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시는 호가의 도움으로 손을 닦은 뒤 지오레에게 차를 따라 줬다. 지오레는 뜨거운 차 한 잔을 오래 마셨다. 골목의 소음과 바깥채를 오고 가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환한 자리였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바닥을 보던 기사의 고개는 한참 뒤에야 놋시를 향했다.
“나쁜 소릴 하려던 건 아닙니다. 저는 사실……. 그게, 타게신과 오래 알고 지낸 편인데, 그에게 마음을 둔 짝이 있다는 말을 뒤늦게 들었습니다. 시도르의 경비대장이 된 뒤에는 연락이 뜸했지만 그래도 편지는 주고받았었는데…….”
“예…….”
“그때도, 수도에 온다는 편지로 노리 님의 이름을 처음 들었죠. 아시겠지만 그는 결정을 함부로 내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놋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는 그렇다. 그는 누구의 눈에도 신중해 보이는 남자였다.
“평생의 주인을 쉽게 정할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놀랐고. 그리고 나서 노리 님을 처음 봤을 때 이해했거든요. 무척 아름다우시니까 그럴 만하다 생각했는데, 아마 제가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
“노리 님은 언제부터 그를 아셨나요? 아무래도 제 짐작보다 오래된 사이일 것 같습니다.”
“그……. 네. 어릴 때부터 얼굴을 봤습니다.”
“그러셨군요. 조금만 생각해도 그게 당연할 텐데. 그게…….”
하하. 지오레는 갑자기 웃었다. 답답해하던 표정이 사라진 편안한 웃음이었다.
“예전에. 수도의 기사단 숙소는 대우가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약을 얻기는 힘들었어요. 일부러 각박하게 구는 고참이 많았거든요.”
“…….”
“타게신은 그중에서도 곧잘 어디서 약을 만들어 어린애들을 도왔습니다. 한번 물어봤더니, 어머니가 약초사라는 걸 들었죠.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분위기라서 처음 듣는 소리였습니다.”
그랬을 것이다. 놋시도 알 것 같았다. 테스는 수도의 생활을 부모에게 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생이 있는 건 늘어난 뒤에 보이는 상처처럼 묻혔다. 친구들에게도 같았을 듯하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수도의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저희는 아직 어렸습니다.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죠. 의사는 유명한 사람이었고……. 팔다리가 멀쩡해 보였는데 무슨 일이지 싶어 나중에 캐물으니 동생이 화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
“이제 보니까 그게 거짓말이었나 싶어요. 노리 님을 말하기 부끄러워 동생 핑계를 댔나 봅니다.”
하하하. 지오레는 쾌활하고 소년 같은 웃음을 흩뿌렸다. 놋시는 단정히 내려와 있는 자신의 긴 소매와 그 밑에 숨은 손을 내려다봤다.
그가 언제 본 것일까? 어쩌면 방금 전 차를 따를 때? 아니면 그전에 손을 씻을 때? 또는 시끄럽게 물건을 치우며 약재 창고를 뒤질 때?
놋시는 다시 그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오레는 놋시의 외면을 수줍음으로 착각한 듯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타게신의 친구는 즐거운 얼굴로 돌아갔다. 그가 한 마지막 농담은 겨울 연회에 자신도 왕자를 수행하며 가게 될 테니 그때 꼭 인사를 받아 달라는 애원이었다. 농담에 웃지 못한 놋시는 지오레가 떠난 뒤에도 계속 가슴이 답답해 저녁 식사를 가볍게 넘겼다.
그날 밤 돌아온 테스에게 지오레의 방문을 얘기하던 놋시는 겨울 연회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다. 따지자면 오래전부터 하던 생각이었다.
“제가……. 장갑을 끼든가, 소매가 긴 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추울 것 같아서? 사람이 많아 정원에 모이지만 거긴 이곳의 안마당 같은 장소다. 외풍을 막아 주는 벽이 있고 천장도 막을 치니 따듯할 텐데.”
“그게 아니라…….”
주저하던 놋시가 말을 잇는다. 사실은 시도르에서도 신경 쓰였지만 그때는 말하지 못했다. 그때는 남들의 눈보다 테스가 더 두려웠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지금처럼 쉽게 말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손의 상처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요. 이미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왕을 만나는 자리인 만큼…….”
“…….”
누워 있던 테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따라 일어선 놋시의 왼손을 끌어가 어루만지는 얼굴이 조용하다. 조용하지만 단호하고, 침착했다. 꼭 그런 목소리가 놋시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숨기는 게 아니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숨기는 것이지. 혹시나 보일까 두려워하는 걸 숨긴다고 하는 거다.”
“…….”
마른 손목의 일그러진 피부가 더운 손바닥에 감싸였다. 서늘한 손가락이 감겨들고 곧 뜨거워진다. 두 개의 체온이 겹쳐져 서로를 도왔다.
“보이면 보라고 하자. 부끄러운 게 아니고 흉한 것도 아니야.”
“…….”
낡은 흉터에 닿아 온 테스의 입술은 감미로웠다. 놋시는 어린싹을 모으듯 조심스러운 형의 입술을 피하지 못한다. 부끄럽고 흉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자격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테스를 상처 주기 싫어서였다.
왕궁의 겨울 연회가 열리는 날은 에트와주에 첫눈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채 녹지 못한 순백으로 장식된 왕궁은 아름다웠다.
겨울 연회는 전통적으로 밤에 시작하지만 그것은 시내의 이야기다. 왕의 집에 모이는 시간은 이른 저녁이었다.
왕궁으로 향하는 좁고 넓은 골목길 수십 개가 구경꾼으로 가득 차올랐다. 짧은 석양과 함께 도착한 것은 귀족과 기사만이 아니다. 이름 높은 전사와 부유한 상인들이 끌고 온 말과 마차만으로도 구경거리였다.
놋시도 그중 하나였다. 테스는 오늘 말을 타지 않았다. 넓은 허리띠에도 항상 차고 다니던 큰 칼이 아니라 왕이 줬다는 단도가 걸려 있다. 세공된 손잡이가 화려해 저절로 눈길을 끌었다.
평소에 타지 않는 커다란 마차에는 놋시가 모르게 호화로운 장식이 늘어 있었다. 검게 칠한 표면 위로 정교한 쇠 장식이 모서리마다 붙은 그 위에 유리를 씌운 등불이 달렸다.
네 마리 검은 말이 이끄는 마차를 각자 말에 올라탄 타게신의 부하가 뒤따랐다. 이름을 써 붙이지도 않았는데 타게신을 외치는 목소리가 금세 따라붙었다. 시종을 겸하는 그들이 마차 발판을 내리는 소리마저 뒤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힐 정도였다.
테스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놋시는 망토의 모자를 내리지 않고서 주변을 살폈다. 왕궁의 넓은 길 위에서 하나둘 보이는 귀한 이들은 하나같이 번쩍였다. 두르고 온 보석의 반짝임이다.
놋시는 속으로 걱정했지만 왕궁의 연회라고 옷차림이 별날 필요는 없었다. 호가와 사테의 도움으로 준비된 그의 옷은 익숙한 형태였다.
수도의 유행에 맞춘 긴 윗옷과 통이 넓은 바지는 금으로 된 비늘 장식과 은구슬이 달렸다는 것 말고는 시도르의 정성 어린 옷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차와 말에서 내리는 귀족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다피벳의 말대로, 보석을 두르고 이름을 내밀면 그만인 자리였다.
“길이 험하니 발밑을 조심해라.”
“…….”
놋시의 걸음이 느렸던 걸까. 테스는 털이 매끄러운 망토 밑에서 그의 손을 찾아다 잡고 이끌었다.
놋시는 조심하던 것은 걸음이 아니라 신발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눈물방울처럼 생긴 진주를 달아 놔 신기도 두려웠던 그것으로 눈길을 걷게 되자 어디를 디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구경 온 이들의 소란과 말의 울음소리, 마차 바퀴와 눈에 젖은 길이 만들어 낸 잡음은 적지 않았다. 망토의 모자를 벗지 않고서 테스의 걸음을 뒤따라간 놋시가 음악을 듣게 된 것은 왕궁의 안뜰에 들어선 뒤였다. 여기까지 온 것은 놋시도 처음이다.
춥지 않게 벽을 두르고 너울거리는 비단으로 천장이 막혀 있는 그곳은 눈부신 유리와 금이 박힌 기둥의 세상이었다. 사람 열이 들어가도 자리가 남을 만한 거대한 청동화로가 불꽃의 춤을 주관하는 입구 너머로 꿈에서도 상상 못 한 화려함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놋시를 놀라게 한 것은 보석으로 별을 대신하고 밤하늘처럼 넓은 비단 천장도, 백 가지가 넘을 게 분명한 요리도 아니었다. 눈을 피하게 만들지만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이들이 그를 긴장시켰다.
체레오의 겨울 연회에 모인 알파 기사는 얼핏 봐도 스물이 넘었다. 놋시는 이름과 옷차림이 아닌 기세로 그들을 알아봤다. 빈 몸으로 서 있어도 전사임을 모를 수 없는 테스처럼, 눈빛이 형형하고 자세가 드높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둘 늘어났다.
타닥거리고 화로의 불꽃이 날리는 정원의 공기 속에서 꽃과 술과 향료의 향기가 저들끼리 어우러졌다. 그러니 이곳은 화살이 날아오고 칼날이 부딪히는 전쟁터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놋시는 날 선 한기를 느꼈다. 몇 겹의 옷과 털 망토에 감싸인 몸이 저절로 뒷목을 곧추세웠다.
겨울에 보기 힘든 귀한 꽃과 흘러넘치는 술과 값비싼 향료로도 숨겨지지 않는 강렬한 본능. 이곳에는 맹목적인 욕구와 버무려진 무언가가 타오르는 횃불보다 크게 불타고 있다.
놋시의 민감한 후각은 야만의 냄새를 맡았다. 동물적인 경쟁으로 탄생한 질투가 화려한 밤의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이 어떤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온 알파의 삶이 어떤지, 놋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테스의 동생으로 살면서 아주 모를 수는 없다.
한때 그는 본인의 열병을 고치러 사로나의 시내에서 값싼 책과 소문을 모았었다. 수도에 온 뒤에는 다피벳의 무심한 말과 병사들의 수다를 주워들으며 그보다 나은 지식이 늘었다. 대비는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오늘 왕궁의 겨울 연회에서 놋시는 태어나 처음으로 수십의 알파와 한 공간에 있게 됐다. 겨울의 찬 공기에 불꽃이 더해져 만든 화려하고 들뜬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장소가 아무리 넓어도 좁게 느껴지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날아와 꽂히는 것만 같은 압박이 놋시를 숨통을 조여 왔다.
“저쪽이다.”
“예.”
놋시의 대답은 뱉는 숨에 섞여 나온 무의미한 목소리다. 그는 손을 감싼 테스의 온기가 없었다면 자신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포에와 세조가 뒤를 따르다 옆으로 나서는 게 느껴졌지만 제대로 알아보긴 어려웠다.
정해진 자리에 앉혀지고 망토를 벗기는 손에 어깨를 세우고 왕의 등장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그런 뒤에야 놋시는 눈앞을 살필 수 있었다. 그의 육체는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 스스로의 자취를 지우던 것 같다.
왕궁의 겨울 연회는 주머니 속의 주머니인 도시의 구조와 흡사한 형식으로 차려졌다. 평소라면 낮은 담으로 테두리를 나눠 둘 뿐인 정원에 금은과 보석을 붙인 비단 장막이 높게 세워져 입구가 넓은 주머니를 만들면, 그 안에 모두의 자리가 정해지는 식이다.
리제크의 자리는 가장 안쪽, 왕궁으로 들어가는 계단 바로 앞이다.
규모의 차이가 엄청나지만 과거 놋시가 시도르에서 봤던 축하연도 이런 형식이었다. 높은 이의 자리가 모두를 내려다보며 있고 그 앞으로 잔치와 공연과 길이 갖춰진다.
타게신의 자리는 왕의 얼굴을 알아볼 만큼 가까운 자리였다. 그렇더라도 소통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놋시가 왕을 바라봤을 때 시야에 함께하는 건 둥글게 놓인 몇 개의 탁자와 거기 앉은 사람들뿐이다. 옷차림과 나이로 보면 권력이 큰 귀족들이었다.
자리의 모양도 달랐다. 왕이 내려다보는 주변에 크고 작은 원으로 놓인 탁자는 열 몇 개일 뿐이다. 나머지는 길게 놓인 자리에 줄을 맞춰 앉았다. 시도르의 성에서 병사를 앉혔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놋시의 앞에 놓인 음식은 먹음직하게 다채로웠다. 하나같이 큰 그릇에 조금씩 담겨 먹기 쉬웠고, 벽에 붙은 왕궁의 시종들이 끊임없이 다가와 음식을 추가하거나 치웠다. 순서가 정해져 있는 듯했다.
연회의 시작은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자리가 정리된 뒤 어디선가 흘러나오던 음악이 극적으로 바뀌며 리제크의 인사가 울려 퍼졌다.
한 해의 마무리를 축하하는 왕의 인사는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나왔고 길지 않았다. 수도를 뺏길 뻔했던, 왕의 목숨이 위험했던 수치스러운 사건이 빠져 있어서다.
놋시는 박수를 보내는 테스를 곁눈질하며 소리 없이 손을 움직였다. 기척을 느낀 듯 돌아본 테스의 얼굴은 평온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럴 것이다.
놋시의 눈에는 달랐다. 그가 느꼈던 살벌한 기운을 테스도 알고 있었다. 평온을 가장한 표정과 달리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속도를 조절하며 주변을 훑었다.
테스는 놋시에게 먹으라는 듯 몇 개의 접시를 밀어 줄 뿐 자신은 먹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놋시는 가만히 있는 것도 견디기 어려워 꾸며진 음식을 맛보려 했으나 옆에서 속삭인 포에 탓에 입맛을 모두 잃고 만다.
“노리 님, 이후에 왕에게 인사하시게 됩니다.”
“예?”
“지금 저쪽에서 일어난 쌍이 보이시죠? 올해 자식을 얻은 공작 부부입니다. 저들 다음에 왼편의 노부인이 갈 겁니다. 후작 부인이신데 이번 전쟁으로 자식을 잃었죠. 그리고……. 아마 그다음에 지금 자꾸 일어서는 남작이 끼어들 테고, 그다음이 타게신입니다.”
“…….”
“올해 새로 작위를 얻은 건 타게신이 유일하니까요.”
포에는 설명을 추가하듯 말을 더했지만 놋시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그가 이해한 것은 자신이 왕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자 무엇도 먹을 수 없게 됐다.
다행히도 자리에 따라온 포에와 세조는 음식을 잘 먹었다. 작은 목소리로 다른 이들은 어찌 됐냐 놋시가 묻자 그들은 자리가 따로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놋시는 포에의 여유로움이 테스를 따라 자주 왕궁에 와본 경험의 덕일지 궁금해졌다. 그의 긴장과 뭐라 표현하기 어렵게 경직된 마음을 알아본 것일까. 갑작스레 테스가 놋시에게 말했다.
“포에는 태어나길 귀족으로 태어났다.”
“…….”
“왕궁의 예법에 대해서라면 다피벳보다 그가 나을 거다.”
테스의 말에 눈이 이만해진 놋시가 돌아보자 포에는 다급히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 기침하며 나온 그의 변명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그는 몰락한 남작가의 마지막 후예 중 하나라고 했다.
“작위도 사라진 지 오랩니다. 못난 짓을 워낙 많이 해서요.”
“……작위가 사라질 수도 있군요.”
“예. 저희 집안이, 그런 방면으로 재주가 많습니다.”
놋시는 괴로운 과거일까 두려워 질문을 삼갔지만 포에는 대단하지 않은 화제인 양 가볍게 말을 이었다. 세조와 포에는 곧 가산을 탕진하고 작위마저 날려 버린 누군가에 대해 떠들었고 놋시가 듣기에 이야기의 반은 믿기지 않는 과장이었다.
포에의 집안을 망하게 한 것은 육촌 또는 사촌 형인 듯했다. 아마도 그 사람의 존재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우습고 황당한 농담을 듣던 놋시도 잠시나마 주변을 잊고 웃었던 것 같다. 덕분에 리제크의 앞에 섰을 때 엉성한 실수를 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제일 걱정한 것은 쏟아지는 시선을 가로질러 그 앞까지 걸어가는 것이었기도 하다.
체레오의 왕인 리제크는 숱 많은 다갈색 머리의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납치와 억압을 겪고도 건강해 보였다. 에체르와 닮은 생김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가 있었다.
긴장한 놋시가 느낄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리제크는 테스의 손을 잡고 다가간 그를 멀리서부터 지켜봤다. 건네진 말은 적었다. 타게신의 공을 새삼 칭찬한 왕은 놋시에게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그가 뱀 부족 출신의 약초사라는 걸 들었다는 인사였고, 둘째는 혼약의 의식에 대한 제안이었다.
“수도에 온 첫해에 고생이 많았군. 새해에는 혼약의 의식을 하고 평화를 즐길 수 있겠어.”
“……예,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말문이 막힌 놋시의 곁에서 테스가 대답했다. 놋시는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쫓아 말했고 왕은 만족한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반지가 여러 개인 그 손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는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에체르가 주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그보다 색이 짙었다.
놋시는 왕의 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이게 다냐고 되물을 만큼 짧은 대화를 보충하듯 묵직했다.
진주가 달린 놋시의 신발은 양탄자 위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눈이 더러워진 바깥과 다른 세상인 푹신한 바닥을 밟으며,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리에 돌아온 놋시가 테스에게 물었다.
“이게 전부인가요.”
“그래.”
테스의 간결한 대답에는 놋시만 들을 수 있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 이후에는 테스도 음식을 먹었다. 사람들은 그 뒤로도 하나둘씩 왕의 자리를 찾아갔지만 대부분 놋시와 마찬가지로 짧게 머물렀다.
놋시는 설마 이게 끝일까 싶어 긴장을 풀지 않았으나 접시를 여러 개 비운 테스가 그에게 음식을 먹이기 시작했다. 풍성한 음식을 앞두고 입을 다물고 손을 접었던 놋시도 입가에 다가온 과자와 보석처럼 조각된 과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테스는 모이를 먹듯 손에 들린 음식을 받아먹는 놋시에게 이후의 흐름을 알려 줬다.
“한 차례 인사가 끝나면 구경하기 쉽다. 저 밑의, 화로가 있는 주위로 광대와 가수가 나올 테지. 그걸 봐도 되고, 아니면 주변을 구경해도 된다.”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그것도 가능할 테지만, 사원을 보는 게 낫지. 왕족들은 안을 오가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적 없어. 어차피, 여기서 입구가 보이는 곳밖에 가지 못하고.”
“…….”
“하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겠다. 너를 보려 기다리던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
그의 말대로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놋시의 눈에 그들은 자신을 보러 온 이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타게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와 무릎을 굽혔다. 그들은 놋시를 바라보고 이름을 배워 갔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놋시는 서서히 날 선 감각을 잃었다. 그는 탁자 위의 도자기 접시처럼 가만히 앉아 테스를 지켜봤다.
왕궁의 겨울 연회는 풍성하고 화려한 장면으로 계속됐다. 나직한 목소리에서 느슨하게 흘러나오던 여유가 테스의 입가에도 머무른다. 그는 미소를 보이며 다가오는 이들을 맞이했다.
놋시는 왕에게 인사하러 기다리듯 타게신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을 봤다. 그는 또한 다가오지 않는 이들의 선망과 질시를 봤다. 때때로 다가온 후에도 숨기지 않는 그것들은 놋시의 상상보다도 강렬했다.
나라 안의 많은 이들이 타게신을 질투하고 있다. 현명하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는 결과였다.
체레오의 왕국에서 태어난 알파들은 하나같이 같은 운명이었다. 태생이 부유하고 고귀한 자들조차 세상이 정한 기준을 탈출할 수 없다. 모두 칼을 들었고 들지 못하면 실패자였다.
타고난 이름을 얻는 뛰어난 이들이 한 해에 수십 모이고 죽어 갔다. 살아남은 이들 중 기사가 되고 작위를 얻는 알파가 몇이나 될까. 이름 없는 전투와 전쟁터의 상흔을 품고도 부스러지는 이들이 그보다 많을 것이다.
왕을 구하고 도시를 구한 타게신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로 나올 때마다 놋시는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곤 했다. 테스의 훌륭함이 드높아질수록 그림자가 짙어졌다.
오래전부터 빛나던 이름 안에서 공과 죄가 함께 자라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함께 살게 된 놋시는 풍성하고 화려한 왕궁에서도 어긋남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테스가 걱정됐다. 신중하고 자신만만한, 모든 걸 해내는 타게신이 죄에 익숙해져 벌을 잊는 게 두려웠다.
놋시가 염려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었다. 질투와 욕망으로 존재를 평가하며 핥듯이 바라보는 이들이 놋시를 원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목적이 타게신의 성공과 보상인 것처럼, 그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죄의 벌을 받아도 잃을 게 없는 이였다.
놋시는 가끔씩 주고받는 귀한 이들의 인사를 견디며 자리를 지켰다. 포에는 타게신의 곁에 서 말을 얹었고 세조가 놋시의 옆에 붙어 그를 도왔다.
이름과 작위가, 상인의 역사와 부유함이 놋시의 귓가에서 음악과 함께 뒤섞여 들렸다. 탁자 위에는 끊이지 않는 물처럼 호사스러운 음식이 놓이고 치워졌다.
음악에 노래가 섞이고 광대의 장난과 웃음소리가 커져 갈 때쯤 방문이 줄었다. 이제 테스의 곁에 모인 것은 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닌 친분 있는 이들이었다.
기사와 귀족이 모여 중요한 대화를 하는 것 같아 자리를 떠야 할까 고민하던 놋시는 그때 마찬가지로 친분 있는 이의 부름을 받았다.
“노리 님, 에체르 님이 잠시 말씀을 나누자고 청하십니다.”
한 번쯤 얼굴을 본 것 같은 공주의 시종이 그에게 말했다. 놋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테스는 아는 듯했다. 가벼운 턱짓을 따라 일어선 세조가 놋시의 망토를 챙기며 그를 도왔다.
“정원에 가자고 하면 거절해라.”
“그래도 되나요?”
“내가 그랬다고 말하면 된다.”
자리에 앉아 있는 테스에게 손을 한 번 잡히고 주의 사항을 들은 뒤. 놋시는 남의 눈을 피해 도망치듯 시종의 뒤를 따랐다.
에체르는 왕족의 자리에 있었다. 넓은 계단이 산처럼 이어지다 갑작스레 나타난 평지였다.
왕이 앉은 뒤편에 만들어진 구역은 굳이 말하자면 왕족의, 짝이 없는 여자들을 위한 자리 같았다. 키가 높은 꽃과 화로가 어우러져 특히나 겨울 같지 않았다. 현란한 장식으로도 가려지지 못할 넓은 자리였지만 교묘한 조절이 더해져 밑에 있는 이들은 보기 어려운 장소였다.
놋시는 시종의 뒤를 따라 도착한 뒤 어디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말을 기다렸다.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한 부인도 있었고 놋시와 비슷한 연배도 몇 앉아 있었다. 모두 여자였고, 머리와 목과 손에 두른 보석으로 눈 코 입이 보이지 않을 만큼 번쩍거렸고, 하나같이 밝거나 짙은 갈색 머리였다.
어깨와 가슴을 훤히 드러낸 그녀들의 옷차림은 계절과 맞지 않았지만 왕궁의 장막 안은 지나치리만큼 더웠다. 놋시의 눈은 갈 곳을 찾지 못하며 바닥과 탁자를 방황했고 그때 에체르가 외쳤다.
“너는 왜 내게 인사를 오지 않지!”
다짜고짜 타박하는 그녀는 평소와 똑같았다. 옆에 다가가 달래는 시종의 목소리도 그랬다.
“노리 님은 이번이 처음이시잖아요. 길도 모르고, 에체르 님이 불러 주신 걸 감사히 여기고 있을 겁니다.”
“처음이었어? 타게신은 대체 뭘 하고 지낸 거야? 아무튼. 이리 와라! 인사를 올려야지.”
“……감사합니다.”
놋시는 조용히 말을 보탠 뒤 에체르의 손짓을 따라 다가갔다. 그녀의 뒤에 앉아 있던 부인은 리제크와 에체르의 어머니였다. 놋시는 젊은 왕과 유복자를 낳은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줄 몰랐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어두운 다홍색으로 위엄 있는 옷을 입은 그녀의 목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다. 에체르와는 사이좋은 모녀 같지만 리제크를 낳은 사람이라고 상상하기 어렵게 젊은 외모였다.
“네가 타게신의 짝인 노리구나. 약초사라며. 에체르가 이름을 말했었지.”
“어머니, 발이 아픈 걸 얘기해요!”
“의사에게 이미 보였잖니.”
“의사는 하나같이 멍청하다고요!”
에체르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했다. 시끄럽게 투덜거리는 그녀를 보며 주변의 여자들이 웃었다. 온몸의 보석이 내뿜는 영롱한 빛이 따라 흔들린다.
그들은 왕의 조카나 사촌 형제, 핏줄을 따지기엔 멀지만 친분이 높은 귀족의 여자들이었다. 에체르는 자신의 소개 덕에 모두 놋시의 이름을 이미 안다고 했다.
놋시는 혼자 떠오른 미소를 숨겼다. 처음에는 분명 그를 욕하며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공주가 타게신을 좋아했다는 건 수도의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그를 보며 눈짓하는 성숙한 여자들도 아는 듯하다. 고귀한 그녀들은 타게신의 짝인 것보다 약초사로서의 그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리제크를 구한 타게신의 공이 짧게 언급되고, 나머지는 의외로 진지한 질문들이 그에게 쏟아졌다. 귀한 약을 먹는 방법이나 겨울에 좋기로 소문난 약재에 대한 궁금증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입을 다물고 눈을 밑으로 향한 놋시가 그녀들의 필요에 답했다. 왕을 만났을 때처럼 긴장되진 않았지만 그래서 다른 생각이 나타났다. 다피벳이 떠올라 놋시의 마음이 복잡해진다.
다피벳이 왕궁의 약초사였을 텐데. 당연히 그 하나만은 아니었겠지만……. 왕과의 관계 때문에 그녀들마저 다피벳을 멀리했던 걸까? 에체르의 혐오 때문에 돌아선 걸까? 그래서 바깥에 약초상을 차리게 몰아낸 걸까?
놋시는 번잡한 상념을 억지로 끊어 냈다. 에체르의 기분을 맞춰 주려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놋시도 결국 지금 다피벳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타게신의 자리에 혼자 오진 못해서 안 보이는 일이라 짐작했었는데, 어쩌면 다른 이유로 얼굴을 보기 어려운 게 아닐까.
잠시 후 에체르가 놋시를 약과 병세와 향료의 가격까지 떠들던 무리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지루함을 못 견뎌 그를 부른 것 같았다. 왕의 자리보다도 높아 밑의 공연이나 사람들 무리가 훤히 보이는 곳이지만 매해 봤던 공주에게는 구경거리도 못 되는 것 같다.
“왕궁이 처음이라니 황당하구나! 내가 구경을 시켜 주지.”
“네. 왕궁의……. 사원이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거긴 재미없어. 사제가 모여 자기네만 아는 소릴 하고 있을 테고.”
내려다보이는 연회를 향해 입술을 삐죽거린 에체르가 손을 내밀자 시종이 다가와 겉옷을 입혀 준다. 혹시 밖을 나가나 싶어 놋시의 말이 급히 나갔다.
“정원은 가지 않는 게 좋다고 들었는데요.”
“누구에게? 아, 타게신이 그랬겠지.”
“그…….”
“거기선 술을 마시니까. 흥. 감히 나를 뭘로 보고?”
꽃과 넝쿨이 장식된 난간에 달려드는 그녀를 놋시가 자신도 모르게 쫓아갔다. 그만이 아니라 세조와 두 명의 왕궁 시종도 달려온 것 같다. 성급한 소녀가 까딱 잘못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노리! 저기 봐라. 타게신도 술을 마시고 있다!”
“…….”
그녀의 말이 옳았다. 연회의 분위기는 놋시가 올라온 잠깐 사이 크게 변했다. 왕이 내린 술을 담은 목 긴 유리병이 보석보다 더 반짝이며 탁자마다 놓여 있었다. 타게신의 손에도 그리고 주변의 손에도 술을 마시는 은잔이 들려 있는 것 같다.
연회란 원래 그런 법인데. 놋시는 에체르가 무엇에 화났는지 알 수 없어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저도 술은 마실 줄 압니다.”
“그까짓 걸 누가 못 마시겠어!”
“……뱀을 넣은 술도 있습니다. 몸에 좋다고 해요.”
“뭐?”
“독과 약은 동전의 양면이니까요. 사막에서는, 독을 품은 가재도 쓴다고…….”
놋시의 말에 놀란 에체르는 곧 타게신을 잊었다. 독뱀을 먹는 방법에 대해 캐묻던 그녀는 징그럽다 말하면서도 재밌어했다. 수선스럽게 맞장구치는 시종이 공주의 옷차림을 매만지는 사이 놋시는 몰래 밑을 내려다봤다.
지금 그의 앞에는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의 눈과 찌르는 시선이 버거워 보지 못하던 게 모두 보였다.
왕의 자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은 하나하나가 다 이름을 뜻할 것이다. 그중 하나가 타게신이었다. 기사와 귀족이 모인 그의 주변은 시끄럽지 않지만 비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거나 보지 않는 척하는 이들도 다른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이름 모를 귀족과 기사들도 적지 않았지만 모두 크지 못했다. 놋시가 보기에 타게신의 동그라미만큼 큰 것은 하나뿐이었다.
다음 왕이 될 맏이이자 알파 기사인 자케일. 오만한 성품과 괴상한 집착을 가졌다는 그의 주변은 눈부신 보석과 금은이 붙은 옷으로 얼굴이 가려질 만큼 요란했다. 몇이나 모였는지 세지 않더라도 한 명이 열 명의 부귀함을 가진 거라 알게 되는 무리였다.
사라지지 않지만 이유 모를 불안이 놋시를 자꾸 괴롭혔다. 여기엔 그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의 걱정은 분명 어리석은 헛짓일 테지만…….
사방을 살피던 놋시의 눈이 에체르의 부름에 겨우 돌려진다. 그녀는 그에게 왕궁의 그림과 조각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미술품에 대한 놋시의 지식은 보잘것없었다. 사제가 그리는 문양과 사로나 시내의 도자기 상인들의 장식, 관리들의 건물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돌기둥 정도가 이제껏 그가 미술품이라 느꼈던 전부다.
왕궁의 예술 작품은 그런 것들과 달랐다. 다른 용도가 전혀 없이 오로지 보여 주기만을 위해 그려진 그림과 조각들이 높고 넓은 복도에 제각각 자리를 차지했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고 자연의 조화보다 정교하다.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다. 여인의 얼굴이 꼭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그렇지?”
“정말 아름답습니다.”
분명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칭찬하면서도 놋시의 시선은 주변을 힐끗거렸다. 왕궁은 드넓었다. 연회가 열린 장소에서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처음 에체르가 왕궁 안으로 그를 이끌었을 때 놋시는 고생하며 거절했다. 아무리 오메가라도 남자인 자신이, 나이 어린 공주와 둘만 있는 건 좋지 않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공주의 시종이 둘이나 따라붙고 세조의 동행도 허락받은 뒤에야 걸음을 쫓을 수 있었다.
“재스, 화가의 이름이 뭐였지?”
“타비노사입니다.”
“그래. 아주 옛날 사람이야. 죽었는데도 그려 놓은 그림이 살아 있어서 이름이 아직도 불리는 거다. 정말 대단하지?”
“예. 정말 그렇습니다.”
에체르의 말에는 진심 어린 찬사가 들어 있었다. 놋시는 공주를 달리 봤다. 시간을 때우려는 놀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에게 그림을 보여 주려던 것 같다.
놋시의 시선은 조금 전과 달리 신중하게 그림을 살폈다. 그녀의 마음에 보답하듯 관심을 더한 그가 자신의 키보다 높고 사람 다섯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그림을 찬찬히 헤아려 본다.
그림 속 세상은 평화로웠다. 해가 넘치는 정원의 그늘진 정자에 검은 머리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과 얼굴이 특히 세밀히 묘사되어, 그린 사람의 정성을 고스란히 전해 왔다.
그림을 보는 그 곁에서 에체르는 갑자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이런 머리카락을 갖고 싶었어.”
“네?”
“이런 검은 머리카락. 해를 받아도 노랗게 변하지 않는, 검은 돌 같은 머리카락 말이야.”
“예…….”
왕궁의 재력이라면 머리 색을 염색하는 정도는 수월한 일인데. 의아해 돌아본 놋시는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쏘아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난감한 일이었다. 에체르 님의 머리도 아름답다 말해 봤자 통할 성격이 아니다.
“제 머리는 구불거려서, 그림의 여인만큼 좋지 못합니다.”
“흠. 그건 그래! 곱슬머리는 불편해. 사촌인 치앗세도 곱슬머리인데, 혼약식 날 머리를 다 펴겠다고 난리 치다…….”
높아지던 소녀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하지만 놋시는 등 돌린 채로도 그녀보다 먼저 접근을 느꼈다. 감각이 예민할 세조도 어느새 머리 방향을 바꿨고 눈치가 빠른 시종들도 공주의 옆에 바짝 붙는다.
여럿이 모여 있어도 황량하게 느껴지는 넓은 복도 저편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울리고, 점차 커지다 느려진다. 언제 어디서 쫓아왔는지 모를 자케일이 서넛의 부하를 거느리고 그들에게 다가와 섰다.
갑자기 왕자를 마주치게 된 놋시가 순간적으로 각오한 최악의 상황은 에체르와 자케일의 다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케일의 욕을 하는 에체르가 당사자 앞이라고 조용할 리 없다.
괜히 곁에 있다 들어선 안 될 일을 듣게 될 정도만 걱정했는데. 그의 걱정은 섣부르고 나태한 착각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쏘아붙이는 에체르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위태로운 시선이 놋시의 전신을 훑었다. 두텁고 장식이 많은 바짓단과 소매통이 넓고 길이가 긴 윗옷 밑으로 더러운 물이 묻는 것만 같다.
놋시는 전신을 휩쓰는 불쾌한 감각을 욕지기처럼 참고 삼켰다. 자케일은 깨진 술잔 같은 시선을 놋시의 턱과 목 어딘가의 한 점에 놓은 채 말했다. 그는 첫 마디로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타게신의 오메가로군. 우리는 이미 인사한 사이지.”
“……예. 그렇습니다.”
“그때도 알아봤지만……. 오메가는 오메가야. 남자치고는 괜찮은 생김이니까. 안 그런가?”
두런거리는 동의가 키 큰 그림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놋시는 비스듬히 손을 올렸다. 그의 어깨에 스치던 에체르의 향기가 뒤로 끌려가 멀어졌다. 겁먹은 숨을 참는 시종의 손 밑에 공주의 귀한 옷이 붙들렸다.
자케일은 취해 있었다. 하지만 시끄러운 공주를 입 다물게 한 것은 그의 너저분한 말이 아니다.
알파는 화내고 있었다. 뒤틀리고도 솟구칠 길이 넘치는 오만한 분노는 술 냄새보다 빠르고 진하게 주변을 점령했다. 존재만으로도 사방을 압박하는 그에게 금과 비단으로 장식된 왕궁의 남아도는 자리가 먹혀 버린다.
불빛이 닿지 않을 높은 천장도, 훤히 뚫린 퇴로도, 권력과 사랑을 태생부터 갖고 나온 공주도, 비딱한 입술 앞에서 뒤로 밀려나고 만다.
놋시는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을 들었고 허리춤에 손대는 세조를 시야 가장자리에서 봤다. 달려간 것은 공주의 시종 중 결단력 있는 한 명인 듯하고 세조는 최악을 가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누구도 나설 수 없다. 그을린 연기처럼 분노를 흘리는 알파의 앞에서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는 건 어린 소녀에 불과한 공주도, 실력이 합당한 병사도 아니다. 그것은 놋시다.
오메가의 광기 어린 열병을 알파만이 견디는 것처럼, 본능을 드러낸 알파의 도발을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오메가뿐이다.
“자케일 님, 무슨 일이신가요.”
“…….”
떨림을 억누르며 낮게 나간 그의 말에 대답 대신 칼날이 돌아왔다. 자케일은 겉보기로만 기사가 아니라고 증명하듯 화려한 칼집에서 긴 칼을 한 번에 꺼내 들었다.
왕자는 길게 흐르는 위협을 감추지 않았다. 다가온 걸음은 아슬아슬하다. 놋시에게 팔을 뻗으면 닿지 않지만 칼을 내밀면 닿을 거리다.
가볍게 흔들린 칼끝이 허공을 막으며 늘어뜨려진 놋시의 왼손으로 향한다. 은구슬이 자잘한 소매 단을 넌지시 찔러 온 그것이 스르륵 옷깃을 올리기 시작했다.
놋시는 모든 소리를 들었다. 흐느낌을 참는 소녀의 엉킨 호흡을, 바스락거리는 옷의 신음을, 바닥을 닳게 할 것처럼 제자리에서 들렸다 내려앉는 세조의 장화까지. 그는 모든 소리를 들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겨울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는 왕궁의 복도는 말이 없을 뿐 조용하지 않다. 터질 것처럼 가득 찬 침묵이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자케일의 칼이 놋시의 소매를 끌어 올릴 때마다 하나둘 서로 충돌하는 은구슬이 잡음을 냈다. 소맷자락 속에서 숨죽인 마른 팔이 피부에 닿을락 말락 움직이는 칼끝을 버티고 있다.
잠시 뒤 자잘한 은구슬이 부스스하게 시끄러워진다. 침묵을 가르는 과장된 감탄사가 칼날을 타고 흘러온 탓이다.
“하! 정말 흉측하군.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궁금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을 만큼.”
“…….”
자케일은 놋시의 흉터를 비웃고 있었다. 왕자의 무리가 내뱉은 거칠고 천박한 웃음이 따라붙으며 천장에 닿을 듯 높아졌다.
“타게신의 운도 전쟁터 밖에선 없나 보지. 기껏 혼자 구해 온 짝이 이 모양이라니.”
“모르죠, 또. 저런 게 좋은 사람도 있잖습니까.”
“그런 건 직접 하는 놈들이 듣는 소리지.”
구정물을 튀기는 소리처럼 지저분한 웃음이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을 더럽히며 울려 퍼졌다.
놋시는 벽을 따라 붙어 있는 촛대와 등불 밑에서 그들의 비웃음을 견뎠다. 팔꿈치까지 드러난 왼팔 위로 일그러진 피부가 다른 윤기를 냈다. 핏줄이 비쳐 보이게 깨끗한 손목 안쪽과 달리 손등부터 지져진 자국이 얽힌 나무뿌리처럼 마른 팔을 타고 올라 이어진다.
발각된 상처를 긁으며 움직인 칼끝은 재주 좋게 피를 내지 않았지만 흔적 없는 고통이 놋시를 마비시켰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마음의 상처란 거구나.
자케일은 낄낄대다 칼을 내렸다. 칼이 소매를 들추고 피부를 스치는 동안 놋시는 울거나 숨지 않았다. 생경한 괴로움은 아픔이 아닌 충격으로 번졌고 고개를 세울 수 있게 해줬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그는 자케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상을 알게 된 건 이상하지 않다. 놋시의 화상을 아는 사람은 수도에도 여럿이다. 이상한 것은 비밀을 밝혀낸 듯 굴고 있는 분노한 왕자의 만족이다.
혼약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을 뿐 놋시는 타게신의 정당한 짝으로 왕에게 인정받은 몸이었다. 자케일이 아무리 취했더라도 짝이 있는 오메가를 모욕하는 죄를 무시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 곁에는 공주가 있다. 그녀는 시끄러울 뿐이지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죄를 물을 수 있는 목격자인데…….
작아진 웃음으로 무리와 수군거리며 키득대던 자케일의 고개가 다시 그를 향했다. 혼란한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놋시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는 왕자의 칼이 돌로 된 바닥을 찢으려는 듯 휘저어진다. 끼기긱, 섬뜩한 소음과 함께 미소 지은 자케일이 말했다.
“다들, 이렇게 흉측한 오메가는 본 적이 없을걸. 그렇지 않나요, 고모님? 전신이 매끄럽고 피부가 꽃잎 같고, 향긋한 숨을 내쉬는 오메가에게는 있을 수 없는 끔찍한 흉터지 않나요?”
에체르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듯 큰 숨만 뱉었다. 지저분한 웃음이 여러 개 겹쳐질 뿐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
공포로 씨근덕거리는 에체르의 숨이 두어 번 나올 동안에도 자케일은 놋시를 보고 있었다. 한층 더 소름 끼치게 바닥을 긁은 그가 울음을 터트린 공주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타게신의 죄를 네가 받았구나. 그렇지? 진정한 알파라고 찬양받는 그의 죄를, 네가 다 받은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에 놋시의 심장이 처음으로 덜컥였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경멸이 아니라 질투다.
“아니면 같이 죄를 지었나? 흉측한 몸으로 그의 놏을 받았나?”
“…….”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겠지. 태어나긴 너도 깨끗한 몸이었을지 몰라…….”
놋시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빨라지고 거세져 세상을 삼킬 듯 커지는데도 자케일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한 걸음 더 다가온 알파의 체취가 매캐한 연기처럼, 악몽 속의 어둠처럼 놋시의 시야를 가렸다.
질투와 갈망이 썩으며 만들어진 기괴한 냄새는 동물의 사체가 만드는 단내와 닮아 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어야, 그런 벌을 받게 될까?”
“…….”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부모가 자식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쿵쿵거리던 놋시의 심장이 뚝 하고 멈춘다. 뚜둑 떨어져 나갔다. 코앞에 흩뿌려진 지독한 비웃음이 살을 파먹고, 커다래진 구멍으로 피를 토하는 심장이 추락했다.
이곳은 애당초 외진 장소가 아니었다. 놋시를 유혹하듯 다가왔던 왕자는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울리자마자 자리를 떴다. 몰려온 시종들이 보게 된 것은 자케일을 욕하며 울고 있는 에체르뿐이다.
“자케일이 미쳤어! 미쳐 버렸다고!”
“에체르 님,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그 녀석이 타게신의 짝을 모욕했다고! 어서 가서 불러와! 타게신의 손에 죽어 버리라지!”
“에체르 님, 흥분하지 마세요. 또 열이 나요. 어머님께 가서 얘기하세요. 다 알아서 해주실 거예요…….”
시종들은 악을 쓰는 소녀를 달래며 놋시를 모른 척했다. 왕실의 수치를 들킨 게 부끄러운 눈치였다. 한 번 두 번 닿아 오던 그녀들의 눈빛은 놋시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놋시는 비어 버린 머리에 생각을 욱여넣었다. 타게신의 짝을 왕자가 모욕한 게 알려진다면 결투가 일어날 것이다. 남의 눈 때문이라도 그렇게 될 터다. 저들은 그걸 알아 두려워하고 있다.
미래의 왕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사건과 어떤 시종이 엮이고 싶을까. 누구도 원흉이 된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놋시의 어깨가 감춰진다. 망토를 걸쳐 준 뒤 구걸을 막아서듯 놋시 앞에 선 세조가 물었다.
“노리 님. 어떻게 할까요.”
“…….”
그는 놋시에게 말로 사죄하지 않았다. 짓밟힌 비통함에 괴로워하는 남자를 보며 놋시는 입을 열었고, 다시 다물었다가, 유일한 이름을 불렀다.
“타게신에게……. 돌아갑시다.”
“…….”
“우선은 그렇게 해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 놋시의 텅 빈 마음은 다음을 몰랐다. 환한 복도를 걸어가는데도 눈앞이 어두워 머리가 욱신거렸다.
놋시는 생각했다. 적어도 하락의 실종에 대해서는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더러운 비웃음을 닮아 가려는 입술을 깨물고서, 망토를 고쳐 잡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연회는 끝나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테스는 그들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걸음에 다가온 테스가 그를 감싸 안았다.
테스의 손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놋시는 찰나의 큰 호흡을 느꼈다. 그에게 묻어 있는 자케일의 지저분한 숨을 테스도 맡았을 것이다.
다음의 일은 잘 알 수 없었다. 주변의 여럿이 일어섰고 몇은 벌써 자케일의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망토의 모자까지 올려 쓴 놋시는 좁아진 시야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고서도 옆에서 고개 숙이는 세조를 볼 수 있었고 그가 빠르게 보고하는 사태의 요약을 들을 수 있었다.
“에체르 공주가 ‘밝은 오후의 복도’로 노리 님을 데려갔습니다. 그림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케일이 나타나서는,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더군요. 노리 님에게 칼을 내밀고 위협하고, 공주를 울리고, 추잡한 소리를 하다 사람들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알파의 분노가 너무 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타게신의 무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진실에 흡사한 추측을 내놓았다. 포에는 왕자가 사라질 때부터 불안했다고 후회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놋시는 세조가 어떤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비통한 표정을 보면 말을 가릴 정신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가 본 것은 정말로 저것뿐이고 그렇게만 들린 모양이다. 진실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랬을 듯하다.
테스는 얼마 있지 않고 왕궁을 나왔다. 밖은 이미 새까만 밤이었다.
마차 안은 왕궁의 장막과 달리 써늘했다. 예상보다 빠른 출발이라 안을 덥히는 준비가 무시당한 탓이다.
놋시는 그 냉랭함이 좋았다. 왕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지, 아니면 왕은 지금 에체르를 상대하느라 바쁠지, 무의미한 잡념만 쫓던 그는 마차 안에서 처음으로 테스의 손을 살갗으로 느꼈다. 망토에 감싸인 채 품에 안겨 서 있느라 이제껏 손도 잡지 않고 있었다.
“그…….”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열었던 놋시는 또 하나를 깨닫는다. 그의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껏 그랬던 걸 스스로만 몰랐을 수도 있고, 남들의 눈이 사라지자 그제야 숨이 트이듯 껍질이 부서진 걸지도 모른다.
여전히 망토의 털에 파묻혀 있던 놋시의 고개가 숙어지고, 숨은 눈이 세게 감겼다 떠진다. 표정을 고치고서 눈을 든 그가 테스를 바라봤다. 하락에 대해, 왕자의 착각인지 예고인지 모를 말에 대해 알려야 한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자 생각이 멎어 버렸다. 놋시가 본 것은 익숙한 걱정과 애정뿐이다. 거기엔 불안과 의심 대신 계획이 들어 있었다.
알고 있었구나. 대상을 정의하기 어려운 확신이 놋시의 다친 심장을 뛰게 했다. 테스는 모두 알고 있던 것이다.
마차 안의 자리는 서로 마주 보고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테스는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는 핏줄이 비치고 마디가 두드러진 오른손과 흉터로 일그러진 피부의 왼손을 같이 잡힌 놋시는 언제쯤 그가 말해 줄지 기다렸다. 기다리며 생각했다.
메다로의 말대로 베단은 뒤쫓기 쉬운 자였다. 타게신을 질시하는 자들이 그들의 저택을 감시했을지도 모르고, 이상한 행동은 모두 쫓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이상하지 않은 것도 쫓아다녀 놋시의 매일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없더라도, 여관 거리에 등장한 타게신의 부하는 관심 있는 자의 시선을 이끌었을 터였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결과를 짐작하긴 쉬운 일이다.
저택에 돌아온 놋시는 호가의 도움이 아닌 테스의 손을 빌려 귀한 옷을 벗었다. 때 묻지 않은 값진 물건이지만 다시는 입지 못할 것 같았다.
테스의 손은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는 놋시를 계속 따라다녔다.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준 그는 벗은 몸을 침대에 눕히고 어둠을 함께 덮었다.
가리는 것 없이 안겨진 놋시는 테스의 심장을 들으며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장막 안의 더위와 전혀 다른 체온의 따듯함이 놋시의 피를 돌게 했다.
“그 사람은,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없습니다…….”
“…….”
한마디씩 이어진 말은 한 줄도 빼놓지 않았다. 놋시는 그림 속의 검은 머리 여인과 소매 단에서 흔들리던 은구슬을 이야기했고 썩은 내를 풍기던 알파의 체취를 얘기했다. 칼끝이 그의 피부를 훑었다 말했을 때는 등허리를 쓸어내리던 테스의 손도 잠시 멈췄던 것 같다.
모든 걸 말한 뒤 놋시는 자신이 기억을 전하는 게 아니라 버리고 맡겼다고 느꼈다. 그는 다시는 오늘의 경험을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돌로 깨 잊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을 정도였다.
놋시가 생각하기엔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분명 더러운 죄인인데, 어째서 죄를 탓하는 말을 듣기 싫어할까? 사람이라 그런 거라 보기엔 뭔가 달랐다. 차이가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어쩔 수 없이 되새기고 되새겨 본 그가 마침내 알아차린다.
자케일은 그를 욕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놋시의 팔을 지지며 피눈물을 삼켰을 어머니를 모욕했다.
놋시는 피비린내가 나도록 입안의 살을 깨물었다. 애초에 너희가 주인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기네 마음대로 만든 세상이 이따위가 아니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는 지금이라도 왕자를 찾아가 따지고 싶어졌다. 내가 죄인인 것을 어머니는 모른다, 그들은 자식을 벌주는 부모가 아니다, 그녀는 나를 보물처럼 보살폈다고…….
하지만 그는 죄인이었다. 짐승으로 태어난 놋시가 테스를 더럽히고 광기에 물들여 죄의 길을 걷게 한 것은 부정하지 못할 진실이었다.
에기가 안다면 정말 그런 벌을 내릴 만한 큰 죄인이다.
어느새 놋시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눈물로 뜨거워진 뺨을 서늘한 손이 어루만졌다. 테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놋시에게 말했다.
“내가 그를 죽일 것이다.”
“…….”
“그가 왕자가 아니기를 기다리는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먼저, 그의 손을 자를 수 있다.”
놋시는 테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타게신의 주위에 모여들던 강인한 어깨와 깊숙한 눈빛들은 제각각 계획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것만은 놋시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한낮에도 에트와주의 시내는 조용했다. 마지막 달의 축제로 밤새 놀던 이들이 지쳐 잠든 탓이다.
한적한 술집에 팔 하나가 없어 비어 있는 소매를 피로 물들인 사내가 나타나 앉았다. 얼굴이 퀭하고 수염이 맥없는 남자는 혼자 전쟁을 치른 듯 삭막한 모습이었다.
그 남자는 그들의 영웅인 타게신의 추잡한 비밀을 풀어 놓고서 듣는 귀를 구걸하기 시작했다.
처음 남자가 허전한 소매를 흔들며 술집의 바깥에 앉았을 때 주인은 개의치 않았다. 어제는 장사가 잘된 날이고 지금은 마지막 달의 축제 기간이다. 모두 너그러워지는 시기였다.
술집 주인은 일하는 꼬마를 시켜 남자에게 나쁘지 않은 맥주 한 잔과 딱딱하고 짭짤한 소금빵을 줬다. 먹는 둥 마는 둥 앉아 있던 남자는 오늘 밤에도 이어질 시내의 축제를 위해 사람들이 늘어나자 입을 열었다.
기회는 찾기 쉬웠다. 게르독의 공격 이후, 타게신의 이름은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빠진 적 없었다. 어제 왕궁의 연회에 타게신이 짝을 데려온 것도 모르는 이가 없다. 왕의 허락과 축복을 받았으니 새해에 혼약의 의식이 있겠다며 경사를 말하기 좋은 날이다.
남자는 타게신을 칭송하며 그의 가정을 미리 축복하는 활달한 이들에게 말을 붙였다.
“나도 타게신을 알지. 우리는 같은 고향 출신이거든.”
“그게 어디요?”
“사로나. 사로나가 타게신의 고향이지.”
“그래, 들어 본 것도 같군.”
그리고 남자는 타게신의 짝에 대해 얘기했다. 뱀 부족 출신의 모친을 닮아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그가 타게신의 친동생이라고.
모두가 단번에 믿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며 증거를 댔다.
그는 자신이 마자기오의 약초상에서 일하던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알렸고, 소년의 부모가 오메가인 것을 감추기 위해 자식의 몸을 태웠다고 말했다.
마자기오의 약초상은 산맥을 따라 자리 잡은 각박한 구석뿐만 아니라 평야로 이어지는 풍족한 곳에서도 계절을 따라 올 만큼 유명한 가게였다. 사로나가 어디인지 모르는 이들 중에도 마자기오의 약초상을 들어 본 사람은 있었다.
소년의 몸에 대해서는, 남은 알 수 없을 일이지만.
타게신의 오메가로 짐작되는 검은 머리 소년은 시장에서 자주 보이는 손님 중 하나였다. 눈이 맑고 조용한 그는 언제나 긴 소매 옷을 입었고, 한둘은 왼손의 일그러진 손등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김이 딴판이지 않나. 머리색도, 얼굴 생김도 전혀 다르다고?”
“형제가 꼭 닮으란 법이 있소? 나만 해도 동생과 닮은 구석이 없는걸!”
남자는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하락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게르독이 떠난 사로나에서 수도까지 오랜 시간 걸어왔다고 한다.
그는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 도움을 청하러 타게신을 찾았다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됐고, 그것을 숨기려는 자들 때문에 자신이 이 꼴이 됐다 말했다.
잘린 팔뚝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거나 혀를 찼다. 뼈와 오그라든 살을 엉성히 묶은 붕대에는 아직도 생피가 묻어 있었다.
하락은 분명 불쌍한 몰골이었지만 그것이 진실을 증명하진 못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짓이라 욕하기도 힘들다.
그가 미쳤다고 하는 이들은 많았다. 미친 사람이 꼭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사람들도 나왔다. 위대한 전사를 욕보이는 추악한 망언이라 욕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사매로노의 남매를 떠올렸다. 다음 왕이 될 자케일의 괴상한 집착이 아니더라도, 한때는 수도에서 제일 인기 좋은 연극이었다.
우습다고 넘기기에는 하락의 말이 절박했다.
진실이냐 따지기에는 그럴 수 없는 일이다.
명성 높은 이름과 음란한 죄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기 쉬운 화제였다.
팔을 잃은 그 남자는 그날 오후 늦게 에트와주의 시내에서 일어난 소동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는 입을 열고 떠들었을 뿐이지만 다양한 반응이 뒤엉키며 사건이 여럿이 됐다.
사방에서 일어난 패싸움을 진정시키던 경비대는 그 남자를 잡고도 데려가지 못했다. 타게신이 저이를 그렇게 했다는데, 설마 진짜라면 어떻게 정당한 판결을 내리겠냐고 막는 사람이 많았다.
분분한 대립을 해결한 것은 왕궁의 병사였다. 그들을 이끌고 온 왕족의 기사는 축제 기간의 소동을 탓하며 사태를 정리했다. 그들은 왕에게 데려가 바른 판결을 얻게 한다며 타게신을 욕하던 사로나 출신의 남자를 데려갔다.
진실인지 아닌지 의견이 빗발치며 축제 기간의 새로운 화제로 떠올랐다. 뛰어난 이는 찬양만 받을 수 없고, 누군가를 욕하기 위해 진실 여부를 따지지 않는 이도 많은 법이다.
술집에서 시작해 싸움과 욕설로 시내를 휩쓴 추악한 소문은 타게신의 저택에도 금세 닿았다.
일꾼들과 병사가 오가며 말을 듣고 자기네끼리 화냈지만 놋시는 몰랐다. 그는 간밤의 일로 마음이 뒤숭숭해 오후 늦게야 방을 나왔고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다.
호가도 놋시 앞에서 입을 다물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생각 없는 실수를 막기 위해 메다로는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다피벳이 있었다면 진작 알려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아직 겨울 연회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늘에서 눈도 오지 않고 밖에 서 있어도 뺨이 얼지 않는 겨울. 놋시는 이런 겨울이 처음이었다.
산맥의 칼바람을 맞으며 평생을 보냈던 놋시는 온화한 수도의 겨울이 어색했지만 최소한 버섯은 잘 자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없는 할 일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말려 둔 약재도 정리해야 하고, 부탁받은 맥꽃잎도 구해야 한다.
석양보다 먼저 돌아온 타게신이 말에서 내렸을 때, 맞으러 나온 사람들 중에는 그의 주인이 없었다. 테스는 놋시를 부르러 가는 호가를 말리고 자신 혼자서 그를 찾아갔다.
놋시는 안채의 뒷벽 구석에서 그늘을 먹고 자란 버섯을 모으고 있었다.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점차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태양 아래서 테스의 눈은 조용히 그를 지켜봤다.
하테가의 핏줄에는 작은 키가 없다. 놋시 역시 그렇다. 자라나길 작지 않고 팔다리가 길어 실제보다 커 보이는 편이다.
그것을 알아도 테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에 놋시는 항상 자신보다 작고 어린 동생이었다. 황갈색 돌벽 앞에서 구부려 앉은 뒷모습은 유독 작아 보였고 세지 않은 바람도 막아 주고 싶을 만큼 불안해 보였다.
오늘 하루,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을 놋시의 귀에 닿지 못하게 막아 둔 이유는, 그가 직접 말하기 위해서다.
“뭘 하고 있지.”
“…….”
놀란 짐승처럼 돌아본 놋시가 그를 알아본다. 짧고 작은 미소도 떠오르지 않지만 커다란 눈동자가 한층 선명해지듯 빛났다.
찰나의 반짝임이 지나간 뒤 표정을 감춘 얼굴이 테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놋시의 잠잠한 얼굴에 익숙하다. 그의 동생은 부모의 밑에 있던 어릴 적에도 어리광이 적고 떼를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테스도 그런 아이였고 따지자면 그들의 부모도 그랬다. 전사의 핏줄에서 사냥꾼으로 유명한 차노륵도, 차갑고 매서운 손으로 독버섯을 고르고 뱀독을 뽑던 에기도, 살갑고 다정하게 서로를 대하는 부모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삶이 차갑고 얼어붙은 산 밑에서 계속된 탓일지도 모른다. 항상 일해야 하는 생활이, 겨울이 긴 날씨가 그들에게 모든 낭비를 멀리하게 했을 뿐이지 타고나길 무뚝뚝하진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테스는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 시작은 그가 다른 걸 바라게 된 순간이었다. 하나뿐인 상대가 생긴 뒤부터 테스는 변했다.
테스는 놋시가 남에게 하듯 웃음을 감추지 말고, 눈물을 참지 않고, 내게는 말하고 떠들어 주길 희망하게 됐다. 그때부터 테스는 조금씩 자신을 바꿨다. 칼을 연습하듯 칭찬을 연습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다.
항상 잘되진 않았다. 사람은 변하기 어려운 동물이다.
그렇더라도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테스는 놋시가 그에게 어리광부리고 투정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아니라도 최소한 억울하고 슬픈 일은 이야기해 주길 바랐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서운한 것을 토로하길 소원했다. 오직 그에게만.
잘 듣는 재주가 부족한 만큼 기회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놋시는 소리 지르고 우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젯밤도 그랬다. 모욕을 당하고 죄를 들켰다 말하면서도 놋시의 목소리는 계속 작아졌다.
열병이 아닌 때 보기 힘든 눈물조차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의 품에서 가라앉았던 놋시는 자신이 우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놋시는 방울로 흘려야 할 눈물을 멈추지 않는 피처럼 흘리면서도 아프단 소리를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하락의 등장과 처참한 몰골을, 추문을 떠들어 만든 소동을 이야기하는 테스 앞에서 놋시의 입은 오래 멎어 있었다. 초점을 잃었던 눈은 황급히 돌아왔고 딱딱하게 굳은 어깨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를 지켰다.
괜찮냐고 묻는 그에게 놋시는 작게 대답했다.
“그렇게 된 일이군요.”
“그래.”
“……저는 괜찮습니다.”
테스는 놋시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놋시.”
“…….”
그는 밖에서 부른 지 오래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테스의 손에 잡혀 있는 마른 어깨는 속을 누르듯 버텼지만 청회색 눈동자는 곁눈질을 참지 못했다. 혹시나 누가 있을까, 그 이름을 듣는 귀가 있을까 두려워한 눈이 실수를 깨닫듯 질끈 감겼던 것도 같다.
오늘 테스는 모처럼 알맞은 시간에 저택에 돌아왔다.
그는 놋시와 저녁을 먹었다. 식사 내내 그들은 수도의 날씨와 아직 덧대기가 끝나지 않은 안채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슷하게 저녁을 먹고 있을 수도 안의 반 이상이 타게신의 소문을 떠들 테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았다.
놋시는 한두 마디 대답하며 간간이 그의 눈을 마주쳤다.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눌러 남긴 눈동자는 어젯밤처럼 입을 다물었고 테스의 참을성을 시험했다.
그는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선 메아리가 아닌 목소리가 필요하다.
저녁을 먹은 테스는 자신의 서재에서 포에와 메다로를 만나 일을 처리했다. 놋시는 오늘 모은 버섯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서재에 앉아서 귀 기울이던 테스는 놋시가 평소처럼 바깥채로 가지 않는 걸 눈치챘다. 버섯과 약재를 손질하면 항상 그곳에 가져다 놓는다는 걸 저택 안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테스 역시 평소보다 일찍 주인의 침실로 발을 옮겼다. 조금 이르게 언제나의 순서로 잘 준비를 한 그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놋시의 입은 꾹 다물려 있었다.
마지막 등잔불이 꺼질 때도, 테스의 손이 익숙하게 어깨를 안을 때도 놋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조금씩 깊어지며 무게를 더할 때도 흐릿한 신음만이 새어 나왔다.
크고 서늘한 손가락이 체온에 더워진 옷을 들추고 등허리를 더듬을 때. 그때서야 놋시의 몸이 떨려 왔다. 억눌린 감정이 더는 담겨 있을 수 없다며 뛰쳐나온다.
갈라진 목소리가 테스에게 애원했다. 안 된다고, 지금은 이러지 말자고.
테스는 달빛에 조각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털 담요를 들추며 일어선 어깨 밑으로 놋시의 얼굴이 흰빛에 드러났다. 침대 위 벽에 붙은 화로의 노란빛이 조금씩 닿으려 하지만 바깥의 차가운 달빛이 더 크다. 창백한 뺨과 얇은 턱밑으로 그늘을 뺏긴 목이 힘들게 침을 삼킨다.
“뭘 하지 말자고.”
“…….”
놋시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옷자락이 풀린 목덜미에 가로줄 무늬가 생겼다. 두드러진 쇄골이 짙게 그린 그림자를 눈으로 덧그리며 테스의 손이 움직였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 귀중한 장기를 품고도 뼈로 보호되지 못하는 배 위에서 커다란 손이 꿈틀거린다. 붙드는 손가락을 빠져나왔다. 살이 없는 아랫배를 누르며 내려간 손목이 바지를 끌어 내리고도 멈추지 않는다. 그 손이 흥분하지 못한 오메가의 성기와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뻗은 허벅지를 스치며 바지를 벗겼다.
벗기는 손을 말리던 놋시의 왼손이 윗옷을 붙잡고 힘을 준다. 손등의 흉터를 당기며 마디가 곤두서 부들거린다.
“놋시.”
“…….”
놋시의 눈은 어느새 감겨 있다. 테스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깨물리는 입술과 흔들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계속해 손을 움직였다.
테스의 손이 사이가 허전한 허벅지를 모으며 무릎을 들고, 걸려 있던 바지를 잡초처럼 뽑아내자 긴 다리가 고스란히 벗겨진다. 한기를 느끼듯 소름 돋는 피부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손이 허벅지를 잡고 일으켰다. 기울어진 경사를 따라 추락하듯 다가간 손가락이 벌려진 살결 틈새 그림자에 닿았다.
“흐읍…….”
“이러지 말자고?”
달빛에 드러났던 놋시의 얼굴 위로 다른 숨이 겹쳐진다. 입술이 닿지 않고도 둘의 호흡이 한데서 섞인다. 모로 누워 있는 테스의 굴곡진 긴 팔이 크게 접히며 벗은 하체를 벌리고, 숨듯이 서로를 찾는 놋시의 허벅지가 붙잡혀 무엇도 감추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네 몸을 만지지 말고 입도 맞추지 말라고.”
“…….”
“왜지.”
“…….”
놋시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말을 하지 않았다. 테스는 바닥을 짚고 있던 왼팔을 기울여 허공에서 흩어지던 숨을 선이 얇은 턱에 묻혔다. 서늘한 입술이 연달아 입을 맞춘다. 자꾸 깨물려 뜨거워진 입술을 달래듯 혀가 스치지만 속을 탐하지 않고 뺨을 지났다.
닿았다 떨어지고 가볍게 문지르는 테스의 입술이 놋시의 목덜미와 귓가를 데워 놓는 사이에도 그의 손은 쉬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의 연한 살과 흥분하지 못한 성기를 만지던 테스의 오른손이 벗은 배를 타고 올라와 옷을 들췄다. 굳어 있는 주먹을 밀치며 심장을 찾듯 가슴 위를 헤맨다.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게 쓰다듬는다.
그의 입술도, 손도, 단단한 뼈와 근육이 힘을 품은 육체도, 무엇 하나 놋시를 덮치지 않았다. 무게를 더하지 않고 파고들지 않는다. 빨라진 박동과 짧아진 호흡을 말리듯 느긋하고 부드러운 애무가 영원히 계속할 수 있는 것처럼 이어졌다.
테스는 같은 행동을 매번 다르게 반복했다. 그에게는 사실이 그랬다. 수천 번쯤 했을 입맞춤도 항상 새롭게 느껴졌다.
그는 조금씩 풀려나는 놋시를 느꼈다. 죄악감과 수치와 자책에 사로잡혀 있던 몸이 미지근한 물에 녹게 된 얼어붙은 땅처럼 서서히 깨어났다.
그들은 어느새 하나가 된 것처럼 몸을 겹치고 있었다. 테스는 거추장스럽던 옷을 벗기고 벗었다. 그의 서늘한 손가락과 넓은 등이 모두 더워져 있다. 열을 품은 육체가 담요를 대신하듯 놋시를 가렸다.
어깨에 이를 대고 살을 빨며 테스의 고개가 숙어진다. 위에서 밑으로 흐른 움직임에 넓은 등이 올라서고 허리가 당겨졌다.
그러자 놋시의 몸이 물러서려 한다. 밀어 넣은 무릎과 허벅지에 눌린 하체가 떠들렸다 가라앉는다.
테스는 우연한 자극에 등줄기를 굳혔다. 그의 성기는 이미 끝을 적셨고 달군 쇠처럼 뜨겁다. 작은 마찰도 소중해 더 하라며 몸통을 비벼 댄다.
어깨를 가볍게 빨던 입술이 황급히 떨어지고 세게 입을 다문다. 어금니를 세게 물고 욕망을 삼킨 테스가 일부러 느리게 고개를 들고.
그는 가리는 것 없이 드러난 놋시를 내려다보며 크게 두 번 가슴을 들썩였다. 보라는 것처럼 선명한 예고에 화답하듯 놋시의 눈이 깜박였다. 흐릿하고 가늘게 떠졌던 시선이 머무르고, 말하려는 듯 입이 열리지만 소리가 없다.
테스의 손 하나가 습해진 살결을 떼어 내듯 놋시의 허벅지를 잡았다. 잡아 들고 움직이며 숨을 뱉고 떨림을 참는다. 막힘없는 접촉으로 자세가 변하며 비밀이 공유된다.
“아, 흣…….”
놋시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입에서 나온 소리를 뒤따르듯 전신이 숨을 내쉰다. 그의 올라선 무릎 사이로 나무 밑동 같은 허리가 조심스레 가라앉았다. 내밀한 살결이 겹치며 다문 입에서 숨이 터지듯 육체가 맞춰진다.
미지근한 흥분에 부풀던 놋시의 성기와 단단한 몸통을 세우고 아랫배에 올라붙은 테스의 성기가 포개졌다. 닿고 문지르며 열기를 옮기고 고조된다. 갈 곳을 주지 않으며 제자리에서 흥분을 북돋는다.
살을 열고 몸을 섞지 않아도 이미 한 몸이라는 것처럼, 벌거벗은 두 개의 육체가 심장을 겹치고 욕망을 합쳤다.
맞닿은 가슴과 배를 지그시 누르면서, 벌려진 다리처럼 버려진 손목을 눌러 잡고서, 테스가 말한다.
“이것을 하지 말자고.”
“…….”
놋시는 더 이상 테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청회색 눈동자는 새까맣게 침몰해 있다. 깨진 도자기처럼 하얗게 빛난 놋시의 흰자위는 달빛보다 하얗다.
물기 없이 바짝 마른 눈동자는 이제 떨리지 않고, 입술을 열어 말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알아서?”
“…….”
“이렇게 벗은 몸을 나누는 우리가, 같은 부모를 둔 형제인 걸 누군가 알아서?”
“그…….”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짝을 맺었지.”
“…….”
“그건 이미 정해졌다. 앞으로 뭘 해도 달라지지 못해.”
테스는 뚜렷한 목소리로 진실을 말했다.
그들은 이미 몸을 섞었고 속을 엮었다. 마음을 밝히고 열병을 치렀다. 진정한 짝이었다. 이제 와 남들이 알아도, 몰라도, 또는 욕하며 그들을 갈라놓아도 소용없었다. 어떤 것도 돌이켜지지 않는다. 정해진 미래를 얻은 지 오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세상이 없어져도, 타게신의 하나뿐인 주인은 그의 동생인 놋시다.
놋시도 그것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테스도 안다. 그의 동생은 단지, 그와 다를 뿐이다. 놋시는 수치를 알고 죄를 아는 올바른 존재였고 밝혀진 비밀에 괴로울 때조차 남 탓을 하지 못하는 착한 아이였다.
그러니 테스가 그의 죄를 먹어야 했다. 놋시의 죄를 먹고 삼켜 그의 배 속에 계속해 씨를 뿌리고, 독버섯처럼 자라나 땅을 차지하고 검은 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박아 헤어날 수 없도록 엮어야 한다. 산사태에도 무너지지 않고 지진에도 갈라지지 못하게.
“이제 와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세상 모두가 알아도, 몰라도, 우리와는 상관없다.”
“…….”
“너는 이미 나를 가졌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하지만…….”
후들거리는 목소리가 피딱지처럼 매달렸다. 그것은 죄라고, 타게신의 이름이 더러워졌다고 단언한다. 놋시는 자신이 죽지 않은 탓이라고 갈라진 숨으로 그에게 속죄했다. 모두 자기 잘못이라며 괴로워했다.
커다란 눈에 핏방울처럼 맺힌 눈물이 흐르는데도 바짝 마른 목소리는 균열을 고치지 못하고, 절벽의 가장자리로 떨어져 갔다.
테스는 눈물이 번진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그의 욕심에 붙들리고도 동생은 그를 걱정하고 있다. 추악한 욕구를 들이대는 알파의 성기 밑에서 오메가의 속을 보이고도 도망칠 줄 모른다.
“흐읍, 읏…….”
울음을 막는 입맞춤에 놋시의 말이 먹혔다. 거칠어진 혀가 드세게 파고들어 입안을 찌르고 입술을 간지럽힌다. 후으, 하아, 참을성을 잃은 테스의 호흡이 젖은 뺨에 쏟아지고, 입을 떼지 못하며 뜨거운 고백이 되풀이됐다.
“타게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거다.”
“그렇지 않…….”
놋시의 말은 계속 끊겼다. 누운 등 밑으로 파고든 테스의 왼손이 마른 가슴을 조이며 서로를 밀착시킨다. 덜덜 떨리는 허리를 더듬어 내려간 오른손이 둥근 살을 움켜쥐고 연다. 살결 틈새를 벌리며 헤집던 성기가 길을 찾고 머리를 박았다.
“헉, 으읏!”
“놋시…….”
“흐읍, 흐윽…….”
마르지 않는 허기를 채워 주면서도 끝없는 갈망을 샘솟게 하는 주인의 속에 몸을 묻고서, 성급히 이뤄진 결합에 버거워하는 어깨를 놓지 않으며, 테스가 물었다. 세상이 다 아는 게 두렵냐고.
죄는 변하지 못합니다. 굳건히 돌아온 놋시의 대답에 살가운 웃음을 흘리며 테스가 되묻는다.
그들의 죄가 아니게 되면, 그때는 괜찮겠냐고.
놋시는 그날 하루 종일 시간에 떠밀려 다녔다. 뒤숭숭하고 어수선한 기분이 한순간 허무해지다 다음 순간 빼곡해졌다. 그의 마음과 머리는 아침부터 그랬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게 잡초가 가득한 벌판이었다.
자케일의 말은 망상으로 치부될 내용이다. 그런 것은 협박이라 부르기 어렵다. 놋시도 그가 자신을 협박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왕자는 그를 모욕했지만 그뿐이었다. 조건도 목표도 남지 않은 대화는, 대화라고 부르기도 힘든 일방적인 비웃음으로 끝났다.
그는 이것이 밀어닥칠 위험의 전조인지 아니면 남들이 지겨워하는 오래된 집착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의 상황은 남들과 달랐지만, 다른 것은 그가 진정한 죄인인 것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놋시와 상관없이 저물어 가던 하루의 끝이 오기도 전에, 일찍 돌아온 테스는 놋시에게 하락의 귀환과 폭로를 알려 줬다.
놋시는 그에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없어서였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을 더하는 테스의 곁에서 놋시는 음식을 먹었다. 어두워진 하늘 밑에서 불을 켜는 저택을 돌아보고 주인의 침실에 앉았다.
놋시의 머리는 먼지처럼 떠다녔다. 하락의 폭로에 발각된 그들의 죄가 어떻게 될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저택의 이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할지.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진실이 모든 곳에 손을 뻗쳤다. 벗어나지 못하니 방황하게 된다. 밀어닥치는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누가 하락의 말을 믿을까? 사로나의 사람을 찾으면 금세 밝혀질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시내의 오메가 마님이 살아 있다면 놋시의 검은 머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아니라도 수많은 사람이 두건을 두르고 몸을 가린 소년을 알고 있었다.
누가 하락의 말을 의심할까? 놋시의 검은 머리와 청회색 눈동자는 테스의 금발과 전혀 다르다. 숲속의 늪처럼 깊은 형의 눈매와 달리 크고 창백한 그의 눈을 수도의 시내에서도 본 사람이 여럿이다.
형제가 짝을 맺다니. 타게신의 훌륭함과 어울리지 않는 추문이라고, 허황된 거짓이라 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변치 않는다. 그들은 피로 이어진 친형제로 죄를 저질렀다. 왕자의 질투와 하락의 고발이 함께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지 모를 일이다.
불확실한 미래는 모호한 덩어리로 놋시의 숨을 막았다. 타게신의 부하들은 부정하겠지만 바깥의 이들은 다르다. 테스의 성공을 시기하는 자들이, 놋시를 보고 그의 운명을 부러워한 자들이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저택 안의 이들도, 바로 곁에서 지켜본 이들도 신뢰할 수 없다. 어딘가 이상했다며 진실을 추측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는 추측이 아니다. 들려오는 말에 마음이 쏠리고 믿음이 자라날 수도 있다.
놋시는 세상과 괴리되어 저무는 해를 보내고 밤에 도착했다. 테스의 당당함을 따라 하듯 모른 체하는 겉과 달리 속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게 없는 순서로 테스와 한 침대에 누우면서도 그의 마음은 한곳에 있지 않았다. 어디에도 붙지 못해 날아다니는 먼지 같고 흩뿌려진 모래 같았다. 들쑤셔진 생각은 물이 떨어져 뭉치기도 하고 볕에 말라 부서지기도 했다.
테스의 손이 그를 만지고 건조한 입술이 닿아 왔을 때도 그랬다. 서늘한 손이 옷자락을 들치며 더워지고, 더워진 손가락이 더 뜨거운 속에서 서늘하게 느껴질 미래를 예고했을 때. 그때조차 놋시의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다.
익숙한 애무와 접촉이 마비된 심신을 자극하며 그의 주의를 끌었을 때, 수면 아래 소용돌이처럼 혼란스럽던 상념을 뚫고 불쑥 솟는 확신은 두 가지였다. 이래선 안 된다는 두려움과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막무가내로 그를 일으켰다.
놋시는 갈라진 목소리로 테스에게 애원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진실을 욕하는 이가 나타났는데. 세상 사람이 다 알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타게신의 이름이 추잡한 말로 더러워지고 있는데……. 지금 그들이 이래선 안 된다고, 지금은 하지 말자고 더듬거리는 스스로의 말이 자신의 귀에도 애처로웠다.
하지만 테스의 입술은 떠나지 않았고 손도 멀어지지 않았다. 테스는 그에게만 보여 주는 미소를 피부에 새기며 단단한 전신을 겹쳐 왔다. 하지 말자는 걸 계속하며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 왔다.
이 밤은 뭔가 달랐다. 놋시는 변화를 느꼈다. 테스는 시도르의 방에서처럼 그를 곤란케 하지 않았다. 수도에 온 뒤로 테스는 놋시가 싫다 말하게 만든 적 없다. 지금도 그렇다.
지금은 이래선 안 된다고, 사실은 영원히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놋시는 조금씩 고집을 빼앗겼다. 그의 몸을 벗기고 만지며 정성 들이고 마음을 쏟는 육체 밑에서 조금씩 허물어졌다. 부서진다고 느낀 것은 껍질뿐이고 만져지는 곳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았다.
테스의 전신이 고스란히 닿아 와 욕망을 전하고 흥분을 키우는 걸 느끼면서도 놋시는 밀어내지 못했다. 어깨를 쓰다듬고 가슴을 더듬는 손을, 허리를 간지럽히고 더딘 성기를 자극하는 접촉을 싫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삽입이 일어나 결합이 이뤄진 순간. 완전히 젖지 못하고도 열린 몸 안으로 압박하는 열기가 속을 녹이며 들어찬 순간, 테스는 이상한 말을 했다. 너무나 이상해 벅찬 침입에 휩쓸리던 놋시의 정신이 번쩍 돌아올 정도였다.
속을 차지하고도 모자라다는 가슴과 배를 하나처럼 녹여 붙이고서. 바짝 다가온 테스의 입술이 놋시에게 물었다. 그들의 죄가 아니게 되면, 그때는 괜찮겠냐고.
테스는 거칠고 격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럴 것처럼 침입하고도 한참 동안 놋시를 기다려 줬다.
“흐읏, 으읍, 흣…….”
놋시는 억눌린 숨을 흘리며 생각했다. 테스가 기다리는 게 무엇일까. 그의 몸 안에서 자리 잡는 성기가 움직일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놋시의 대답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지금의 놋시에게 벅찬 현실이었다. 그의 몸을 꿰뚫은 열기도, 이해되지 않는 질문도,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화끈거리고 무거워진 배로 힘들게 숨 쉬는 게 고작인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해야 한다니.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무엇도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다. 놋시는 어지러운 머리와 더 어지러운 육체를 힘겹게 헤아렸다. 멈춘 채로도 열을 모으는 몸속의 성기 말고도 자극이 너무 많았다. 밀착된 무게와 체온만으로 충분한 일인데 테스의 손은 지금도 쉬질 않았다.
놋시의 등을 둘러 안은 테스의 왼팔은 어느새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가슴을 건드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뻗어 유두를 부풀리듯 끝을 비비자 어디선가 높은 숨이 샜다.
테스의 오른손은 그전부터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벌어져 눌린 놋시의 다리는 굵은 허리에 감기지 못하고 혼자 허공에 기울어져 있다. 커다란 손이 안타깝다는 것처럼 당겨진 근육을 달래고 적은 살을 어루만졌다.
바닥에 버려져 있던 팔을 들어 테스의 어깨를 마주 안고서, 침입의 여파가 흐릿해져 민감해진 내벽이 세세한 생김을 느낄 때쯤, 그때서야 놋시는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었다.
테스가 무엇을 물었더라? 그들의 죄가 아니게 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놋시가 떠올릴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저희가, 읏, 피를 나눈 형제가……. 아, 아니란 건가요?”
“……그러길 바라니.”
“…….”
흐우, 하아, 어깨와 가슴이 들뜨게 큰 숨을 쉬면서도 테스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놋시에게만 들리면 된다는 것처럼.
테스의 말은 조용하게 늘어났다. 그의 말만 들으라는 듯 세상을 가리고서 놋시를 감싸 안고서 나온 이야기는 오래된 생각들이다.
“예전에……. 그런 적 있다. 열병을 앓는 너는 가끔 나를 잊었어. 내 이름을 잊고 내 몸을 부르게 되지.”
“…….”
놋시는 근육이 곤두선 넓은 어깨와 굽혀진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순간에 잠겨 들었다. 시야가 트여 있지만 보이는 건 비어 있는 벽과 흐릿한 빛이 음울하게 만든 그림자뿐이다.
어두운 천장 아래 넓은 방은 어둠으로 모호해져 싸늘해 보이지만 놋시가 들이쉬는 공기는 그렇지 않다. 서로의 체취와 열기로 따뜻하다. 그를 안고 있는 테스도 따뜻하다. 익숙해졌다 생각해도 항상 새로운 순간이, 불시에 찾아오는 흥분과 미약한 자극을 품고도 곧 아늑해진다.
“처음에는 그게 서운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달았지.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서로를 모르고 형제가 아니었다면……. 네가 죄인이라 슬퍼할 일도 없을 거라고. 너도 편히 마음을 줄지도 모른다고.”
뼈를 조이며 끌어안던 테스의 손이 서서히 풀렸다. 다리를 어루만지며 달래던 오른손도 놋시의 허리 밑으로 들어왔다. 어깨를 둘러 안은 놋시와 똑같이 두 팔로 그를 안아 온 테스의 고백이 맞닿은 뺨을 울리며 귓가에서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내 동생인 네가 좋다.”
“…….”
“부모님도 그랬다. 내가 네 형인 걸 좋아했어, 너도 그렇지. 어리던 너는 우리가 진실한 형제인 걸, 타게신의 동생인 걸 자랑스러워했어…….”
놋시는 울컥 치솟은 뜨거운 숨을 삼켰다. 테스가 말하는 마음을 그도 알았다. 그들이 죄인이 되기 전에도, 형제가 가선 안 되는 죄의 길을 걷게 된 후에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도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짐승으로 태어난 자신이 밉고 더러워진 타게신의 이름이 안타까울 때도, 테스의 위험하고 대담한 행동이 광기에 물들었다 믿을 때도…….
그는 태어나 단 한 번도 테스가 자신의 형이 아니길 원한 적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테스는 놋시와 뺨을 맞대고서 아주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간헐적인 떨림이 겹친 몸을 흔들고 속을 두들기기도 했지만 큰 행동은 아무것도 없다.
놋시는 들어와 있을 뿐인 테스의 성기가 그새 혼자 속을 엮은 게 아닐까 상상했다. 살을 붙드는 혹이 아니라 더운 열기로 서로를 녹여 하나가 되는 그런 것,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라 헛웃음처럼 입가를 건드린다.
바보 같다. 멍청한 생각이라 탓하면서도 놋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급해지고 억눌려 있던 그의 심장이 간지럽고 들뜨는 박자로 변해 나가고 싶다는 듯 발을 굴렀다. 안겨 있는 것만으로 뻐근해진 몸이 가만있는 사지를 조르듯 속을 떨었다.
밟히는 모래처럼 자잘하던 자극이 알갱이로 구르다 진흙으로 뭉친다. 그의 등허리를 잡고 있던 테스의 손 하나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바닥을 짚고, 다음으로 붙었던 가슴이 떨어졌다.
닿을락 말락 멀어진 얼굴과 달리 살을 열고 들어온 것은 더욱 가까워진다. 닿고 밀다가 멀어진다.
“흐윽, 아, 응…….”
“흣…….”
길게 빠져나온 테스의 성기가 느린 속도로 놋시의 몸을 재차 파고들었다. 멀어진 어깨에 엉성하게 걸쳐져 있던 놋시의 손이 고쳐 잡고 매달린다. 닿아 버린 이마 아래서 코끝이 비벼지고 벌린 입술이 신음을 머금었다.
오랜 시간 벌려져 풀어져 있던 놋시의 내벽이 어쩔 줄 모르고 전율했다. 저들끼리 조여들다 밀려드는 힘에 달라붙는다. 두툼한 머리와 더 굵은 몸통이 끝까지 들어왔다 들쑤시고 다시 나간다.
테스의 성기가 아는 길을 되찾으며 깊은 둔덕을 찧고 비비자 느슨하게 흐르던 놋시의 신음이 높아지고 빨라졌다.
아, 으, 흩어지는 소리를 모으듯 혀가 닿아 입술을 핥는다. 깊지 않은 접촉이 야릇한 감각으로 놋시를 당황시켰다. 입술 안쪽을 스치기만 하고 머무르지 않는 뜨거움이 아쉬워진다.
“흐응, 으음, 흐으…….”
자신도 모르게 놋시의 손이 뻗는다. 결이 바른 금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당기자 얇고 긴 입술이 뺨을 스치고 입에 닿았다. 열기로 부드러워진 테스의 입술이 그를 맛보고 혀를 내밀었다. 미지근한 공기와 함께 놋시의 입안으로 들어와 금세 뜨거워진다.
테스의 혀끝이 놋시의 밑바닥을 훑고서 입천장을 찌를 때마다 그의 어깨에 올라선 팔꿈치가 흔들렸다. 살을 열고 몸을 섞은 결합이 질척해진 피부를 짓뭉갤 때마다 입술 새로 소리가 튀었다. 번잡해진 충돌에 잡음이 늘어나고 마찰이 접촉으로 번진다.
“흐읏, 으읏, 아, 윽!”
놋시는 날카로운 아픔에 소리 지르고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 흥분에 잠긴 육체는 어디가 어떻다 구분하기 어렵게 안팎으로 자극에 취해 있었다.
머뭇거리던 놋시의 팔이 갑자기 자유로워진다. 후우, 숨을 몰아쉰 테스가 몸을 일으켰다.
체온이 사라진 허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놋시의 다리가 들린다. 무릎이 하나로 모여 옆으로 함께 눕자 허리가 뒤따르고 어깨가 세워진다.
그러는 동안에도 섞여 든 몸은 그대로다. 민감해진 몸이 겪게 된 낯선 변화에 놋시의 등줄기가 뒤틀리지만 잠깐뿐이다. 곧은 손목이 기울어지는 어깨 뒤를 버텨 주듯 바닥을 짚었다. 숙어진 입술이 가까워지고 결합이 깊어진다.
“아! 아, 흐응, 으읏, 흑, 읏…….”
바닥에서 올라선 놋시의 손 하나가 몇 겹으로 뒤엉킨 부드러운 천과 담요를 부여잡는다. 그 손목은 어느새 테스에게 잡혀 있다. 굴곡진 가슴이 좁혀진 어깨를 누르며 그를 덮어 그늘로 삼켜 버렸다.
“흐으, 으응, 읏, 흐읏!”
놋시는 소리를 참지 못하며 바닥에 뺨을 뭉갰다. 짓눌린 입술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신음으로 천을 적시고 공기를 달게 만들었다. 접혀진 몸이 미는 힘에 밀리며 다시 끌려오고 재차 붙들린다.
놋시의 손은 어느새 테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다른 하나는 가슴팍에 웅크리고 혼자 주먹 쥐었다.
아무렇게나 접혀 내질러진 다리가 저들끼리 허벅지를 비비며 무릎을 부딪친다. 흔들리고 떠들리다 추락하길 반복했다. 머리를 들고 몸부림치던 오메가의 성기는 끝을 타고 흘러내린 묽은 정액으로 번들거리게 젖은 지 오래다.
신기루 같고 산발적인 절정이 놋시의 눈앞을 희고 검게 지나다녔다.
머리가 보일 듯 길게 나온 테스의 성기가 쉴 새 없이 다시 들어가고 다시 들어가 속을 헤집는다. 신음이 간간이 먹히며 육체의 잡음이 커져 간다. 허벅지가 허벅지를 짓누르고, 비틀어진 어깨가 바닥을 짚은 손목을 밀고, 길게 젖혀진 놋시의 목덜미가 테스의 이에 물리고 빨려 붉고 푸른 자국을 얻으면서.
그러다 찢어지는 비명처럼 까마득한 절정이 또다시 나타나고. 머무르고. 흥건한 체액의 단내에 쇳내를 더하며 피비린내처럼 강렬해진다. 뜨거운 감각으로 흩어졌던 놋시의 몸이 의식과 함께 되돌아왔다.
“헉, 흐윽, 으응, 응…….”
“후으, 놋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이미 헤어질 수 없는 몸이다. 부풀어 오른 알파의 놏이 오메가의 연약한 점막을 벌리며 떠나갈 수 없게 했다. 넘쳐흐르는 정액이 스며 나온 체액과 전혀 다른 감각으로 놋시의 속을 적셔 놨다.
놋시는 테스의 품에 안겨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성기의 존재보다 허리를 끌어안은 테스의 손이 더 명확히 느껴졌다. 뒤로 안겨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해도 닿아 오는 입술은 여전했다.
테스는 끊임없이 놋시에게 입을 맞췄다. 머리카락과 귀와 뺨과 어깨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테스의 숨이 묻고 스며든다.
알파의 몸과 흥분에 묶여 벗어나지 못하는 놋시를 쓰다듬으며 테스는 놋시에게 모든 걸 말해 줬다. 그들이 없을 때부터 쌓여 온 기사들의 불만과 고귀하고 부유한 자들의 다른 속셈을.
평야가 끝없는 제국과 광활한 사막 사이에는 길고 굵게 이어진 레드자 산맥이 등뼈처럼 자리했다. 체레오의 왕국은 거기에 붙은 살 중에 제일 큰 덩어리였다. 활력과 부유함으로 보면 중요한 내장이라 할 만하다.
크기로 비교하면 섬이 중심인 달산보다 작고 거친 심성으로 따지면 사막의 게르독과 견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왕국의 이름을 내걸었고 수도인 에트와주도 오랜 세월 풍요로웠다. 끊임없이 이어진 주변의 공격을 계속해 버텨 왔기 때문이다.
국경 지대의 다툼을 일상으로 보내면서도 제국과 사이좋은 이유, 사막의 도둑들이 제대로 덤벼 오지 못하는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가장 큰 둘은 분명하다. 레드자 산맥과 알파 기사단이다.
체레오의 왕국은 길게 붙은 산맥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반을 이룬다. 제국의 복잡한 전설을 믿자면 그곳에서 도망친 수많은 알파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레드자 산맥에 숨어들었다.
그래서일까, 체레오의 후예는 신기하게도 왕의 이름을 지켜 왔다. 병사의 숫자나 무기의 질로 따지면 진작 지도에서 사라졌을 이름인데도.
작은 왕국은 끈질기게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고 산맥의 금과 평야의 곡물로 부귀해졌다. 지척에서 부딪히며 핏줄이 섞이고 친근해질 만큼 오랜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체레오의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정해진 기사단의 수장은 왕이다. 왕국의 모두가 왕의 밑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체레오의 알파 기사단은 가혹한 성장만큼 독립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귀족의 후원을 받지만 왕궁과 저택이 아닌 곳에서 무리를 이뤘다.
국경 지대의 혼란이 커질 때 사람들이 찾는 것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칼을 든 알파 기사의 이름이다. 어느 나라라도 마찬가지다. 냉정한 두뇌와 사람을 뛰어넘은 의지력을 갖추고 쇠로 된 몸으로 칼을 휘두르는 그들이 전쟁터를 지배했다.
그들은 계층의 일부였지만 동시에 구별되는 존재였다.
왕족, 귀족, 산 밑 구석의 이름 없는 마을까지. 알파의 출신은 다양하지만 인정받는 데 필요한 건 부모의 지위가 아니다. 모든 것이 한 명의 실력으로 판가름 났다. 귀족과 왕족과 산 밑 마을 출신의 아이들이 똑같이 모여 똑같이 싸웠다. 어린 나이부터 한곳에서 잠을 자며 전투에 나서야 한다.
잔혹한 과정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왕국의 기사단은 그들의 왕이 알파가 아닌 것에 불만 갖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과 다르고, 세상은 사람의 것이었다.
왕족과 귀족으로 태어난 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이해하게 된다. 세상은 사람의 것이고 알파는 사람과 달랐다. 더욱 뛰어난 대신 그만큼 책임이 크다.
뼈를 시리게 하고 피를 마르게 하는 전투를 치르며 어른이 된 모든 알파가 그들의 출신을 잊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능력과 그것의 활용이다. 그러지 못한 자는 타고난 명예를 잃고 사라지며, 남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줬다. 올바른 발전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때로는 잊을 수 없는 탄생이 존재한다. 태어난 것만으로 의미를 갖는, 또는 가졌다 주장하는 이들이 간혹 등장해 물을 흐렸다.
체레오의 왕은 언제나 맏이에게로 이어졌다. 적장자 상속은 다양한 문화에서 안전하다 인정받은 관습이다. 분명한 사실만이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법이었다.
자케일은 맏이로 태어난 알파였다. 드물게 일어나는 우연이지만 이제껏 없던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존재가 남들을 불안하게 한 것은 과거의 왕들과 다른 성품 탓이다.
기사단은 왕의 명령을 받지만 알파들의 수장은 따로 있었다. 지금 체레오의 왕국에서 그렇다 불릴 존재는 왕도 함부로 오라 가라 못하는 나이 든 장군, 자필라다.
전대 왕인 지체마와 친분이 두터웠던 자필라는 사막과 산맥이 끝나는 평야 지대의 저편에서 가장 큰 군대를 이끌고 있다. 굶주리지 않는 땅덩이는 그만큼 사건이 잦았다. 어린 알파들이 처음 가는 전쟁터로도 유명하다.
테스가 처음 갔던 전쟁터도 그곳이었다. 수도에서 멀지만 제국과 딱 붙은 위치라 어지간한 이름은 오래 버티지도 못한다. 제국에도 명성이 자자한 노장군은 아마 매일 아침 칼을 들고서 10년쯤 더 살다 죽을 것이다.
왕족과 귀족과 젊은 알파가 오글오글 모여 있는 수도에서 자필라를 대신한다 인정받는 이름은 타게신이다. 어린 나이부터 명성이 높아 귀족과 상인의 관심이 쏠렸던 그는 스물이 되기 전에 제국의 장군 둘을 죽였고 왕의 목숨을 구해 작위를 받았다.
타게신은 거창한 후원자 하나 없이 남들이 부러워할 것을 모두 얻었다. 다수의 기사들이 그를 질투했지만 그뿐이었다. 누구도 그와 어긋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테스가 걸어온 길은 정당했고 무엇 하나 트집 잡힐 구석이 없었다. 곧은 콧대와 깊숙한 눈매, 하나로 묶은 금발로 유명한 기사는 자신도 저렇게 되겠다는 마음으로 남들이 노력하게 만드는 본보기였다.
그러니 다음 왕은 누구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이전에 해왔던 대로 한다면 무엇도 달라질 필요가 없었다.
자케일은 그럴 의도가 없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만이 아닌 핏줄의 이름으로 모두에게 존경받길 원했다. 현재에 만족하는 상인, 왕족을 저어하는 귀족, 비열한 알파를 경멸하는 기사들의 불만이 수를 셀 수 없게 쌓여 갔다.
테스는 자케일이 그를 특히 싫어한다 말했다. 그러나 자케일을 싫어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왕자의 실수를 기다리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왕이 부재했던 그때, 조금만 욕심을 보였다면 곧바로 끌어내려 졌겠지. 하지만 그가 왕좌에 앉기를 바라는 자도 많아. 균형이 싫고, 모두 자신들이 차지해야 속이 풀리는 족속들이…….”
놋시는 테스의 이야기가 어렵지 않았다. 타게신의 짝으로 수도에 도착해 일상을 보낸 것만으로도 은연중에 알게 되는 현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전에, 시도르에서 이미 그의 권위를 봤던 것 같다.
넓은 저택, 자유로운 시간, 놋시에게도 허리 굽혀 인사하는 이름 모를 병사와 타게신을 외치는 골목의 사람들까지. 하나같이 테스의 권위가 얼마나 인정받는지 나타내는 증표였다.
시장의 상인들은 타게신의 저택에서 왔다는 메다로를 귀족만큼 우대해 줬다. 출신이 불분명한 얼굴을 모자로 가린 수수한 옷차림의 그도, 맨얼굴을 드러내고 보석을 달지 않은 놋시도, 언제나 존중받을 수 있었다.
“소문이든 무엇이든, 비열한 공격이 있을 줄 알았다. 네가 오지 않았다면 다른 핑계를 찾았겠지. 왕도 무시할 수 없게 일을 키워 나를 밀어낼 생각이겠지만……. 쉽지 않을걸. 리제크는 그렇게까지 어리석지 않아. 자신의 평안을 위해 내가 필요한 건 다른 누구보다 그일 테니까.”
탁월한 자는 언제나 남들의 이목을 끄는 법이다. 좋은 눈길의 숫자만큼 나쁜 눈길도 받게 된다.
테스는 너무나 태연자약하다. 놋시는 오래전부터 대비한 덕에 그가 이런지 궁금했다.
타게신을 떠받드는 온 도시에 그들의 비밀이 밝혀진 와중에도 테스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무리 믿는 자가 적어도,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마치 세상이 다 알아도 괜찮다는 것처럼, 죄를 짓고도 잘못을 모르는 사람처럼.
놋시의 가쁜 숨이 덜그럭거린다. 딸꾹질을 하듯 들썩인 어깨에 더워진 입술이 다가왔다.
응, 으읏, 배를 누르는 손에 맞춰 신음하면서도 놋시는 애써 생각을 모았다. 테스가 정말로 죄를 모를 만큼 미친 게 아니라면, 설마…….
“그, 사매로노의 전설이……. 정말 있던 이야기인가요.”
“그런 헛소리는……. 자케일의 꿈이겠지. 무슨 전설의 탄생을 가져도 그놈은 위대해지지 못해.”
“…….”
“그런 얘기의 반은 다 꾸며 낸 장식이다. 후세가 공들여 핏줄을 치장하니까.”
테스는 딱 잘라 남매의 전설을 망상으로 치부했다. 자케일의 무의미한 집착이 그의 모자람을 뜻한다고도 덧붙였다.
놋시도 거기엔 동의할 수 있었다. 에체르를 달래던 시종들은 자케일의 자격을 신경 썼지만 두려움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짐을 대하듯 지겨워하는 분위기였다. 전설이든 망상이든, 자케일은 사람들이 터부시하는 죄를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하는 놋시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되풀이한 테스는 이런 시기를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놋시는 그가 말하는 시절이 왕과 부하의 반목을 뜻하는지, 사회의 격변을 뜻하는지, 그도 아니면 미친 왕에 맞선 반란의 때를 뜻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금세 정리되는 상황이 아닌 데다 생각이 어려운 순간이기도 했다.
밤새 그랬다. 놋시의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테스는 그를 아침까지 놔주지 않았다.
“흐으, 으읍, 그만, 그만…….”
“한 번 더 나올 수 있다. 내 것과 전혀 달라. 진득하지 않고 단맛이 나지…….”
테스의 손은 무자비했다. 무자비하고 황홀했다. 놋시의 온몸이 그의 손에 잡힌 성기처럼 조종당했다. 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육체가 속을 찌르는 열기와 밖을 조이는 손가락에 휩쓸렸다. 원망할 수 없는 혀에 벌려진 입이 침을 받아 삼켰다.
때가 되면 풀려나야 할 몸이 떨어지지 못한 채 밤을 새고, 새벽이 오는 걸 보며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놋시는 또다시 늦게 일어났다. 오후에 눈뜬 그는 지친 손을 움직여 한 끼를 먹고 말았다. 그것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호가의 눈을 위한 흉내였다. 열병이 아닌 때 오랜 시간 엮여 있던 탓에 몸의 피로가 극심했다.
“오늘은 집에 계시나요?”
“네. 그, 방을 늘리니까……. 물건 정리를 마저 하려고요. 그리고…….”
창밖의 한낮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놋시가 기억해 둔 물건을 꺼내 온다. 그는 타게신의 이름으로 들어온 선물 중 누구나 쓰기 편할 금화와 보석을 호가에게 선물했다. 마지막 달의 축하를 위한 선물치고는 과했지만 달리 베풀 가족도 없다.
크게 감사하는 호가에게 다피벳과 사테에게 줄 선물이 어느 정도면 될지 상의하던 놋시는 그들 집의 손님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걸 들었다. 달리 온 연락이 없어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됐지만 호가의 말로는 괜찮은 듯하다. 그녀는 사테가 오가며 다피벳의 물건을 챙겼다고 말했다.
“축제 기간이니 놀러 갈 곳이 많겠죠. 왕궁도 지금은 한가할 테고요.”
“…….”
놋시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택했다. 왕과 다피벳의 관계는 모두가 알면서 말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날 내내 놋시가 한 일은 그것뿐이었다. 호가를 내보낸 뒤에는 곧 돌벽이 덧대어질 안채의 자투리 땅을 둘러보고, 그 김에 집 안을 걸은 게 고작이었다.
메다로와 베단은 자기들의 할 일을 하러 다녔다. 놋시는 매일이다시피 밖을 나다니던 그가 안에만 있는 걸 보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지만 상상하지 않았다.
저택의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볼지,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당장은 마주할 자신이 없는 일이었다.
바깥의 상황 역시 알 수 없었다. 시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어 왕궁에 잡혀 간 하락의 운명이 어찌 될지, 타게신의 이름을 두고 떠드는 소문이 여전할지, 놋시는 상상하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 생각조차 피곤했다.
폭도가 몰려와 불을 지를 분위기라면 도망칠 뒷문을 알아 둬야겠지만. 오늘은 모든 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지막 달의 하루였다. 타게신의 저택은 그래 보였다.
어차피 놋시는 도망칠 뒷문을 모두 알고, 수도의 골목에도 제법 익숙해져 있다.
평소처럼 밤에 돌아온 테스는 종일 한 일이 없다는 놋시에게 잘했다며 웃었다. 투정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놋시는 일찍 잠들지 못해 얼굴을 마주하고 만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몸을 씻으면서 보게 된 전날 밤의 흔적은 혼자 눈에도 부끄러울 만큼 많았다.
그날 밤 언제나처럼 테스의 품에 기대 잠들게 된 놋시는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되새겼다. 어젯밤 내내 이야기하던 테스는 하나를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 놋시는 아직, 어떻게 하면 그들의 죄가 아니게 되는지 모른다.
또 다른 이틀이 무료하게 흘러갔다. 놋시는 여전히 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집 안에선 예전처럼 돌아다녔다. 그늘의 버섯을 모아 저택 안의 바깥채를 오가는 그에게 사람들은 전과 똑같이 인사했다.
타게신의 저택은 평화로웠다. 겉보기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놋시의 눈은 작은 쪽문도 지키고 선 병사를 알아봤고 가끔 그를 확인하듯 오고 가는 메다로의 뒷모습을 알아봤다.
놋시는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내의 말은 입을 다무는 걸로 막을 수 있지만 사람의 손은 그러지 못한다.
왕의 조용함은 그 자체로 두려웠다. 하락이 잡혀 가고도 시내의 소문은 계속 불어나고 있을 터였다. 제각각 길을 찾아 소식을 알아본다면, 이제 자유로워진 사로나와 시도르의 이들이 입을 모은다면…….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걱정 없이 지냈다고. 죄를 죄라고 말만 하면서도 감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보이는 곳에 있을수록 찾지 못하는 그런 걸 노렸던 걸까? 테스의 뜻을 헤아려 보던 놋시는 언제나처럼 결론짓지 못한다. 그는 한순간 절망했다 다음 순간 무감각해졌다. 메다로를 붙잡고 캐물으면 최소한 남들이 어떻게 떠드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테지만 알아서 뭐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수도의 겨울은 따듯했다. 저택에는 음식과 장작을 준비하는 이들이 그득하다.
놋시에게는 할 일이 없었다. 다피벳의 부재로 약초상도 문 닫은 상태였다. 지금처럼 병사가 쪽문과 빈틈까지 지키고 서 있을 때는 손님이 와도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
테스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구는 병사와 똑같이 밤에 돌아오고 아침에 나갔다. 놋시는 변화가 생긴다면 그가 제일 먼저 자신에게 말할 것이라 믿었지만 어쩌면 모두 끝난 뒤에나 듣게 될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됐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모든 게 뒤바뀔 때조차 그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뒤늦게 눈떠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이들을 봤을 뿐이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오늘은 무슨 소식이든 얻겠다 다짐하던 놋시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정오의 종소리보다 먼저 길을 나온 에체르가 타게신의 저택에 온 것이다.
“여기, 사과의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에체르의 사과는 자케일의 무례에 대한 왕의 대응인 것 같았다. 에체르는 왕궁에서만 쓰는 게 분명한 향료와 겨울을 위해 준비된 절임을 여러 병 가져왔다. 하나같이 귀한 과일과 채소라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밖에 덧붙여지는 말은 없었다.
공주를 따라 들어온 시종은 모두 넷이었고 하나같이 표정이 평온한 여성들이었다. 두 명의 시종이 호가의 안내를 받아 향료와 유리병을 옮기는 동안 다른 두 명이 남아 에체르의 차 시중을 들었다.
놋시는 오늘 방문으로 세르시의 부재를 확실히 느꼈다. 왕궁에서는, 단순히 여자들이 모인 장소라 없는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모른 체하고 넘어가기에는 커다란 변화였고 아는 척하기엔 딸려 나올 이야기가 걱정된다. 그렇게 놋시가 갈등하는 동안 에체르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세르시는 당분간 없어. 어디더라? 다리카, 그가 간 누나의 고향이 어디였지?”
“소르만입니다.”
“그래. 누나의 고향에 무슨 일이 생겨서 세르시가 도와야 한다고, 꽤 예전에 떠났다. 게르독이 물러서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 그때 왕이 막 돌아왔던 시기라 나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든 피해가 컸을 테니까.”
“…….”
놋시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급히 수도를 떠난 세르시의 결정은 우연일 수도 있고……. 그렇든 아니든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에체르는 자케일의 행패를 왕에게 모두 고했다고 놋시에게 알렸다. 놋시가 듣기에는 불만을 토하러 그에게 찾아온 것 같았다.
“타게신의 짝에게 그런 짓을 하는데도 놔두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미쳐 버린 게 분명하다고. 도대체 어떤 기사가 그런 왕에게 충성하겠어? 거기다가, 시내에 광인을 풀어 소동을 일으키다니!”
“예?”
“너도 들었을 것 아니냐! 외팔이 광인이 나타나 타게신을 모욕하며 난리를 부렸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왕의 앞까지 끌고 가서는……. 흥, 그러다 제가 더 고생할걸!”
하락의 등장까지 자케일의 수작으로 단정 짓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든 하려 놋시의 입이 열리지만 생각이 터져 나가 소리가 막혔다.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타게신의 뒤를 뒤지던 자케일이 그들을 기억하는 고향의 생존자를 끌고 와 연극을 부렸을 수도 있다고, 명성을 질투하며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말한다면…….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불려 온 증인은 한 명뿐이고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자식을 감싸는 왕을 욕하고 지루한 겨울을 탓하는 공주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놋시가 생각했다. 왕이 고민될 만도 하다고. 쓸모 있는 부하와 질투하는 아들 사이에서 편을 정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에체르가 이렇게 당당히 떠들 정도면 왕궁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말이 번졌겠지.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어리석음으로 죄를 덮는 현실의 한복판에서 놋시의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뭔가를 기다리며 날짜를 세던 것은 놋시 혼자가 아닌 듯했다. 그날 밤 테스는 내일 저택에 손님이 여럿 온다고 그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오시는 손님인지…….”
“마지막 달의 축하를 위해 인사차 들르는 거지. 너도 얼굴은 봤으니 두려워할 건 없다.”
연회에서 주위에 모여들던 귀족과 기사를 뜻하는 걸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놋시가 잠든 것처럼 조용해진 뒤 테스의 말이 이어졌다.
타게신은 내일 왕궁에 불려 간다. 혼자 찾아가는 것처럼 남의 눈을 피해서 가야 했다.
“왕은 난감할 거야. 왕자의 편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해. 하락의 말은 앞뒤가 맞을 테니까. 적어도, 출신은 의심할 수 없겠지.”
“…….”
“솔직한 심정으론 귀찮을 거다. 내가 동생과 붙어먹는 게 그에게 무슨 상관이겠어. 나는 그를 대신해 칼을 휘두르기만 하면 그만인데. 세금을 어째야 하느니 떠드는 귀족보다 내가 더 편리하고 쓸모 있다고……. 왕자를 설득하겠지. 달래고 어르면서.”
놋시의 정수리를 스치며 이어진 테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른 말투다. 잠꼬대인 양 작지만 격렬한 억양에 놋시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들어 보지 못한 적나라한 표현은 천박한 소문에서 나온 걸까? 놋시는 그의 앞인데도 말을 조심하지 않는,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 것 같은 테스가 불안했다. 짐작보다 압박이 큰 것 같았다.
내일 타게신의 저택에 모이는 자들은 분명 테스가 왕에게 불려 가는 걸 알 것이다. 결판을 내리게 된 하루가 걱정되어 오는 동조자들, 동료들, 적의 적들을 생각하며 놋시의 가슴이 계속 뛰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다.
“저희가……. 도망치게 되나요?”
“…….”
놋시는 반역이나 결투를 묻지 않았다. 그가 생각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뿐이다.
만약 왕이 하락의 말을 믿는다면, 만약 그들의 죄가 밝혀져 욕설과 돌이 날아온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도망쳐야 한다. 도망치는 건 그도 할 수 있다.
얼굴을 감추는 끈적한 연고가 아직 있다고, 머리를 자르고 색을 물들이면 알아보기 어려울 거라고 중얼거리는 그를 테스의 팔이 안아 왔다. 가볍게 얹혔던 손이 힘과 목적을 보이며 놋시를 끌어안았다.
“연고는 버려라. 다시는 바를 일 없을 테니.”
“…….”
테스는 도망치지 않을 거라 말하지 않았다. 놋시는 규칙을 어기며 발버둥 치는 심장을 손으로 억눌렀다. 어서 이 밤이 지나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느라 잠을 이룰 수 없다.
다음 날 타게신의 저택은 일찍부터 주인을 잃었다. 그 대신 손님이 밀려들었다. 화려한 옷을 눈에 띄게 차려입은 거창한 이들이 요란한 무리를 이끌고 골목 앞을 메웠다. 시끄럽게 모인 머리들은 구경꾼이지만 말없이도 눈길을 끄는 이들은 하나같이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병사들이 문을 지키다 오드사와 메다로의 명령을 받고서야 길을 내줬다. 놋시는 타게신의 서재에 모여들어 왕의 목숨을 논하던 과거를 떠올렸다.
지금 저들이 구할지 말지 결정하는 게 왕의 목숨일까 아니면 타게신의 목숨일까. 놋시에게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남들의 반응은 달랐다.
메다로는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옷차림의 건장한 이들을 한곳에 모은 뒤 음식과 차를 내줬다. 오드사는 그중 특별해 보이는 이들을 골라 타게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기세등등한 젊은이들은 흥분을 보이기도 했고 예리하게 생긴 늙은이는 저택을 느긋하게 둘러봤다.
놋시는 자신이 인사를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러지 않는 게 옳은지, 또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지 헷갈렸다. 모여든 사람의 지위가 다양한 데다 알파가 여럿이라 호가도 겁먹고 있었다.
“노리 님은 서재에 모인 늙은이들에게 얼굴을 비추면 그만입죠.”
“뭐라고 인사해야 하나요.”
“타게신이 집에 없어 죄송하다, 손님들은 편히 기다려 달라……. 그 정도죠.”
메다로의 말대로 뒤따른 놋시는 서재를 꽉 채운 이들의 숫자가 열이 안 된다는 걸 알아봤고, 하나같이 칼을 찼다는 것도 알아봤고, 다음 순간 자신의 옷차림이 아닌 집 안의 무기가 걱정됐다. 모인 자들이 집 안을 뒤집으려 맘먹으면 버틸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들은 그만큼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다행히 그 칼끝이 향한 곳은 다른 벽이었다. 그들은 메다로의 말을 되풀이한 놋시에게 왕궁에서 봤던 때와 똑같이 인사를 되돌려 줬다. 놋시를 처음 봤다는 이들은 아름답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며 웃었고 왕궁에서 이름을 들은 이들은 저택이 품위 있다느니 하며 날씨를 얘기했다.
놋시의 할 일은 예의상 발라진 덧말과 함께 한 바퀴 말이 돌 동안 흐릿하게 웃는 것이 전부였다. 그다음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기다리는 것뿐이다.
편안한 주인의 방에서 차와 간식을 앞두고서. 놋시의 귓가엔 가끔 이명이 울렸다. 수도가 포위되고 바깥이 소란하던 어느 날 밤과 전혀 다른 훤한 대낮인데도 자꾸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는 테스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테스는 분명 살아 돌아올 것이다. 놋시가 두려운 것은 살아 돌아온 그가 무엇을 하는지였다. 왕이 그를 다독일까? 그를 질책할까? 왕자를 탓하며 화해를 강요할까?
그렇게든 어떻게든 넘어가게 된다면, 자케일은 과연 가만히 있을까?
오전에 나갔던 테스가 저녁 종소리를 넘기고 돌아올 때까지 놋시는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뛰어나간 그는 환호성을 이끌고 돌아온 테스를 봤다. 말에 올라탄 모습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흐트러짐 없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다.
곧고 바른 얼굴에서 불빛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놋시의 손이 저 혼자 주먹 쥐었다.
테스는 놋시에게 모든 걸 얘기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이가 많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대신 그는 왕을 구하러 떠난 그날처럼 놋시가 모든 걸 듣게 해줬다.
저택 안 건물의 생김은 비슷하다. 타게신의 서재로 쓰이는 큰 방 옆에 붙은 작은 방은 쓰임 없이 비어 있어 메다로와 놋시가 함께 있기에 어색함 없었다.
문짝이 달리지 않은 작은 통로가 무거운 털가죽으로 막혀 있는 그곳에서 놋시는 위대한 전사들의 분노를 들었다. 테스를 향한 여러 말이 넘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었다. 짤막하게 상황을 알린 뒤에는 듣기만 하는 듯했다.
“리제크가 드디어 미쳤군. 그런 녀석을 죽어도 왕위에 앉히겠다는 말이지?”
“네가 아니면 죽었을 주제에, 어떻게 그가…….”
“구해 주지 않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왕족의 반은 편하게 다카르를 택했을 테죠.”
여러 알파의 분노는 목소리가 아닌 기세로 벽을 울렸다. 손바닥에 식은땀을 흘리며 버티는 놋시에게 메다로가 설명해 줬다. 다카르는 자케일의 동생인 어린 왕자의 이름이라고 한다.
왕은 테스의 짐작대로 화해를 종용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떠들어 댄 하락의 주장이 조사될 것이라 공언했다. 하지만 왕은 자케일에게도 사과하라 명령했다. 왕궁에 초대된 타게신의 짝을 모독한 죄는 작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왕자를 감싼 겁니다요. 왕자가 나서서 타게신의 추문을 떠드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빼줬으니까요.”
“…….”
놋시는 중얼거리는 메다로의 눈을 외면했다. 그는 자케일이 테스에게 사과했는지 듣지 못했다. 모인 사람이 너무 많았고 각자 할 말이 넘쳐 났다. 그들에게는 놋시의 진실이 중요하지 않거나, 또는 그보다 원하는 소망이 있는 것 같았다.
서재의 이야기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포에와 세조는 밖에 모인 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즐거움을 위한 게 아닌 술과 냄새가 강한 육포, 뜨거운 차와 신선한 과일이 서재로 들여졌다. 일꾼이 아닌 오드사가 직접 음식을 날랐고 복도로 이어진 뒷문을 통해 놋시에게도 차와 음식이 준비됐다. 저녁을 대신하듯 배를 채우는 종류였다.
놋시는 뜨거운 차를 마셨지만 다른 건 먹을 수 없었다. 메다로는 그와 달리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나무토막처럼 먹고 마셨다. 그런 성격이라 알파 무리가 화내는 옆방에서도 이렇게 편할 수 있을 것이다.
메다로의 둔함은 놋시에게 큰 도움이었다. 그는 웅성대며 번지는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고 놋시가 모르는 이름과 사건이 나올 때마다 설명을 덧붙여 줬다.
세상을 울리는 기세로 속삭이는 이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놋시는 시간을 잊었다. 자정의 종소리가 울린 것도 호가가 부르러 와 알게 됐다.
“노리 님, 그만 주무세요. 뭘 하더라도 밤중에 하진 않겠죠.”
“…….”
호가는 더 이상 겁내는 얼굴이 아니었다. 왕의 병사가 쫓아와 잡아 가지 않으니 다 좋게 끝났다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놋시는 잘 수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왕국의 비밀과 알파들의 분노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이 토론의 끝에서 결정 나는 게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테스의 말대로 오래된 불만이 한자리에 풀린 날. 그들의 분노는 낮이 부족해 밤을 넘본다. 놋시는 이것이 반역의 준비인지 아니면 불평을 정리해 개선을 요구하려는 자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아직도 테스의 뜻을 알 수 없었다. 화가 났는지, 분한 마음인지, 복수를 원하는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하는지……. 무엇도 분명히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이들 사이에서도 타게신의 뜻을 밝히라는 의견이 늘고 있었다. 놋시는 사실 그들의 뜻도 알기 어려웠다.
귀족과 기사들은 왕의 불공평과 왕자의 부족함을 확실히 짚었지만 수도를 시끄럽게 만든 추문에 대해선 말이 적었다. 테스의 입장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관심 없는 일인지? 메다로에게 물으면 답을 얻을 테지만 놋시에겐 꺼내기 불안한 화제였다.
테스는 몇 번이나 재촉당한 뒤 입을 열었다. 놋시의 가슴에서 뛰던 심장도 지쳐 조용해진 한밤중에서야 입을 연 그는 자케일의 사과가 어땠는지 얘기했다.
“왕자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면, 제가 정말, 친동생과 짝을 맺었다 밝혀진다면…….”
“…….”
“그때는 노리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하더군요. 저의 충성을 봐서 목숨은 살려 주겠다고.”
한순간 벽이 떨렸다. 벽에 붙을 듯 귀 기울였던 놋시의 몸이 놀라 물러선다. 바람에 꺾였던 불꽃처럼 조용해졌던 벽 너머에서 불붙어 타오르는 커다란 외침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제껏 놋시가 들었던 불평과 분노는 침착한 대화였나 싶다. 알아듣기 힘든 외침이 벽을 울리고 바닥을 두들겨 견디기 힘들어진다.
메다로도 느꼈는지 밖으로 나갈 자세다. 놋시는 손짓하는 그를 따라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고, 뒤를 통해 안마당에 나와 섰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숨이 뚫려 속이 트였다.
우물과 약초가 있는 고요한 풀숲에는 달빛과 밤벌레가 어우러지고 있지만 그것은 놋시의 고개가 숙어져 있어서다. 조금만 시선을 들면 사방에서 생생한 변화를 알게 된다.
횃불을 밝힌 벽을 가득 채우며 흥분한 알파의 고함이 여러 개 튀어나오고, 그걸 들은 것처럼 저편의 불빛들도 흔들렸다. 날이 추운데도 밖에 모여 있는 각자 다른 이들이 성내는 주인을 느낀 듯 웅성거렸다.
놋시는 혼자 생각으로 답을 구하지 못했다.
“메다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왕자는 집착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타게신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었습죠.”
“무엇을 선택한단 말입니까.”
“…….”
메다로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는 어둑한 저편, 밖에는 횃불이 붙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 다피벳의 거처를 보고 선 채로 놋시에게 설명해 줬다.
“타게신의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죠, 다른 친척분도 없고요.”
“…….”
“두 분의 외모는 전혀 다릅니다. 머리 색, 눈의 모양, 색깔, 코의 생김……. 노리 님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제가 보기에는 뼈의 굵기도 다를 것 같습죠.”
놋시의 심장은 함부로 뛰지 않았다. 사방에서 시끄러운 이들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듯, 짓밟힌 풀잎처럼 조용했다.
“그러면 어떻게 두 분이 형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요. 하락이라는 자의 말을 조사해 본다는 건 결국 다른 사람의 말을 모으는 겁니다. 게르독에게 빼앗겨 황폐해진 사로나에서 누구를 찾아옵니까? 관리는 첫날 다 죽였다던데. 더군다나 타게신의 고향은 엄밀히 말해 그곳도 아니고, 산자락에 붙은 마을 아닌가요?”
“……예, 그래요.”
“시내의 부잣집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데 어디에 기록이 있을지. 사로나의 모든 사제를 모아도 고작해야 타게신의 어릴 때 이름 정도 나올 것이며, 그마저도 찾기 쉬운 상황이 아니죠. 그 동네에서 얼마나 죽었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국이니까요.”
메다로는 오래전에 생각을 끝낸 사람처럼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것은 진실이 무엇인지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
“에트와주에서 자기 소망대로 짝을 얻은 알파는 제 살아 생전에 타게신이 처음입니다. 귀족의 지원 없이 작위를 얻은 기사도 그분 혼자고. 노리 님 역시, 귀족의 자식이 아니고 여기저기서 어릴 때 끌려와 왕국의 재산이 된 오메가도 아니죠.”
냉정한 듯 막힘없는 목소리는 가차 없이 진실을 늘어놨다. 놋시도 하나씩 알 것 같아진다. 사람의 말로만 판명 나는 진실이라면 누구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일이다.
자케일은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에체르도 그렇게 말했다. 외팔이 광인을 내세워 소동을 일으켰다고.
“가장 좋은 길은, 왕이 왕자를 혼내고 타게신에게 사과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
“이젠 다른 수가 없게 됐습죠.”
“무슨 뜻인가요?”
“타게신에게 남은 수가 하나뿐이라는 걸 모두가 이해할 겁니다요.”
놋시도 그 순간 이해했다. 테스는 왕의 뉘우침을 원해 오늘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동류에게 양해를 바란다 말하기 위해 오늘을 맞이한 것이다.
준비는 여러 날 걸리지 않았다.
테스는 저택에 불을 붙이기 전 놋시에게 귀한 것을 챙기라고 말했다. 놋시의 품에는 오래된 씨와 아버지의 칼과 어머니의 놋거울이 들어 있었다. 어릴 적 테스가 선물해 준 기계 달력도 그 안에 있었고 오래된 씨 종자와 다양한 종류의 약재가 조금씩 구해졌다.
보석과 금은 주머니는 일하던 이들에게 일찌감치 분배됐다. 호가에게는 특별히 귀한 걸 골라 줬고 똑똑한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새로운 날이 지나기 전에 멀리 떠나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재산이었다. 병사가 아닌 이들은 모두 아침 해와 함께 길을 떠났다.
불타오르는 저택을 보며 놋시는 깨닫는다. 자신은 이곳에 어떤 꽃도 키우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키워 낸 것은 독버섯뿐이며, 그 타는 연기는 혼란을 부추길 것이다.
놋시는 항상 입던 옷에 친숙한 흰 털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서 투박하게 테두리만 세운 마차에 올라탔다. 오드사가 끌고 온 생선 장수의 마차는 나무궤짝과 나무통으로 바닥이 빼곡하다.
소금에 절인 생선으로 가득 찬 나무통 중 하나의 밑바닥에는 자케일의 눈 뜬 목이 들어 있었다.
목 없는 왕자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때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합류한 세조의 말로는 시장 한복판에 걸린 채로 정오를 넘겼다고 한다. 벌집처럼 모여 붙은 저택가의 화제를 잠재우느라 왕의 손이 미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