 놋시는 잠시 후 돌아와 잡내를 없애 주는 약초를 내밀었다. 돌아보지 않으며 모든 소리를 듣고 있던 테스는 내밀어진 손에서 그것을 받았다. 깃털이 뽑히고 머리와 발이 손질된 새의 속에 뿌리와 잎사귀가 들어차고 곧이어 구워졌다.

    이곳에서 사냥을 하는 것도,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다 처음인 것만 같다.

    풀밭에 앉은 놋시는 무릎을 껴안으며 모닥불에 떨어지는 기름방울을 봤다. 밝아 오는 아침이 등 뒤로 닿아 왔다. 더 이상 파랗지 않은 공기를 물들이며 타는 냄새와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 허기를 느낀 적 없는데도 입안에 침이 고이고, 바람에 밀려온 연기에 눈이 찌푸려졌다.

    “네가 보고 있어라.”

    “…….”

    놋시는 얼굴 볼 새도 없이 일어선 테스가 말을 살피러 간다 짐작했지만 커다란 어깨가 향한 곳은 동굴이었다. 테스는 나무바가지에 담긴 뜨거운 물과 놋시가 모아 놨던 열매 몇 개를 갖고 돌아왔다.

    껍질이 얇은 열매를 놋시가 벗기는 사이 구워진 고기에서 뼈와 살이 분리되고, 뜨거워져 있던 판판한 돌 위에 살코기만 남겨졌다. 이것이 테스가 준비한 놋시를 위한 식사였다.

    놋시는 새콤한 맛이 밴 손가락으로 껍질이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집어 먹었고 테스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테스는 놋시가 먹는 모습을 좋아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안식이었다. 욕심 없는 작은 입이 그가 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있는 줄 몰랐던 마음속의 균열이 메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조차 오늘은 충분하지 않았다. 언제나 찾아오는 만족으로도 테스의 허한 속은 들어차지 못했다. 아니면 이미 가득 차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후회와 다른 원통함이 조각난 돌처럼 그의 속에 쌓여 있다.

    테스는 갑갑한 목구멍을 뚫기 위해 뼈에 붙은 고기를 뜯었지만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잇새에서 깨물린 새의 뼈가 깨지며 입안의 살을 찔렀다. 핏방울을 핥는 혀끝이 초조하게 상처를 헤집는다.

    어젯밤 놋시는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놨다. 이젠 대답해 줄 차례였다.

    “어떻게 하고 싶으니.”

    “…….”

    “너는 그것만 말하면……. 아니. 그게 아니다.”

    고통에 일그러진 곧은 얼굴이 놋시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답을 요구해선 안 된다. 테스는 놋시의 앞에서 참회해야 했다. 선택을 가장한 몰이를 그만둘 때가 왔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불에서 타들어 가는 살점이 자신의 폐인 것처럼 테스의 숨이 막혔다.

    얼마나 오래 침묵했을까. 바닥을 향해 기울어져 있던 테스의 시야에 놋시의 손이 들어왔다. 재를 털어 내고 살만 발라 줬는데도 놋시의 손에는 검은 흔적이 묻었다.

    “고기를 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

    “남은 건 잎으로 묶어 둬야겠어요. 데오기에게 가져다주면 애들이 좋아할 테니까.”

    “…….”

    “애가 둘입니다. 기억나세요?”

    테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테스의 밑바닥에 남아 있던 한 조각 양심의 외면이 아니라 뼛속 깊은 무관심이 만든 결과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랬다. 지금 그의 머리를 채운 생각은 놋시와…….

    “아기를…….”

    “…….”

    “아기를 어떻게 하려고.”

    “예?”

    “……아기가 있다고 했어.”

    “…….”

    테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금세 사라진 새벽하늘보다 맑은 눈동자가 그를 마주 봤다. 죄가 아무리 쌓여도 더러워지지 않는 하얀 얼굴이 그에게 대답해 줬다.

    “아기가 있지요.”

    “…….”

    “저는 이 아기가 겪게 될 행복이 괴롭습니다. 그 죄도 괴롭고, 그 삶이 두려워요.”

    내가 그렇다고 말하는 목소리였다. 테스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나는.”

    “…….”

    “나는 네가 괴로운 게 괴롭다. 죄는 괴롭지 않아.”

    누군가 참았던 숨을 들이마셨다. 놋시는 눈물이 마른 눈으로 그를 쏘아봤고 테스는 진심을 털어놨다.

    몇 가닥 머리카락이 흐트러져도 내리쬐는 빛줄기와 다를 바 없어 금 가지 않은 곧고 올바른 형의 얼굴에서 놋시는 진실을 봤다.

    그렇다. 테스는 폐허가 된 부모의 집도 괴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에 괴로워할 남자라면 타게신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놋시가 모르는 테스의 죄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죽음에 이유가 있었고 배신에도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그들의 죄에는 이유가 있었던가? 결국 다 욕심으로 일으킨 죄로, 그것으로 쌓아 올린 삶이 아닌가?

    침묵은 길지 않았다. 입을 다물었을 뿐 그들도 조용하진 않았다. 놋시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와 테스의 어깨를 부풀리는 호흡이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와 바람이 만들어 낸 합창보다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테스는 줄곧 그를 보고 있었다. 놋시는 간신히 그를 마주 봤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무엇을요.”

    “제국을 떠나자면 그럴 거고 바다 너머로 가자면 그렇게 하자. 지금 이대로 산을 넘어서 사막으로 갈 수도 있지.”

    “…….”

    “황제는 체레오를 얻었다. 내게 명예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갚을 빚은 남지 않았어. 이대로 떠나면 아무도 모르게 살 수 있다.”

    놋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았다. 황제가 체레오를 얻은 것은 테스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바란 것은 그까짓 왕국이 아니라 타게신이었다.

    “그래도…….”

    놋시는 가슴이 답답했다. 쥐어짜듯 나왔던 목소리를 키우려 온 힘을 다했다.

    “그래도 진실이 바뀌지 않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나요.”

    “하지만 진실을 바꿀 수는 없어.”

    “…….”

    “숨길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너는 내 주인이고 나는 네 것이야. 이미 정해진 일이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되는 형제로 정해져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정해진 일은 많다. 이것도 그중 하나야. 우리는 떨어질 수 없어.”

    “…….”

    익숙하게 귓가를 울리는 단호한 목소리엔 낯선 불안이 섞여 있었다. 놋시는 테스의 초조함을 느꼈고 이해 못 할 절박함을 맡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화를 낼 때조차 테스는 막무가내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사실은, 테스의 말 또한 진실이었는데.

    “그래서 저는 어디를 가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

    “그래도 너는 나를 떠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괴로워도……. 괴로울수록, 나에게 분노해야 해. 그렇게, 내 곁에서 나를 미워하면 된다. 죄인을 미워하고 벌을 내려야지.”

    “…….”

    놋시는 천천히 알게 됐다. 테스는 억지를 쓰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그른 걸 알면서도 투정하는 아이처럼, 확신이 사라진 자리에 고집과 애원이 비집고 들어와 있다. 차라리 화를 내라며 화를 내는 그런 목소리였다.

    “너는 죄가 없어. 죄가 있는 건 나뿐이니까…….”

    “아녜요. 저도 죄가 있습니다.”

    놋시는 말하다 고개를 흔들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지 못하고 기다리고 바라고. 모두 그의 죄였다.

    바로 이쯤에서, 또는 조금 떨어진 땅 위에서. 어리던 놋시는 죄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잘못됐더라도 형을 더럽히는 것보다 그게 나았다.

    그러나 그는 금세 두려워졌고 테스의 품은 아늑했으며 나뭇가지 침대는 한 번도 불편한 적 없다.

    가족을 버리는 것과 더럽힌 것 중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놋시는 이제 와 차노륵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도 분명 수많은 밤을 버텼을 터였다.

    아기를 죽이지 못한 것처럼 생겨난 사랑을 품어 버린 것은 놋시였다. 살인하고 배신하며 사람의 법을 어겼다 해도 그는 테스를 욕할 수 없었다. 테스의 죄를 욕할 자격은 그에게 없는 딱 한 가지였다.

    누군가 대신 화내 주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욕을 먹고 발에 차이고서 폐허가 된 고향을 보면 마침내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물이 된 자신과 미쳐 버린 형을 경멸하고 증오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저는 어디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벌을 받고 있는, 살아 있는 한 계속되는 죄의 주인이니까요. 영원히 부서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혼자였다면 지금이야말로 떠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망상이고, 이제 그에게는 아기가 있다. 태어날 때까지는 죽지도 못하게 됐다. 태어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디를 가더라도 그들의 죄는 끝나지 못한다. 황제의 말보다 강한 생명의 태동이 죄의 결실로 맺혀 그의 삶에 뿌리를 내렸다.

    놋시는 자신이 아기를 원망하는지 아니면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애틋하면서도 끔찍한 생명에는 죄가 없지만 그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그러니 반가워해야 하는 걸까?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터지려고 해 입술을 깨문 놋시가 불현듯 가까워진 체취에 고개를 든다. 다가온 테스의 손이 그를 잡았다. 마디가 긴 손가락은 재가 묻고 더러워진 채로도 반듯한 생김을 잃지 못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자.”

    “…….”

    “행복은 필요 없어. 나도 벌을 받을 테니 나를 놓지 말아라. 계속, 같이 벌을 받자.”

    “죄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벌을 받나요.”

    “그러니 네가 벌을 줘야지.”

    “…….”

    “네가……. 버리는 한숨 하나가 내게는 열 개의 칼날 같다. 너도 알고 있지.”

    “…….”

    마디가 두드러지고 핏줄이 돋은 커다란 손이 메마른 나무처럼 놋시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마음고생에 말라 있는 테스의 손을 보며 놋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열이 몰린 눈이 무거워지고 코끝에서 차오른 답답함이 금방이라도 눈물로 쏟아지려 한다.

    놋시도 알았다. 어떻게 모를까.

    테스는 죄의 구덩이에서 주저앉은 그를 위해 세상 모든 좋은 것과 귀한 걸 가져다줬다. 똑같은 죄인이면서 탓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놋시에게 무엇도 하지 말라 감싸 줬다. 그는 놋시의 방패고 갑옷이었으며 아늑한 집이고 황홀한 꿈이었다.

    평생 그를 아프게 할 칼이 될 텐데도, 맨손으로 날을 잡고 피를 흘리면서도 테스는 놋시를 놓지 않고 있었다.

    놋시는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엉클어진 신음을 들었다.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자 피가 나고 코가 막혔다.

    그리고 테스는, 참고 기다리던 그의 손을 이번에는 막지 못한다.

    무릎 밑의 돌과 축축한 흙과 질기게 뭉친 풀잎이 주는 자잘한 불편들, 긴장으로 배어난 식은땀과 되살아나는 심장의 아픔까지도 소중한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테스는 놋시를 붙잡고 애원했다.

    “내가 약속한다. 이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

    “네가 원하면 다시는 무엇도 하지 않을 거다. 다시는…….”

    “그럴 수 없어요.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죄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

    “멈춘다고 사라지지 못해요. 어떤 죄는 필요하고, 어떤 죄는 지워지지 않고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테스의 손이 열 오른 뺨을 감싸 쥐자 놋시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떨리는 입가를 스친 엄지가 재를 묻히고 닦아 주듯 문지른다. 테스의 손가락이 한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 밑에서 놋시의 입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함께 죄지은 것입니다.”

    “…….”

    “그러니 앞으로는 지은 죄를 함께 괴로워하고 같이 견뎌야 합니다. 약속하세요. 더는 숨기지 않겠다고. 저를 속이지 않겠다고.”

    “그래.”

    “……그러다 보면 함께 죽을 날도 올 겁니다.”

    “그래.”

    “…….”

    “그게 내 소원이다.”

    닿지 않아도 닿은 것처럼 절실한 눈동자 밑에서 놋시는 아주 짧게 눈 감았다. 핏물처럼 새어 나온 눈물 몇 방울이 서늘한 아침 공기에 식어 갔다.

    왜 우냐고 묻는 테스에게 놋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많아졌다는 그에게 테스는 아기를 가져 그렇다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를…….”

    “아기가 울지 못해서 네가 대신 우는 거다.”

    “아닙니다.”

    “그래.”

    “…….”

    “사실은 나를 대신해 울고 있지. 내가, 눈물도 흘릴 줄 모르는 짐승이라서…….”

    그래서 놋시는 테스를 대신해 울었다. 죄의 구덩이를 무덤 삼아 영원한 슬픔으로 흙을 덮었다.

    그들은 행복하지 못할 테지만 헤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놋시는 힘이 부친 다리로도 테스의 손을 붙잡지 않고 산을 내려왔다. 그토록 오래 멀어져 지냈는데도 산길은 편안해져 있었다. 놋시는 아주 옛날부터 사방이 절벽이라도 다른 길을 원치 않았던 자신을 기억했다.

    이른 아침의 마을에는 드문드문 인기척이 보였다. 재가 남은 풍경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달라져 있지만 사람의 냄새는 세월이 흘러도 다를 게 없다.

    테스는 놋시에게 사제의 곁에서 자신을 기다리라 말했다. 아침에 도착할 이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직접 시내로 나가 마차와 사람을 불러올 기세였다.

    놋시는 데오기의 집에서 기다리겠다 말했다. 사제에게도 인사를 남길 테지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녀였다.

    데오기가 아이들과 함께 자리 잡은 집은 조용했다. 놋시를 데려갈 마차와 말이 나타날 때까지 마을의 고요는 깨지지 않을 것이다.

    반기며 나온 데오기에게 놋시는 테스가 잡은 산새 고기를 줬다. 잠기운이 남은 아이들이 뜯어 먹도록 하나를 잘라 놓는 데오기의 옆에서 놋시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보로새 나무가 남아 있는 차노륵의 집터에서 살아 달라 그녀에게 부탁했다. 부모의 재가 뿌려진 땅에 착한 사람들이 살아 주면 좋겠다고 머리 숙였다.

    네가 살면 되지 않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데오기는 놋시의 귀에 되돌아온 보석 달린 금붙이를 봤고 그것으로 테스의 방문을 눈치챈 것 같았다.

    놋시는 그녀에게 귀걸이를 줬다. 테스의 품에서 기다려 왔을 약속의 증표는 아주 잠시 살갗에 머무른 눈물처럼 주인을 떠났다. 조심스레 다가온 거친 손에 전해졌다. 이후에 그들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보낸다 해도 이보다 소중한 건 없을 터였다.

    마차의 뒤에 앉은 놋시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고향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태어나고 자라 10여 년을 보내고서도 미처 몰랐다. 산 밑 마을의 주변에는 그가 가보지 않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매일 지나다니던 날에도 신경 쓴 적 없었고 돌아오던 날에도 깨닫지 못했다. 전쟁의 흔적이 남아도 가려질 만큼 넉넉한 땅이었다.

    놋시가 그것을 모른 것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의 한숨이 깃든 산을 사랑했고 아버지의 웃음이 스러진 절벽을 사랑했다. 혼자가 되고서도 외로움을 모르고 숲의 동물처럼 살았던 것은 그래서였다.

    그리고 형이 그에게 돌아와서. 산 밑 마을에 홀로 남아 살아가는 놋시에게는 몇 달에 한 번 수도에서 찾아오는 형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앞에 아무리 넓은 들과 시내가 흘러도, 놋시는 절벽 아래 어두운 동굴을 선택한 지 오래였다. 어떤 아름다운 곳을 들어도 어떤 무서운 꿈을 꿔도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다.

    놋시의 눈앞에서 해가 떠 하얗게 빛나는 여름 하늘이 점점 커졌다. 산이 멀어져 가고 바람이 거세졌다. 검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가리던 천을 바람에 빼앗겨 휘날린다.

    이마를 간지럽히고 눈가를 어지럽게 쏟아지던 머리카락을 잡아 모으다가. 놋시는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말 위에서 소리 지르지 않아도 사람의 귀를 모으는 테스의 나직한 입술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초록 숲처럼 서늘하고 열을 품은 동굴처럼 깊숙한 테스의 눈동자가 놋시를 바라봤다. 눈물이 마를 수는 없지만, 그러고도 웃게 될 미래가 약속처럼 그 안을 떠돌고 있었다.

    『하베스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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