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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3. 향수 (12/17)
  • 외전3. 향수

    “전무, 님…… 오셨어요?”

    “…….”

    집 안으로 발을 디딘 차주원이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코끝에 손등을 갖다 댔다. 집 안 전체에 독한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온갖 향기가 섞여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무, 무슨 냄새요? 저는, 아, 안 나는데…….”

    차주원은 흔들리는 서이연의 눈동자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누군가 향수병을 수십 개 깨지 않은 이상 이런 냄새는…….

    차주원이 향수 냄새로 범벅이 된 채 양손을 부산스레 꼼지락거리고 있는 이연을 눈에 담았다.

    “…….”

    깼구나.

    작게 한숨 쉰 차주원이 물었다.

    “안 다쳤어?”

    “…….”

    이연은 입만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서이연. 안 다쳤어?”

    “흐으…… 전무님.”

    차주원의 물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참던 이연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품에 안겼다.

    “죄, 죄송해요…… 전무님, 향수, 제가…… 깼어요…… 흐윽. 어떡해요…….”

    “괜찮으니까 대답해. 다쳤어, 안 다쳤어.”

    “바, 발만…… 살짝 베였는데, 밴드 붙였어요…….”

    “…….”

    차주원이 바로 이연을 안아 들었다. 갑자기 높아진 눈높이에 놀란 이연이 차주원의 목덜미를 팔로 꼭 감았다.

    소파에 얌전히 놓인 이연이 곧바로 등을 돌려 멀어지는 차주원의 커다란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뒤덮은 생각은 당장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오늘 낮, 이연은 유난히 심심했다.

    이연은 아침 일찍 출근하는 차주원을 잠이 덜 깨 비틀거리며 배웅했다. 눈을 비비며 발끝을 들어 그의 볼에 입맞춤도 했다. 그가 출근하고 나서는, 다시 포근한 침대 위로 기어들어 가 차주원이 잠을 잤던 자리에 몸을 뉘었다.

    늦은 오후, 눈을 떴을 땐 이미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차주원이 베고 잔 베개에 얼굴을 비비던 이연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배를 채울 준비를 했다. 소박하게 차린 밥상을 사진 찍어 차주원에게 전송한 후, 밥을 꼭꼭 씹어가며 점심 식사를 했다.

    “아 맞다……!”

    가만히 티브이를 시청하던 이연이 드레스룸으로 돌진한 건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차주원과 호텔에서만 만날 때부터, 드레스룸에 몰래 들어가 그의 옷을 구경하며 몸에 대어보기를 즐겼던 이연이었다.

    며칠 전 교외 드라이브 데이트를 했을 때, 그가 연하늘색 셔츠를 입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멋져 보여, 그 셔츠를 저도 꼭 한번 입어보고 싶었다. 드레스룸에 걸려있던 정장들을 뒤적이던 이연이 드디어 푸른 빛깔의 셔츠를 찾아냈다.

    서둘러 잠옷을 벗어낸 그가 맨몸에 셔츠를 걸쳤다.

    “와아…….”

    셔츠의 감촉이 부드러워 작게 감탄한 이연이 거울 앞에서 빙그르르 돌며 옷 태를 감상했다. 비록 속옷 한 장과 셔츠만 걸친 몸이었지만, 차주원의 옆자리에 앉아 운전대를 잡은 그의 옆모습을 감상했던 설레는 마음이 다시금 생생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게 무슨 향이었더라…….”

    문득 그의 볼에 입 맞췄을 때 은은하고 청량하게 퍼졌던 향기를 다시 맡고 싶어졌다. 차주원은 항상 장소에 맞춰 다른 향수를 뿌리기 때문에, 드라이브를 할 때는 어떤 향수를 사용했는지 궁금했다.

    “나도 뿌려보고 싶은데…….”

    이 셔츠를 입고 똑같은 향수까지 뿌리면 정말 기분 좋을 텐데.

    값비싼 향수병이 일렬로 놓인 서랍장을 구경하던 이연이 마침내 결심한 듯 향수병을 차곡차곡 품에 쌓기 시작했다. 실내에서 향수를 마구 뿌리면 향이 섞여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할 것 같아서, 정원으로 가지고 나가서 하나씩 맡아볼 생각이었다.

    팔 안에 향수병을 세 개까지 담던 이연은 자신이 셔츠에 속옷만 걸친 상태라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병들을 도로 내려놓은 후 면바지 하나를 찾아 입었다. 그는 다시 품 안에 향수병을 쌓기 시작했고, 마침내 향수병 열두 개를 안아 나르는 데 성공했다.

    “조심…… 조심, 할 수 있어.”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묘기였다. 이연은 천천히 대리석 바닥을 밟아가며 드레스룸에서 침실을 지나, 거실까지 도달했다.

    “아, 문…….”

    문을 어떻게 열지.

    이연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문 앞에 잠시 향수병들을 놓아두고, 문을 연 뒤 다시 향수병을 안아 옮기기로 결정했다. 해답을 찾아내 뿌듯한 기색의 얼굴에 보조개가 깊게 팼다. 그러나 잠깐의 방심은 이연의 하루를 망쳐버리고 말았다.

    현관문까지 걸음을 옮기다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아윽!”

    넘어지던 순간 팔을 쭉 뻗어버려, 향수병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을 인식하기도 전에,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열두 개의 향수병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는 마치 우박을 동반한 거센 소나기와도 같았다.

    “아아…… 흐으, 안 돼…….”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이연의 커다란 눈망울에 빠른 속도로 눈물이 맺혔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가시자마자, 코를 찌르는 독한 향기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정신을 어지럽혔다.

    “흐윽, 아니야…….”

    현실을 부정하는 이연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성한 향수병은 하나도 없었다. 열두 개의 향수병 모두 유리 조각이 되어 투명한 액체를 피처럼 흘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어, 어떻게, 다, 다 깨질 수가 있어…… 흐으.”

    이연이 사태를 수습해보려 유리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이미 발바닥이 베여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큰 충격을 받은 이연은 허겁지겁 향수병의 잔해를 치우기에 바빴다.

    그러나 유리 조각을 다 치우고, 액체를 모두 닦아냈지만 온 집에 진동하는 향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연은 훌쩍임을 멈추지 못한 채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흐윽…… 어엉…… 허엉…… 바보…… 냄새, 머리, 아파…… 흐으…….”

    이연은 냄새를 빨리 빼내기 위해 부채 두 개를 찾아 들고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며 팔을 흔들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한참 동안이나 고군분투하며 혼자만의 전쟁을 치러냈다.

    차주원이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팔을 크게 흔들며 부채로 냄새를 빼냈던 이연은, 그가 소독약과 연고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도 베였네.”

    이연의 작은 손을 잡고 살피던 차주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얀 손에 얕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깊게 베이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향수 냄새가 온 집 안에 진동하게 만들 수 있는 거지.

    차주원은 이연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지만, 심하게 풀이 죽은 듯한 이연의 눈에서 툭하면 눈물방울이 흘러내릴 것 같았기에 말을 아꼈다. 이미 작은 어깨가 추욱 처져 있었다. 눈가에 붉은 기운도 가득했다. 손과 발을 다친 데다, 울기까지 한 이연이 혼자 얼마나 놀랐을지 걱정된 차주원이 조심스레 상처를 치료했다.

    “이연아. 우리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

    치료를 마친 차주원이 이연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녁 먹고 드라이브도 하고.”

    “……전무님…….”

    이연이 고개를 들고 순하게 처진 눈망울을 맞춰왔다.

    “응.”

    “저는, 저는 사고뭉치예요…….”

    “하하. 그래?”

    “그래도 저 쫓아내지 마세요…….”

    불안함을 가득 담은 이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마자, 호선을 그리던 차주원의 입꼬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서이연. 너, 내가 그런 말 입 밖으로 내뱉지 말라고 했지.”

    이미 홀로 자책을 마쳤을 이연을 다그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말에는 참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차주원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사고 쳤잖아요…….”

    “실수 한 번 한 것 가지고 못된 말 할 거야?”

    “머리 아파요…….”

    “…….”

    머리가 아프다며 품에 안겨 오는 이연을 보자, 아차 싶었다. 잠깐 집 안에 있었던 걸로도 이렇게나 답답한데, 꽤나 오랫동안 독한 냄새에 노출됐을 서이연은 어땠을까.

    차주원이 바로 이연을 안아 들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연을 품에 안고 정원을 거닐었다. 바로 차에 태우기보다는 차가운 바람을 쐬어주는 것이 좋겠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

    “네에…….”

    “이연아, 다음부터는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나한테 전화해. 응?”

    “네에…….”

    왼쪽 어깨에 고개를 묻은 이연이 옷감 위에 볼을 비비며 웅얼댔다.

    “어떻게 된 거야.”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

    차주원은 이연의 엉덩이를 다시 받쳐 들고 걸음을 옮겼다.

    “드라이브할 때요…… 며칠 전에, 저희, 드라이브했을 때요…….”

    “어.”

    차주원이 아래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전무님이, 하늘색 셔츠 입으셨잖아요…… 너무 멋있어서, 저도, 입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입었는데, 근데, 향수도 뿌려보고 싶었어요.”

    “그랬어.”

    “근데, 근데 무슨 향수인지 몰라서, 뿌려봐야 알 것 같아서…… 정원에서 뿌리려고 했어요. 안에서 뿌리면 냄새가 섞일 것 같아서…….”

    “그건 그러네.”

    “제가, 열두 개, 안았거든요. 정원으로, 잘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넘어졌어요.”

    “열두 개나 들었어.”

    “흐으…… 네에. 열두 개…….”

    “안 무거웠어?”

    “그냥, 조심해서, 옮겼는데, 모르겠어요. 갑자기…….”

    “많이 놀랐겠네.”

    “무릎, 아팠어요…….”

    “아까 보니까 빨갛더라.”

    “흐으, 부, 부채로, 많이 흔들었는데, 그래도, 냄새가 계속 났어요…….”

    “우리 집에 부채가 있었나.”

    “여름에, 촬영하면서, 받은 거, 챙겨놨었어요. 전무님 것도 같이…… 두 개…….”

    “팔은 안 아파?”

    “뻐근해요. 지금…….”

    “하…….”

    차주원은 웃음을 참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이연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이연은 사고뭉치가 맞다.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사고뭉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을 가졌지만, 문득 이연의 마음이 너무나 잘 이해될 때가 있었다.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줄만 알았더니, 그날 입은 셔츠가 마음에 들었구나. 내가 입고, 사용하는 건 뭐든 다 알고 싶어 하고, 따라 하고 싶어 하는구나.

    고개를 숙여 이연의 이마에 입술을 찍은 차주원의 얼굴이 행복에 젖어 있었다. 향수로 샤워라도 한 듯한 어린 연인을 품에 안은 알파는 꼭꼭 숨어있는 순한 체취를 맡기 위해 오메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품 안의 가벼운 무게감이 오늘도 선명했다. 가슴 바로 위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도, 왼쪽 어깨 위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도, 그리고 이 세상에서 거슬리지 않는 유일한 페로몬인 서이연의 향기도. 모두 명확한 사랑이었다.

    “배는 안 고파.”

    “마, 많이 뛰어다녀서…… 배고파요.”

    “그럼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네에…… 오늘은, 많이 먹을래요…….”

    선선한 저녁 공기 사이로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섞여들었다. 사랑이 묻어있는 다정한 목소리에 순하게 대답하는 울음기가 남은 목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에 차분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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