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 처피뱅
“전무님…… 오셨어요.”
“……어. 잘 있었어.”
“네에…… 저녁 전무님이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요…….”
차주원은 현관문을 열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이연의 옷차림에 멈칫했다. 아니, 오늘은 옷이 아니라 모자였다. 이연은 머리 위에 커다란 털 뭉치 하나가 달린 베이지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풀어질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도대체 왜 집 안에서 털모자를 쓰고 있는 걸까.
괜히 말을 꺼냈다 이연이 상처라도 받을까 봐, 차주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연이 눈에 띄게 풀이 죽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주원이 축 처진 이연의 어깨를 감싸고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나 이연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저녁을 먹는 내내 풀이 죽어있었다.
처진 눈망울을 하고서도 밥은 꼭꼭 씹어 삼키는 이연을 보자, 차주원의 얼굴 위로 애틋한 미소가 번졌다. 이연이 움직일 때마다 모자 위에서 흔들리는 동그란 털 뭉치가 시선을 잡아챘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촉촉한 눈망울을 한 채 실내에서 털모자를 벗지 않는 건지.
차주원은 문득 이연과 동거를 시작하기 전에는 어땠는지 떠올렸다. 클라이언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미팅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한밤중이었다. 싸늘한 정적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삭막한 집 안. 그 안으로 발을 디딜 때면 항상 어머니가 떠난 그날이 기억났다. 버림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버린 그날이.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연은 토끼가 되어 생일을 축하해주었고, 향수 냄새를 덕지덕지 묻힌 채 맞아주기도 했다. 발레를 한다며 속옷을 입지 않고 타이즈를 입고 있기도 했고, 오늘은 귀여운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정신없고 새롭다. 어떻게 하면 이연을 실망시키지 않고 반응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항상 비꼬는 듯 내뱉어지는 날 선 말투 때문에 입을 꾹 다문 것이 수십 번이었다. 아이 같은 이연이 사고를 쳐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도 컸다. 그러나, 요즈음 차주원은 어린 서여원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때 이후로 가장 행복했다.
바닥이 비치는 호수처럼 선명한 감정이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차주원은 서이연을 사랑했다.
“…….”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이연의 축 처진 작은 뒷모습을 보자, 잠이 들 시간인데도 털모자를 벗지 않은 모습을 보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연아.”
차주원이 이연의 옆에 걸터앉아 물었다.
“모자 쓰고 잘 거야?”
“…….”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연은 이미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 놓인 손만 만지작거리는 이연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담은 차주원의 눈이 통통한 볼을 향했다.
“오늘…… 머리 자르러 갔어요.”
“어.”
“사, 사장님이, 저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요즘에 유행하는 머리라고, 추, 추천해 주셨어요.”
“그랬어.”
“네에…… 처키, 처키뱅이랬어요…….”
“그런 게 있어?”
“최신, 유행이라고…… 그랬어요.”
머리가 잘못된 건가…… 툭 치면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연의 눈동자에, 차주원이 작은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이연아. 괜찮아.”
“…….”
“머리는 또 길잖아. 응?”
“흐으…… 흐윽, 전무님…… 전무님.”
이연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차주원의 품에 안겨들었다. 모자에 달린 커다란 털 뭉치가 차주원의 턱을 간질였다.
“저, 저 어떡해요…… 흐으, 어떻게 해…….”
“이연아.”
“저, 저 진짜 이런 머리로 살기 싫어요…… 흐어엉…….”
차주원이 어쩔 줄 모르며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는 이연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서이연의 얼굴로는 삭발을 해도 예쁠 텐데, 어차피 또 기를 머리에 왜 이렇게 슬퍼하는 걸까. 스스로 저 모자를 벗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머리를 보기라도 해야 괜찮다며 위로해줄 텐데.
“이연아, 울지 마. 너 울면 열나잖아.”
“흐으…… 바보야…… 나 바보예요…….”
“그런 말 쓰지 말랬지.”
“진짜 바본데 어떡해요…… 흐윽.”
얼마나 펑펑 우는지, 이연의 얼굴 위에 콧물 방울이 생겼다. 작은 방울이 톡 터지는 것을 본 차주원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려 작게 한숨 쉬었다.
“하아…… 내가 봐줄게. 모자 벗어봐.”
“…….”
“응? 괜찮으니까.”
“흐으…… 으으. 전무님, 웃, 으면, 저, 소파에서, 잘 거예요…….”
“못된 말 하지 말고.”
“흐윽.”
이연이 한참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모자를 벗었다. 천천히 드러난 이연의 머리는, 앞머리가 짧게 잘려있었다. 하얗고 볼록한 이마의 반 정도를 덮은 결 좋은 머리칼 밑으로 선이 고운 눈썹이 어여뻤다. 이게 최신유행이라고. 바가지 머리는 몇십 년 전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 아니었나.
“……저, 바보 같죠……?”
“아니.”
귀엽기만 한데. 이렇게 보니 보육원에서 만났을 때 같네. 십 년은 어려 보이는 이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차주원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정말요……?”
“이것 때문에 하루 종일 우울했던 거야?”
“……저 괜찮아요?”
“당연하지. 귀여워.”
“정말요……? 전무님, 거짓말하는 것 같은데…….”
이연이 눈물을 닦으며 못 믿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거짓말 아닌데. 왜 이렇게 날 못 믿어.”
“못, 믿는 게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이상해요…… 바보 같아요.”
“아니라니까.”
차주원이 이연의 눈물 젖은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입술을 좇던 이연의 눈동자가 차주원의 눈과 마주했다. 그는 이연의 발간 눈가를 살살 쓸어주었다.
“아직 크랭크 인까지 시간 있다고 했었지.”
“네…… 두 달 정도요.”
“그럼 됐네. 걱정할 필요 없겠다.”
“……전무님은, 바보랑 같이 사는 거, 괜찮아요……?”
다정하게 이연을 볼을 쓸어주던 차주원의 손이 멈췄다.
“서이연.”
차주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차주원은 서이연이 정말로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연이 스스로를 바보라 칭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아까까지는 바가지 머리가 바보 같다는 의미라 생각해 별말 하지 않았지만, 울음을 그치고 나서도 이러는 걸 보니 비단 머리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랬지.”
“…….”
“서이연.”
“…….”
“대답도 안 할 거야?”
차주원이 고개 숙인 이연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이연이 웅얼거리듯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낸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저, 전무님은, 똑똑, 해서…… 저랑 너무, 비교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미용실에서, 기사 봤어요…… 전무님이, 인터뷰한 거요.”
“무슨 인터뷰.”
“기억도, 잘 안 나요…… 반도체 얘기였던 것 같은데…….”
차주원은 손에 땀이 나는지 허벅지에 손바닥을 스윽 문지르는 이연의 하얀 손에 시선을 두다, 울음기로 발갛게 달아오른 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저는, 저는 그런 거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전무님한테는 아무렇지 않게, 잘,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주제잖아요.”
차주원의 가지런한 눈썹이 짜증스럽게 튀어 올랐다. 이연이 늘어놓는 얘기가 잘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다. 그러니까, 서이연이 반도체에 관해 잘 모르는 게 도대체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러면…… 만약에 전무님이 저랑, 그거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으면, 어떡해요, 저는……?”
“…….”
“제가, 멍청해서…… 전무님이, 저 한심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하.”
“전무님이, 저랑 말이 안 통해서,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안 하면, 어떻게 해요……?”
서이연의 상상력이 이렇게 풍부했을 줄이야. 차주원은 이연의 불안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서이연.”
“…….”
차주원이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하지 않는 이연을 날 선 목소리로 불렀다.
“서이연.”
“네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이연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작게 대답했다. 서이연의 갑작스럽고 거대한 상상력에 머리가 아파 와, 차주원은 찌푸려진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대본 가져와.”
“네?”
동그랗게 커진 이연의 눈망울을 바라보는 차주원의 시선이 무감했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때면 마냥 서늘하고 차가운 차주원은 영락없이 고압적인 우성 알파의 얼굴이었다.
“요즘 연습하고 있는 대본. 가져와.”
“…….”
차주원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연이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거실로 나갔다.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연이 다시 침실로 걸음을 옮기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연은 문 뒤에서 고개를 반만 내민 채 침실을 훔쳐보았다.
차주원이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을 거라 생각해 한 행동이었지만, 방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그의 서늘한 눈초리만 받았다. 어깨를 움찔한 서이연은 후다닥 침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요…….”
“수현이 네 역할이야?”
대본을 받고 이연이 적어놓은 메모들을 훑던 차주원이 물었다.
“네.”
“상대역은 정욱이고.”
“네.”
“대사 읽어.”
“지금요……?”
“내가 정욱 역 리딩할 테니까.”
“…….”
“연기 제대로 해.”
“네에…….”
차주원의 날 선 목소리에, 이연이 그의 눈치를 보며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긴장한 상태에서도 순식간에 배역에 몰입한 이연은, 차주원의 로봇 같은 뻣뻣한 대사 리딩에도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가 지금.”
“처음부터 너였어. 그때 밀가루 공장 가는 길 헷갈린 것도 다 연기였겠지. 그 새끼들한테 미리 연락하고 시간 벌려던 거였잖아. 내가 얼마나 병신 같았을까. 응? 제일 친한 친구가 주동자인 것도 모르고 쓰레기더미나 뒤진 내가…… 얼마나 병신같이 보였을까, 정욱아.”
“희진이한테는 말하지 마.”
감정이 가득 실린 이연의 목소리의 뒤를 차주원의 딱딱한 목소리가 이었다. 회의 중 브리핑을 받은 후 평가할 때처럼 고저 없고 날 선 목소리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대본 세 장에 걸친 기묘한 대본 리딩을 끝냈다. 영문도 모른 채 연기를 시작했지만, 결국 몰입해버려 만족할 만한 연기를 펼친 이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연기 평가해봐.”
차주원은 이연에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전무님 연기를요?”
차주원은 연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대본을 읽었을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어.”
“왜요……?”
“왜라니.”
“전무님은, 배우도 아니잖아요…… 연기는, 잘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네가 반도체 기사 이해 못 한 게,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서이연은 차주원의 물음에 머리를 세게 맞기라도 한 듯 입을 벌렸다. 그러나 곧 벌어진 입은 천천히 다물어지고, 작은 이빨이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짓씹었다.
“대답해.”
“…….”
“뭐가 문제인지, 나한테 설명해. 납득할 수 있게.”
“……설명, 못 해요.”
이연의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이 곧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차주원은 대답을 들어야 했다.
“왜.”
“이, 이상한 게, 아니라서요…… 흐엉…….”
차주원은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이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연의 떨리는 몸을 품에 안아 주었다. 그의 얼굴에, 이연을 일부러 몰아붙여 울린 것 같단 죄책감이 깔렸다.
“흐으…… 으으…… 전무님.”
차주원의 커다란 손이 이연의 작은 등을 쓸어내렸다. 한참 동안 울음을 뱉어내던 이연도, 익숙한 체취와 촉감에 안정을 찾고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이제 그만 좀 울어.”
“후으…… 으엉…….”
떨리는 숨을 내뱉는 이연의 얼굴이 울음의 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주원은 이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물이 맺힌 이연의 얼굴 위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엔 티브이에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며 재잘대던 열네 살 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카메라 앞에 서던 게 마냥 재밌었던 다섯 살 아이와 인생에 남은 게 연기밖에 없었던, 호텔 방에서 다시 만난 스물여섯 살의 이연.
그리고 지금. 비수기에도 매일 대본 리딩을 거르는 법이 없는 아이. 조용하기에 뭘 하나 찾아보면 방에서 대사를 내뱉는 제 모습을 녹화하고 있는 아이. 함께 영화를 보다가도 마음에 드는 대사가 있으면 꼭 제가 한 번 웅얼거려보는 아이.
서이연만큼 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차주원이 이연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부드러운 이마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열 좀 식히고 자야겠다. 하루 종일 모자 쓰고 있느라 더웠겠네.”
“네에…… 흐으, 사실 더웠어요. 집 안이 따뜻해서…….”
추위에 약한 오메가와 동거를 시작한 이후로, 차주원은 난방에 예민하리만치 신경 쓰고 있었다.
“전무님. 근데요, 전무님 똑똑한 거, 좋은 것 같아요.”
차주원의 가슴팍에 다시 고개를 묻은 이연이 중얼거렸다.
“왜.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
이연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쓸어주고 있던 차주원이 물었다.
“네에…… 똑똑해서, 저도, 이렇게 이해시켜 주셨잖아요…….”
“하하.”
이연은 차주원의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잘 이해해줘서 고마워.”
이연의 짧은 앞머리를 걷어낸 차주원이 뽀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간신히 울음을 멈춘 이연의 입술이 또 삐죽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똑똑한데. 귀엽기까지 하면 어쩌지.”
“……안 귀여워요.”
“귀여워. 이마가 예뻐서 이런 앞머리도 잘 어울리네.”
“똑똑한 전무님이 하는 말이니까 믿을래요.”
“믿어. 거짓말 아니니까.”
“네에…….”
“너한텐 거짓말 안 해.”
“저두요…….”
차주원이 자신의 가슴에 볼을 비비는 이연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고를 치는 품 안의 오메가는 어깨를 잘게 떨면서도 제 옷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안쓰러웠다가, 이제는 애틋하다. 이 연약한 생명체를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생각지도 못한 걸로 혼자 땅굴을 파고, 혹여나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할 때는 정작 아무렇지 않은 듯 환하게 웃는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차주원이 이연의 부드러운 앞머리를 살살 문지르며 생각했다.
순하고 강단 있어 보이지만, 속은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너를. 나는 아마 좀 더 섬세한 관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