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의 입술은 부드럽고 건조하다. 틈을 보이지 않고 다물린 놋시의 입술에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지던 그의 입에서 잠긴 숨이 새어 나왔다. 다시 부딪힌 입술이 이번에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무른다. 자리를 떠나지 않으며 짙어진 체취처럼 숨을 섞는다.
놋시의 아랫입술을 슬며시 물었던 테스의 입이 윗입술도 맛보고서 다시금 겹쳐졌다. 그러더니 물기 어린 혀가 나와 다물린 틈새를 따라다닌다.
억지로 들어오지 않지만 멀어지지도 않으며 더워진 표피를 적시는 혀끝이 간지럽다. 그 미미한 자극에 놋시의 입술이 살짝 열리고 만다.
답답하다는 듯 움찔거린 작은 입 속에 테스의 혀가 어느 순간 들어섰다. 그러고서 안을 핥는다. 조금뿐인 틈을 벌리며 들어와 윗니를 건드리고 입술 안쪽의 젖은 살을 간지럽혔다.
그러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오고, 나갈 듯이 물러서다 깊숙이 찔러 든다. 불규칙한 행위에 작은 혀가 충돌하고 비벼졌다. 젖은 살이 마찰될 때마다 놋시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밀어내지 못하지만 환영하지도 못하고서. 움츠리는 얼굴을 따라가며 테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놋시의 커진 숨에 맞춰 조금 더 크게 벌어진 입을 통해 시원한 혀가 얽혀 들었다.
“음…….”
참고 참던 아주 작은 신음이 붙들린 목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니 놋시는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열병을 준비시키는 미열과 불안한 초조함이 없을 때조차, 차가운 달빛만 맴도는 커다란 방 안의 적막한 침대 위에서조차, 그는 테스를 밀어내지 못했다.
이런 것은 형제가 할 짓이 아니라고 놋시의 깊은 마음이 외쳐 댔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안에서 생겨난 질척한 잡음을 이기며 목구멍 속에서 나온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응……. 읏, 으음…….”
놋시는 커다란 침대 위에서 혀를 빨리고 입술을 깨물리며 신음했다. 그의 온몸을 껴안은 테스의 체온처럼 입안을 채운 혀도 뜨거워지고 있다.
왜냐면 테스의 말이 옳기 때문이다. 피를 나눈 형과 입술을 비비고 혀를 섞는 것이 놋시는 싫지 않았다. 더럽고도 무지한 짐승처럼 발정하지 않고서도 그 밑에서 입을 벌릴 만큼.
그날의 입맞춤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현재의 연속으로 끝났다. 놋시는 아늑한 품에 안겨 잠들었다. 악몽의 부재만이 유일한 차이였다.
놋시의 밤을 차지하던 악몽의 빈자리는 차차 테스로 메꿔져 버렸다. 그를 안고 숨을 섞으며 혀를 맛보는 테스의 입맞춤은 꿈이라도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매일 밤 계속됐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모조리 원상태가 되지는 못했다. 악몽은 여전히 흐릿한 어둠으로 놋시의 의식을 건드렸다. 하지만 긴 잠이 불가능하게 끈질기진 않았다. 어쩌면 놋시의 잠이 워낙 깊어져 그런 듯했다. 밤늦게 돌아온 테스의 입맞춤에 붙들려 있다 보면 항상 지치듯 잠들게 됐다.
테스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놋시의 몸과 마음속에서 복잡한 생각을 날려 버리며 당장의 호흡과 조용한 어둠에 기대게 만드는 재주가.
놋시의 생각에는 그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테스의 입맞춤은 놋시의 몸과 마음을 노곤하게 풀어 놨다. 거칠게 몸을 만지지 않고 힘들게 숨을 빼앗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한 것처럼 지치게 해서, 놋시의 전신이 잠을 원하며 선선히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악몽이 줄고 잠이 돌아온 뒤에도 놋시의 매일은 모호해져만 갔다. 그는 매 순간을 회의하게 됐다. 테스의 거짓과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살아가는 스스로가, 친절한 이들의 인사를 받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낮과 함께 흐릿해진 밤은 더욱 큰 혼란으로 번졌다. 반복되는 입맞춤은 애초부터 낯설지 않았다. 알지 못한 현상으로 놋시를 당혹시키는 건 거기에서 정지된 현실이었다.
그날 밤은 전날 밤과 같았다. 조금씩 깊어지고 길어진 입맞춤이 매일의 습관으로 홀로 누운 놋시를 준비시켰다.
항상 그렇듯 변화를 만들지 못해 무의미한 걱정이 그를 찾아왔다. 지금이라도 침대에서 뛰쳐나가야 할지, 텅 빈 마당을 가로질러 벽을 넘어야 할지, 만약 그렇다면 어디로 갈지, 움직이지 않는 몸을 힘들어지게 하는 피로한 상상이 놋시를 잠들게 했다.
그가 눈떴을 때 보게 된 건 새벽의 푸른 공기를 배경으로 그를 바라보는 테스의 눈동자였다.
“내가 깨웠구나.”
“……벌써 아침이지 않나요.”
“내가 늦은 탓이지.”
놋시의 머리를 쓰다듬던 테스의 손이 귓가를 어루만졌다. 차가운 물 냄새가 났다. 몽롱한 잠기운을 쫓으며 감각을 되살린 놋시는 테스가 어디에 누워 있는지 깨닫는다. 오래전의 꿈처럼, 악몽 같은 과거처럼, 그의 다리 사이에 몸을 겹친 테스가 숨을 내쉬고 있다.
하지만 놋시는 벌거벗지 않았다. 악몽과도 과거와도 다른 현실의 그는 여름에도 선선한 시도르의 밤에 어울리는 긴소매 옷을 입고 있다.
목 앞에서 끈으로 묶인 옷자락 위로 목덜미에 입 맞추는 테스 역시 벌거벗지 않았다. 그의 어깨는 드러나 있었지만 긴 다리를 감싼 질긴 천의 바지가 친밀한 잡음을 내고 있다.
소리를 내는 건 그것뿐이었다. 테스의 입맞춤은 전날 밤과 같이 조용했다. 놋시의 머리를 가두듯 안고서 어루만지는 두 손 밑에서 겹쳐진 그림자가 흔들렸다.
놋시는 자신을 안고 혀를 섞는 상대의 자연스러운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테스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고 신중함을 느낄 수 있었으며 지나치게 조용한 스스로를 느낄 수 있었다.
의미심장한 정적으로 채워진 방 안 공기가 놋시의 눈꺼풀을 짓눌렀다. 낯설지만 처음이 아닌 긴장이 피부 밑을 간지럽힌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놋시가 답을 미뤄 온 결정의 순간이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눈앞에 나타났다.
테스의 입술이 밤마다 그를 만지게 된 이후 놋시는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잠을 재우는 손짓으로 시작된 접촉은 더디게 제자리를 걸었지만 변화를 막지 못했다. 침대에 눕는 테스의 자리도 달라졌고 그를 안는 손도 달라졌다.
만약 테스가 자신을 안으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말처럼 진정한 주인으로 자신을 품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놋시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의 현실은 그가 아는 부정의 명분을 모조리 벗어난 상태였다.
부정해야 할 이유는 변하지 않은 사실들이다. 그는 열병을 앓고 있지 않고 이곳은 아무도 없는 동굴이 아니며 테스는 여전히 그의 형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입 맞추는 테스의 입술은 자연스러웠고 사람들은 놋시를 주인으로 불렀다. 그들이 거짓을 진실로 바꿔 놨기 때문이다.
테스는 악몽 같은 사고를 원하는 관계로 정의했고 자신의 마음을 놋시에게 고백했다. 그의 주장에는 원천이 있었고 혼자만의 책임이 되지 못한다. 머리로는 부정하는 놋시가 몸으로 떠나지 못하는 것은 과거를 벗어나지 못해서다.
그들의 죄는 이미 일어난 과거였다. 돌이킬 수 없어졌다는 시간과 인과의 진리가 거듭되는 자책 속에서 원인이 아닌 이유로, 추악한 변명으로 변하고 있었다.
만약 테스가 자신을 안으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그의 밑에서 짐승처럼 엎드렸던 자신이 이래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선자의 목소리로 그를 욕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그의 뺨을 훔치고 혀를 맞대는 테스의 육체 밑에서 놋시의 몸과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물에 잠긴 것처럼 온통 푸른 새벽 공기가 의식을 떠다니게 만들어 육체와 분리했다.
그때 갑자기 자각이 찾아왔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은 기묘했다. 악몽과 과거에서 흥분을 불러일으켜 그를 발정시키던 테스의 입맞춤을 받으면서도 놋시의 육체는 젖어 들지 않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만드는 박자를 따라 느린 신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때처럼 수상한 감각이 몸속에 차올라도 더워지지 못했다.
놋시는 서늘한 입술이 그의 뺨을 핥고 목을 더듬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맑은 정신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무감각한 육체에 아무렇지 않아 하는 테스였다.
형에게 발정하지 않는 자신의 육체는 분명 놋시의 마음을 안심시켜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해하기 불가능한 현실은 새로운 공포가 됐다. 그는 테스의 혀를 맛보며 노곤해지기만 하고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이 낯설고 어색했다.
한참 뒤 그를 가리던 테스의 그림자가 사라진 뒤에는 더 당황하게 된다. 놋시의 머리를 쓰다듬던 테스의 손은 이제 그의 배를 어루만졌다. 가슴과 등이 바짝 붙게 안긴 그에게 귓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더 자라. 오늘은 나도 일찍 나갈 일 없으니 함께 아침을 먹자.”
“…….”
협정의 조절이 막바지에 달했다는 뜻이구나. 놋시도 황무지의 언덕 위에 차려졌다는 천막의 이야기를 들었다. 테스는 수도의 대사와 게르독의 소란꾼들이 모여 시도르의 운명을 정하는 그곳에 매일같이 나가 자리를 지킨 지 오래였다. 시도르의 모두는 다가올 평화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놋시는 그런 걸 묻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끌어안은 테스를 느끼기만 했다. 숨소리, 온몸의 박동, 들숨과 날숨이 만드는 육체의 일렁임까지. 얇은 옷을 뚫고 온기를 더해 주는 테스의 손만이 아니라 귓가에 들리는 호흡과 그에 맞춰 울리는 전신이 닿아 있어 알지 못할 게 없었다.
그러니 놋시의 감각과 의식은 테스의 뚜렷한 흥분과 저변의 욕망을 알았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당사자는 그런 게 없다는 듯 깊은숨을 흘리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놋시는 눈앞의 벽이 다가온 새벽에 점차 훤해져 색을 되찾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테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신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힘들게 잠을 설친 탓일까. 놋시는 그날 유독 늦게 눈떴다. 방 안에는 샛노란 낮의 햇빛과 8월 끝자락의 열기가 가득했다.
멍한 머리로 바깥의 소란을 듣던 놋시가 아이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허둥거리며 일어났다. 평소라면 데자가 아침을 가져올 시간도 진작 지났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런데 어째서 날 깨우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며 서둘러 얼굴을 씻은 놋시가 나왔을 때 방 안에는 테스가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방 안에는 두 명의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침대 머리맡의 의자 앞에 작은 탁자를 옮겨 놓던 참이었다. 다른 한 명은 들고 온 음식을 그 위에 내려놓기 시작했지만 놋시는 다음을 보지 못했다. 큰 걸음으로 소리 없이 다가온 테스가 그의 시야를 가린 탓이다.
“머리가 젖어 물이 흐른다.”
“예?”
“내가 하지.”
“…….”
테스의 큰 손이 곧 놋시의 머리를 닦아 줬다. 뒤집어쓰다시피 얹어져 있던 무명천으로 머리의 물기를 문지르는 그 손은 익숙했다. 항상 하던 것처럼 당연히 다가와 뿌리칠 수 없는 그런 손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자리를 지키던 놋시의 당황한 눈에도 테스는 이런 보살핌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언젠가 이랬던 적 있었을까. 설마 있더라도 기억나지 않는 동굴의 시간이었을 텐데.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준 테스의 손은 물기가 남은 목덜미까지 살핀 뒤 떠났다. 시야가 트인 놋시의 앞에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식사만 남아 있었다.
차려진 음식은 아무리 봐도 간단하지 않다. 곱게 구워진 뜨듯한 빵에는 무늬가 찍혀 있었다. 썰려 나온 고기와 국물을 대신해 곁들여진 물기 많은 야채를 구경하고 선 그를 테스의 손이 자리로 이끌었다.
놋시가 앉은 곳은 의자가 아닌 침대였다. 데자가 가져다주는 가벼운 아침을 혼자 먹을 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는데, 두꺼운 접시로 테스를 위해 꾸며진 상을 앞에 두자 무례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테스는 무심히 식사를 시작했고 빵을 뜯는 그의 옆에서 놋시도 음식을 들게 됐다.
“제가 늦잠을 잤군요.”
“모처럼 푹 잔 것 같아 다행이다.”
“…….”
놋시의 그릇에 고기를 덜어 주는 테스는 일찍 깬 듯했다. 성안의 할 일을 하던 모양인지 바지와 윗도리뿐인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심지어 칼도 차지 않았다. 놋시는 테스의 평화로운 모습이 어떤 뜻일지 추측하며 주는 음식을 먹었고 오래지 않아 답을 얻었다.
테스는 어젯밤 드디어 협약의 조건이 전부 정해졌다고 말했다. 왕의 대사는 사막의 이들과 증인을 교환한 뒤 수도로 돌아갈 테지만 오늘 밤에는 시도르에서 축하연이 열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열흘 뒤에는 모든 게 바뀐다.
“열흘 뒤에는, 우리도 수도로 간다.”
“열흘이요? 그렇게 빨리…….”
“그래.”
“그러면 시도르는 어떻게 되나요?”
“시도르에는 다른 사람이 오지. 지금쯤이면 이름이 정해졌을 시기다.”
“…….”
놋시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 테스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좁은 탁자를 가득 채운 음식은 둘이 먹기에 너무 많다.
그들이 먹고 있는 시도르의 식사는 권력에 대한 대우가 아니라 진심 어린 존경이 만들어 낸 음식이었다. 짧게 머무른 놋시도 뼛속 깊이 알게 된 그들의 정성조차, 테스를 이곳에 붙잡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왕의 대사를 위한 축하연은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라 시도르의 모두가 진심으로 감사하는 잔치였다. 그날 성안은 무척 바빴다.
사막의 게르독을 물리친 것은 시도르의 전사들과 타게신이지만 이후의 평화를 약속받은 것은 왕의 대사가 얻어 낸 성과로 칭송됐다.
놋시는 시도르의 성에 언제나 사람이 많아 항상 잔치처럼 음식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은 평소의 몇 배로 규모가 컸다.
일이 하도 많아 그도 도울 수 있었다. 힘쓰는 곳에서는 못 하게 내쫓겼지만 애들도 다 불러다 반죽을 치대는 상황이라 할 일을 찾기 수월했다.
높은 이들을 위해 좋은 술을 골라내는 노인과 함께 여럿이 마실 술과 음료수를 준비하는 게 놋시의 몫이 됐다. 오래된 술에 몸에 좋은 약초와 향이 좋은 껍질을 넣어 맛을 돌봤다. 낮부터 밀려든 사람들에게도 항상 내주던 쓴 맥주가 아니라 통에서 꺼낸 과일주가 나가고 있었다.
성 뒤편의 널따란 저장고에 둘러앉은 노인과 놋시는 특별히 좋은 술을 따로 골라냈다. 값싼 술에는 약초를 섞고 향을 더하며 끊임없이 병을 채웠다.
젊은이들 몇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계속해 술을 날랐다. 모두 웃는 얼굴이다. 놋시는 노인이 식사할 때 함께 간단히 허기를 때웠다. 데자가 그를 부르러 오기 전까지는 해가 진 줄도 모를 만큼 바쁘게 시간이 흘러갔다.
하루가 금세 지났기 때문일까. 놋시는 자신에게 진짜 할 일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데자가 데리러 왔을 때도 그는 그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른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놋시가 아니다. 그는 타게신의 주인으로 불리는 노리로 알려졌고, 그렇다면 이런 중요한 연회에서는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노리 님, 시간이 없어요.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제가요?”
“네. 대사님이 주인님을 만나니까요. 타게신의 옆에 앉으니 오늘은 색을 맞춰야 합니다. 제가 보고 왔지요. 왕이 준 허리띠를 했으니, 보석의 노란색에 맞춰 입어야죠.”
“…….”
“마침 좋은 게 있어요. 작년에 사매로노의 상인 무리가 게르독에게 당했을 때, 물건을 되찾아 줬더니 금색 비단을 줬거든요?”
“금색이요?”
“네. 화사하고 아주 좋은데, 그게 참, 타게신의 머리카락을 놀리는 거라고 말이 나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거든요. 창고에서 썩을 판이었는데 잘됐죠. 노리 님은 머리가 새까매서 잘 어울릴 겁니다.”
“……제가 꼭 그 옆에 앉아야 하나요?”
“사람 많은 게 싫으시죠? 이놈들이 어찌나 마실지 저도 걱정됩니다. 그래도 잠깐만 참으세요. 일은 다 끝난 참이니까 금방 술판이 벌어질 테고, 그땐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
“왕의 대사가 꼭 노리 님을 보고 싶다고 했어요. 타게신의 주인이니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놋시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깐 사이 그를 많이 알게 된 듯했다. 타게신의 주인이라며 향하는 시선을 거부한 적은 없었는데, 불편해하는 걸 어느새 알아본 걸까? 그것 말고도 뭘 알아봤을까?
의미 모를 긴장으로 뻣뻣해진 놋시에게 데자는 얼굴과 손을 씻을 더운물을 떠다 줬다. 그녀는 테스의 방에 있는 옷장을 열어 이제껏 놋시가 본 적 없는 옷을 들고 나왔다.
새하얀 윗도리는 그의 몸에 딱 맞아 갑갑해 보이지만 앞쪽에 단추를 잔뜩 달아 입고 벗을 수 있었다. 손등을 덮는 소매 끝에는 축복을 뜻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누가 봐도 놋시를 위해 만들어진 새 옷이었다.
“드로네가 엊그제 완성한 옷입니다. 좋은 자리에 입고 나가게 돼서 잘됐어요.”
“드로네가 만들었다고요? 값을 치러야…….”
“나중에 고맙다고 하시면 됩니다. 자, 머리를 넘겨 보세요.”
“그래도 시간이 많이 걸렸을 텐데.”
데자는 과분한 단장에 당황하는 놋시를 무시하며 그의 팔을 마음대로 움직여 새 옷을 입혔다. 부드러운 흰 천은 속이 보일 듯 가벼웠지만 꼼꼼한 바느질로 모양 잡혀 놋시의 몸에 피부처럼 들러붙었다.
상체는 딱 맞지만 바지 위로 길게 늘어지는 하단은 그렇지 않다. 앞은 허리를 가리고 뒤는 무릎에 닿는 불균형한 모양의 기다란 윗도리는 사로나에서도 축제 때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옷차림이었다.
아이와 여자는 이 위에 허리띠를 하고, 어른은 이 위에 재단이 된 어깨띠를 두른다. 놋시는 데자가 말하는 금색 비단을 허리띠로 두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천은 그렇게 쓰기엔 아까운 보물이었다.
금사와 은사가 섞여 밤에도 빛을 발하는 노란 천은 길이가 놋시의 키보다 길었다. 들어서 눈앞에 가져다 대면 시야를 막지 않지만 떨어뜨려 놓으면 반짝거리는 색 때문에 다른 걸 보지 못했다.
“이런 천은 처음 봅니다.”
“네. 함부로 잘라서 옷을 만들기도 아깝죠. 넓이가 애매해서 어떻게 쓰나 싶었는데 노리 님은 키도 크셔서 괜찮을 것 같네요.”
“…….”
데자는 반짝임을 품은 별 무리 같은 노란 천을 놋시의 목덜미에 늘어뜨렸다. 어깨를 가리고 허리 뒤로 양 끝을 모은 그녀가 어떻게 매듭을 지으니 정말 그렇게 됐다. 앞뒤로 길게 늘어지는 천 자락이 일부러 만든 장식처럼 사치스러웠다.
낮이라면 더울지 모르지만, 해가 진 뒤에는 여름에도 쌀쌀한 산맥과 사막의 가장자리 지역에서는 적당한 옷차림이었다.
“다 됐습니다. 역시 색이 어울리네요.”
“…….”
데자는 놋시를 욕실의 거울 앞으로 끌고 가 세웠다. 수도의 귀한 이들처럼 보석으로 된 줄을 휘감지 않았지만 그의 평생에서 오늘이 제일 화려하게 입은 날이었다.
“달맞이 날이었다면 꽃을 달 수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아쉽네요.”
“이걸로도 충분해요.”
“맞아요. 늘씬하셔서 밝은색도 거추장스럽지 않고 너무 좋네요!”
만족스러운 듯 놋시의 소매 단을 정리해 주던 데자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에 놋시는 여유 있게 거울을 볼 수 있었다. 거울 속의 사람은 타게신의 주인이란 이름에 걸맞아 보였다.
사치스러운 밝은색 옷을 입고 얼굴을 드러낸 그는 머리가 검고 얼굴이 하얗다. 조용한 눈동자는 다물린 입술과 어우러져 이름이 주는 고귀함을 흉내 내고 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반짝거리는 천이 금빛 은빛을 발했다. 사로나의 시내에서도 보기 어렵던 화사한 색이었다.
만약 이게 타게신의 주인인 노리라면. 그렇다면 무엇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테스는 그들에게 그렇다 말했고, 그러니 놋시도 그렇게 따라야 한다.
돌아온 데자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내려가며. 놋시는 가리는 것 없이 드러난 자신의 얼굴이야말로 당겨지면 벗겨질 장식 같다고 생각했다.
연회는 놋시의 상상을 뛰어넘게 거창했다. 그가 술병을 만지고 노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동안 바깥의 세상은 변해 있었다.
성을 둘러싼 돌담에서 이제껏 열린 적 없던 문이 열렸고 마을로 이어지는 커다란 길이 사람 머리로 채워졌다. 뒤로 갈수록 탁자도 뭣도 없이 줄줄이 이어진 자리는 성벽을 벗어나며 넓게 퍼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앞마당에 만들어진 자리는 급조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힘들여 모아 온 꽃과 축하하는 분위기 덕에 여름밤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성의 앞을 배경 삼아 새로 바닥을 놨다. 제일 높은 탁자가 그 위에 자리했고 앞으로는 기다란 잔칫상이 여러 줄 놓였다. 놋시의 자리는 높은 탁자였다. 그 자리가 대사와 타게신의 자리였다. 놀랍게도 모두가 선 채로 놋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흥겨운 이들의 소란보다 높은 곳에 서 있는 왕의 대사는 머리가 희끗했다. 목소리가 쉰 중년의 남자는 놋시에게 타게신의 짝을 뵙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놋시는 기회가 있다면 사로나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너무 높고 너무 넓었다. 긴장과 당황을 드러낸 그에게 대사는 수도에 오거든 인사를 나누자며 말을 끝냈다. 놋시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다음 값비싼 옷차림의 남자가 놋시의 곁에 다가와 선물이라며 상자를 전했다. 놋시는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테스가 그를 대신하듯 대화를 이어 갔고, 대사의 입에서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놋시의 침묵이 불쾌하지 않은 듯했다.
“수도로 가거든 식을 올리겠군. 나는 가지 못할 것 같아 그 선물을 미리 했네.”
“돌아오셨을 때 제가 있지 않아도 그가 있을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왕의 입이 쓰겠어. 소문이 많던데.”
“소문은 항상 많습니다.”
테스와 대사는 놋시가 모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자리에 앉는 게 신호인 것처럼 어디선가 북소리가 났다. 놋시는 내려다보이는 전체가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박동에 따라 시선을 모으는 걸 지켜봤다.
곧, 대사의 곁에 서 있던 하나가 큰 소리로 협약의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놋시의 귀에는 낯선 이름이 많았지만 내용이 미리 알려졌는지 듣고 앉은 시도르의 이들은 질문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발을 굴리는 소리가 북보다 컸다.
마침내 나온 환호성은 정직했고 늘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새로운 소식을 위한 날이 아니라 얻어 낸 끝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시도르의 모두는 왕과 타게신을 찬양하고 있었다. 평화를 축하하는 그들은 마침내 게르독을 몰아낸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사방에서 외쳐 댔다.
죽어 간 친구를 그리워하는 자도 있었고 원한을 갚아 기쁜 자도 있었다. 흥에 겨운 이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왕의 대사와 테스의 옆자리에 앉은 놋시는 모든 걸 봤다. 음식이 얼마나 남아도는지, 계속해서 들여오는 술병이 얼마나 빨리 비워지는지 볼 수 있었다. 술과 평화에 취한 이들이 떠드는 모든 말도 들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제껏 놋시가 알던 고향의 잔치와 다르지 않았다. 규모가 커지고 사람이 백 배로 많은 것을 빼면 모를 일이 없다.
하지만 그날 놋시가 처음 보게 된 것은 시도르의 복잡한 문화가 고스란히 표현된 정교한 음식이 아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테스의 명령에 사람이 죽는 걸 봤다.
외침이 잦아든 연회의 끝에는 인질 교환이 있었다. 자리에 끌려온 이들 중에는 수도로 데려갈 인질이 아닌 배신자도 섞여 있었고 그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타게신의 명령은 짧았다. 늘어선 이들이 죄명을 읊은 뒤 묶인 자들의 손과 발을 하나씩 잘랐다. 놋시는 비명 지르지 않았고 얼굴을 굳히지도 않았지만 해쓱하게 질리는 낯빛을 막지 못했다.
사람이 죽는 걸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었으니까. 그러나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손과 발이 차례로 잘리며 시체가 나오는 건 죽음이 아니라 살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며 흥겨워하는 것 역시 놋시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사냥꾼의 싸움과 병에 걸린 곰의 살육을 봤던 놋시도 다수의 칼이 만들어 내는 난잡한 죽음에는 놀라고 말았다.
게르독이 시도르를 쥐어짠 세월은 길었다. 탁자 위에 흐르는 술만큼 많은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적의 죽음에 흥겨워하는 이들은 험악한 인상의 병사들만이 아니다. 놋시를 향해 인사하고 좋은 것만 주려던 이들이 살육의 흥분에 취해 탁자를 두들기고 있다. 환호성과 노래가 어우러진 사람의 소음이 별이 가득한 하늘에 닿을 듯 높아져 갔다.
술보다 독한 흥분으로 팽팽해진 열기가 주변을 점령하고 치밀어 오른다. 놋시는 이제껏 손댈 생각도 못 한 기다란 잔을 들어 입을 적셨다. 그가 정성껏 맛을 낸 향기로운 술이 물처럼 길게 넘어갔다.
시체를 치운 뒤에도 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흙바닥에 스며든 검은 피처럼 새까만 하늘에서 별이 빛났다. 모두가 게르독을 욕하며 달아올랐다. 밤을 새울 것처럼 노래가 끝나질 않는다.
테스는 놋시에게 떠날 자유를 줬다. 대사는 벌써부터 밑에 내려가 흉터가 많은 노병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너는 먼저 들어가라. 나는 남아서 상대를 해줘야 하니까.”
“…….”
그가 놋시의 질린 얼굴을 봤을까. 앞을 향해 앉아 있던 놋시는 옆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소리만 들었다. 망설이는 놋시의 귓가에 투박한 남자들의 걸음과 다른 자잘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데자가 온 듯하다.
놋시는 데자의 손에 이끌려 높은 자리를 벗어났다. 데자에게서도 술 냄새가 났지만 그녀가 마셨는지 취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리 님, 식사는 하셨어요? 괜찮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동정이 담겨 있었지만 그것은 놋시를 향한 것이었다. 데자는 곧 흥겨움을 숨기지 않는 말투로 놋시에게 불놀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여기는 술이나 마시고 재미가 없죠! 저쪽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좀 들고 가세요.”
“타게신이, 먼저 들어가라고…….”
“그분은 밤새 술을 받아야 하니 됐어요! 우리도 마지막 인사를 해야죠. 안 그래요?”
“…….”
그새 소식이 전해졌구나.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걸음을 멈췄던 놋시는 틈을 주지 않으며 이끄는 손에 말이 막혔다. 데자의 활달한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작지 않지만 말하는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왕이 타게신을 부르니 가야지 별수 있겠어요? 게르독도 타게신이 떠나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니, 어지간히 무서운가 봅니다.”
납득한 목소리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게르독의 조건은 놋시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읊어 대는 선언문을 빼놓지 않고 들었으니 이것은 아마 글로 남기지 않는 뒤편의 약속일 듯하다.
“나쁜 짓을 안 하면 왜 벌을 받겠어! 안 그래요? 타게신이 없으면 다시 시도르를 먹으려 들겠지만, 그렇다고 저희 걱정하실 건 없어요! 여기도 이제 살기 좋아질 테니 꼭 나중에 보러 오세요. 이제 농사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소망과 꿈이 담긴 목소리가 놋시를 데려간 곳은 성 뒤편의 내리막길이었다. 평소 닫아 두는 큰 문을 대신해 짐수레와 사람이 오고 가던 입구 앞으로 아이와 노인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여자의 웃음과 노인의 노래가 채운 따뜻한 공기에는 달달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노리 님, 여기에 앉으세요.”
불가에 모인 이들은 거의 다 서 있었다. 데자는 자리를 깔아 둔 편평한 바닥에 놋시를 앉혔다. 지대가 높아 구경하기 좋은 자리에는 다리가 불편한 노인과 갓난아기를 안은 여자들이 몇 있었다.
“노리 님, 이것을 드십시오.”
“노리 님, 이것을 마시세요.”
놋시는 언제나처럼 쏟아지는 친절에 둘러싸여 밤공기를 밝히는 불을 구경했다. 시끄럽게 활기찬 목소리들은 그의 침묵을 개의치 않았다. 파란색 노란색 연기를 피우던 놀이꾼이 불에 꽃을 피우기 시작하자 모두들 웃기 바빴다.
계속해 음식을 가져다주는 데자에게 고맙다 말한 놋시는 옆 사람을 흉내 내듯 꿀에 적신 빵을 씹었다. 모두가 어둑한 하늘 위로 버섯처럼 피어오르는 붉고 푸른 연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자신은 왜 이렇게 넋이 나갔을까. 무엇에 놀랐는지 고를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늘 놋시는 전쟁터에서 칭송받는 타게신의 모습이 어떤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도둑의 손을 자르고 배신자의 혀를 자르라 명령하던 침착한 목소리는 파편에 불과할 잠깐으로도 놋시가 모르던 세월을 가르쳐 줬다.
불현듯 그가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며 지도를 보던 과거가 떠올랐다. 타게신의 이름으로 오랜 세월 국경 지대를 지켜 온 테스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닌데. 이제껏 몰랐던 것도 아닌데 무엇에 이리 놀란 걸까?
생각은 혼자 널뛰었다. 약간의 술과 긴장으로 피곤해진 머리가 한자리에 주저앉아 본 것을 되풀이하다 알게 된다.
놋시가 오늘 밤 처음으로 배운 것은 테스가 가진 살인의 기술이 아니라 그가 내리는 명령의 권위였다. 그가 오늘 처음 본 것은 살인도 죽음도 아니다. 타게신의 말을 기다리며 칼을 들고선 남자들이, 이제껏 몰랐던 놋시의 무지를 일깨워 줬다.
어느새 모두가 불에 가까워졌다. 서 있는 놋시의 곁에는 어른의 웃음이 어우러지고 있다. 억지로 재우지 않아도 놀다 지친 아이들이 줄어들 시간이다.
깊어진 밤은 뜻이 붙은 노랫소리와 부추김으로 이어졌고 모닥불은 계속해 신기한 연기를 냈다. 물 위로 흘러가는 꽃처럼 밝은 연기 덩어리가 하늘로 날아갔다. 사방이 길이라도 갈 곳이 없는 놋시와 다르게 자유롭고 장난스러운 실종이다.
저게 어디서 사라지는 걸까. 고개를 빼고서 흐릿한 궤적을 따라가던 놋시의 눈이 문득 주위의 변화를 눈치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불놀이를 보지 않는다.
아이를 재우고 돌아와 떠들던 여자도, 졸음을 버티며 박자를 맞추던 노인도, 풋내 나는 장난으로 서로를 귀찮게 하던 소년과 소녀도 한곳을 보고 있다.
시선의 끝을 쫓아간 놋시도 보게 된다. 눈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대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림자를 벗어나 서 있는 테스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지만 벌레를 유혹하는 불꽃처럼 시선을 모으는 건 따로 있다. 곧은 얼굴에서 보기 힘든 미소가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놋시는 불가로 내려오는 테스를 헛것인 양 바라봤다. 떨어진 별을 보듯 그를 보는 건 남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이 높은 콧대 아래서 항상 단호하던 입매가 옅은 미소로 풀리자 사람이 달라 보였다. 엄격함이 가리던 화려한 이목구비가 갈아 놓은 칼날처럼 빛을 발했다.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며 남의 입이 수군거렸다. 하지만 놋시에게는 그렇지 않다. 놋시는 세상에서 테스의 웃음이 낯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를 홀리는 건 미소가 아니라 깊숙한 눈동자의 열기다. 타는 불이 비추듯 일렁이는 무엇으로, 술과 노래가 아닌 것들로 가득 찬 테스의 얼굴이 놋시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다가와 뺨을 감싸는 손가락은 평소보다 더웠다. 어쩌면 놋시의 얼굴이 하도 뜨거워 차가운 손이 닿자마자 데워졌을지도 모른다.
“방으로 돌아가자.”
“…….”
“어서.”
놋시의 다리가 풀렸다. 밤하늘에 먹히는 연기처럼 허둥거린 몸이 붙드는 팔에 안겨 걷기 시작했다.
방에 돌아온 놋시의 몸에는 땀이 솟아 있었다. 그 뺨에 입 맞춘 테스도 알았을 것이다. 찬지 더운지 모르겠는 입술이 그의 눈 밑 언저리에서 중얼거렸다.
“땀이 났구나.”
“불이 뜨거워서…….”
놋시가 힘들게 꺼낸 말은 천 조각보다 못했다. 테스의 손 밑에서 사부작거리는 잡음을 내며 구겨지던 금빛 천이 흘러내렸다. 눈두덩을 문지르고 광대뼈를 따라가던 입술이 목덜미로 흐르는 것과 동시에 등허리를 붙잡은 손이 하나 남은 옷을 움켜쥔다.
그러자 놋시의 입에서 걱정이 터졌다. 연약한 천과 곱게 달린 앞 단추가 끄는 힘에 금방이라도 뜯길 것 같다. 들러붙은 옷자락이 어깨에 팽팽히 당겨져 찢어질 기세다.
“그, 잠깐……. 흐읍, 읏.”
터진 걱정이 먹힌다. 놋시의 입을 막으며 입술을 겹친 테스의 혀에선 씁쓸한 술맛과 옅은 단내가 났다. 뭔지 알 만큼만 머무른 그것이 곧 익숙한 맛으로 변했다. 새벽의 숲처럼 진하고 서늘한 테스의 맛, 테스의 숨이다.
“후으, 흣…….”
“흐읏, 으음…….”
그의 몸을 끌어안은 테스가 속을 채우고 있다. 놀란 호흡을 누르며 들어온 혀가 서늘한 감각으로 입안의 점막을 문질렀다. 느리고 한가한 움직임에 열려 버린 입과 달리 놋시의 심장은 들쑥날쑥 뛰어갔다.
테스가 취한 걸까. 이별의 인사라며 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웃음을 흘릴 만큼 취해 버린 걸까.
하지만 취한 사람처럼 다리가 풀리는 건 테스가 아니다. 힘을 잃은 놋시의 사지는 붙드는 팔이 없다면 진작 바닥에 떨어진 금빛 천처럼 흘러내릴 터였다.
기름 등잔의 불이 몇 개나 켜져 있는 방인데도 놋시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앞을 가리고 입을 막은 테스의 육체가 온몸을 조이듯 힘을 주고, 그대로 하나가 될 것처럼 끌어안아 왔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움직이던 손이 간신히 잡은 것은 테스의 옷이다. 가슴께를 긁으며 매달린 그의 손 밑에서 단단한 몸이 들썩였다. 놋시의 입도 거기에 맞추듯 터졌다.
“헉, 흐읍, 흣…….”
“놋시.”
길었던 입맞춤을 끝내고도 떠나지 않는 입술이 그의 귓불을 깨물고 목덜미에 한숨을 내쉰다. 입이 아닌 목에서,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오듯 긁히는 숨결이 놋시의 이름으로 새어 나왔다.
“옷이, 아, 옷을 벗어야…….”
“…….”
“단추가 떨어지면…….”
놋시를 압박하던 어깨가 짧게 흔들렸다. 서두르는 말이 들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곧 놋시는 더 이상 허공에 붙들려 서 있지 않게 된다. 크고 높은 침대에 그를 앉힌 테스가 긴 옷자락 밑으로 맨살을 쓰다듬었다.
마디가 도드라진 긴 손가락이 허리 뒤의 빈 곳을 건드릴 때마다 놋시의 등줄기가 떨려 왔다. 눈앞이 트이고도 보이는 게 없던 그의 손이 다급해진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불가능해진 머릿속에는 단추를 풀어야 한다는 다짐뿐이다.
부들거리는 놋시의 손은 자꾸만 엇나가며 헛손질이 된다. 나란히 앉은 넓은 어깨의 그림자 속에서 놋시는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숙인 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지 않기 위해서다.
그를 앉힌 테스는 자신의 윗도리를 금세 벗었다. 벗은 어깨가 굴곡을 만들며 긴 팔로 이어지고 커다란 그림자를 작게 뭉쳤다. 어깨를 좁히고 단추를 푸는 놋시는 그보다 더 작아져 있다.
불빛을 등지고 다가와 앉은 테스의 손은 끊임없이 그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얇은 천에 가려진 등을 더듬다가 그 밑으로 뼈를 만지기도 하고, 더 밑으로 내려가 살을 만지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단추에 매달린 놋시는 폭이 넓은 바지 위로 허벅지를 더듬던 손이 더 이상 가리는 것 없이 닿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아차렸다. 정신을 차리자 무릎을 넘어 흘러내린 바지가 후들거리는 종아리에 걸려 있었다.
희게 드러난 놋시의 살 위로 펼쳐진 테스의 손이 땀으로 습한 피부를 만졌다. 방 안의 공기가 만들어 낸 한기와 손바닥의 뜨거움이 교차한다.
그 적나라한 대비가 놋시를 눈뜨게 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던 고개가 들리며 진득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만다.
“단추가…….”
흐릿한 목소리가 사그라진다. 놋시는 자신의 입이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그를 보는 테스의 눈은 우물 바닥처럼 검었다. 등 뒤를 채운 노란 불빛을 거스르는 얼굴에서 흰자위가 만든 분명한 선을 두르고서 새까매진 눈은 신기하게 맑다. 달을 담은 우물처럼 일렁이는 어둠이다.
놋시의 손이 길을 잃고 멈춘다. 엉성한 손끝에서 풀리던 단추는 아직도 몇 개가 남았다.
괴상한 초조함에 땀을 내던 목덜미가 그새 식어 있었다. 습기로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더운 손바닥이 뒷목을 감싸자 그걸 알겠다.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 조용해진 놋시에게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애원했다.
“혀를 내밀어 봐라.”
“…….”
“조금만…….”
어울리지 않게 조르듯 사라지는 끝에서 확연한 감정이 흘렀다. 쏟아졌다. 놋시의 얼굴에 스며들던 테스의 시선이 코끝을 지나 입술에 머물렀다.
입술이 닿지 않아도 닿은 것처럼 간지러워진다.
움찔거린 놋시의 입술 사이로 작은 혀가 나와 아래를 핥고 숨는다. 그늘이 깊어진 목덜미에서 소리를 내며 침이 넘어가고, 느린 숨이 어깨를 들췄다 내려놓고, 다시 혀가 보인다. 물기 어린 살덩이가 조금씩 밖으로 나와 아랫입술을 가릴 만큼 내밀어졌다.
멈칫거리고 부들거리던 혀끝이 미지근한 공기에 말라 갔다. 들뜨듯 열린 작은 틈새로 혀를 내민 놋시의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부옇게 눈앞이 번졌다.
그러다 갑자기. 세상의 밝음과 어둠이 뒤흔들리며 감각이 사라진 혀가 다른 끝을 맞았다.
다가와 기울어진 테스의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나와 끝을 비비고 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부딪히지만 겹쳐지지 못한다. 길게 나온 속살이 물컹하고 끈덕진 마찰을 반복하며 조금씩 그를 빼내고 삼켰다.
눈이 감긴 놋시의 고개가 테스의 손바닥에 잡혀 구르고 그의 혀가 끝을 빨리며 몸서리치는 사이. 저 밑에서는 허벅지가 들리고 있다. 바지를 벗어난 다리 사이로 커다란 손이 들어가 습해진 피부를 누르며 자리 잡는다.
애틋하고 간지러운 감각이 전신으로 번지며 놋시를 추락시키고 등허리를 잡아끈다. 그의 허벅지를 벌리고 들어온 테스의 손이 손가락으로 변해 꿈틀거렸다.
그 손가락이 젖은 살을 더듬는 감각이, 제멋대로 몸을 떠는 성기를 훑고서 그 아래 부드러운 피부를 헤집는 손끝이, 약간의 습기로 축축해진 좁은 입구를 건드려 온 첫 마디가 놋시의 정신을 끄집어냈다.
안 돼. 또다시 살을 열고 몸을 섞으면 안 된다고, 자신도 모르는 저 속의 열기가 죄보다 두렵고 끔찍해 놋시의 입이 외치고 만다.
“속에는, 흣, 아니…….”
“…….”
“그, 거기는, 그러면…….”
두서없는 말이 막연하다 점차 커진다. 잊고 있던 두려움을 모조리 꺼내 온 목소리가 떨리는 속삭임을 이어 갔다.
“아기가 생기면, 그러면 안 됩니다.”
“……아기?”
“필요하면, 제, 그때처럼,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해도 되지만.”
“…….”
“살을 열고, 그러면…….”
섬뜩한 만약을 말하기조차 힘들어 소리가 멎는다. 빼앗겼던 입과 혀를 되돌려 받고도 놋시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물이 차오르듯 흔들리는 놋시의 눈이 테스를 올려다봤다. 열병의 허기와 집요함 없는 그의 몸을 데워 놓고 헤집으려는 형에게 동생의 눈이 애원하고 있다.
방 안은 조용해졌다. 나무의 속을 태우는 불처럼 은근한 잡음이 사라지자 꺼진 모닥불인 양 가라앉는다. 정적을 몇 번이나 혼자 삼킨 놋시가 고요해진 눈을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린다.
그러다 용기를 내고, 그러다 두려워하고, 그러다 어쩔 줄 몰라 다시 바라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목소리가 말을 만들어 본다.
“테스…….”
“…….”
“화가 났다면…….”
그 목소리에 담긴 서글픈 후회가, 불안의 싹을 드러내고 만 공포가 테스를 놀라게 했다.
테스는 화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분노는 그 안에 없다. 그는 당황했고 자책하며 흥분으로 욕망에 차 있었다.
아기. 그와 놋시의 자식이라니. 생각도 해본 적 없는 확실한 가능성이 심장을 삼켰다 뱉는다. 펄떡거리는 맥박이 머리를 두들겼다. 이제는 가능하다. 모든 게 달라진 지금은 꿈이 아닌 현실로 앞날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나 놋시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손바닥에 들러붙는 살결을 파고든 테스가 살을 열고 몸을 섞어 모든 걸 쏟아 내도 지금은 이루지 못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아무리 네 속을 적셔도 결실은 싹트지 않을 거라고……. 대답하려 열리던 테스의 입이 다시 닫혔다.
안심하게 하고픈 그의 마음이 더럽고 추악한 욕심에 걸렸다. 놋시의 눈에 스며든 두려움을 지우고서 자신으로 채울 수 있다는 무분별한 욕망이 그의 몸을 부추기고 있다.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얼마나 오래 말을 잊었을까.
테스는 기다리고 걱정하는 놋시를 내려다봤다. 커다랗게 열린 청회색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덧씌우며 깊이를 더했다.
그는 이제껏 놋시의 걱정을 알고 있다고 믿어 왔다. 열병의 피로가 가시고도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몸이 그래서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집을 잃고 고향을 떠난 마음은 힘든 게 당연하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면서도 젖지 않는 몸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놋시의 걱정은 그만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 도착해 무서운 꿈에 다치던 동생의 마음을 둔한 그가 미처 모른 두려움이 좀먹고 있었다.
그 순간 테스는 결심했다. 그는 놋시가 믿게 할 터였다. 놋시는 테스의 무엇을 가져도 되지만 자신은 결코 동물의 욕망으로만 그의 몸을 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니……. 화나지 않았다.”
“…….”
“네 몸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럴 수 없지.”
“…….”
“너는 이미 나를 가졌다. 이 몸을 어떻게 쓰든, 잘라 내서 살을 먹어도 상관없지만…….”
거친 말에 움찔한 놋시의 눈에서 은은한 빛이 반짝였다. 차분해진 테스의 손이 놋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가 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욕망을 배출하려 너를 만지는 게 아니야.”
“…….”
“너를 원해서……. 모든 걸 하고 싶을 뿐이지.”
입술이 닿으며 말이 잠겼다. 놋시의 뺨을 핥고 목으로 내려간 그의 혀끝에 짠맛이 돌았다. 서걱한 소금 덩어리를 핥을 때처럼 깨끗한 맛이었다.
식어 있는 몸을 되돌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늘어진 옷자락 밑에서 슬며시 부풀어 올랐던 놋시의 성기는 아직도 발기하지 못한 상태였다. 연해진 살덩이는 테스의 손가락에 끝을 잡히고 손바닥에 몸통을 감싸이고서야 서서히 단단해져 갔다.
새로운 자극에 놀란 놋시의 등허리가 세워지고 두 손이 일어서지만 고개는 떨어지지 못했다. 덜컥대던 머리가 뒷머리를 당기는 손에 이끌려 젖혀진다. 벌어진 입이 막히고 토해진 숨이 먹힌다.
테스의 이에 깨물리고 빨리는 입술 사이로 높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조이는 힘에 버티듯 더워진 오메가의 성기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머리를 세우고 있다.
“읏, 아, 흐응…….”
“후우…….”
벗은 가슴에 부딪힌 놋시의 손이 잡을 곳을 찾지 못해 미끄러진다. 테스의 탄탄한 가슴과 어깨도 땀으로 촉촉해져 있다.
술에 취하지 않는 육체로도 그는 오늘 웃음을 보였다. 놋시의 혀를 물고 살을 만지며 끊이지 않던 웃음이 속에서 키워져 몸을 덥혔다. 더워진 손가락이 자잘한 애무로 부드러운 몸을 만지자 불이 번지듯 흥분이 옮겨 갔다.
“흐응, 읏, 으읏.”
그의 손에 잡혀 입을 벌린 놋시가 뜨거워진 숨을 뱉으며 신음했다. 젖은 혀가 비벼지듯 서로를 마찰하는 피부가 같은 온도로 달궈지고, 단단한 손바닥을 따라 하듯 표피가 팽팽해졌다.
그 순간 바로 밑에 물이 가득한 것처럼 부풀어 오른 성기가 풀려난다. 들뜬 몸을 짓누른 테스의 손등이 옷자락을 들치며 바깥으로 나와 돌아다녔다.
땀과 습기로 끈적해진 테스의 손가락이 남은 단추를 풀고, 맨살을 따라가 등으로 올라간 손이 팔을 띄우며 앞으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벗겨진 하얀 윗옷이 어딘가로 던져지며 잡음이 멈춘다.
벗겨 낸 옷보다 더 하얀 놋시의 어깨가 테스의 눈앞에 드러나고, 만져지고, 가쁘게 들썩인다. 허리를 잡은 손과 머리를 잡은 손이 옮겨져 이곳저곳을 만지다 허벅지를 들었다.
당기고 밀리며 굽혀진 놋시의 무릎이 느슨하게 펼쳐진 것은, 발가벗은 그의 몸이 다리를 벌리고서 테스의 허벅지에 앉은 다음이었다.
허리를 마주하고 콧날을 맞대고서 입안의 숨이 밖에서 섞이는 그 순간. 바라보게 된 허리 사이에서 불거진 핏줄을 드러낸 테스의 성기가 놋시의 살에 머리를 비볐다. 부드럽고 습한 사이를 헤매던 그것이 손에 잡혀 짝을 만난다. 커다란 손에 붙잡힌 두 개의 성기가 서로를 키우며 몸을 붙였다.
“아, 읏, 테스…….”
숨을 멈추며 일어서던 고개가 뒷목을 잡혀 멈춰 서고 다음 순간 매달려 온다. 갈 곳을 잃은 놋시의 손이 테스의 어깨를 붙들고 머리를 기대는 그 밑에서 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살갗이 젖어 들었다.
놋시는 돌연히 어른거리는 노란 불빛을 봤다. 벽에 붙은 좁은 선반 위에서 기름 등잔의 그림자가 길쭉했다.
그의 눈이 보게 되자 코도 냄새를 맡고 귀도 소리를 듣는다.
숨 쉴 때마다 들어와 속에 스며든 무겁고 서늘한 향이 또다시 입안을 돌아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피와 쇠의 냄새를 벗어난 테스의 체취가 더운 공기와 함께 그를 흠뻑 적시고 있다.
작고 기다란 노란 불빛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인 것 같다.
하지만 방 안에는 미끄덩거리는 신음이 울려 퍼진다. 흐응, 흐응, 입을 열지 못하고서 몸을 울려 나오는 소리는 그의 것이다.
테스의 어깨를 끌어안은 몸이 그런 소리를 내고 있다. 소리 내며 흔들린다. 다듬어진 몸과 견고한 손에 붙잡힌 성기에 생경한 자극이 일어날 때마다 등허리가 저절로 떨렸다.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던 거지. 놋시의 기억은 길을 잃었다.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몸을 섞으면 안 된다고, 아기가 생기면 안 된다고 말했던 것 같다. 너를 원할 뿐이라고 대답을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놋시는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한다. 테스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깜깜해졌다. 꿈속의 환상처럼 전신이 들떠 올랐다.
벌거벗은 사지를 겹치고서 입술을 깨무는 놋시의 귓가에 뜨거운 호흡이 계속해 쏟아졌다. 벗은 몸을 만지는 손처럼 젖어 있는 테스의 혀가 귓불을 빨고 목을 핥았다.
살을 깨물고 녹여 먹듯 이가 움직이고 혀가 문지를 때마다 몸속이 화끈거렸다.
불이 붙은 것처럼 까마득해진 정신은 더 이상 자신의 신음을 듣지 못한다. 놋시의 귀에는 그의 손바닥 밑에서 뛰고 있는 테스의 심장과, 핏대를 세운 목에서 울려 퍼지는 낮은 외침만이 들렸다. 말로 나오지 않고 몸으로 전해지는 떨림이 모조리 그의 이름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이름이 나왔을 때. 거칠어진 목소리가 토하는 자신의 이름이 들린 순간, 둥근 어둠이 뭉개 놓은 놋시의 눈이 감겨 버린다. 눅진하고 끈질기게 차곡차곡 쌓여 온 열기가 밖으로 터져 나와 배를 적시고 흘러내렸다.
사정의 여운에 젖은 놋시는 살을 타고 흐르는 뒤섞인 정액과 쓰고 단 냄새를 모르고 누웠다. 쓰러졌다. 감긴 눈처럼 힘을 잃은 잠깐 사이 차가워진 침대 위로 등이 닿고 머리가 놓였다. 찬 기운에 놀란 등줄기와 몸속의 경련이 잘게 이어지자 각기 다른 이유로 안팎이 떨려 왔다.
펼쳐진 몸을 잊고서 숨을 고르던 놋시는 전율이 남아 있는 아랫배와 질척해진 허벅지를 뒤틀어 일으키려다 포기한다. 일어설 힘이 없고 덮쳐 온 체온이 무거웠다.
판판한 가슴에 닿은 입술이 살을 모으듯 이를 대고 있었다. 흥분으로 부풀어 연해져 있던 돌기가 곧 단단해지며 세게 빨리자 원치 않는 소리가 만들어진다.
“흐읏, 으응…….”
입에서 놓치는 축축한 신음은 그의 귀에도 익숙지 않다. 풀 냄새를 더하는 사정도, 가슴을 빨리는 것도 처음이 아닌데 왜 이렇게 생소한 걸까.
부옇게 번진 시야를 털어 내듯 여러 번 떴다 감기던 놋시의 눈이 허공을 헤매다 멈춰 선다. 당황한 얼굴에서 벌려진 입이 놀란 숨을 들이켰다. 테스의 손 밑에서 열병의 집착과 허기가 없어 한 번의 배출로 지쳐 버린 그의 속이 열리고 있었다.
흥건한 체액이 절로 만드는 미끄러운 초대는 아니다. 표면에 맺힌 땀처럼 약간의 체액이 주름을 적신 정도였다.
살을 파고든 손가락 한 마디는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절정의 쾌감이 순식간에 지워질 만큼 낯설고 선명한 침입은 겪어 본 적 없는 이물감과 모호한 긴장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의 위에서, 아래에서, 닿는 곳마다 입을 맞추고 다리 사이를 헤집던 테스도 그걸 알았다.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킨 그가 놋시를 내려다봤다. 입구의 주름을 문지르며 들어온 하나를 남겨 둔 채로.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 꽉 차버리는 좁은 길 안쪽에서 스멀거리고 습기가 차오른다. 옅게 공기를 떠돌기 시작한 단 냄새가 겹을 더하고 양을 늘리며 내벽을 적셨다.
까맣게 초록을 잡아먹은 눈을 피하지 못하며 마주 본 놋시가 드디어 알아차린다. 지금 그의 살을 적시며 열고 있는 건 열병의 집착적인 허기와 무절제한 발정이 아니었다. 삼킬 것처럼 깊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테스의 육체가, 애정이, 그의 몸을 흥분시킨 것이다.
기묘하고 야릇한 위기감이 놋시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그를 내려다보며 움직인 테스의 입술이 뭐라고 말하고 있다. 앞을 놓친 이야기를 되묻는 목소리가 후들거린다.
“무슨 소리를…….”
“생기지 않으면 괜찮은지 물었다.”
“…….”
“네 배를, 이 속을 적시지만 않으면…….”
놋시가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는 몇 번의 되새김질이 필요했다. 뜻을 알겠다 생각한 뒤에도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의심이 치솟았다.
온몸을 두들기는 다채로운 자극이 놋시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지 않고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생각이 답답해 속이 막혀 왔다.
그러다 깨닫게 된다. 지금은 이미 해버렸다고 벗어날 수 없다고 믿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다.
열병이 없는 머리로 테스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속을 만져지는 건 처음이었다.
허기 없이 그 손을 적신 것도 가슴을 빨린 것도 모두 다 처음인 일이지만 가장 낯선 것은 거기에 휘말려 변하는 스스로다. 아니, 처음부터 달랐던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조금만 더하면 답을 얻을 놋시의 사고가 거기서 잘려 나간다.
“헉, 흐읍…….”
조금씩 축축해진 뜨거운 속살이 벌려지고 꿰뚫렸다. 버겁게 만드는 손가락이 길어지고 깊어진다. 한 줄기 통증이 비릿하게 스치며 놋시의 숨을 붙잡고 고개를 잡아챘다.
반사적으로 허리가 들리고 어깨가 뒤틀리지만 곧이어 무게에 막힌다. 얼굴 위로 드리웠던 그림자 대신 다가온 테스의 이마가 들썩이던 가슴을 내리눌렀다.
“으응, 흐으, 흑, 그만……. 흐음, 흡.”
얇은 피부를 씹히고 유두를 빨린 놋시의 입에서 말이 헛돌고 숨이 구른다. 자리에 넘어진 정신이 밀려드는 자극을 급급하게 받아 마셨다. 곧고 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부여잡은 손이 늘어난 침입에 놀라 미끄러진다.
흥분으로 숨죽인 습기가 늘어나자 질척한 잡음이 시끄러워졌다. 아픈 소릴 들었는지 입구까지 물러선 테스의 손가락이 좁은 구멍을 달래며 지문을 묻혔다. 찔리고 닿는 곳마다 얼음이 녹듯 물기가 늘어났다.
끈적거리는 애원이 아무리 시끄러워져도 놋시의 수치스러운 마음은 감추지 못했다. 생각을 끊어 먹는 격렬한 광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놋시의 몸이 속속들이 알게 되는 느리고 나약한 유혹은 끈질겼다. 주인도 모르는 너머로 그를 데려가 버린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는, 벗은 허리를 감싸 안고 입맞춤을 더하는 테스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
테스는 한참 동안 놋시를 지켜봤다. 사정의 피로에 노곤하게 풀린 몸을 안고서 살을 헤집고 입을 맞추면서도 그가 보고 듣는 건 놋시의 모습과 소리였다.
하지만 영원히 보기만 할 수는 없다. 봐서는 모르는 걸 알기 위해서도 다른 대답이 필요했다. 그렇게 핑계를 대며 움직인 그의 육체가 봐서는 모르는 것을, 손에 만져지는 살결과 떨어지고 붙는 내벽의 경련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어쩌면 욕심을 낸다.
곤두선 유두를 굴리던 혀가 또다시 이를 대고 만다. 등을 감싸고서 뼈를 조이며 꺾어진 손목이 다른 쪽의 부푼 돌기를 더듬자 가쁜 숨이 뒤엉켰다.
엎드린 그의 팔에 끌어안긴 매끈한 등이 재차 솟구치지만 갈 곳이 없다. 어긋나는 박자로 속을 넓히던 손가락이 깊어질 때마다 눌려 있는 허벅지가 움찔거린다. 멈추지 않는 자극에 당하면서도 놋시는 가끔씩 애원했다.
“그만, 이, 으응, 안에는…….”
“후우으, 그래, 하면 안 되지…….”
“흐응, 흐읍, 잠깐, 아!”
열병의 광기 없이 그에게 안긴 눈동자가 온통 젖어 들었다. 아픔과 수치를 놓지 못하는 얼굴이 의지로 쾌감을 참고 버틴다. 흥분으로 풀어진 입술 새로 동물의 새끼처럼 말 못 하는 원망이 흐르지만 머리카락을 당기는 손은 거세지지 못했다.
그 거부하지 못하는 손이, 욕하지 못하는 한탄이 테스의 간절한 마음을 부추겼다. 욕심이 더해지고 늘어나다 끝나지 않는 환희에 빠져들었다.
당황으로 물든 놋시의 얼굴이 입을 벌리고 연약한 속살이 젖어 들자 손을 뗄 수 없어졌다. 연달아 일어나는 얕은 침입을 밀어내던 예민한 점막이 조금씩 진득해지며 미끄러워지자 끝에 닿기 전에는 떠날 수 없어졌다.
이런 것은 모두 추악한 이기심의 변명이며 진실은 그가 더러운 짐승이기 때문이지만, 테스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픈 동생의 입에 침을 흘려 넣고 혼자 된 밤에 그 맛을 떠올리던 사납고 불결한 개였다.
그러나 이 개는 주인과의 약속을 지킬 줄 안다.
놋시의 겹쳐진 허벅지 사이에서 달아오른 손목이 마침내 빠져나갔다. 하나둘 늘어났던 손가락이 몇 개나 됐는지 모르는 머리도 갑작스레 생겨난 허전함을 눈치챈다. 괴상망측한 아쉬움과 해방감이 섣불리 나타나 정신없는 놋시를 내리쳤다.
“흐으음…….”
갑갑하게 조이던 굵고 긴 팔이 떠나자 가벼워진 가슴이 너부러진다. 한숨 같은 신음이 샜다. 반듯이 뻗지 못하는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간신히 떠진 놋시의 눈이 잠시 후 빛을 머금고 초점을 맞춰 본다. 밤을 넘긴 기분이지만 세상은 아직도 어두웠다.
한 번만 더 눈을 감으면 잠들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그래도 숨이 골라진다. 맨정신으로 겪게 된 난잡한 애무를 애써 흘려보낸 놋시의 몸이 공기 중의 한기를 느낀다.
그걸 느낄 만큼의 찰나 뒤에 다가온 그림자가 깊다. 형체보다 먼저 온기가 닿았다. 체온이 올라간 테스의 어깨가 다시 그의 눈앞에 있다.
힘든 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상체가 훑어지고 빈 허리가 잡힌다. 자연스레 굽혀져 있던 무릎이 쓰러진 돌에 눌리는 풀처럼 길을 내줬다.
“테스.”
가물거리고 감기려는 놋시의 눈 밑에서 테스의 이름이 한숨으로 나갔다. 간지러움에 나오는 빈 웃음처럼 뜻이 없다.
그러다가 눈이 깜박인다. 흰자위를 드러낸 시선이 올라붙는다. 벌어진 허벅지 밑으로 무릎이 끼어들며 피부가 닿았다. 식어 가던 몸이 겹치는 체온에 눌리며 저절로 속을 내보였다.
“흣, 아니, 안…….”
안 된다고 말하던 놋시의 말끝이 흩어진다. 습기와 여운으로 풀어 헤쳐진 세밀한 주름이 열리며 미끄러운 점막이 밀려났다. 두텁게 굴곡진 테스의 성기가 들어갈 리 없는 입구에 머리를 넣으며 길을 뚫고 있다.
그러다 멈추고, 그러다 기다리고. 조금씩 밀어 넣다 계속 멈춰 서는 삽입이 언제쯤 끝났을까. 놋시는 모른다. 압도하는 크기와 뜨거움에 비좁은 구멍이 막히는 동안 숨을 쉬는 게 고작이었다. 분별없는 허기가 잠들어 있는 속에서 울컥거린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방 안의 어둠과 결이 다른 새까만 눈동자 밑에서 놋시가 정신을 차린 건 나중의 일이다.
돌아온 의식은 푹신하고 높은 침대 위에서도 땅에 묻힌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굽혀진 등과 좁아진 가슴팍에 모인 두 손 모두 무거운 암흑에 묻혀 있었다.
끝이 없는 압박에 세게 감겼던 눈을 뜨자 현기증이 나지만 그보다 먼저 통증이 되살아난다. 육중한 크기로 그의 속을 꿰뚫은 테스의 성기가 커진 호흡과 함께 꿈틀거렸다.
“흐윽, 잠깐…….”
“후으, 흣.”
“아니……. 흑, 으읍…….”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을 감으며 놋시의 입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 눈물을 참는 코가 울리고 얼굴이 뜨거워진다. 숨만 쉬어도 온몸이 저리지만 사실상 감각이 온전히 집중된 건 한 군데뿐이다.
길고 굵은 열기가 그의 몸을 반으로 갈라놨다. 심이 박힌 듯 단단한 덩어리가 크게 맥동하며 닿은 모든 곳을 문질렀다. 속에서 퍼지는 얕은 전율에도 놋시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흐응, 으읏, 흐으.”
“놋시…….”
놋시의 세상을 눈앞의 어둠으로 만든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굽혀진 팔다리와 넓은 등으로 그를 가둔 테스가 속삭인다. 괜찮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떠올리게 만드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놋시는 열병의 최면에 걸려 있지 않다. 찢어질 것처럼 화끈거리는 내밀한 속은 시작과 끝을 느끼기 어렵다.
자리를 적실 만큼 흠뻑 젖지 못한 허벅지 사이에서 힘들게 벌려진 좁은 구멍은 가까스로 고통에 적응해야 한다.
“아, 왜…….”
왜 이러냐 묻던 입술이 깨물리고 고개가 들썩였다. 허리를 고쳐 잡는 손마디가 살을 지지듯 뜨거웠다. 핏줄이 불거진 긴 팔뚝 위로 놋시의 손이 더듬어 매달리자 뜨거움이 줄었다. 줄어든 것은 열기가 아니라 터져 나온 힘인 것 같다.
“아직, 으응, 기다, 기다려야…….”
뜨지 못하는 눈가에 물기가 늘었다. 찡그린 미간에도 땀이 솟았고 씹히는 입술에서도 짠맛이 났다. 피가 섞인 걸지도 모른다. 가슴 한중간 밑이 갑갑해 숨이 트이질 않았다. 막힌 건 밑이 아니라 위였고 사방 모든 곳이다.
입을 열고 숨을 고르는 놋시의 귓가를 무언가가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뺨을 따라가 광대를 그리던 손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이마를 쓸어 주고 뒷머리를 감싸 줬다.
괜찮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믿지 못하며 한참이나 견디던 놋시가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를 기다리던 테스가 입을 맞춰 왔다.
“으음, 읏, 이러면 안, 하읍, 안 된다고…….”
“약속했지.”
“그런, 흑, 그런데 왜…….”
놋시의 입을 열고 뺨 안쪽의 살을 더듬은 테스의 혀가 느리게 입안을 헤맸다. 믿지 못할 크기로 그의 속을 차지한 살덩이와 달리 살가운 애무가 이어지자 마비가 풀린 것처럼 놋시의 혀도 풀려났다.
입안의 점막을 핥으며 혓바닥을 겹치다가 천장에 혀끝을 비비는 테스의 입맞춤을 당하며 놋시는 몇 번이나 말했다.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그에게 테스가 대답했다. 속을 적시지 않겠다고, 아기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는 목소리가 어두운 동굴의 그때와 똑같았다. 믿지 않을 수 없는 그 목소리가 놋시를 유혹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믿기 어려운 확신으로 무장한 테스의 입술 밑에서 놋시의 몸이 둔중한 통증에 익숙해졌다. 날카로운 불안이 애틋한 온기에 마모된다.
끊임없이 어루만지는 테스의 손이 웅크린 어깨와 팔을 쓸어내리고 자극에 지친 유두와 주변의 맨가슴을 간지럽혔다. 떨고 있는 배를 스치고 지쳐 있는 성기를 애무했다. 곧은 뼈대와 근육으로 길게 다듬어진 팔다리가 놋시를 위해 움직이며 불편한 육체의 괴로움을 덜어 줬다.
서서히, 한없이 느린데도 달을 가리는 구름처럼 변화가 불려 왔다. 놋시는 막혔던 숨이 트이듯 달라지는 자신을 느꼈다.
방 안에 늘어난 단내를 그도 맡을 수 있었다. 생경한 침입으로 열을 품은 내벽이 흥건해지는 물기에 미끄러워지고 질척해져 있다.
불편에 익숙해진 육체가 그가 모른 목적을 위해 다음으로 넘어간 순간 놋시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원망이 아니었다. 의식되는 성교에 낯선 그도 이것이 고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괜찮을 거라는 테스의 말은 헛된 약속이 아니었다. 그는 놋시에게 고통을 주기 싫어 자신의 욕망을 버려 온 자였다.
오래도록 품어 온 인내심을 열병의 사고처럼 놓친 뒤에도 걱정은 길게 머물렀다. 한동안은 모든 게 성급했던 것 같았다.
놋시는 건강을 회복하고 안 해도 될 일을 찾으며 시도르의 삶을 시작했지만 테스의 눈에는 안심할 수 없는 시기였다.
악몽에 시달리는 놋시를 달래다 시작된 입맞춤은 그 이상 깊어지지 않았다. 테스는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놋시를 모두가 보고, 모두가 그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현실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오늘이 어째서 다른 날로 정해졌는지는 그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듯하다. 수도로 가는 게 정해지고 알려진 것도 그중 하나였고 대사의 축하도 그중 하나였다.
희고 노란 옷을 입고 밤하늘을 바라보던 놋시는 숲이 해를 가린 산속 늪지에 혼자 피어난 꽃 같았다.
사로나는 시도르와 크게 다른 곳이 못 됐다. 쉬운 길로 걸어서라도 열흘을 넘기지 않고 올 수 있는 이곳에는 거친 역사의 흔적이 가득했다.
도둑을 욕하면서 도둑질하는 이가 들끓었고 아이를 때리고 버리는 이들도 많았다. 오랜 세월 나라의 뜻을 모르며 살아온 자들은 쉽게 마음 열지 않았다. 테스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산 밑 마을 태생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게르독이 그들의 위에 앉은 타게신의 동생을 죽이고 고향을 불태웠다는 소식은 이제껏 기회 얻지 못하던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런 사연이 없었다면 시도르의 교활한 이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놋시를 좋게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는 다르다. 그곳의 사람들이 교활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들보다 훨씬 계산을 잘 한다는 뜻이다.
왕의 대사가 식을 거론한 것은 허락의 전조였다. 왕과 귀족의 선택으로 부림당하던 타게신이 내려 주는 오메가를 마다하고 자신의 짝을 고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남들이 다 아는 희생과 공이 균형을 맞춰야 허락될 도전이었다.
수도는 시도르와 다르고 사로나와도 다르다. 놋시는 그곳에서 더 이상 흙을 뒤지며 버섯과 약초를 모으지 않아도 되고 일하지 않는 모습이 남의 눈에 어찌 보일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는 수도에서 타게신의 주인으로 돌벽 안에서 살 수 있다. 나무를 뽑고 돌을 치워 편평히 골라 놓은 바닥만 디디며 무엇도 걱정하지 않고서.
테스는 놋시와 몸을 섞은 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발정의 광기 없이 버거워하던 육체가 그의 품에서 조금씩 맞춰지는 치밀한 과정은 감미로웠다.
길고 집요한 삽입에 힘들어하던 마른 어깨도 차차 가라앉았다. 긴 호흡을 반복하며 감은 눈두덩이 가끔씩 잘게 떨렸다.
가늘게 떠진 놋시의 눈은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거듭된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 힘없이 가슴팍에 모여 있던 두 손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바닥에서 굽혀진 테스의 왼손은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른손은 가슴과 목을 어루만진다. 열을 품고서 부푼 돌기를 반복해 굴리던 손가락이 움푹 들어간 쇄골을 더듬었다. 얇은 턱을 건드리고 귓바퀴를 둥글린다.
그의 오른손이 열린 채 숨 쉬는 입술을 건드릴 즈음에는 놋시의 손도 더 이상 망설이고 있지 않다. 머뭇거리며 웅크리고 재차 들뜨던 손등이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갔다. 얄팍한 허리를 지나 배꼽 언저리에 간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이…….”
말은 시작뿐이었지만 나머진 필요가 없었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던 놋시의 눈이 색이 빛나듯 커졌다. 테스의 턱까지 올라왔다 황급히 내려가는 시선에는 인지가 분명하다.
눈으로 보지 못해도 만진다면 모를 수 없는 그들의 결합을, 그의 살을 열어 길을 채운 테스의 성기를, 손바닥 아래 살갗의 들뜸과 몸속의 감각이 같은 이유라는 걸 이제야 온전히 깨달은 것 같다.
“이게…….”
“그래.”
“하지만, 으음, 이건…….”
놋시의 말이 멈추고 숨이 들쑥날쑥해진다. 그의 배 속에서 숨 쉬고 있는 다른 이의 몸이 신기하고 의아한 것처럼 찡그려지던 눈매가 아래를 향하고서 혼자 깜박인다.
반쯤 발기한 채로 쓰러져 있는 자신의 성기를 봤는지 도망치던 시선이 또다시 테스의 턱에서 멈췄다.
커다란 눈이 뜨고 감길 때마다 시선이 흔들렸다. 테스를 비껴가며 그림자 속을 헤매던 눈이 간신히 멈추자 말이 이어졌다.
“이건, 너무 크고……. 흐읏, 이, 이상한데…….”
“이상하고 싫다.”
“아, 싫다는 게 아니라…….”
테스는 그러면 좋으냐는 장난으로 놋시를 괴롭히지 않았다. 한때는 그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테스와 놋시가 태어나 자란 곳은 음식도, 돈도, 모든 게 넉넉하지 못해 사치가 불가능한 산 밑 마을이다. 그들은 사냥과 밭으로 굶지 않는 자신들이 풍족하다 생각했지만 모두가 일해서 먹을 수 있는 매일은 수도의 향락이 결여된 결백한 삶이었다.
수도를 다니고 전쟁을 나서며 피와 욕심의 맛을 안 뒤에도 테스는 오래도록 바른 목적만을 따랐다. 그런 그가, 동물의 생김에 비교되며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알파의 남다른 점을 납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릴 때는 관심이 적었고 커가면서는 거부감이 들었다. 수도의 삶에 익숙해지며 난잡한 이들을 알게 된 뒤에는 더했다.
그는 자신의 욕구가 놋시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하기 훨씬 전부터 사람과 다른 알파의 성적 능력에 무관심했다. 혐오감을 가질 만큼 어리석지 않았지만 자랑스레 여길 만큼 오만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칼솜씨가 노력이 필요한 기술임을 알아도 남들에게 직접 자랑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살인이 죄가 아니다. 전쟁터의 전투가 그랬고 다투는 자들의 결투가 그랬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순간에는 그의 다름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된다.
놋시가 떠듬떠듬 말하는 동안에도 테스의 손은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얇은 턱을 받치듯 기울어진 엄지손가락 위에서 검지와 중지가 입술을 더듬었다.
땀으로 촉촉해진 피부와 달리 금세 마르는 입술 위를 길게 지나다니던 손끝이 말을 그친 그 안으로 들어간다. 잇새로 들어선 마디 끝에 무르고 부드러운 혀가 닿았다. 뜨겁다는 느낌보다 연하단 생각이 먼저 드는 놋시의 혀가 테스의 손가락 첫 마디 구부러진 관절에 눌려졌다.
막힘없이 들어가던 하나가 둘이 되자 놋시의 손이 팔목을 부여잡았다. 밀어내려 하는 게 아닌 무심한 속박에는 힘이 없고 그 대신 신뢰가 있다. 갑갑하게 입안을 채운 손가락이 불편하기만 한 게 아님을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다.
“이렇게……. 입에 들어간 것처럼, 내 몸이 네 속에 들어 있지.”
“…….”
가까운 목소리에는 명확한 발음보다 호흡이 더 많다. 속삭이는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깊어지자 놋시의 혀가 맞추듯 물러섰다.
마디가 길고 각이 선 테스의 손은 항상 끝이 단정했다. 매일 칼을 다듬는 습관은 피와 흙이 묻게 되는 손톱을 함께 다뤘고 놋시를 만지게 된 후로는 결벽적일 만큼 깨끗해졌다.
고이는 침을 삼키며 자연스레 움직인 놋시의 입술이 머무르는 길쭉한 마디를 빨았다. 얕은 전율로 힘이 실리던 테스의 허리가 고집스럽게 굳는다. 크게 삼킨 숨을 조용히 흘린 그가 말했다.
“힘들고 아프면 깨물어도 된다.”
“…….”
“다른 걸 원하면, 다르게 하고…….”
사라진 목소리를 대신하듯 손이 움직인다. 혀뿌리에 닿을 만큼 깊어졌던 검지가 구부리며 젖은 몸을 뺀다. 침이 묻은 두 번째 마디가 밖에 나왔다가 춥다는 것처럼 안을 향한다.
놋시의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짚은 테스의 왼팔에 근육이 뭉치고 날이 섰다. 한 줄기가 당겨지듯 곤두선 어깨 밑으로 잔 근육이 두드러진 등허리가 굴곡을 낮췄다. 그러고서 팽팽해진다.
들뜨고 굽혀진 등과 달리 박자를 이어받은 밑에선 멈춤이 없다.
느리고 약하게 시작된 입안의 반복을 따라 하듯 허리가 움직이고 허벅지가 달라붙었다. 놋시의 속을 차지한 테스의 성기가 닿은 곳을 확인하듯 자세를 바꾸고 자리를 옮긴다. 한없이 느리고 신중해 등줄기에 땀이 새로 솟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이다. 발을 굴리듯 반복된 얕은 행위는 점차 무거워지고 빨라지지만 격렬해질 수 없다. 녹아내리는 체온 속에서 단단함을 유지한 머리가 미끄러운 내벽을 벌리며 더욱 깊이 들어가지만 원하는 대로 몸부림칠 수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테스의 손가락이 입안을 울리는 진동에 잠기게 된다.
“읏, 흐우, 으응…….”
테스의 손목을 붙들고 매달리는 놋시의 눈이 감겨 있다. 부드러운 천처럼 가늘게 구겨진 미간 아래서 내쉬는 숨이 가빠지고 입술이 모인다. 입안에 걸리는 살을 깨무는 이가 저도 모르게 몸 안의 박자를 따라 했다.
“으응, 흐읍, 흣, 윽.”
몸속을 헤집는 성기가 굴곡진 머리로 끝까지 닿을 때마다 놋시의 소리가 작아지고 커진다. 읏, 읏, 잇새로 숨 쉬며 끄덕이는 고개처럼 가슴팍이 들뜨고 어깨가 밀려난다.
머리를 감싼 테스의 왼 팔뚝에 길이 막힌 그의 몸이 허리를 띄우다 가라앉고 다시 가라앉는다.
“응, 으응, 으읏…….”
“후으, 흐읍…….”
입에 물린 손가락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닿을 듯 기울어진 테스의 호흡 밑에서 놋시의 숨결도 질척해진다. 좁아진 세상의 공기를 익은 과일처럼 달아진 오메가의 체취가 물들이고 그 맛이 알파의 입안에 고여 들었다.
흥건해진 체액을 묻히고 미끄럽게 놋시의 몸을 드나드는 테스의 성기가 거듭된 자극에 더욱 커진다.
놋시의 몸을 열어 놓은 테스의 성기가 좁은 살을 비집고 머리를 박았다. 굵어지는 뿌리 끝까지 살을 누르며 달려든다. 읏, 읏, 작던 외침이 커질수록 다른 모든 게 커진다. 닿았다 떨어지듯 자리에 돌아오던 억눌린 욕정에 속도가 붙고 힘이 실린다.
계속해서 같은 길로 돌아가던 끝이 언젠가부터 번잡해졌다. 빠듯한 입구를 메꾸고 박은 채로 위를 찌르기도 하고 진흙을 떠내듯 속을 후비기도 한다.
“아! 으응! 아, 아!”
그러다 보니 어느새 놋시의 입이 자유로워졌다. 혀가 보이게 열린 입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막아선 손이 떠나 풀려난 머리가 베개가 사라진 바닥에 뒤통수를 짓이긴다.
거세진 박자에 밀려나고 끌려오는 어깨 밑에서 손 하나는 바닥을 움켜쥐고 다른 하나는 팔뚝을 잡고 있다. 허리를 잡고 놔주지 않는 테스의 손목을 놋시의 오른손이 움켜쥐고 손톱을 박았다. 세상이 온통 뒤흔들려 잡을 것이 그뿐이다.
테스의 성기는 쉬지 않고 놋시의 속을 들쑤셨다. 빠르고 거세진 행위는 느리고 완만하던 시작을 새까맣게 잊게 만들었다.
맞붙은 육체 사이로 불퉁한 머리가 보일 듯 끝까지 나왔다 되돌아갈 때마다 침대가 흔들렸다. 사람 다섯이 누워도 될 만큼 크고 무거운 그것도 전력을 다하는 알파의 힘에는 당하지 못한다.
그런 걸 놋시가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허리를 잡히고 도망칠 곳 없어진 전신이 한 번의 움직임에 모조리 휘둘린다. 그림자가 사라져 드러난 상체가 계속해서 들썩였다. 살이 없는 가슴 밑으로 뼈를 드러낸 흉통이 오르락내리락 다급하다.
“흐윽, 흣, 이…….”
더 이상 비명도 되지 못하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뚝뚝 흘렀다. 안과 밖이 모두, 만들어 내는 소리까지 모두 물에 잠긴 것처럼 차올랐다. 그의 온몸이 젖어 있었다.
땀이 솟은 손바닥이 자꾸만 테스의 팔목을 놓치며 미끄러졌다. 벌려진 허벅지에 허리가 부딪혀 올 때마다 충돌과 마찰의 소음이 요란했다. 젖은 살이 만드는 그 소리가 놋시의 신음보다 커진 지 오래다.
끔찍하게 큰 테스의 성기가 살을 찢지 않고 뼈를 부수지 않고도 그의 몸에 들어찼다. 처음 한 번으로 자리를 낸 것처럼 속을 찌르던 덩어리가 어느 틈에 아프지 않고 정신 차리자 쾌감이 됐다.
두툼한 머리가 어딘지 모르는 곳을 건드릴 때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들린 허리 위에서는 혼자 서버린 놋시의 성기가 흔들리고 있다. 땀으로 축축한 피부 위에서 매끈한 몸통을 세운 그것이 어지러운 박자에 휘말려 부풀어 올라 끝을 적셨다.
“흐, 아! 으응, 흐읍.”
나가고 들어오는 삽입의 반복에 밀려나던 놋시의 고개가 한순간에 늘어졌다. 소리를 놓친 입과 크게 떠진 눈의 침묵을 대변하듯 매끄러운 오메가의 성기가 몸을 떨었다. 잡아 주는 손도 없이 부풀었던 몸통 위로 묽은 정액이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절정에 경련하는 내벽을 가득 채운 그대로. 테스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부시고 현란한 자극이 속을 뒤집어도 손을 놓지 않고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테스는 욕망의 배출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으로 놋시의 기쁨을 느끼는 그의 육체는 사정이 줄 수 없는 더 높은 만족에 취해 있었다.
그의 길고 각진 손가락이 놋시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누르기 쉽게 생긴 것처럼, 그의 몸 다른 모든 것도 주인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놋시는 절정에서 내려온 후에도 한참을 깨어 있었다. 불씨를 뒤적이듯 끊임없는 자극의 탓이지만 반절은 놀란 마음이었다. 테스가 그의 몸에 만들어 내는 쾌감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함몰당하던 열병의 시기와 전혀 달랐다.
테스의 육체 밑에서 놋시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골라지는지 알알이 느끼게 됐다. 그보다 테스가 먼저 알 것 같지만 이렇게 시간을 들이면 스스로도 모를 수 없게 된다.
여운에 잠겨 늘어진 놋시와 몸을 섞은 채로, 테스는 자꾸만 그의 가슴을 빨았다. 목덜미도 빨았고 어깨도 깨물었지만 가슴을 빨리는 게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열을 내며 화끈거리는 돌기가 가라앉을 새를 못 얻어 계속 부풀어 있었다.
말할 기운이 없던 놋시는 간신히 어깨를 돌리며 가슴을 가렸지만 팔 아래로 틈이 너무 컸다. 힘없이 가라앉았던 성기도 다시금 건드리는 손에 몸을 일으켜 버린다.
거세지 않고 느린, 몰아치지 않고 꾸준한 애무가 더 감당하기 힘들었다. 뭘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지 고스란히 알고 나면 뒤따르는 수치와 경악이 쾌감으로 범벅됐다.
가슴을 가리고 바닥을 뜯으며 비틀어진 놋시의 허리는 오래도록 풀려나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살을 열어 놓은 테스의 성기가 다른 박동의 존재를 과시하며 남아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큼직한 베개가 손에 붙잡힌 게 먼저인지, 그 뜨거운 열기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게 먼저인지, 놋시는 알지 못한다. 그는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민망하게 높아지던 신음이 입안에서 으스러지자 다른 소리가 더 잘 들린다.
깊숙이 들어오는 살덩이처럼 귓구멍을 파고드는 테스의 호흡이, 살과 살이 충돌하고 젖은 피부가 비벼지는 모든 잡음이 한데 엉켜 놋시를 짓눌렀다. 베개를 끌어안은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껴안고 있던 베개에 놋시의 침이 묻는다. 끌어안고서 숨던 얼굴이 결국에는 물고 말았다. 옷을 입힌 것처럼 둘러져 있던 자주색 천이 이에 물리고 침으로 젖어 엉망이 된다.
비틀어졌던 허리는 그새 완전히 모로 놓였다. 그래도 빠져나갈 수 없다. 테스가 놋시의 다리 하나를 잡은 탓이다. 길고 완전한 삽입이 거듭되며 속이 비는 찰나마다 잡힌 발목이 당겨졌다. 놓였다 잡히는 저릿한 감각이 배 속을 찌르는 둔탁함과 다른 듯 같게 겹쳐졌다.
놋시는 저절로 굽혀진 등허리를 더욱 둥글게 말았다. 흔들릴 때마다 살갗에 부딪히는 자신의 성기는 이미 단단해진 지 오래다. 발목뼈를 감고 있던 악력이 어느 틈에 허벅지로 옮겨지고, 정성 들여 만든 덫처럼 정교한 테스의 큰 손이 그의 무릎을 벌린다. 축축하고 흥건해진 하체가 질척한 소리를 내며 벌어지고 꿰뚫렸다.
으응, 으응, 뭉개진 놋시의 신음이 베개에 버려지다 들뜬 틈으로 새어 나온다. 어느 틈에 다리 대신 붙잡힌 놋시의 왼팔이 베개를 놓친다. 잡히는 곳마다 자국이 남을 것처럼 뜨거웠다. 오래된 흉터로 지저분한 손목 위로 살을 지지듯 뜨거운 지문이 찍히고 있다.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며 점점 작아지던 놋시가 입안에서 젖던 솜을 뱉고 만다. 꼬리를 잡혀 버둥거리던 뱀이 머리를 맞고 죽듯이 절정이 닥쳐왔다. 그새 익숙해진 짧은 해방감 밑으로 묽은 체액을 간신히 흘리는 자신의 성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더 밑, 더 아래에서는, 여전히 뜨겁고 커다란 테스의 성기에 벌려져 다물리지 못하는 육체가 굴복하고 있다. 안과 밖의 경계를 잊고 무뎌진 속도 억지로 끄집어낸 절정을 참지 못하고 떨어 댄다. 멈출 수 없는 전율을 반복하는 그의 몸이 빨아 먹듯 거대한 살덩이에 매달렸다.
얼얼하게 풀어진 속에서 아주 작은 허기가 되살아났다. 여기까지, 이 안까지 모두 문지르고 적셔 달라는 괴상하고 섬뜩한 욕구가 놋시의 머릿속에 분명히 떠오른 순간.
“그……. 그만, 이제 더는…….”
놋시는 베개에 묻혀 있던 고개를 들며 초점을 맞췄다. 오래 어두웠던 시야가 아득했다가 확실해진다. 목소리에 스며 있는 공포가 자신의 귀에도 들렸다.
추락의 끝이 여기가 아니라는, 견디기 어려운 쾌락의 끝도 여기가 아니라는, 분명 이다음에 떨어질 곳이 남아 있다는 확실한 예감이 그의 지친 몸을 움직이게 했다.
불분명한 두려움을 자각한 놋시의 애원이 들렸던 걸까. 그의 속을 열고 채웠던 테스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뼈가 뽑히듯 허물어지는 하체 위로 더운 피부가 겹쳐졌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테스의 몸이 커다란 그림자로 놋시를 가리고 안에서 요동치던 성기가 바깥에 놓인다.
서늘한 옆구리를 지나 배에 눌리는 그의 성기는 아직도 크고 단단하며 흠뻑 젖어 미끄럽다.
하아. 후으. 잔뜩 웅크린 몸을 감싸고서 숨을 내쉬던 테스가 놋시의 뺨에 입술을 문지른다. 언제나 건조하고 시원하던 혀가 뜨거운 살결로 변해 지쳐 열린 입안으로 들어왔다.
“흐음, 으응…….”
부드럽고 온화한 혀를 맞이하던 놋시가 베개를 놓친다. 아니, 베개를 잃는다. 허전해진 손에 긴 손가락이 얽혀 든다. 몸이 눌리고 손을 붙잡힌 그의 배 위에서 테스의 성기가 떨리듯 팽창하며 살을 적시고 있다.
단단한 살덩이가 속에서 움직이듯 머리를 흔들며 토해 내는 감각이, 땀으로 습한 살갗 위로 뜨겁게 쏟아진 정액이 곧 식어 가며 만들어 낸 대비가 놋시의 어지러운 머리에 잊었던 약속을 상기시켰다.
이걸로 괜찮은 걸까. 순간의 안도가 불안해지고 의문이 싹트지만 물어볼 기운이 없다. 서로의 열기만으로 젖어 잠긴 놋시의 몸과 마음이 수면으로 도망쳤다.
다음 날은 빠르게 지나갔다. 놋시가 눈을 뜬 시점이 오후라 그럴 터였다.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열병의 직후에는 며칠 내내 눈뜨지 못했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지금으로선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게 된다.
해가 가득 들어와 눈부신 허공을 바라보던 놋시의 눈이 순식간에 다시 감긴다. 세게 감긴 눈꺼풀 아래서 안팎의 고통이 헤아려졌다. 욱신거리는 하체,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 두 다리, 마냥 무거운 머리를 짜릿하고 새침한 뭔가가 자꾸 깨운다.
매끈하고 보송한 천에 닿아 있는 그의 가슴이 꽃의 가시처럼 뾰족하고 짧은 아픔을 호소했다. 혼자 부풀어 있는 작은 돌기는 숨을 들이쉴 때 닿고 내쉴 때도 닿는 일이라 막을 방법이 없다. 아니, 닿지 않게 하는 게 우선이다.
따끔거리는 가슴을 돌리며 모로 누운 놋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화끈거리고 목덜미까지 퍼지는 열기가 스스로도 알 만큼 뜨거웠다. 눈으로 확인하기 두려운 모습을 상상으로도 피하며 웅크린 그가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다.
벗고 누운 몸은 보송했다. 끈덕진 행위로 연달아 일어난 사정도, 좀처럼 더위를 모르던 몸에서 머리카락을 적시며 흘렸던 땀도, 빠듯한 속보다 먼저 미끄러워진 겉도 꿈이었던 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일어났구나.”
“…….”
푹신한 바닥이 더해진 무게로 흔들렸다. 웅크린 놋시의 어깨가 더 좁게 모였다. 엉망으로 흩어져 있을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치우고 바짝 붙어 온 테스의 입술이 그의 어깨에 찍혔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몇 겹의 얇은 천도 그 입술의 온기를 막지 못했다.
“졸리면 더 자고, 아니면 깨서 뭔가 먹자.”
“…….”
놋시는 화가 나지 않았는데도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불분명했다. 부끄러운 마음과 피로한 기운 말고는 모조리 어수선할 뿐이다.
테스가 취했던 걸까. 그래서 그랬다면 앞으론 그러지 않을까. 아니면 매일 밤 이러려는 걸까. 놋시의 몸을 자신도 못 알아보게 바꿔 놓고서, 그러고도 씨를 뿌리지 않고,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말인가 더 들린 것 같지만 기억되지 못한다. 깜빡 다시 잠들었던 놋시가 눈떴을 때 창밖에는 석양이 걸려 있었고 침대 옆에는 그를 위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아무도 없는 방 안이 더욱 쓸쓸히 느껴졌다.
해가 진 저녁에 혼자 일어선 놋시는 식사를 하고 몸을 씻었다. 절벽을 여러 번 오른 날처럼 줄이 당겨진 다리는 그새 조금 풀려 있다. 욕실의 물은 식어 있었지만 차가운 물을 원하던 터라 도움을 찾지 않았다.
미지근한 물에 온몸을 담근 놋시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손자국이 남은 다리는 모른 체할 수 있지만 색이 짙어진 가슴의 돌기가 아직도 저릿했다. 씻을 게 아니라 식히려는 이유였다는 듯 가만히 물에 잠겨 앉아 있으니 두서없이 걱정이 되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처음 이곳에서 눈떴던 순간처럼 믿기 힘들고 괴로운 마음은 없었다. 이미 저지른 죄라 무뎌져서일까. 두려움조차 위선이라서?
놋시는 제정신으로 형과 몸을 섞어 놓고도 무감각해진 스스로가 간밤의 자신보다 더 낯설다고 생각했다.
멍한 머리를 적시며 몇 번이나 물속에 얼굴을 담근 놋시는 찾는 목소리가 나타날 때까지 욕조 안에 머물렀다. 그릇을 가지러 온 데자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늙은이가 이거저거 섞은 술을 주더라니 제가 안 그래도 걱정했습니다. 이젠 좀 괜찮으세요? 더 드시고 싶은 건 없고요?”
“많이 먹었습니다.”
“뭘 많이 먹어요, 죽이 다 남았는데. 과일 좀 가져올게요.”
“…….”
데자는 놋시가 술 때문에 병이 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테스가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아니라고 할 말도 없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그에게 그녀는 얼음에 넣어 뒀던 여름 열매를 가져왔다. 8월 끝물의 물러진 과육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달았다.
하는 일 없이 곧 밤이 됐다. 종일 자서 졸리지 않은데도 언제나처럼 혼자 침대에 누운 놋시는 순식간에 찾아온 밤이 어떻게 흐를지 몰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불을 밝히지 않고 돌아온 테스는 서늘한 체취를 묻히며 등 돌린 그를 안았다. 금세 잠든 호흡은 차분했고 그만큼 익숙했다. 별다른 말도 특별한 행위도,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인사였다.
잠든 테스의 품에서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 놋시는 어젯밤이 별났던 거라고, 술로 병이 났던 게 맞다고 자신을 안심시켰지만 이후의 나날은 그렇지 않았다. 수도에 갈 준비를 시작하며 전과 달라진 며칠 동안 제일 크게 변한 것은 테스였다.
겉보기에 달라진 것은 테스가 전처럼 멀리 다니지 않는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가 시작한 준비는 떠나며 가져갈 짐이 아니라 남겨질 시도르에 대한 다그침이었다.
테스는 갑자기 써야 할 답장과 확인할 편지가 많아졌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말을 탄 사절이 나타났고 어느 날은 커다란 마차를 여러 대 끌고 다니는 장사치가 나타나 타게신을 찾았다.
커다란 방에서 놀리던 긴 탁자에 두꺼운 목록과 짧고 긴 종이가 쌓였다. 타게신을 부르며 찾아오던 이들은 전처럼 그와 함께 방을 떠나지 않았고 답장을 받아 나르기 바빴다.
때로는 함께 나가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성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래층에 찾아온 이들을 만나러 방을 나간 때조차 틈틈이 돌아오곤 했다. 책을 꺼내 가는 때도 있고 글을 써주는 때도 있었으며 물건을 고르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놋시는, 더 이상 밤에만 돌아오지 않는 테스에게 한낮에도 붙들리게 됐다.
격렬한 밤 이후 테스의 시선을 피하던 놋시는 이틀 뒤 아침에 당황스럽게 잠을 깼다. 새벽같이 나갈 일이 사라진 테스가 아침 내내 침대에 누워 놋시를 만지고 혀를 섞었다. 겨우 무던해진 가슴 돌기를 자꾸 건드려 그러지 말라고 말하자 밑으로 손이 뻗었다.
“아직도 아프면 큰일이지.”
“아니, 아닙니다.”
“가슴보다 여기가 더 아팠을 텐데.”
“…….”
테스는 오전의 햇살이 새하얗게 만든 침대 위에서 얼굴도 붉히지 않고서 놋시를 벗겼다. 놋시는 태연하게 파고드는 손보다 그 웃는 얼굴이 더 믿기지 않았다.
부들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거센 입술로 정신을 빼놓던 테스는 조여드는 입구를 흥분으로 풀어 헤쳐 적신 다음에야 놋시를 놔줬다. 단내를 풍기는 체액으로 젖은 손가락이 놋시의 성기를 일으키곤 끝을 세웠다. 매끈한 머리 밑을 짓누르는 손마디는 허무할 만큼 빠른 절정을 뽑아냈다.
그는 그 뒤에도 한참이나 놋시의 곁에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늘어진 몸을 씻겨 주고 데자가 들고 온 식사를 곁에서 먹여 줬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귀한 웃음을 지으며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놋시는 옷자락의 밑으로 들어온 손을 막지 않았다. 손끝과 혓바닥으로 작은 돌기를 부풀리고 알갱이 지게 굴리던 테스는 살 없는 가슴께와 마른 배까지 침을 묻히고도 고개를 떼지 않았다.
가빠진 숨을 씹으며 두 팔에 얼굴을 숨겼던 놋시는 그의 성기를 삼킨 뜨거움에 참던 비명을 내질렀었다. 힘없이 놓여 있던 살덩이가 테스의 입술에 빨리고 물리며 단단해지는 감각은 둔한 그도 알 만큼 음탕했다.
테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놋시를 만졌다. 조금 전까지 왕의 편지에 답장하던 그가 의자에 앉은 그대로 놋시의 입술을 핥았다. 흙이 묻은 손을 씻지도 못하고 붙들린 놋시는 옷 위로 느껴지는 욕망의 크기에 놀라고 목덜미를 깨무는 이에 놀랐다.
하루는 자정의 종이 칠 때까지 잠들지 않은 테스가 그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수도에 가면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도 많을 거라고, 문득 말하는 목소리가 잠꼬대처럼 느슨했다.
“타게신은, 할 일이 많으니까요…….”
“그래. 하지만 너도 그럴 거다. 수도의 구경거리에 정신이 팔려서, 내가 없는 줄도 모르겠지.”
“그, 읏, 흐읍.”
놋시는 그럴 리 없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속에 박혀 있던 손가락 세 개가 움직였다. 길을 내는 것처럼 깊어지고 무서운 자극으로 끝을 찾은 테스의 손은 흠뻑 젖는 절정을 일으키고도 한참이나 속을 헤집었다.
테스는 그 밤 이후로 놋시의 살을 열고 몸을 섞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매일같이 그를 만졌다. 놋시의 생각에는 분명히 달랐지만, 어쩌면 다를 게 없는 것도 같았다.
그의 몸에 들어오는 혀와 손가락은 희미하게 두려움을 남긴 커다란 성기와 달랐지만 그렇더라도 테스의 몸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더니 열흘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테스는 수도로 가는 여정에 20여 일을 잡았다. 놋시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다.
따져 보니 원래라면 고향에 돌아가 쉴 틈일 것 같았다. 그러나 테스는 여행을 휴식으로 삼자고 말했다.
“천천히 가면 너도 못 본 곳을 구경할 수 있겠지. 그래 봤자 특별할 건 없지만 가을은 평야를 보는 데 어울리는 계절이니까.”
그들에겐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사로나는 아직도 검은 연기에 뒤덮여 있었고 테스의 남은 가족은 놋시뿐이다.
그래서 가까운 길을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놋시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가는 길에 사로나에 갈 수 있냐 물으려던 자신이 철없다고 느껴졌다.
그들과 함께 시도르를 떠나는 일행은 다섯에 불과했다. 셋은 놋시도 얼굴을 외우게 된 오드사, 포에, 세조였고 나머지 둘은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한 명은 어디서건 본다면 잊기 어려울 특이한 외모였다. 사막의 태양을 떠올리게끔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머리가 새하얀 그는 양 뺨에 가득한 문신을 길게 늘어지는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저는 제국의 핏줄입니다.”
“예…….”
“하지만 사막에서 태어났죠.”
“…….”
놋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메다로라고 자신을 알린 그 남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외모였다.
제국과 사막의 출신 성분이 중요하다고 느껴 먼저 말했던 걸까. 어떤 사람들은 태어난 사연을 따지길 좋아하니까?
“저는 뱀 부족의 핏줄입니다.”
“알고 있습죠. 노리 님은 꼭 그렇게 생기셨거든요.”
“…….”
온화한 얼굴이었지만 대답을 찾기 어려운 말 상대였다. 성격이 급한 포에가 어디선가 나타나 메다로를 끌고 가는 사이 또 다른 첫 상대가 노리에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덩치가 엄청난 그 남자를 테스는 베단이라고 불렀다. 그는 벙어리였고 이제껏 놋시가 본 사람 중 유일하게 테스보다 키가 컸다. 힘도 테스보다 셀 것 같았다. 혼자서 궤짝 세 개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에 벽이 떨려 왔다.
떠나는 타게신을 배웅하는 시도르의 인파는 줄줄이 반나절을 이어졌다. 그래도 끝이 있었고, 성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길에 서 있는 건 각자 색이 다른 다섯 마리 말과 두 마리 말이 묶인 마차 한 대뿐이다.
마차에 묶인 말 하나는 그렇게 쓰일 게 아닌 생김새였다. 이 새하얀 백마는 테스가 놋시에게 준 말이었다. 그는 놋시를 위해 새로운 말안장과 장화를, 심지어 고삐를 잡을 때 손을 보호해 줄 장갑까지 마련해 줬지만 그런데도 마차에 타도록 고집했다.
“그러면 왜 말을 주셨는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지. 무슨 일이 생기면 마차를 버려야 하니까.”
“…….”
놋시는 테스의 말에 토 달지 않으며 마차에 실린 짐과 함께 길을 따라갔다. 짐은 애초에 적었고, 그걸 다 실어도 자리가 남아돌게 넓은 마차였다. 서운한 것처럼 콧김을 내뿜는 말에게 테스는 빨간 사과를 줬다.
여행은 평화로웠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필요가 없고 자신이 길을 찾지 않아도 되는 여정. 말하자면 이것은 놋시가 처음 해보는 여행이었고, 책에서만 봤던 그 말이 이런 뜻이구나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그들 중 수도에 가는 게 처음인 건 놋시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테스는 지도가 필요 없는 지식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마을을 피하진 않았지만 거기서 머무르지 않았다. 가져온 식량과 재미 삼아 하는 사냥으로 풍족한 세끼를 먹을 수 있었다.
좁아지거나 넓어지는 길은 가끔 흐지부지 사라졌지만 마차가 다니지 못할 만큼 험한 지역은 드물었다. 테스의 말대로 가을은 평야를 보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가끔씩 나타나는 황금빛 벌판과 새빨갛게 물든 숲은 보기만 해도 좋은 장관이었다.
지평선에 산이 없는 평평한 땅은 놋시에게 낯선 구경거리였고 며칠을 가도 지루해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는 보는 것 말고 할 일이 없었기도 하다.
식사는 주로 포에와 세조가 준비했다. 놋시는 숲에서 주운 향이 좋은 약초나 맛있는 버섯을 그들에게 줬지만 그 이상의 도움은 확고히 거절당했다.
그러니 할 일이 없는 놋시는 한가롭게 마차에 실려 갔다. 열어 놓은 덧창 너머로 바깥을 구경했고 해가 환할 때 책을 읽었다.
떠나기 전 수없는 사람을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던 테스는 놋시에게 새로운 책을 선물했다.
낯선 문양으로 표지가 붙은 두꺼운 책에는 놋시가 아는 모든 사물과 세세한 것들이 제국의 말로 쓰여 있었다. 어떤 것은 아는 이름이지만 어떤 것은 낯설었다.
놋시는 수도에서의 삶을 걱정하지 않았지만 마냥 편안하게 예상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를 이유로 침울해지곤 하는 그에게 테스는 한 가지 당부만을 했다.
“수도에 가서는 말을 달리해라.”
“어떻게 다르게 하나요.”
“붉은 뿌리라고 하지 말고 순무라고 하고, 새손줄기라 부르지 말고 고사리라고 부르는 정도면 된다.”
“…….”
귀족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 놋시도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지, 그들이 살 집은 어떠한지……. 물어야 할 질문이 많은데도 놋시는 입을 다물었다.
테스는 묻지 않는 그에게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의 이름을 말하거나 용도를 모를 건물이 방앗간이라며 설명해 주곤 했다. 하지만 수도에 대해서는 먼저 말하는 게 적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지만 요즘의 놋시는 테스의 생각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가늠하기 힘든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놋시는 자신이 테스에게 화가 났는지, 아니면 예상 못 할 미래가 두려운지, 그도 아니면 이미 진창에 빠져 무서운 게 없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일행은 평평한 길을 따라 여유 있게 이동했다. 놋시는 마차에서 자게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밤에는 천막을 치고 잤다. 가을이 막 시작되는 날씨라 춥지 않아 큰 불편이 없었다. 때로는 이런 데 이런 게 있나 싶게 숨겨져 있는 빈집에서 묵을 때도 있었다.
우연이기 어려운 마주침은 익숙하게 자리를 정하는 포에의 손으로 확인됐다. 어떻게 아는 장소냐고 묻는 놋시에게 테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보는 눈이 적어지자 더욱 웃음이 흔해진 것 같다.
“돌아다닌 세월이 길었으니 아는 게 있어야지.”
“예전에 다니던 길인 건가요.”
“그래. 내가 수도를 다닌 것도 벌써 10년이 가까워지니까.”
그랬던가. 놋시는 알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테스가 몇 살부터 수도를 다녔는지, 언제부터 칼을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테스는 놋시가 아는 처음부터 자신과 다른 존재였다.
넓은 땅의 숲은 사람보다 시끄럽지만 동시에 고요했다. 새와 벌레가 청량하게 붐비고 동물의 냄새와 땅에 떨어진 열매의 고소한 향이 뒤섞인 밤은 놋시에게 레드자 산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곳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춥고, 조금 더 스산하고, 조금 더 맑았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엔 항상 어머니가 있었다.
놋시는 무심하게 나타난 에기의 이름과 차노륵의 얼굴을 기억 저편으로 묻었다. 막연한 슬픔이 아닌 죄의식이 그의 눈을 억지로 감겼다.
테스의 품에 안겨 잠드는 놋시는 감히 부모를 그리워하지 못했다. 더러워진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체레오의 왕국에서 수도로 정해진 도시는 에트와주라고 불렸다. 산 밑 마을보다 제국에 더 가까울 그 도시는 나라에 하나뿐인 보물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림자 안의 사람이 고개를 들어선 끝을 볼 수 없는 오래된 나무였다.
찾아오는 모든 이가 그 나무를 보진 못하지만 레드자에 등 돌리고 넓은 길을 따라오다 보면 첫 번째 표식이 그것이었다.
낮고 넓은 언덕 위에서 말을 멈춘 테스가 마차에 있는 놋시를 불렀다. 덧창을 열고 고개를 내민 놋시에게 길게 뻗은 손이 방향을 가리킨다.
그 손끝에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 머리가 가득했다. 사방에서 좁은 길들이 모여 더 넓어지다 평지에서 모인다. 커다란 마당처럼 활짝 펼쳐진 밝은 땅은 다니는 발에 밟혀 풀이 사라진 거인의 길이다.
그 거인의 길 한복판에, 말도 되지 않게 높고 수백 개의 가지가 무겁게 땅에 닿는 체레오의 수호자가 서 있었다.
“이곳이 수도다. 사람들은 여기가 체레오의 왕국 한가운데라고 말하지만, 다녀 본 이들은 알지. 이곳은 제국에 훨씬 가까운 곳이라는 걸.”
“그게…… 안 좋은 건가요?”
“우리에게는 나쁠 게 없다. 그 덕에 건물도 아름답고, 길도 깨끗하니까.”
놋시는 알 듯 모를 듯한 테스의 대답이 신기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 길에서 말 위의 곧은 자세는 타게신의 옷을 입지 않아도 알아볼 만큼 위엄을 드러냈지만, 그의 눈에는 어쩐지 테스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수도로 온 게 기쁜 걸까. 무엇을 짐작하기에도 부족한 머리로 놋시는 마차 안을 정리했다. 내릴 준비를 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새삼 긴장이 돌아왔다.
시도르의 성벽도 크고 넓다고 느낀 그에게 에트와주를 둘러싼 장벽은 실감 나지 않는 장엄함으로 느껴졌다.
마차 벽 틈새로 밖을 보던 놋시는 거인의 길을 막힘 없이 지나온 그들이 지키는 이가 늘어선 웅장한 문을 기다리지 않고 통과하는 걸 봤다. 벽을 넘어서자마자 좁아진 시야는 나무와 숲의 그림자가 아닌 주변 건물의 높이 탓이다.
마차가 어딘가로 계속해서 가는 동안 주변의 소음과 냄새가 변해 갔다. 산에서 단련된 놋시의 예민한 후각은 점차 늘어나는 청결함과 부의 냄새를 맡았다.
꽃과 과일에 뒤섞인 값비싼 향료가, 톡 쏘는 귀한 향초의 냄새가 대낮인데도 생생했다.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궁금해하던 놋시가 마침내 밖을 나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문을 연 곳은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말로 들어도 믿기 어려울 만큼 사치스러운 저택이었고……. 길고 풍성한 갈색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름다운 남자가 타게신을 반기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다피벳이었다. 그는 놋시가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마주한 동류였다. 다피벳은 남성의 육체를 가진 오메가였을 뿐만 아니라 왕의 형제를 치료하는 약초사이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